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1강
(강의:이근호 목사)
국민학교인지, 중학교인지, 대학교인지 지금 여러 계층에 계신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그 어려운 잠언을 초등학교 일학년, 아직 유치원도 안 들어간 애들도 있어요. 유치원도 안 들어간 애들에게 잠언을 이해를 시킨다, 또는 잠언을 알려준다, 그걸 대략 난감이라 이야기하죠.
제가 믿는 구석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성경 잠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잠언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대한 사람이 뭐냐 하면, 보통 인간이 아니고 아예 인간 자체가 달라요. 보통 사람 같으면 진짜 대학을 나와도 이 잠언을 이해를 못 하지만 유치원생이라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다른 인간’이라면 이 잠언도 이해되리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해될 수 있도록 제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언은 ‘지혜’라고 하는데 잠언서에서 지혜라 하는 것은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사람에게 없는데 사람에게 없는 걸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논하겠다, 심판하겠다.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초등학교 때 시험을 치는데 시험문제에 선생님께서 가르쳐준 내용을 시험 치면 애들이 시험 칠 수 있는데 애들이 배운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엉뚱한 문제 갖고 시험 치면 걔들 다 떨어집니다. 걔들 영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하나님 됨을 자랑하고 싶어서 ‘너희들 이런 것 없지. 이런 것 구경도 못했지.’ 약을 살살 올리시는 거예요. ‘너희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지.’ 그래서 이건 마치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에요. 전혀 이거는 세상에서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모집해서 담아놓은 것이 우리가 지금 공부하려는 잠언이라는 겁니다.
잠언의 특징은 우리 속에 없다. ‘지혜’인데 이 지혜는 인간 속에 없어요. ‘인간 속에 없다.’ 인간 속에는 없으면서 이 지혜대로 사람들은 결국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속에는 없는데 우리가 우리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런 가능성, 그런 것은 없는데 나중에 죽어보니까 지혜대로 되는 거예요. 이걸 어려운 말로 ‘구조’라 하는데.
잠언은 구조입니다. 근데 이 구조가 움직여요. 움직여서 우리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성깔대로 사는데 우리 성깔대로 살든 말든 우리 외곽에 설치돼있는 이 구조가 지혜란 시스템이 우리를 흔들어서 천국 갈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속에는 없어요. 우리가 그걸 접촉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알 수도 없는 그 무엇이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 그게 바로 지혜고 그 중에 일부가 잠언입니다. 모든 게 전도서, 아가, 잠언, 욥 다 지혜라 하는데 그 중에 일부가 지혜죠.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정리하면 우리 속에는 없는데 뭔가 우리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휘저어 놓는 그런 외부에 설치된 시스템, 구조 그게 바로 지혜라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우리 출애굽기 1장 6절 한번 봅시다.
출애굽기 1장 6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이게 이 해석이 상당히 중요한 해석입니다. 여기에 앞의 것 다 끊어버리고, 그 시대 사람들은 거기까지도 끊어버리고, 그 다음에 ‘다 죽었고’ 이 단어만 남지요.
이 방금 우리가 같이 본 출애굽기 1장 6절을 이걸 설명하면 어떤 것이 적당한가 고심하고 있었는데 [웃음을 찾는 사람들] 웃찾사라 하지요. 웃찾사의 코너를 보니까 이걸 설명하는데 적절한 설명이 나왔어요. 뭐냐 하면, 웅이 아빠의 고난이라. 그 웅이 아빠 고난을 보니까 성우가 저 뒤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서 웅이 아빠는 죽었고’ 하니까 그 이야기 듣고 거기 있는 웅이 아빠는 죽어버려요.
웅이 아빠가 죽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이 웅이 아빠는 죽었다고 뒤치래 설명해주는 게 아니고, 웅이 아빠는 전혀 본인이 죽을 마음이 없어요. 죽을 마음이 없는데, ‘그래서 웅이 아빠는 죽었고’, ‘웅이 엄마는 새 시집가고’ 그러면 무조건 성우가 시키는 대로 웅이 아빠는 살고 싶어도 죽어야 되고, 웅이 엄마는 새 시집가야 돼요.
그게 바로 강력한 지시, 이게 바로 외부의 구조입니다. 이게 지혜라는 겁니다. 이 특징이 뭐냐? 웅이 아빠는 무슨 말씀을 지킨 게 없어요. 웅이 아빠가 지키고 싶다, 안 싶다 혼자 고민을 하던 고심을 하던 상관없이 웅이 아빠 외부에서 시간 됐구나. 웅이 아빠는 보지도 않아요. ‘그래서 웅이 아빠는 죽었고’, ‘빨리 죽어, 빨리 죽어, 빨리 죽어.’ 시나리오 죽게 돼있어. 너는. 그 다음에 웅이 엄마는 시집을 간다. ‘빨리 가, 빨리 가’ 시나리오가 그래요. 이게 세상입니다.
