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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48) 언약의 하나님(I)     (계11:19)
praysir 추천 0 조회 6 18.08.02 23: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8) 언약의 하나님(I)

 

 

(계11:19)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우리는 지난주까지 일곱 번째 나팔까지를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일곱 대접의 재앙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대접의 재앙이 나오기 전에 11장19절부터 12장,13장,14장에 이르기까지 또 한 번의 삽입 부분이 등장을 합니다. 제가 처음에 요한 계시록의 구조를 나누어 드렸을 때 이 부분이야말로 요한 계시록의 핵심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리쳐드 보캄 교수님의 논문집을 보면 이 부분은 요한이 이제 완전한 우주의 종말인 대접 재앙을 설명하기 전에 왜 그렇게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 부분을 그렇게 보면 요한계시록 전체를 한편의 일관성 있는 편지로 볼 수 있습니다. 뭐 복잡하게 대칭구조 이런 것 들먹이지 않아도 전체를 한편의 편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게 이 편지가 전해졌을 때 그들이 대칭구조니 뭐니 해서 분석을 해서 읽었겠습니까? 그냥 편지 읽듯이 죽 읽고 감격을 하고 위로를 받고 격려를 얻고 힘을 얻은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은 참 simple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입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구구절절이 써서 보내주신 연애편지입니다. 성경을 너무 복잡하고 신학적으로 쪼개는 버릇은 어떤 면에 있어서 성경의 바른 이해를 오히려 막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11장 19절부터 12, 13,14장을 마지막 대접 재앙이 올 수밖에 없는 이유로 본다면 거기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있어야 하겠습니까?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즉 복음이 적혀있어야 하겠지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전체 내용이 이 세장 안에 전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나누어드린 hand out을 잘 보시면 이 세 장안에 구약 전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이 땅에서의 교회의 삶, 그리고 구속받는 교회의 모습, 심판 받는 세상 이 모든 복음의 내용이 환상의 모습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 전체 복음의 내용을 구약 적 언어로 표현을 하면 무엇일까요? ‘언약’이지요. ‘하나님의 약속’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가가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어떤 언약입니까? ‘너희들은 모두 죽어야 할 자들이지만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신약과 구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를 복된 소식,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고요.

 

(레26:12)

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렘31:33)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겔11:19-20)

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슥8:7-8)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의 언약이 뭐예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 언약이 어디서 완성이 됩니까?

 

(계21: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언약의 완성이지요? 이걸 우리가 다른 말로 뭐라고 부른다고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그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 눈에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뭡니까? ‘언약 궤’‘법 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계시록 11장 19절에 언약궤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계11:19)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사도 요한은 이제 계시록 11장 19절부터 14장 끝까지에서 복음이 설명이 될 텐데 그 서론 격으로 ‘이 세상은 구약에 계시되었던 그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으로 완전히 멸망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것’이라는 것을 19절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궤의 등장과 함께 심판의 상징인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언약궤가 복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그 언약궤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지성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지성소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성막, 성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성소 안의 법궤는 그 성막 전체를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떠 올려 보세요.

 

성막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번제 단입니다. 번제 단에서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죄인들 대신 죽임을 당하고 태워지는 곳이지요?

그 번제 단을 지나면 무엇이 있지요? 물두멍이 있습니다. 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기서 수족을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소로 들어가면 왼쪽에 촛대가 있고 오른 쪽에 진설병이 놓여있는 떡 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맞은편으로 향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하나님의 법궤가 놓여있고 일 년에 한번 속죄일에 대 제사장이 그 법궤 위에 피를 뿌리고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를 받습니다. 그 법궤 위를‘시은 좌’‘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라고 부르죠. 이 성막을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비교를 해 보세요.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던 유월절에 무죄한 어린양이 죽고 그 피가 문설주에 발려진 집 장자들은 다 살아납니다. 성막의 어디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번제 단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홍해를 건넙니다. 고린도전서 10장2절에서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라고 표현을 하지요?

 

(벧전3:21)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세례를 받은 것이 성 막의 물두멍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삶이 이어지지요? 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침이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지요? 성소 안에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향단(구름기둥) 촛대(불기둥) 떡 상(만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거쳐 가나안으로 입성을 하게 됩니다.

가나안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곳이지요.

