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봉, “한국사 편지 2권(웅진주니어:2002)”를 읽고
이제 2권,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에 대한 내용이다. 통일 신라가 점점 부패하기 시작하자 여러 지방에서 호족(재산이 많고 세력이 강한 집안)들이 일어나 계속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그리고 신라는 점점 망해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양길의 부하였다가 양길을 배신하고 세력을 넓히고 있던 궁예와 그 궁예 밑으로 들어간 송악의 호족 왕륭과 그 아들 왕건, 그리고 백제를 세운 견훤이었다.
궁예는 901년, 민심을 얻은 때에 ‘고려’라고 했다. ‘후고구려’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실은 ‘고구려’를 ‘고려’로 바꾼 것은 장수왕 이후부터인데 그 전에는 모두 ‘고구려’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려는 왕건과 다른 장수들의 힘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었다. 그러나 궁예가 자신을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을 ‘관심법’으로 가차없이 죽였고 그 사이에는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왕건도 죽을 뻔 하였으나 최웅의 도음으로 살아난다. 결국 보다 못한 장수들이 왕건을 중심으로 궁예를 내쫒고 왕건을 왕으로 섬긴다. 도망친 궁예는 어느 밭에서 보리를 몰래먹다가 백성들에게 ‘맞아죽었다’라고 한다.
고려와 후백제는 계속 전투를 했는데 후백제가 연전연승 하다가 930년 1월에 경상도 안동에서 터진 고창 전투에서 고려가 크게 승리했고, 후백제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후백제가 기울게 된 이유는 정치적 혼란이었다. 견훤에게는 총 10명이라는 많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총명한 4번째 왕자인 금강과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첫째, 둘째, 셋째인 신검, 왕검, 용검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둬놓고 금강을 죽인 뒤 신검을 왕으로 모신다.
한편 감금당한 견훤은 신하의 도움으로 왕건에게 도망치는데 왕건은 견훤을 후하게 대접하다가 대세가 이미 정해졌다 판단한 왕건이 약 9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로 쳐들어간다.
백제와 고려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당연히’ 고려가 이기고, 동생들 때문에 왕위에 오른 신검은 용서했지만 그 동생들은 죽거나 귀양 간다. 그리고 신라의 경순왕은 기울어가는 신라가 어쩔 수 없다 판단해 영토를 왕건에게 바친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백성을 위해 세금을 줄여주고, 거란이 화친을 청해오자 사신을 귀양을 보내고 거절한다. 그러자 ‘열받은’ 거란이 전쟁을 시작한다. 993년에 거란의 제 1차 침입 때 거란 왕의 사위인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고려의 왕과 신하들이 나와서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하라고 했지만 서희는 거란과 동맹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가로막는 여진이 압록강 일대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거란에서도 화친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소손녕은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천 마리, 비단 100필을 선물로 주고 거란은 압록강 서쪽에 다섯 성을 새로 쌓아 고려로 통하는 길을 냈고 고려는 서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홍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등 6곳에 성을 쌓게 했는데 이것이 ‘강동 6주’이다.
강동 6주를 얻고 거란과 화친을 맺은지 10년 후 고려는 다시 송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거란이 강동 6주를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거란은 1010년 다시 쳐들어왔다. 고려는 왕이 친히 거란에 인사하러 간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3차 침입은 1018년에 일어났다. 소손녕의 형인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는데, 이때 고려군은 20만 8천여 명으로 거란의 2배였다. 강감찬은 소가죽을 연결해서 강 상류를 막아 놓고 정예 기병 1만2천 명을 매복시켰다. 거란군은 아무것도 모른 채 건너다 쏟아져 내려오는 강물에 쓸려가거나 기병에게 공격당해 거란군은 대패했다. 홍화진에서 패한 소배압은 개경을 향해 밀어닥쳤지만 우물은 다 막아져있고 곡식은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아서 거란군은 철수한다. 압록강 근처의 귀주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거란군 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화살을 퍼부었는데 거란의 10만 군사들 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전투가 바로 ‘귀주 대첩’이다.
고려 속의 불교에 대해 보자면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만든 대장경이 있다. 거란 침입 때 처음 만들었다는 뜻의 ‘초조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 불타 없어지자 그 뒤 만들어진 것이 지금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팔만대장경은 조선 세종 때, 일본이 팔만대장경을 보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는데 세종은 아까울 것 없다면서 보내려고 했지만 신하들 중 한 명이 나중에는 줄 수 없는 물건을 달라고 하면 어쩌겠냐고 해서 그만두게 되었다.