출애굽기 1장 6절 다시 한번 읽어 보세요.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그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얼마나 해석이 간단합니까? 해석이 무척 간단하지요. 해석만 간단할 뿐 아니에요. 기분 좋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근심, 걱정을 내가 할 권한이 없어.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근심, 걱정을 할 수 있는 자격이나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은 내 소유가 아니고, 외곽에 있는 지혜의 소유고, 그분이 하실 일이기 때문에 내가 고민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자, 이렇게 성경대로 한다는 말은 성경대로 ‘웅이 아빠는 죽었고.’ 목소리도 그래요. ‘웅이 아빠는 죽었고.’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읽는 성경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어떤 지시가 주어져야 돼요. 지시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그 지시 따라 움직이는 걸 가지고 이 두꺼운 잠언서에는 뭐냐 하면, 지혜를 알면 지혜가 너를 살리겠고. ‘웅이 아빠는 죽겠고.’ 똑같은 이야기라니까. ‘지혜가 너를 살리겠고.’ 여기 잠언서에 나오는 우리하고 협상하거나 타협하거나 의논하거나 전혀 대화할 의사 전혀 없습니다. 전혀 그럴 의사가 전혀 없어요.
‘지혜를 아는 자는 살았고, 지혜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죽었다. 빨리 죽어.’ 역할이 그런 역할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잠어서만 아니고 성경 전체를 그렇게 해석해 주셔야 됩니다. ‘목사님, 이유를 대세요?’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잠언에 나와 있습니다.
잠언의 특징은 제가 처음에 지혜는 인간 속에 없다고 했지요. 잠언서에 나오는 지혜의 특징은 그게 모두 다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여호와에게서 나와요. 따라서 여호와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그 나오는 구멍이 한 곳에 정해져 있어요. 정해져 있으니까 우리한테는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지혜도 없는 주제에 잠언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정말 잠언을 지킨 사람은 어떤 현상, 어떤 결과를 나타내느냐 하면, 잠언을 내가 지켰다 이래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잠언의 출처는 내가 아니고, 여호와께서 나왔네.’라고 여호와께 귀속되고 여호와께 돌아갈 때 그 사람, 잠언이 거쳐 온 절차와 경로에 휘말린 사람이다.
잠언을 지킨 사람이 아니고, 잠언이 내뿜던 어떤 태풍이 있는데, 허리케인이 있는데 토네이도의 둥글둥글 도는 그 강력한 폭풍에 휩싸여서 그 토네이도가 나왔던 지혜란 태풍이 나왔던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하는 소리가 뭐냐? ‘지혜는 여호와께서 나왔습니다.’ 이런 고백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런 자가 산 자에요. 그런 자가 지혜를 통해서 산다는 겁니다.
뭘 지키는데? 지금 자기 안에 지혜가 없는데 지키기는 뭘 지켜요. 못 지키지요. 없는데 뭘. 출처가 한 군데 고정돼있다니까. 여호와에게서만 나와요. 여호와에게서만 지혜가 나와서 그 지혜는 자기 나온 것을 태풍으로 확 쓸어다가 다시 자기에게로 귀속시켜 당겨버려요. 그런 경로를 밟죠. A에서 B, B에서 C.
여러분, 이 교재 봤습니까? 한번 읽어봤어요? 이 교재 오늘 저녁에 쭉 이렇게 어렵지 않아요. 읽어보시면 거기 경로가 A에서 B, B에서 C, C에서 다시 A로 돌아가는 그 경로가 나와 있어요. 이 경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B 지점에서 멈췄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C 지점으로 끌려가고 C에서 A로 다시 갑니다.
저와 여러분이 걱정할 문제는 아니고 우리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오는 그 지혜가 자체적인 생산력을 가지고 어떤 일을 도모하면서 어떻게 꾸미다가 결국은 지혜가 지혜 값을 하면서 자기에게 귀속되는가? 그 절차와 그 경과, ‘path’라 하지요. 영어로. 그 경과, 절차를 어떻게 우리가 이걸 파악할 수 있느냐? 그게 이번 수련회의 공부입니다.
아하, 이런 경로를 밟아서 이런 경로로 가는구나. 목사님, 그 경로가 뭔데요? 이렇게 성급하게 물으신다면, 그 경과와 경로는 모델이 있어요. 지혜가 와서 지혜로 돌아가는 모델이 있는데 그 모델은 구약성경에 나타나지 않고, 신약성경에 나타나십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잘 아시는 예수님이죠. 예수님께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은 여호와께서 나왔던 지혜의 절차를 그대로 밟고 가시는 겁니다.
밟고 가시면서 하는 소리가 있어요. ‘너희들은 지혜를 모른다.’ 마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똑똑해? 잘났어? 알기는 뭘 알아. 너희는 지혜를 몰라.’ “오, 하나님 아버지여 이 지혜를 슬기로운 자에게 다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옳소이다. 그렇게 된 것이 저와 아버지 뜻 맞습니다. 합의한 대로 맞습니다.” 그리고 가버려요. 그리고 자기 길 가버립니다. 상당히 폐쇄적이죠. 자기 경로에 누굴 눈 감아 주질 않아요. 상당히 폐쇄적입니다.
