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 ‘군사위 주석’ 넘기라는 시진핑, 거부하는 후진타오
‘황태자’가 돌아왔다. 중국의 차기 최고지도자 시진핑(習近平)은 이달 초부터 시작된 보름여의 ‘잠적’을 끝내고 다시 건재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건강이상설, 테러설, 사보타주(sabotage · 태업)설 등 그를 둘러싼 각종 ‘설(說)’은 여전하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부총편집을 지낸 중국 전문가 윌리 램(林和立)은 소식통을 인용해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중앙군사위 주석을 2~3년 더 유임하기로 결정한 뒤 보시라이(薄熙來)의 ‘반당 음모’를 이유로 류위안(劉源)·장하이양(張海陽) 등 두 태자당 장군의 중앙군사위 진입을 반대하자 시진핑이 ‘화를 내고’ 잠적했던 것” 이라고 주장했다. 건강이상설은 ‘핑계’에 불과하고 군 인사를 둘러싼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국의 권력투쟁은 군을 장악하기 위한 다툼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1927년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槍杆子裏面出政權)”고 했다. 1938년 마오는 “당이 총을 지휘한다. 총이 당을 지휘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당지휘창(黨指揮槍)’ 원칙을 세웠다. 이는 8260만 공산당원에게 금과옥조(金科玉條)다. 인민해방군은 국군(國軍)이 아니다. 정치를 우위에 두는 ‘공산당의 군대’, 이른바 ‘당군(黨軍)’이다. ‘태상왕’ 장쩌민(江澤民), ‘황제’ 후진타오, ‘황태자’ 시진핑은 지금 군을 놓고 다투고 있다. 왜 그럴까? 신중국 63년 역사 중 총이 당을 겨냥했던 빈번한 사례에 그 답이 있다.
친위 쿠데타에서 4인방 분쇄 궁정 쿠데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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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방도시보’의 2003년 3월 16일자 1면. 국가주석에 선출된 후진타오(오른쪽)가 장쩌민 중앙군사위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
| 66년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은 인민해방군의 정치 개입이었다. 주역은 당시 국방부장 린뱌오(林彪)였다. 그는 류샤오치(劉少奇) 당시 국가주석의 권력을 탈취했다. 형식은 그 해 8월 열린 공산당 제8기 11중전회(1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였지만 본질은 군부의 ‘쿠데타’였다
린뱌오는 회의에서 류샤오치를 몰락시키고 마오쩌둥에 이어 권력서열 2위에 올랐다. 린뱌오는 곧 수족을 동원해 허룽(賀龍)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의 약점을 캐내 마오 에게 보고했다. 허룽 역시 실각했다. 마오의 기획작품이었다. 마오가 66년 7월 8일 장칭(江靑)에게 보낸 편지는 그 증거다. 마오는 “천하대란(大亂)은 천하대치(大治)에 이르는 길이다. 7~8년이 지나면 또 한 차례 올 것” 이라며 “내 친구(린뱌오)의 말은 중앙이 발동하고 내가 동의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정변(政變) 문제를 말했다”고 했다. 마오가 린뱌오의 친위 쿠데타에 동의한 것이다. 5년 뒤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권좌까지 노렸다. 진짜 쿠데타는 실패했고, 린뱌오는 탈출하던 비행기가 추락해 숨졌다.
문화대혁명의 종지부도 군부가 찍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자 권력은 진공상태에 빠졌다. 후계자로 지목된 화궈펑(華國鋒)은 문혁 4인방인 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장칭(江靑)·야오원위안(姚文元)의 쿠데타 움직임을 포착했다. 화궈펑은 서둘러 예젠잉(葉劍英) 당시 국방부장 겸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최고지도부 경호를 맡은 왕둥싱(汪東興) 중앙경위국장과 선제공격에 나섰다. 4인방은 자체 무력이 있었다.
예젠잉은 유혈사태를 피하고 싶었다. 10월 6일 오후 8시 화궈펑이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정치국 상무회의를 소집했다. 의제는 마오쩌둥 선집 출판, 마오 주석기념당 건립 문제였다. 왕훙원과 장춘차오는 참석 자격이 있었고, 야오(姚)는 마오선집의 출판담당자라 출석이 자연스러웠다. 왕둥싱의 정예요원들이 회의장 안에 미리 잠복했다. 회의 직전 가장 먼저 들어오던 왕훙원이 체포됐다. 반항은 소용없었다. 대청에서 기다리던 화궈펑(華國鋒)은 “반당 · 반사회주의 죄로 체포한다” 며 죄상을 밝혔다. 뒤이어 들어오던 장춘차오도 같은 운명이었다. 야오원위안은 건물 앞에서 체포됐다. 장칭은 숙소에서 특수요원들에 의해 체포됐다. 4인방 체포에 걸린 시간은 35분. 한 발의 총소리도 없었다. 전광석화 같은 정변이었다.
같은 시간 예젠잉은 특수부대를 보내 신화사와 인민일보 등 중앙 언론사를 장악했다. 당시 4인방의 추종자들이 모두 체포될 때까지 언론은 어떤 뉴스도 내놓지 않았다. 그날 밤 10시 베이징 이화원(?和園) 인근 예젠잉 소유의 별장에서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화궈펑과 예젠잉은 정치국원과 후보위원들에게 4인방의 체포를 알렸다. 그들은 당중앙 제1부주석이던 화궈펑을 당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에 선출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4인방이 준비 중이던 상하이 민병조직의 쿠데타는 사전에 분쇄됐다. 당중앙은 10월 18일 4인방 체포를 공식 발표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는 철칙에 따라 화궈펑이 1인자 자리에 올랐다.
