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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백이나 슈즈가 아니다. 지금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건 제대로 된 스키니 팬츠다. 여기서 ‘제대로 된’이란 ‘다리를 더 날씬하게
조여주고 길어 보이게 착시 현상을 주는’ 쯤으로 해석하면 된다. 스키니 팬츠가 여자들 앞에 패션의 제물로 처음 바쳐진 순간 그들의 표정은 대충
이랬다. “미친 거 아냐? 이걸 입으라구? 요 다리가 들어가냔 말이지!” 하지만 케이트 모스가 입고 나온 사진이 온갖 매스컴에서부터 동대문
시장에 돌자마자 졸지에 밀리언셀러 아이템으로 둔갑했다. 급기야 여자들은 부츠컷 팬츠를 수선집에 맡겨 종아리를 깎기 시작했고, 지름이 15cm도
채 안 되는 두 통로 속에 허벅지와 종아리가 마르고 닳도록 다리를 쑤셔 넣기(거칠게 들릴지 모르지만 ‘입는다’ 보다 더 절절하게 와 닿는다)
위해 침대 위에 나자빠져 발버둥을 쳤다. 또 거기 어울릴 신발이 뭔지 다시 케이트를 힐끔댔다.
<보그>는 옷 좀 입는다는 코리안 패션 피플 가운데 스키니 퀸들을 선별했다. 매니시 룩을 기막히게 입는 메마른 36세, 마르고 아담한 33세, 스키니 원조로 불리는 30대 초반, 170cm 키의 늘씬한 30세, 인형 같은 몸매의 20대 후반, 175cm 키의 20대 중반 등등. 다들 가느다란 다리를 지닌 ‘이기적’ 몸매였다. 그들이 스키니를 입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이콘 흠모’ 작용 때문이다. 기독교도들이 성령을 받듯 스타일링에 있어 영감을 얻은 인물로는 당연하다는 듯 케이트 모스가 거론됐다. “그녀의 파파라치 사진 한 컷을 본 게 정확히 2005년 5월. 당시 한국 멋쟁이들이 부츠컷을 입을 때라 아주 쇼킹했죠. 새 유행일 듯한 예감이 들어 스키니 진을 찾았으나 서울엔 한 벌도 없었어요. 뉴욕에 가는 친구에게 부탁해 어니스트 소운의 블루 스키니 진을 구했어요. 그때만 해도 바니스의 진 코너 스태프들조차 스키니 진이 뭐냐고 반문할 정도였구요.” 인형 같은 몸을 지닌 아가씨의 고백이다. 키 175cm 아가씨도 케이트에 홀린 채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한국인 체형에 절대 안 어울릴 저걸 사는 순간 나도 패션 빅팀이 되는 건 아닐까?” 역시 키 170cm에 늘씬한 30세 여자는 패션 기자로 파파라치 사진을 다루는 고정 꼭지를 진행할 때 스키니 진을 알았다. “‘스키니 진’이란 용어가 생기기 전이라 케이트의 팬츠를 ‘슈퍼 슬림 데님’으로 소개했었죠.” 그렇다고 스키니 진의 발상지를 케이트의 다리로만 단정할 순 없었다. ‘케이트 홀릭’들과 달리 독보적 스키니 룩을 보여준 잔가지처럼 마른 36세의 여인은 케이트의 남자를 언급했다. “피트 도허티가 짧은 가죽 블루종에 블랙 스키니 진을 입고 브라운 가죽 벨트를 확 꼬이게 맨 걸 봤는데 그게 예뻐 보였어요. 케이트나 시에나가 아닌 피트라 이상한가요? 사실 스키니는 남자 몸에 더 예쁘게 맞아요. 예쁘다고 생각한 건 피트 도허티 뿐!” 대한민국에서 스키니 원조라고 모두가 추천한 청담동 구두 디자이너도 뜻밖의 인물을 떠올렸다. “2002년 겨울, 우연히 무심한 표정의 다릴 한나를 봤어요. 박시한 점퍼에 라이트블루 스키니 팬츠, 블랙 스틸레토 힐의 매치는 스타일리시했어요. 강한 에너지가 느껴졌죠.” 케이트 모스 커플과 다릴 한나로부터 ‘필’을 받은 그들은 스키니 시즌 1인 작년 한해 무슨 스키니 팬츠를 입고 지냈을까. 