이걸 저는 네 자로 표현하겠어요. 방금 이야기한 지혜의 경로를 하나의 모델로써 닮아 가신 분이 예수님인데 이러한 현상을 저는 네 자로 뭐냐 하면, ‘불가능성’이에요. 전혀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겁니다. 지금 우리는 불가능성에 도전하고 있어요. 내가 가능해서 교회 출석한다? 그 교회, 교회 아닙니다. 절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성경은 천국은 사람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거예요. 천국에 사람의 힘으로 갈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교회도 사람의 힘으로 갈 수 없어야 되고, 일단 교회 다니시더라도 그 교회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 분위기는 도저히 우리 힘으로는 출석 못한다. 그게 대세가 돼야 되고, 주류가 돼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 다니는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으로 일치가 되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데 천국 못 간다? 그 교회 문제 있어요. 중간에 분명히 그 교회는 불가능성을 분명히 어떤 지점에서는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이렇게 개방시킨, 뭔가 허점을 노출시킨 그러한 증거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거는 CSI나 수사반장에서 조사해 볼 문제에요. CIA 마이애미에서 와서 과학적 수사를 해봐야 됩니다.
분명히 교회 다녔는데 천국 못 간다? 분명히 어떤 요소에서 불가능성을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가능성으로 봐준 뭔가 얼렁뚱땅 넘어간 그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뭐냐? 뭘 뜻하느냐? 기어이 path, 지혜의 경로. 지혜의 경로는 불가능성에서 시작해서 불가능성으로 끝나는데 그 경로 속에 섞이지 말아야 될 것이 섞였기 때문에 경로가 더럽혀진 거죠.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좁은 길로 유지를 해야 천국 가는 영생의 길이 있는데 교회가 좁은 길, 좁은 길 유지하다가 어느새 넓은 길 유지해버리면 그러면 찾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그래 되면 그 교회는 영생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고, 멸망으로 빠지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좁은 길, 좁은 길 유지되려면 이 좁은 길 가라. 그거는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거거든요. 왜냐하면 대세는 넓은 길 가는 쪽이 대세기 때문에 좁은 길을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만큼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에요. 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상이라는 뜻입니다. 불가능성이 유지돼야 정상적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 오는 사람에게 인터뷰를 가끔씩은 해볼 필요가 있어요. ‘교회 어떻게 왔습니까?’ ‘누구 집사님 전도해서 왔습니다.’ ‘땡. 죄송합니다.’ ‘주의 은혜로 왔습니다.’ 이게 정답이죠. ‘어떻게 믿었습니까?’ 열심히 해서 오기 부리니까 믿어졌다. 그거 땡이죠.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게 계속 돼야 돼요.
‘지난 주 왔는데 이번 주 어떻게 왔습니까?’ ‘지난 주 오다보니까 습관이 돼서 왔습니다.’ 땡이죠. 지난 주 온 건 은혜고, 이번 주 온 것 은혜입니다. 뭔가 계속 돼야 돼요. 물론 한 사람에게 물어볼 수 없지만 이걸 점검하는 방법은 있어요. 복음적인 설교를 해버립니다. 복음적인 설교를 해버리면 자기 힘으로 교회 나왔단 사람들 다 나가게 될 거예요. 넓은 쪽으로 다 가게 돼있죠.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도 내일을 다음 주일을 보장 못하죠.
제가 어제 아침에 주일 오전에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교회에 눈치코치도 없이 주님이 왜 개입하느냐 말이에요. 사람들끼리 노는데. 그렇지 않아요? 애들 소꿉놀이하는데 어른이 왜 낍니까? 만약에 주님이 와서 설교해보세요. 몇 사람 남아 있을 거예요. 다 가버리지. 주님이 안 계시니까 교회가 재밌고 즐겁지, 주님 와버리면 교회가 딱딱해서 도저히 다닐 마음이 없습니다.
주여, 공부 시험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왔는데 주님 와서 설교하기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이래버리면 다 나가버리죠. 세상으로 온 것이고. 그리고 뭔가 한에 받쳐서 교회 와서 기도하고 있는데 ‘주님이여, 제가 사기를 당했습니다. 억울해서 못 살겠습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사도바울이 설교하면서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그러면 교회 왜 나옵니까? 그런 상담 받자고 교회 나왔습니까?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주여, 가정에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라.’
