캘리포니아 산 오렌지 한 망을 샀다. 탱글탱글 샛노란 과육을 우물거리다 문득, [오륀지]라고 발음해야 오렌지를 먹을 자격이 있다던 어느 정객의 말이 생각났다. 자유무역협정이 체결 발효되면서 세계화에 대한 욕구가 급증하고 있는 요즘, 이른바 스펙 쌓기의 중심에 어학능력이 최우선이라며 영어공부 열풍이 한창이다. 하지만 그 필요성은 수긍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새 선택과목으로 밀려난 국사의 자리를 영어가 차지하면서부터, 우리는 단군의 건국이념 천. 지. 인, 을 잊고 사는 것 같다.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이 땅과 사람 사이 도리를 깨우쳐 더불어 살라고 밝혀 하신 말씀 "같이의 가치”가 옛날이야기쯤으로 치부되는 것 같다. 유아 영어학원에 다니는 여섯 살짜리 조카, 우리나라 말도 아직 어눌한 작은 입속 혀를 굴려 ‘하이! 하와이유 아임 파인‘둥글고 시큼한 말을 쏟아낸다. 날이 갈수록 서로 다른 조상인 것처럼 말의 시작이 다르니 어느 날 제 할아버지보고 손가락 까딱거리면서’너! 이리와 봐 ‘할 것도 같아, 어린 오륀지 앙증맞은 입이 마냥 기특하지만은 않다. 영어 조기교육의 타당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여타 방법론에 대해서는 되짚어봐야 할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내 나라말을 제대로 배워 쓰게 하는 것이 바른 교육의 핵심이며, 백년지대계의 가장 으뜸인 뿌리의 정신을 가르치는 일 아닐까 싶다. 세계화가 반드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륀지]라는 당위성으로 바느질한 합리주의의 겉옷만 걸친 듯하지 말자는 것이다. 무조건 내 것만 고수 하자는 것도 물론 아니다. 나라말에 깃든 조상의 얼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옳은 순서일 것 같다. 한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는 역사의 숨결 속을 흐르는 뭇 선조들의 유구한 기상이 나와 공유하며 호흡하는 것이다. 한겨레라는 말 속엔 네가 아닌 이웃이 있고,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우리가 바라보던 같은 질감의 하늘이 있었고, 추운 가난을 충분히 덮어줄 情이라는 두터운 이불이 있었다. 그 발자취를 더듬는 것에서부터 세계라는 더 큰 무대를 향하는 당당한 첫걸음이 시작되는 것이며 세계 속의 한국인이라는 파란 새싹이 움트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내가 사는 지역 김포에 중봉 조헌 선생을 기리는 우저서원을 방문했었다. 조선 중종 39년 김포 감정동에서 출생한 선생은 선조 25년까지 학자 및 문인이며, 호는 중봉, 도원, 후율 등이다. ‘후율後栗’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 율곡 이이 선생의 뒤를 이어 이기론 학설의 계보를 잇는 유림의 태산북두셨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우, 김경백, 전승업 선생 등과 투합하여 최초로 일어난 의병장이셨던 선생, 금산전투에서 칠백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신 선생의 민본에 근거한 학문과 사상은 현실 참여적 실천 정신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서원을 가득 채운 절의와 강직을 기웃거리다 죽음도 마다치 않은 순국의 충정, 나라 사랑의 뿌리를 보았다. 해마다 하얀 뭉치 꽃을 피우는 목련도, 느티나무의 몇백 년 수령도 모두 굳건한 뿌리에서 연유한 것이며 후세를 혜량하듯 뿌리에서 뻗은 나무가 마당 가득 푸른 이파리를 펼쳐 아름드리 초록 그늘을 만드는 것이다. 먼 곳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사는 지역 내 수많은 유적지에 넋으로 휘도는 선조들의 혜안과, 세상을 미리 내다보는 통찰의 지혜를 학습하는 것이 오렌지의 미국식 발음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모래밭에선 국가의 동량이 자랄 수 없다. 먼저 내 근본을 아는 것이 국가기반을 다지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것을 단단한 주춧돌이 말해주고 있다. 긴 긴 풍상에 접질리면서도 옛터의 외곽을 지키는 거목의 견고한 침묵, 가장 위대한 웅변을 조용히 경청했다. 북변 삼거리를 돌아 나오는 길에 선생의 동상이 보인다. “김포에 얼이 서다”는 헌정 시비, 왜적의 침입을 선견지명 하셨던 서릿발 같은 일갈이 교차로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내 망무두서茫無頭緖한 정신을 후려친다. 그 바람의 죽비는 선생의 얼이다. 오렌지를 먹어 본 지가 얼마나 오랜지! 농을 하며, 오륀지 그 두꺼운 껍질을 한 꺼풀 벗기고도 우물거리는 입속의 이가 시리다. 주말엔 아들 녀석과 함께 당차고 현기 서린 중봉 선생의 노구를 뵈러 북변동 산책을 나서야겠다. 김부회 [당선소감] 대상 김부회 | 뿌리가 빈약한 민족은 정신이 바로 서지 못해 | | | | 경제발전이 최고의 덕목이 되면서부터 우리 의식 속에서 점차 역사와 역사를 이룩한 선조들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는 것 같다. ‘얼’이라는 말은 정신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을 말한다. 정신이라는 것은 어쩌면 뿌리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뿌리가 빈약한 민족은 정신이 바로 서지 못하게 된다.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은 ‘얼’을 되새겨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겨레와 민족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어느 시공간에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가 같은 질감의 세월을 살아온 것이며 그 바탕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자라왔다. 앞만 보고 가기에도 벅차고 힘든 시간이겠지만, 가끔은 뒤를 돌아보면 선조들의 흔적이 보인다. 그분들의 모습과 헌앙한 기상과 희생이라는 흔적을 더듬다 보면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발견할 수 있다. 현재에 살고, 미래를 물려주어야 할 우리 후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적 자긍심 아닐까 싶다. 중봉 조헌선생의 서원 곳곳에 서린 그분의 강직한 ‘얼’을 더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엄숙해진다. 