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마타병 사건 (일명: 이따이이따이 병) 너무 아파서 아프다 아프다 라고 한 병
1950년대 초, 일본 구마모도 현의 작은 어촌도시인 미나마타 시에 사는 주민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중추신경마비 증세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보행이 불편해지다가 차츰 악화되어 사지가 뒤틀리고 전신마비가 되었고, 시력이나 청력이 감퇴되는 한편 언어장애와 지능장애, 발작증상, 사시, 발육장애 현상까지도 생겨났다. 신생아의 경우는 뇌성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이 집단적인 질병이 공식적으로 발견이 된 것은 1956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3년 후 구마모토 대학 연구반에 의해 이 증세가 수은 중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미나마타 시에는 신일본질소 주식회사(짓소)의 공장이 자리잡고 있었는 데 그 공장에서 배출된 폐수 속에 중금속의 하나인 메틸수은이 함유되어 있었다. 메틸수은의 성분은 물 속에 사는 동물성 프랑크톤과 어패류들을 오염시켰는 데, 먹이사슬을 통해 인체 내에까지 축적이 되어 수은 중독 현상을 일으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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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해당 기업의 폐수 배출을 묵인하여 피해를 더욱 확산시켰다. 제 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은 패전으로 인하여 초토화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하여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경제부흥의 기치아래 수많은 공장이 세워지고 이 공장들에서는 폐수와 매연, 중금속이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경제성장에 급급하여 이런 사실을 은폐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1964년에는 니가타 현 아가노가와 유역에서 제2의 미나마타병이 발생하여 많은 피해자가 생겨났으나, 일본정부는 1968년에서야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공장 폐수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수은중독 현상으로 죽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갔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환자 수는 2천 9백 5십명이고 그중 천 여명이 사망하였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환자 수가 1만여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 영세민들이었고, 신일본질소회사에 의존하여 소득을 올렸기 때문에 공장의 수은방출 중지를 결정하기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다.
수은은 보통 무기수은과 유기수은 상태로 존재하는데, 무기수은의 경우 체내에 흡수되더라도 비교적 쉽게 배출이 되지만 유기수은은 중독현상이 심하고 배설이 잘 되지 않는다. 메틸수은은 유기수은의 한 종류로, 어패류의 체내에 쌓여있다가 이것을 섭취한 사람의 몸 속에 들어와 중독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미나마타 시의 주민들은 신일본질소 공장의 폐수에 섞여있던 메틸수은에 오염된 어패류를 섭취한 결과 집단으로 발병하게 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마나마타 병 환자들에 대한 보상문제에서도 인색한 태도를 보였다. 1973년 일본 환경청은 미나마타병 환자 보상협정을 체결하면서 소위 '인정제도'를 도입하여, 검사 결과 환자로 인정받은 2천 9백 5십명에 대해서만 보상금을 지불하였다. 그후 77년에는 새로운 인정기준을 만들어 감각장애 증상 이외의 다른 증세까지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약 8천명의 환자들이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정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지난 95년에 이르러서야 정부와 최종해결안에 합의하여 40년만에 보상문제를 매듭짓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남은 환자들은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왔었다.
미나마타병 사건은 일본의 산업화과정에서 초래된 집단적 환경오염사례 중 첫번째 사건이다. 일본은 전후의 경제부흥에 치중하고 공해문제 해결에 등한시하다가 이같은 환경오염사건을 발생시켰지만 이러한 사례는 비단 일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1971년 이라크에서도 수은중독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도 온도계나 기압계 제조공장의 근로자들이 수은에 오염되어 발병한 사례가 수 차례 있다. 미나마타병 사건은 환경보호가 왜 필요한가, 그리고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