이거는 아예 불가능한 것만 남기고 일체 가능한 것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해서 어떻게 했더니만 극복해서 구원받았다. 이런 요소를 진짜 다 삭제시키니까 거기에 누가 남겠어요?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왜 그들이 가느냐 하면, 왜 그들이 가느냐고 묻지를 마세요. 원래 인간에게는 알아들을 지혜가 어떤 인식이 없어요. 없으니까 가는 것이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이냐 하면, 그런 소리 듣고 남아있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아, 저 사람 뭐 있다. 그 사람 분명히 뭐 받았다. 저건 인간이 아니야. 천사야.’ 왜냐하면 인간 같은 건 없거든요.
천사 말이 나왔는데 천사의 특징이 있습니다. 천사의 특징이 ‘고집’이 없어요. 천사의 특징은 시킨 대로만 합니다. 이걸 배알도 없다 하지요.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그저 무뚝뚝한 우편배달부 같아. 그저 할 일만 할 뿐이에요.
성도하고 천사에서 성도가 우세한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성도는 울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점에서? ‘나 같은 인간을 구해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하고 운다는, 자기 죄에 대해서 감사가 온다는 점에서 성도가 천사보다 월등하고 그 성도는 천사까지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의 완벽 가지고 천사한테 달려들지 마세요. 그거는 게임이 안 됩니다. 우리는 회개하는 것이 우수하지 완벽한 것으로 천사를 못 이깁니다. 회개하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해서 십자가 피를 보고 나는 원래부터 구원받을 인간이 못 되는 것을 깨닫는데서 오는 주님의 아픈 희생을 보고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우는 거죠.
그게 인간의 위대함 점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성도 속에 사랑 들었다는 것, 사랑이 귀하기 때문에 성도가 귀한 거예요. 안에 뭐가 들었어요. 그걸 오늘날에서는 지혜라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네요. 지혜가 들어있는 사람은 이거는 우수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거는 ‘다른 인간’입니다. 이거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어요. 무서워요, 정말.
어릴 때 가게에서 방울사면 제일 궁금했던 것이 뭔가 소리를 났는데 밖에서 안 보이고, 뛸 때마다 달랑달랑 뭔가 있어요. 분명히 있는데 성질 급한 애들은 발명왕 에디슨 같은 것은 깨버리죠. 저는 어릴 때 라디오를 봤는데 라디오를 아무리 살펴도 사람이 안 들었어요. 거기서 사람이 안 들었는데 거기서 사람 목소리가 나와요. 그 라디오 깨는 충동 억제하려고 애먹었습니다. 분명히 저 꼬마, 사람이 나오니까 사람이 있다. 사람이 있는데 라디오 크기는 있기 때문에 ‘아마 라디오 크기보다 작은 인간, 요정이 들어있을 거다.’ 하고 했어요.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한테는 작은 요정이 들어있어요. 그걸 성령이라 합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가 달라요. 잠언에서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알아듣느냐 하면, ‘모든 지혜는 나한테는 안 나온다.’ 그 이야기를 알아들어요. 모든 지혜는 너에게는 절대 안 나온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 제가 첫째 시간이니까 이 지혜라는 것이 어떻게 잠언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는가? 어렵지만 쉽게 하겠습니다.
중간에 잠언이 있고 이쪽에 시간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여기에 예수님 계십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은 지혜의 완성이라고. 잠언 이전에 뭐냐 하면, 여긴 창세기겠죠. 지혜가 창세기에서 잠언을 통해서 예수님께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잠언이 지혜의 하나의 뭉치라면, 지혜가 뭐냐 묻는다면, 지혜는 ‘활동의 성격’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활동의 성격’ 이 말이 더 어려운지, 지혜가 더 어려운지 분간이 안 되는데 하여튼 지혜라 하는 것은 말은 아니고, 활동하는데 하나의 성질 가지고 활동하는 걸 지혜라 합니다. 지혜라 할 때는 항상 사물, 대상 이래 보지 마시고 뭔가 계속해서 쉬지 않고 멈추지 않는 무슨 활동, 이래 하는 겁니다.
지혜가 들어가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멈추지 않고 활동하게 돼있어요. 행함으로 구원받느냐,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그 이야기 할 수 없어요. 지혜가 들어오면 행함으로 활동하게 돼있으니까. 활동의 성격이 뭐냐 규명하는 것이지 활동 없는 걸 가지고 뭐라고 지적하진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창세기에서 잠언을 통해서 예수님께 가니까 지혜의 원리를 어디서 찾느냐? 바로 창세기에서 찾는데 창세기 찾아봅시다. 41장 38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쯤 되면 또 걱정이 돼요.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걱정되는데. 아까 봤던 출애굽기 1장 6절이 무슨 내용이라 했었든가요? 세 자로 이야기하면? 마지막에 죽었다. 이거 꼭 기억하세요. ‘그래서 웅이 아빠는 죽었고. 빨리 죽어, 빨리 죽어.’ 죽었다. 모든 것이 성경의 짜진 대로 되기 때문에 자기 죽음을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41장 39절에 보면,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그 다음에 33절에 보면,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시고”
그런데 요셉을 가지고 지혜있다. 지혜가 처음 나오는데 요셉이 지혜 있는 이유가 창세기 40장 8절에 보면,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 다음에 해석은 누구한테 있어요?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해석은 제가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는 것 맞잖아요.’ 그런 뜻이다 말이죠. 외부에서 지혜가 투입되고 개입되는 거예요.