성막에서도 그 성소를 지나 하나님의 법궤가 놓여있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구원해 내실 것인가를 성막에, 율법에 정확하게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그럼 지성소 안에 들어있는 그 언약 궤, 법궤가 어떻게 그 전체 복음을 요약하고 있는지 살펴보지요. 벱궤는 무엇으로 만듭니까?

 

(출25:10-22)

10      그들은 조각 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17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께서 법궤를 만들 때 궤는 조각 목으로 만들고 그 위에 금을 입히라고 하십니다.

조각 목이라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나무를 말합니다. 그 것으로 궤를 만들고 그 위에 금을 입히라는 것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적 인성과 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아주 쓸모없는 것 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지만 그 분은 영원한 신성을 갖고 계신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법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십계명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 항아리입니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곧 율법이며 그 율법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가능함, 실패를 나타내는 것들입니다. 법궤는 그 율법과 율법 아래 놓인 죄인들을 예수님께서 감싸 안으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피를 뿌린다는 것은 그 율법과 그 율법 아래 놓인 죄인들을 칼로 푹 찔러서 완전히 죽여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는 것이 아니라 무죄한 제물인 예수가 죽고 죽어야 할 자들은 구원을 받는 것, 즉 법궤는 율법이 죽고 그 위에 시은 좌에서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 바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두 세 개의 궤가 나옵니다. 그 첫 번째가 노아의 궤(방주)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궤(갈대 상자)입니다. 그리고 언약 궤 이렇게 세 개의 궤가 나옵니다.

노아의 궤(노아의 방주)는 여러분이 익히 아시다시피 ‘저주의 물을 맞아 다 죽어야 할 것들을 품에 안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가 대신 그 물을 맞고 죽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이 살아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궤는 어떻습니까? 히브리 남자아이들이 모두 죽어야 하는 그 상황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갈대 상자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된 것입니다.

이 두 궤에는 모두 역청을 바릅니다. 거기서 쓰인 역청이라는 히브리 어‘카파르’의 원래의 뜻은 ‘속죄’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흠 없는 속죄 제물의 피에 의해 이루어진 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두 궤는 바로 언약궤를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 궤 위를 시은 좌, 속죄소라고 한다고 했지요?

 

(히9:5)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지성소 안에 법궤가 있고 그 언약 궤 위에 속죄소가 있습니다. 거기서 속죄소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힐라스 테리온’입니다. 정확하게 그 단어가 로마서에서도 한번 쓰였습니다.

 

(롬3:25)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여기서는 ‘화목제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법궤는 희생제물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이 주어지게 되는 복음을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궤가 왜 없어졌을까요? 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 법궤가 상징하던 것이 성경으로 정확하게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법궤는 이제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참 성전이신 예수께서 오셨고 그 구속 사역을 다 마치시고 가셨기 때문에 더 이상 성전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 성전 자리에 이슬람 사원이 지어진 것이고 이스라엘이 그것을 못 빼앗는 것입니다. 그 자리 뺏으면 이스라엘은 곧 성전을 짓고 제사를 지낼 테니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요한도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언약궤’라고 확실하게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렘3:16)

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얼마나 정확합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은 일 점 일획도 틀리지 않게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법궤를 찾아서 수많은 고고학자들과 과학자, 도굴꾼들이 그 법궤를 찾아서 오늘도 열심히 정글을 누비고 땅을 파고 있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알고 하나님을 조금만 알면 그 모든 것이 다 허사라는 걸 알 텐데 참 수고들 많습니다. 법궤는 절대 못 찾습니다. 성전도 절대 다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과 멸망뿐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왜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는 절대 그 죄를 갚을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떤 다른 방법을 동원하신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면 그 죄의 정체가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죄입니다.

 

(창3:4-5)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기에 넘어간 거죠? 그러니까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야 할 존재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처럼 되고파 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live of the world’라는 그의 책에서 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조건은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지탱이 됩니다. 죄는 이러한 인간됨의 기본 조건을 모르거나 부인하거나 회피하는 것을 말합니다. 죄는 스스로 신이 되려하거나 스스로를 위해 신을 만들려는 인간의 뒤틀린 의지를 칭하는 단어입니다. 죄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나쁜 행동을 가리키는 도덕 적 용어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부한 채 자기가 신인 양 행세하는 것을 가리키는 영성 적 용어입니다‘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근자에 이렇게 탁월한 죄에 대한 정의를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를 정확하게 설명해 놓은 statement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고 미워하고 합니까?