인형같이 예쁜 몸매: “총 4벌. 슈퍼파인, 발렌시아가, 자라, H&M. 최고는 슈퍼파인으로 케이트가 입은 바로 그것. 종아리까지 완벽히 타이트해 발목에서 예쁜 주름이 잡힘. 게다가 하이 웨이스트로 다리도 길어 보임. 최악은 H&M. 밑위가 너무 짧고 스트레치 소재도 별로. 힘 없는 종아리 라인이 단점.” 키 175cm: “부츠컷 시대에 두타에서 스판덱스 스키니를 입어봤으나 자태가 몹시 부담스러웠음. 스트레이트풍의 AG Jean의 Stilt를 입은 뒤 슈퍼파인에 눈독을 들였으나 40만원대. 파리의 누와 케네디에서 로커들이 입는 April 77 발견. 왁스 코팅에 작은 포켓에 기타 피크도 든 디자인. 불행히 지퍼가 올라가지 않았음. 며칠 굶고 입으면 될 듯하여 한 사이즈 큰 걸 샀으나, 결국 실패. 스키니하지 않았으니까.” 키 170cm: “밀라노에서 아크네를 입었으나 허리가 맞는 건 허벅지가 조였고 사이즈 30은 허리가 어정쩡. 허리를 한 사이즈 크게 입은 스웨덴산 Rodebjer는 실루엣이 좋았음. 참, 2004년 봄에 산 헬무트 랭 블랙 팬츠는 스트레치 소재로 발목까지 좁아지는 실루엣이라 스키니 효과가 남. 밑단을 짧게 자를까 고민하며 쇼핑을 후회했으나 현재 대만족.” 마르고 아담한 33세: “6개월만 입고 버릴 작정이라 브랜드는 없음. 두타 1, 인터넷몰 1, 이태원 1, 송자인(위즈위드) 1, 유니클로 1. 최악은 이태원. 블랙 면스판 벨벳 소재라 뚱뚱해 보임. 편할 줄 알았으나 한번 입고 거들떠도 안 봤음. 최고는 일본에서 2만5천원쯤 주고 산 유니클로의 다크블루 데님. 발목에 딱 맞게 잘라 입었더니 컬러도 피팅도 굿!” 매니시 룩의 36세: “쇼핑을 귀찮아해 예쁘다 싶으면 색깔별로 한 곳에서 몽땅 구입. 작년에 발견한 바지집(시장에서 도매로 파는)에서 블랙, 화이트, 그레이진 세 벌 사고 생지 진 하나 더 구입. 최고는 26사이즈, 최악은 27사이즈. 헐렁한 스키니보다 바보 같은 게 있을까.” 이렇듯 스키니를 위한 이기적 조건(길고 마른 다리)이라 해도 그들에겐 스키니 애환이 있었다. 슈퍼파인을 추천한 아가씨는 꼴레뜨 사건을 추억한다. “파리 꼴레뜨에서 스키니 컬렉션을 보고 흥분해 사이즈 대부분이 품절인 걸 알고도 사고 쳤어요. 23인치 초슬림 츠비에 다리를 구겨 넣은 거죠. 반쯤 입은 팬츠를 벗지도 입지도 못한 채 드레스룸에서 쩔쩔매던 저는 스태프의 도움으로 간신히 팬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극도의 타이트함에 적응 못한 건 키 175cm 아가씨도 마찬가지. “저녁만 되면 무릎이 시큰거리고 피부가 더 건조해지는 거예요. 무릎을 굽힐 수 없을 만큼 팬츠가 몸을 조여온 거죠. 게다가 왁스 코팅된 데님은 통풍에 있어 최악! 악건성인 제가 그걸 입고 클럽에 다녀온 다음날 사막처럼 말라버린 피부란!” 한 바지집에서 네 벌을 산 여자는 남자에게 기막힌 소릴 들었다. “버튼플라이를 사서 맨 위 버튼은 안 잠그고 주머니 안감도 일부러 슬쩍 뒤집혀 나오게 했어요. 이러면 너무너무 꽉 껴 보여요. 여기에 더러운 테니스화를 신고 어깨가 뾰족한 재킷을 입고 선보러 나갔더니, 남자 쪽에서 ‘여자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나요?” 6개월만 입겠다던 여인은 스타일링 땜에 속이 터졌다. “스키니 스타일링이 다 비슷해요. 블랙, 부츠, 스웨터 원피스, 튜닉, 롱 체인 목걸이… 외국에서도 낯익은 스키니 룩을 보면 꼭 한국 여자였어요. 진짜 그만 입겠단 생각 간절했죠.” 스키니를 입고 벌어진 해프닝들은 시트콤 수준이다. 