제가 처음에 전제가 뭐냐 하면, 지혜는 우리한테 없습니다. 요셉에게 지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마찬가지로 요셉에게 지혜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이나 우리나 공평하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둘 다 없어요. 없는데 요셉이 열일곱 살 때 그때 자기가 꿈을 꾸었어요. 열일곱 살이니까 요새 같으면 고등학교 이학년 아닙니까? 철이 없어요.
철이 없어 고등학교 이학년 청소년기에는 자아형성 발달과정에서 자기 뭔가 자랑할 것을 무조건 남한테 뽐내고 싶어서 돌아다니게 열일곱 살이에요. 빠라바라~ 빠라바~ 전부다 열일곱 살 때 열여덟 살 때 아닙니까? 드럼 배운다고 드럼 치고, 나도 이런 재주 하나 있다고 그걸 막 자랑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자기가 우주의 중심인 줄 알고 여학생 같은 경우엔 낙엽 하나 떨어지면 낙엽 주워서 그걸 책갈피하면서 혼자 울고. 낙엽 떨어진 것하고 저하고 무슨 관계있어요. 아무 관계없어요. 그냥 울고 이래요. 그게 오래 가서 사십까지 가는 사람도 있어요. 아마 이미아 씨가.
어쨌든 꿈을 꾸었는데 곡식 집단 열한 개가 자기는 가만있는데 열한 개 일어서서 절을 하는 거예요. 쭉 둘러서서 절을 하더라. 그 다음에 별 열한 별과 해와 달이 자기한테 절을 하더라. 이걸 좀 참아야 되는데 이걸 못 참아서 열일곱 먹었으니까 나불나불 거리다. 경상도 말로 씨부리샀고. 전부다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입장에서 그런 소리를 하니까 더욱더 밉습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그래요. 뭐냐 하면, ‘내가 꿈꾸고 싶어서 꿈꾸느냐’ 이 말이죠. 꿈이 요셉을 지배하는 거예요. 꿈이 요셉을 통치하는 겁니다. ‘웅이 아빠는 죽었고.’ 하면 죽어야 되는 거예요. 꿈이 그를 지배하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모든 세상, 모든 인간은 사실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고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손에 대해서는 인간 중에서 ‘너만큼은 인간이야’라고 꼭 찜해서 찜해 주는 사람에게 그냥 ‘너 구원받아’ 이게 아니라 뭐가 그 속에 밀려들어오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하나님이 앞으로 하시는 모든 그 과제, 사명, 시나리오, 드라마 같은 모든 계획서가 그 사람 속에 밀려들어오는 거예요.
근데 요셉은 그걸 모르지요. ‘나는 네가 모르는 꿈 꿨다. 꿈을 계시를 소유할 생각, 너는 꿈 없지, 나는 있다. 있고 없고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주 철딱서니 없는 그런 짓을 했지만 그가 가지려고 하는 것은 사실은 가질 수 없는 거예요. 그걸 제가 아까 뭐냐 하면, ‘불가능성’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뭘 가질 때는 반드시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이건 가질 수 있다. 믿으면 십 년 끌 수 있어. 가지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계획은 항상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 속에서 뭘 깨닫게 하느냐 하면, ‘아, 나는 불가능하구나.’ 불가능한데 ‘주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은혜를 주셨구나.’ 나는 불가능과 가능을 대조하면서 자기 일을 하게 돼있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어떤 기도나 이런 걸 해보면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제 뜻대로 절대로 안 해줘요. 예를 들면 나는 매직을 공중에 세 번 돌리겠다. 하나님 허락하지 않아도 웅이 아빠 죽었다 소리 안 해도 나는 이거 돌릴 거야. 하나님 돌렸지요. 보세요.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그거는 계시 아니잖아요. ‘그러면 제가 선교사가 되서 몽골에 선교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선교했습니다. ‘주여, 제가 선교사 맞습니다.’ 그건 계시 아니다.
그럼 어떤 게 계시입니까? 네가 항상 불가능을 느낄 때 그게 뭐가 됐든 계시다 이 말이죠. ‘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라는 것으로 뭔가 남아 있을 때 그게 바로 숨어있는 계시가 여러분들을 이미 허리케인처럼 토네이도처럼 감아쥔 겁니다. 그러니까 계시 없이는 도움 없이는 살아 본 적이 없어요. 문제는 그걸 포착하겠다고 나선 순간부터 그거는 내 가능성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계시 아닙니다. 그건 지 과시죠. 주님께서는 그런 계시를 준 적 없습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자기가 뭔가 잘 될 것 같아. 왜? 절을 하니까. 아버지, 어머니까지 심지어 형제까지 절을 하니까. 뭔가 ‘나는 뜨고 저들은 내 밑에 있을 것이다.’라고 그런 짐작을 하고 룰루랄라 했지요. 이게 ‘Boys, be ambitious’ 아닙니까? 비전이라고 꿈을 꾸라고. 꿈을 꾸어서 꾼 것은 가능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 아닙니다.