나는 나를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는데 상대방이 나를 하나님처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전부 나보다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처럼’의 사상이 그 근저에 깔려 있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왜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고 주늑이 들고 합니까? 역시 ‘하나님처럼’의 사상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처럼 보여야하는데 나의 이 약점이 들킬까봐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름다운 자연이나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음악을 대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기쁩니다.

 

저는 예전에 현대무용하고 뮤지컬 보는 것을 아주 즐겨했습니다. 그리고 음악 듣는 것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 스피커가 10개도 넘습니다.

어떤 때는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밥도 안 먹고 음악만 들을 적도 있습니다.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참 기뻐요. 예전에 군대 제대하고 가수 최희준 선생님 아들 과외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최희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오디오가 세계 최고 수준의 오디오였습니다. 가끔 그 집에 가서 LP판을 걸어놓고 쇼팽 같은 걸 들으면 저절로 눈물이 주르륵 흐를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되어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시8:1-9)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께서 이 우주와 자연에 자신을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 앞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어 우리 인간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어야겠다는 죄가 들어온 후 인간들은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여자가 지나가면 음욕을 품게 되고, 누가 자기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배가 아파서 잠을 못 자게 된 것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도 탐욕이 먼저 올라옵니다.

 

설악산에 가면 아름답고 웅장한 바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산에 가셔서 제대로 원형이 남아있는 바위나 나무 보셨습니까? 그 바위마다 전부 자기를 나타내려는 인간들의 이름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정으로 파서 자기 이름을 새깁니다. ‘ooo왔다가다, ooo야 사랑해’ 그런 걸 왜 거기다 쓰고 싶어 하죠? 인간은 ‘하나님처럼’되고 싶은 것입니다. 뭐든지 자기 소유로 만들고 싶고 뭐든지 자기 아래 두고 싶은 죄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기서 건져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서 자꾸 힘을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 힘이 늘어나는 것이 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태초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초 신자 시절에 계속해서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자신을 보면서 ”펠릭스큐파 (oh, happy sin)“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죄로부터도 자유하지 못한 내가 그동안 너무 자만했었구나. 나는 하나님이 아니구나, 난 정말 불가능한 인간이구나.’ 이걸 발견한 것입니다. 그 때는 죄조차도 ‘펠릭스큐파 (oh, happy sin)’가 되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예수를 믿고 여러분의 사업이 망하셨거나 몸에 병이 생기셨거나 가정에 불화가 생겼거나 해서 여러분의 힘이 빠지고 여러분이 그 일들을 통해 ‘나는 정말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약하디 약한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달으셨다면 여러분은 복 받으신 분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 어디 ‘만사형통, 소원성취, 부귀영화’가 들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10:10)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왜 오셨다고요?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생명이 뭡니까? 영생이 뭐예요?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영생입니까? 영생은 신적 생명을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들 위에 하나님처럼 군림하고픈 욕망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남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런 삶을 한 단어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하고 내가 남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마음만 벗어버리면 그 사람은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은 전부 ‘하나님처럼’의 사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할 것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바쳐 사랑해라’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거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왜 알렉산더가 땅굴에서 사는 디오게네스를 찾아가서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다’고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왜 그 풍요했던 헬라 사람들이 ‘나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고 했는지 아세요? 우리가 추구하는 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끝까지 하나님처럼 살겠다고 버둥대는 인간들을 전부 멸해 버리시고 거기서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아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선물하시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어떻게 이루시는가가 계시록 11장19절부터 14장 마지막까지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더 이상 엉뚱한 것 좇고 추구하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러 오신 예수님을 모독하지 말자고요. 엉뚱한 것 좇느라 그 동안 저 방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그 귀중한 선물의 포장을 이제 한 겹 한 겹 벗겨 보십시오. 그래서 그 선물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게 되신다면 제가 확신하건대 여러분은 절대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으실 겁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을 너무 몰아치는 것 같으세요? 너무 여러분을 다그치는 것 같으십니까?

너무 여러분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나요? 저는 말씀을 맡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수많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부 무엇을 전하다가 가셨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여러분의 가슴을 찔러야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할 말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악역을 맡았고 그 역할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여러분이 제게 감사의 인사를 하실 날이 꼭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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