역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유적을 더듬어 보는 일, 어쩌면 그것이 나와 내 겨레가 동시대를 같이 호흡한다는 것이며 정신적 번영의 토대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당선 통보를 받고 한동안 얼떨떨하다. 내가 던진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중봉 선생이 금산전투에서 한목숨 장렬하게 희생하신 것처럼. 어눌한 글을 선해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독백의 나날들이 글 化 된다는 것은 좀 더 정진하라는 성찰의 죽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관계된 글 친구들 모두에게 공을 돌리고 싶다. 김부회 / 1963년생. 김포시 고촌읍 수기로 39-13 현대힐스테이트 [심사평] | | | | 제9회 ‘중봉조헌문학상’에 전국 경향각지에서 모두 50명의 신인과 기성작가들이 응모해 주었다. 시 30명에 153편, 수필 20명에 43편이다. 예년보다는 줄었지만, 적지 않은 응모편수이다. 문학상의 의미는 크지만, 어찌 보면 소박할 수 있는 이 문학상에 이렇듯 많이 동참해주고 있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만큼 중봉 선생의 의미와 가치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며, 선생에 대한 인식의 지평도 넓어졌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응모편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당선작을 고르는 심사는 늘 고역이다. 중봉 선생의 궤적을 직접 형상화한 작품이나 모티프로 삼은 작품 또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도 자신의 삶을 응축하여 녹여낸 작품들은 모두 균등한 의미를 갖고 있다. 어느 하나 가벼운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어서 예선과 본선의 심사숙고를 거쳐 3편의 당선작을 선정하게 되었다. 이번 응모작품에서 시는 중봉 조헌 선생의 삶과 사상을 형상화한 것이 역시 많았다. 시의 기동성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자, 중봉 선생이 현재 우리 사회와 개별적인 삶에 던지는 파문이 큰 까닭이다. 중봉 선생을 모티프로 한 작품의 수준도 매년 향상되고 있다. 처음에는 역사와 문학의 구분이 애매한 경계에 선 작품들이 상당했다. 숙고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중봉 선생과 그를 둘러싼 환경들을 내면화하지 못한 탓이다. 과도한 목적성이 불거져 어색한 감탄사 같은 느낌이 시어와 시어 사이를 뚝뚝 끊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시들에서는 중봉 선생의 삶과 사상에 깊이 공감하지 않고는 표출되지 않을 만한 작품들이 다수 눈에 들어왔다. 수필은 여전히 개인의 일상사를 다룬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작년의 경우, 글쓰기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두드러진 반면 사상화라 할 수 있는 측면에서는 한계가 많았으나, 올해 수필들은 개인의 삶에서 보편성을 획득해 사상화 단계에 이르고 있는 작품이 상당했다. 예선을 통과한 시는 모두 3편이다. 송지은의 <토적맹약도를 읽다>, 주석희의 <백의종군>, 최진우의 <저 작은 나무, 나무들이 빛날 무렵>이다. 또 수필에서 당선작 후보가 된 작품은 3편인데, 박종희의 <출가>, 김부회의 <오렌지와 중봉선생>, 박영희의 <물때>가 그것이다. 이 중 당선작은 대상으로 김부회의 <오렌지와 중봉선생>을, 우수상으로 주석희의 <백의종군>과 박영희의 <물때>을 선정하였다. 선정과정의 어려움이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나, 중봉 선생의 삶과 사상을 스스로 육화하는 과정에서 빚어낸 다양한 아픔과 그 극복의 언어를 읽어내는 기분을 어디에 빗댈 수 있겠는가. 심사과정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격론하는 동안 중봉 선생을 선양하는 의미가 더 커졌던 것이다. 대상으로 선정한 김부회의 <오렌지와 중봉선생>은 수필이다. 아마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수필이 대상으로 뽑힌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산문으로 중봉 선생을 형상화하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오렌지와 중봉선생>은 발랄하다. 어두운 하늘 아래 순간순간 환한 빛이 비치듯, 산뜻한 비유가 기분 좋게 갖추어져 있다. 문장은 힘 있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무엇보다 오렌지와 중봉 선생을 연결하는 유추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오렌지를 통해 조기 영어교육의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이를 합리주의로 포장하지 말자고 주장하고 있다. 단순히 우리의 얼을 찾아야 한다는 당위적인 측면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우리 삶을 채울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을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중봉 선생을 일상적인 삶의 언저리로 끌어내어 그 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우수상으로 주석희의 <백의종군>과 박영희의 <물때>을 선정하였다. <백의종군>은 의병의 지난한 삶과 죽음을 정제된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숨 막힐 것 같은 투쟁의 긴장을 그려냈는가 하면 죽어가면서 뜨겁게 토해냈을 간절한 삶의 희망을 절절하게 통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의 우수상인 <물때>는 수필이 가져야 할 요소들로 잘 짜인 글로 표현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 일상적인 소재를 동원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주제의식도 상당히 묵직하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이 ‘중봉조헌문학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문학적 역량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성원해주신 전국의 문인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늘 문운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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