여러분 뜻대로 꿈을 꾸지 않을 때는 개꿈이라도 주의 계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꿈에 여러분 절벽에 떨어져 죽는 게 있거든 그거는 하나님 계시입니다. ‘웅이 아빠는 죽었고.’ 그게 어떻게 죽든 살든 그런 결과에 신경 쓰지 마시고, ‘세상이라는 것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를 깨닫는 자체, 기쁨, 그 기쁨이 하나님이 진짜 알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군요.’
특히 이 지혜에 대해서 요셉의 이런 오해, 자기가 높은 사람 되는 줄 알고 착각했던. 사실은 지혜가 요셉을 어디로 몰고 갑니까? 가장 낮은 곳으로, 가장 처참한 곳으로. 그래서 요셉으로 하여금 ‘나는 죽었다.’ 진짜 ‘웅이 아빠는 죽었다’ 하는 식으로 ‘나는 이제 죽었다’ 할 정도로 ‘나는 절망이다’ 사실은 요셉은 절망이었어요. 정말 요셉은 절망이었습니다.
같은 감옥소 동기생에게 꿈을 해몽했을 때는 어떤 희망을 건졌지요. 하지만 같이 꿈 해몽한 대로 한 사람은 승진했고, 한 사람은 사형 당하고 난 뒤에 승진했던 신하가 그만 승진하고 난 뒤에는 자기를 도와준 요셉을 어떻게 했습니까?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렸다’는 데는 보통 목사들이 환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들이 목회를 하면서 월급 적어서 가슴 아픈 게 아니에요. 교회 교인들 싸워서 가슴 아픈 게 아닙니다. 정말 복음을 아는 목사들 가장 가슴 찢어지는 것은 뭐냐 하면, 설교 듣고 난 뒤에 오 분 뒤에 다 잊어버린다는 것. 소귀에 경 읽기죠. 그것도 광우병 걸린 소에 경 읽기. 다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교인들, 누리꾼들은 반발하지요. 뭐냐 하면, ‘안 잊어버렸습니다. 다 압니다’ 하거든요. 그럴 때 목사들은 행동으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안다는 게 그 짓입니까? 교인들 하는 말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목사 하는 말이, ‘하루아침 같으면 말을 안 합니다. 벌써 삼 년째입니다.’ 하루아침 같으면 말을 안 해요. 마지막에 교인들 대듭니다. ‘니는 인간 됐나?’ 그럼 목사는 ‘막가자는 이야기입니까?’
요셉은 그 껍데기 같은 희망을 가졌어요. 왜? 자기한테 혜택을 입었잖아요.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사람이 무슨 양심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아직 철이 없는 거예요. 사람이 양심이 있고 신앙양심이 있다면 억울하게 옥에 갇힌 나를 빼내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있으면 어떻게 빼낼 노력을 해야 되는데 아예 잊어버렸어요. 아예 기억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어떤 단절, 왜 단절을 깔아두십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은 요셉에게 주어진 계시는 절대로 요셉의 힘으로 성취되는 법이 없다는 것. 요셉이 비록 계시 받은 자지만 계시 받은 자란 이유 때문에 계시 안 받은 자보다 계시 달성에 뭔가 약간의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 완전히 절단시킵니다. 잘라버립니다.
요셉을 살린 것은 역시 뭐였습니까? 꿈이었습니다. 바로가 궁전에 하루는 잠을 자다가 살찐 암소가 나오는데 그 뒤에 갑자기 흉악한 암소가 나와서 살찐 일곱 마리 암소를 다 잡아먹었어요. 그 다음에 연이어 꿈을 꾸는데 곡식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오는 갑자기 더운 바람 불면서 곡식이 다 타죽었어요.
그래서 목회하는 목사 입장에서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 교인들에게 제발 재수 없는 꿈을 꾸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잖아요.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내 기도 들어준다, 안 들어준다? 절대로 안 들어줘요. 참 그 은혜에 감사하죠. ‘주여, 저렇게 복음 모르는 사람에게 꿈으로도 계시하셔서 복음 좀 알게 하옵소서.’ 해도 안 들어줄 거죠?