그렇다면 죽여주게 멋질 때와 꼴도 보기 싫을 때는? 꼴레뜨의 악몽을 지닌 아가씨에겐 파리지엔이 최고. “그들의 슈즈가 끝내줘요. 블랙 스키니에 블랙 부티, 에나멜 플랫폼을 신는데, 스키니엔 이런 킬힐이 제격이에요. 거기에 심플한 가죽 블루종이란! 반면, 밑위가 너무 짧아 힙의 골이 드러날 땐 흉해요. 가슴 라인이 푹 파인 타이트한 저지 톱을 입은 투 머치 섹시도 촌스럽죠.” 헬무트 랭의 통 좁은 팬츠를 스키니로 입은 행운아는 허리 위로 옆구리 살이 삐져 나와 ‘머핀’처럼 보일 땐 뜯어 말리고 싶었다. 스키니를 입고 맞선을 본 여인은 코리안 스키니 룩의 O와 X를 통쾌하게 제시한다. “김민희의 스키니 진은 예쁘고, 윤은혜의 스키니 진은 이상해요!” 별의별 해프닝들을 남긴 스키니의 영욕의 1년은 시즌 2를 맞는다. 사실, 올봄 유행을 타전하는 마크 제이콥스 쇼에서 슬라우치 팬츠가 나오자 스키니가 종식될 조짐이 보였다. 하지만 다들 여자의 몸을 샤프펜슬처럼 디자인했고 다리의 숨구멍을 조이려고 작당한 듯 보였다. 또 질 샌더(신호등 컬러의 디자인), 구찌(블루 블랙 브로케이드), 돌체 앤 가바나(프레자가 뷔스티에 아래 입은 데님), 안나 몰리나리(스탬이 입었던 알루미늄 호일 같은) 등등. 파리에선 혼란스러웠다. 스키니를 물리치기 위한 새로운 팬츠 세력이 보일락말락 했으니까. 발맹의 슬라우치와 클로에의 와이드도 끝내줬지만, 미우미우와 발렌시아가와 랑방 등쌀에 밀려 맥을 못 췄다(슬라우치와 와이드를 향해 “너흰 나오려면 아직 멀었어!”라고 비꼬는 듯했다). 본격적으로 스키니 걸들은 시즌 2의 관전 포인트를 들려준다. 스키니엔 ‘킬힐’이 딱이라던 아가씨는 특별함이 추가됐다고 전망한다. “발렌시아가의 골드 로봇 레깅스를 선두로 샤넬과 칼 라거펠드, 미우미우의 블랙 새틴, 커스텀 내셔널의 홀로그램, 루엘라의 왁스 코팅 등등. 퓨쳐리즘에서 비롯된 ‘샤이니’가 시즌 2의 키워드예요.” 키 170cm의 패션 기자는 ‘포멀’을 밀어붙인다. “이번엔 데님이 대세가 아닙니다. 포멀 팬츠들이 무척 스키니하게 나왔거든요. 문제는 캐주얼한 느낌이 없기에 더욱 체형이 중요해졌다는 것.” 그녀의 예측은 김민희의 손을 들어준 여자의 소망과 비슷한 맥락이다. “스키니 팬츠가 좀 담백해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군요.” 전체적으로 허리 라인이 배꼽 위로 올라갔다는 의견도 있었다. 요컨대 시즌 1에선 스트리트나 데님 같은 ‘캐주얼’이 주인공이었으나, 시즌 2에선 디자이너들이 ‘포멀’을 주인공으로 삼아 스키니를 하이 패션으로 승격시켰다는 사실! 보디 셰이프와 이너웨어는 시즌 1·2 모두의 주역이자 관건. “말랐다고 다 예쁜 게 아닙니다. 종아리가 짧으면 다리가 길어도 안 예쁘고, 허벅지가 두리뭉실하면 엉덩이 아래에 가로 주름이 생겨요. 엉덩이가 너무 납작해도 너무 뚱뚱해도 안 예쁘죠.”제일 중요한 건 보디 셰이프, 그 다음은 길이라고 36세의 스키니 우먼은 조언한다. “너무 길어 주글주글하게 접히는 건 다리가 아주 예쁜 경우만 어울립니다. 대부분은 복숭아뼈 길이로 짧은 게 훨씬 나아요.” 스키니를 입을 땐 웬만한 팬티로는 티가 난다고 33세의 스키니 우먼도 귀띔한다. “그래서 빅토리아 시크릿에 심리스 팬티를 8개쯤 주문했었죠. 뭐, 그것도 완벽하게 비치지 않는다고 할 순 없지만.” 자, 이 기사를 밑줄 좍좍 쳐가며 읽었다면, 이제 당신이 시트콤 스키니 시즌 2의 여주인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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