고려 때 유명한 것을 뽑자면 고려청자가 빠질 수 없다. 도기 중 푸른빛을 띠는 것을 비색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남의 나라 물건을 칭찬하는 일이 드문 중국인들이 최고라고 했다. 청자는 무신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인 12세기 초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사발, 접시, 잔, 병, 항아리 등 생활에 쓰이는 그릇부터 불교용품, 제사용품, 화장용품, 문방구 그리고 기와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은은한 비색을 내는 청자는 고급품이기 때문에 검은색에 가까운 진녹색 청자도 많았다. 이런 청자는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모두 고려 때 쓰여진 역사책이다. 1145년 음력 12월 22일, 김부식은 지난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완성한 <삼국사기>를 인종에게 바쳤다. 역사책은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썼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고 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는 문벌 귀족 세력이 막강한 힘을 떨치던 때였다. <삼국사기>는 유교 중심으로, 또 문벌 귀족 중심으로 나라를 안정되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이전 시대의 역사를 총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쓰여졌다.
<삼국사기>가 편찬된 지 약 140년 뒤인 1281년경, 일흔 다섯 살의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썼다. 오랜 시간 정성들여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공들여 쓴 책이었다.
일연스님은 1206년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출가했다. 승려가 되기 전의 이름은 김견명이었다. 일연스님이 스물다섯 살 때,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받아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했다. 일연스님은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보았다. 그리고 일연스님은 비슬산에서 20년간 도를 닦고 사십 대가 되어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그 후 강화도에 있는 선월사의 주지가 되었다. 일연스님은 국존으로 책봉되어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절하는 의례를 할 만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일연스님의 가슴속에는 젊은 시절부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나라와 백성들의 아픔이 간직되어 있었고, 일반 백성들에게 전해 오는 설화와 신화, 불교 고승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아 만든 책이 바로 <삼국유사>이다. 이 책을 쓴지 약 12년 뒤에, 일연스님은 세상을 떠났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비교해보자면 <삼국유사>에는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일부러 싣지 않았거나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풍속, 생활, 전설, 노래 등이 풍부하게 실려져 있고, 발해와 가야의 역사까지 실려있다. 결국 일연스님께서 쓰신 <삼국유사>가 학자 김부식이 쓴<삼국사기>보다 더 많고 다양한 내용이 실려있다는 것이다.
고려왕들 중 반원정책을 했던 공민왕이 있다. 공민왕은 열두 살 때부터 부모님과 헤어져서 원나라(몽골 이 간나쉐키)에 가서 살았다. 그곳에서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는데, 공주의 이름은 보탑실리. 보통 ‘노국대장공주’ 라고 불린다. 그런데 왕비인 노국대장공주는 다른 원나라 공주들과는 달리 남편 공민왕을 적극 도왔다. 자신이 원나라 공주인 것을 내세워 남편을 무시하면서 고려 백성들로부터 공물을 마구 거둬들이지도 않았다. 공민왕과 사이도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공민왕을 크게 도운 승려가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신돈이다. 신돈은 친원파와 부원배에게 빼앗긴 땅을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개혁 정치를 해서 백성들에게는 성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친원파와 부원배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신돈을 반역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을 내어 죽이고, 신돈이 죽고 얼마 안되어 공민왕도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리고 고려는 급속도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 후 기 ♤
2권은 주로 고려에 대하여 나왔다. 후삼국 시대의 태조 왕건부터 시작하여 고려를 개혁하려고 한 공민왕까지를 보면 위대한 인물도 많았다. 특히 말 한마디에 강동 6주를 얻은 서희와 2배의 대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 군사들은 한명도 죽으면 안되기에 작전을 펼친 강감찬 장군이 한마디로 ‘훌륭하다’. 나는 옛날처럼 칼을 치켜들고 ‘돌격!’하는 장수가 될 수는 없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펜을 치켜들고 ‘추진합시다!’하는 사장이 되려고 한다.
2007. 8. 20. 월요일
김민석(동글이)
첫댓글 동글씨도 5권까지 다 올리면 'favorite restaurant'에 데리고 갈께염~ 기운내3~ㅋㅋㅋ
오홋
'추진합시다' 하는 사장이라.. 멋집니다. 모름지기 세계적인 경영자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 잊지 마시길.. 동글씨 정말, 훌륭합니다. _()_
ㅋㅋㅋ 그중에는 만화책만 읽어서도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 잊지 마시길..
멋진 CEO~ ^^ 5편 완수까지 화이팅~ _()_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ㄳ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먹을 수 없다는거
칼대신 펜으로...!!! ^^ 동글이 부처님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_()_ 아미타불!
ㅋㅋㅋㅋ 키보드가 될 수 있겠죠?
펜을 치켜든 역사학자!!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_()_
아따 복잡한 직업같으요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