그 꿈을 통해서 요셉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국무총리가 되어도 요셉은 여전히 옥에 갇힌 심정이 유지된 겁니다. 그래서. 꿈이 없었으면 ‘나는 한 때에 억울했지만 지금은 난 무시하던 국무총리다.’ 이래 나올 텐데 국무총리가 되어서 그 옥에 갇혔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절대로 나의 성실함이나 나의 정직함이 아니라는 것을 유지시킬 수 있는 그 방책, 그것이 바로 요셉은 국무총리 되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그 마음가짐, 그게 바로 요셉의 지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르르 쏟아지는 게 지혜가 아니고, 예수님처럼 ‘주여, 주의 뜻은 내가 죽는 것 맞지요’라고 자기가 대신 죽어야 되는 것을 계속해서 33년 평생 동안 유지시켜야 된다는 것,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마지막 골인지점까지 계속 그 식으로 쭉 가주는 것, 그게 하나님의 제대로 된 지혜에요.
그리고 경로가 ABC했잖아요. A에서 B, B에서 C, C에서 A로 간다고. 처음에 경로에다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고 이 계시를 받을 때 우쭐댈 수밖에 없지요. 나 계시 받았다. 잠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잠언 주석을 보세요. 박윤선이고, 모든 시중에 나와 있는 잠언 주석 보라고. 한번 보시면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출세합니다, 성공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책이에요. 자기를 부인하는 책이 아니고 모든 잠언주석이 자기를 높이는 책이에요.
제가 쓴 어떤 글에 앞으로 나올 책이지만 이래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돈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면, 그 기도의 응답여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은 돈의 굴레에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집착을 하게 됩니다. 돈 달라고 기도하면 그 돈을 주던, 안 주던 돈이라는 굴레에서 못 벗어나는 신세가 돼버려요. 그러니까 돈 달라는 말은 뭐냐? 자기에게 있는 돈을 크게 확대해 달라는 거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준 것은 뭐냐? 네 속에 없는 건데 그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것만 있어야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 속에 없는 것, 우리가 예상치도 못 했던 것, 우리가 뭘 해야 몰랐던 것, 우리가 뭘 기도할 줄 몰랐던 것, 우리가 뭘 질문해야 될지도 모르는 것. 우리는 질문조차 ‘하나님, 어떤 질문해야 됩니까?’ 조차도 몰라요. 그냥 하나님은 우릴 사용할 뿐입니다. 난데없이.
그런 주석들이 나왔다는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 교회를 말아먹겠다고 작정을 했어. 그래서 잠언서를 그런 주석 안 봐도 말이죠 주석 없이 잠언서를 보면, 사람들은 뭘 골라 보느냐 하면, 내가 어떠면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하는 처세술 관점에서 다 보게 돼요. 이 잠언서를. ‘성공하려면 이렇게 하는구나. 성공하려면 일곱 번 참아야 되는구나. 성공하려면 하나님께 다 맡겨야 되는구나.’ 항상 앞에는 내가 성공할, 내가 성공할 이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뒤에 꼬리가 달려있어요. 잠언에 어떤 구절을 하면 난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게 돼있는 겁니다. 그 경로는 난데없이 주어진 경로 아니에요. 이미 있는 경로에요. 가능성의 통로에요.
그래서 이렇게 해야 됩니다. 잠언서에 있는 모든 내용을 잠언서가 책이 있다면 여기서 우리가 잠언서 1장부터 쫙 훑어 들어가는 겁니다. 훑으면서 어떤 구절이 마음에 드는지 스스로 답을 해보는 거예요. 어떤 구절에 마음에 드는지 이유가 나올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내 속에 있는 괴물이 발각되는 순간입니다.
이 잠언서를 보면서 ‘나는 이 구절 참 좋더라.’ 뭐냐 하면, “부지런한 자는 부자가 될지어다.” ‘야, 이게 젤 좋더라. 부지런해야지.’ 이게 뭐냐 하면, 성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보는 이에 숨어있는 것이 발각되게 하는 효과, 이거 잠언의 효과입니다. 그렇게 한번 쭉 지나갔지요. 스캐너처럼 훑어지나가지요. 두 번째 쫙 지나가면 “부자 되려 하는 자는 속히 망한다” 이게 막 나와요.
뭔가 첫째 잠언을 자기 위주로 자기 이익 위주로 봤던 그것을 쳐버리고 모순된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뭔가 나를 밀어붙이는, ‘그래서야 되겠어? 너는 네 이익만 챙기는 거야. 이기주의야.’ 나무라는 구절이 눈에 띠어요. 그 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잠언을 처음에 보게 되면, ‘신난다. 이거는 불신자도 다 이해되겠다.’라는 그러한 느낌, 신앙하고 전혀 관계없네. 잠언에 보면 믿는다는 소린 하나도 없어요. 이건 행하면 뭘 준다니까 신나는 거예요.
행하면 뭐 준다니까 행했던 주체를 발동시키죠. 그러면 그 행해서 결과가 누구한테 돌아옵니까? 주체한테 돌아오죠. 내 주체가 나를 위해서 도움 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게 있지요. 두 번째는 그것이 잘못을 지적하지요. 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는? 그 첫 번째는 인간의 자기의 본색이 드러나고, 두 번째는 그것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세 번째는 뭐냐? 그러면 뭐냐? 잠언은 뭐냐? 그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확 훑어버리면 다 알게 돼요.
제가 이 수련회 준비하면서 잠언에서 뭘 봤느냐 하면, 미드라쉬라 해서 유대인들이 이 잠언을 해석이 책이 나옵니다. 그걸 읽어봤어요. 촘촘히 읽어봤어요. 유대인들은 잠언을 어떻게 보는가? 유대인들은 잠언 내부에 있는 갈등을 모순을 어떻게 하느냐?
지혜를 얻는 자는 오른손에 재물을 얻고, 왼손에는 장수를 얻는다. 분명히 우리가 땡길 만한 우리가 유혹될 만한 우리가 평소에 원했던 것을 채워주는 것처럼 되지만, 너는 그런 재물을 원치 말고 차라리 명예를 원하라. 이렇게 하다가 그 다음에 너의 모든 것을 주께 맡겨라. 너는 너 자신의 이익의 원하는 것은 악한 인간들이 하는 짓이다. 이래 나온다고.
그러니까 이런 것에 대해서 그야말로 어릴 때부터 구약성경을 신처럼 모시며 달달 외웠던 유대인들은 이 잠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제 삼의 모순된 것을 어떻게 모순을 풀었는가? 그들의 핵심은 이거였습니다. ‘토라’였습니다. 여기 나오는 모든 구절은 바로 토라에 대한 은유로 다 풀은 거예요.
네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기뻐하라. 그건 맛있는 음식이 토라에요.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체한다. 왜 그러냐? 토라공부도 갑자기 많이 하면 체한다. 전부다 해석하는 거예요. 왕을 대접하라. 그 왕은 왕이 아니라 토라를 가르치는 스승이 돼야 돼. 토라라는 것은 율법이에요, 법. 모든 구절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토라에다 적용시키면서 그 토라, 법 앞에서 인간은 한 없이 낮아질 때 비로소 잠언은 모순이 해결된다. 이런 식으로 풀어난 걸 봤어요. ‘아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일 만 했구나.’
그들이 뭘 보느냐 하면, 그 토라, 법이라는 것이 하나의 문자인데 그 문자가 어떻게 실체화되느냐에 대해서 그 사람들은 토라를 가르치는 선생님과 토라를 배우는 사람들이 인격화되어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원래 인간이다. 이래 봤어요.
그러니까 이 토라, 하나님의 법이 한 곳에 집중된다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죠. 모든 지혜는 어디서 나온다? 여호와, 주 여호와죠. 여호와께서 나오는데 여호와께서 나오긴 나왔어요. 돌아가는 게 어디로 돌아가느냐? 자기한테 돌아가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설마 말씀 줬는데 지킬 수 있다는 취지로 줬기 때문에 일반 이런 백정 같은 인간, 못 배운 인간은 모르고, 무식한 놈들은 모르고, 우리같이 토라 전문가, 토라 선생한테 와야 잠언의 내용을 알기 때문에 우리한테 한 수 배워야 된다. 이런 쪽으로 인간 쪽으로 다 돌아버렸어요.
그럴 때 이 말씀 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주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합니다. 뭐라고 했느냐? 지혜로운 자가 나오죠. 1번,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다. 2번,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3번, 토라는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이다. 4번, 불의한 자다. 몇 번입니까? 4번 아닙니까?
누가복음 16장 무슨 이야기인 줄 알아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에요. 횡령한 사람이에요. 회사에서 자기를 쫓아낼 기미가 보이니까 장부조작해서 횡령죄에 걸립니다. 장부조작해서 퇴직 값을 예비해서 혜택을 줘서 자기한테 부정적인 혜택이 돌아간 사람에게 갈라먹기 하겠다는 그러한 자기 대비, 자기 앞가림 대비하는 사람, 그 사람이 율법에 토라에 정통한 바리새인보다 이 시대에 더 지혜롭다는 겁니다.
그 시대, 예수님 시대가 어떤 시대냐 하면, 바로 이게 악한 시대거든요. 악하고 음란한 시대. 악한 세대에서 횡령죄를 한 사람이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너희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혜는 뭐냐? 중요해요. 첫째 시간에. 지혜가 뭐냐? 그 배경이 어떤 때 지혜가 등장하고 나타내느냐? 온통 악할 때 지혜가 자기 윤곽을 드러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지혜의 일점일획도 못 지키는 것이 완전히 그것이 노출될 때, 증명될 때, 확인될 때, 그때 지혜는 빼꼼이 얼굴을 내밉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무슨 이름으로? 이 캄캄한 어두운 세대에서 빛은 오직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어요.
잠언에서 복음 끄집어내고, 잠언에서 메시아 끄집어내고, 잠언에서 십자가 끄집어내는 방법을 잠언을 세 번씩 훑어나가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것도 세 번째 방법은 성령 받은 사람한테 한하는데 성령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은 저녁 때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2008-08-12 20:23:51 녹취: 한윤범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