덩샤오핑의 집권과 천안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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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왼쪽)과 덩샤오핑. |
| 덩샤오핑(鄧小平)이 화궈펑(華國鋒)을 실각시키고 권좌에 오른 것도 ‘총구의 힘’이었다.
76년 10월 중국의 1인자가 된 화궈펑은 덩의 복귀를 즉각 승인하지 않았다. 77년 7월 열린 제10기 3중전회에서 비로소 덩샤오핑을 당중앙 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직무를 복귀시켰다. 화궈펑 · 예젠잉 · 덩샤오핑의 삼두체제가 시작됐다
79년 2월 17일 중국 · 베트남 전쟁이 발발 했다. 문혁으로 허약해진 중국군이 사실상 패배했다. 덩(鄧)은 중 · 월전쟁을 기회로 군부를 장악했다. 덩샤오핑은 80년 2월 제11기 5중전회에서 왕둥싱 당시 당 중앙 부주석을 비롯해 화궈펑 직계 세력을 사직시킨 뒤 자신의 직계인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앉혔다. 최고위직을 공격할 때 수족을 먼저 제거해 고립시킨 뒤 공격하던 마오의 방식과 같았다.
80년 5월 화궈펑은 요시프 티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동유럽으로 떠났다. 군부를 장악했던 덩은 이 틈을 이용해 화궈펑의 경호원을 교체했다. 귀국 후 화는 운신의 자유를 잃었다. 그해 연말 9차례에 걸쳐 열린 중앙공작회의에서 화궈펑 처리가 논의됐다. 화궈펑 비판이 이어지자 예젠잉은 자아비판에 나섰다.
“유비(劉備)는 임종 직전 제갈량(諸葛亮)에게 ‘만일 내 아들이 보필할 만하면 하고, 재주가 부족하면 그대가 취하시오’ 라고 말했다. … 마오 주석은 죽기 직전 나를 두 차례나 불러 지그시 쳐다봤다. 나는 화궈펑 동지를 ‘후주(後主)’로 대했다. 내 정력이 부족했지만 있는 힘을 다해 도왔다.”
화궈펑은 스스로 당주석직과 중앙군사위 주석직에서 사퇴하고 대신 예젠잉을 추천했다. 예젠잉은 은퇴를 고집했다. 결국 덩샤오핑이 중앙군사위 주석, 후야오방이 당주석을 맡았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예젠잉은 덩이 마오쩌둥처럼 지나친 권위주의자가 될 것을 우려했다” 며 “덩샤오핑의 권력을 제한하고 당내 민주를 고양하기 위해 화궈펑을 도왔다” 고 분석한다.
89년 6월 천안문 사건에도 쿠데타의 그림자가 보인다. 당시 대학생 시위를 둘러싸고 당 중앙은 리펑(李鵬) 총리를 필두로 하는 보수파와 자오쯔양 당서기를 포함한 개혁파로 분열됐다. 중앙군사위 주석이던 덩샤오핑은 “20만 명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20년간의 평화를 손에 넣자” 며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한 뒤 자오쯔양을 실각시켰다.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양중메이(楊中美)는 “천안문 사건은 쿠데타”라고 주장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중국공산당 규약에 따르면 총서기의 선출과 파면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권한이다. 89년 6월 덩샤오핑은 중앙위 회의 없이 비밀리에 정치국 상무위 회의만으로 자오쯔양 총서기를 퇴출시켰다. 당규 위반이다. 둘째, 군대 동원 절차에 하자가 있었다. 군 동원령 발포에 중앙군사위 회의가 없었고 명령서에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이던 자오쯔양의 사인이 없었다. 당시 38군 쉬친셴(徐勤先) 군단장은 합법적이지 않은 군령이라며 복종을 거부했다. 그는 항명죄로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천안문 사건 이후 군부에 의한 쿠데타 수준의 정치 개입은 없었다. 군부와 당 최고지도자의 갈등은 이어졌지만 총에 대한 당의 지배는 관철됐다. 89년 11월 천안문 사건을 수습한 덩샤오핑은 3세대 지도자 장쩌민에게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대신 양상쿤(楊尙昆) 중앙군위 제1부주석 겸 국가주석, 류화칭(劉華淸) 중앙군위 부주석, 양상쿤의 동생인 양바이빙(楊白氷) 중앙군위 비서장을 통해 장쩌민을 견제했다. 당시 중앙군사위는 이들 4명이 전부 였다. 장쩌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상쿤·양바이빙 형제는 장쩌민의 명령을 전달하지 않거나 부대 시찰에 동행하지 않는 방식으로 장쩌민을 무시했다.
92년 초 덩샤오핑이 남순 강화에 나서자 양씨 형제는 인근의 사령관들을 동원해 덩샤오핑을 수행했다. 마치 황제의 행차를 호위하던 모습을 연출했다. 군서열 1위인 장쩌민에 대한 도발이었다. 같은 해 9월 열린 제14차 당대회에서 양바이빙은 장성급 인사를 놓고 장쩌민과 충돌했다. 장쩌민은 중앙정치국이 결정하자고 주장했고, 양바이빙은 중앙군사위에서 논의하자고 맞섰다. 양바이빙이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철칙에 반기를 든 것이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에게 도움을 청했다. 덩은 양상쿤과 양바이빙을 모두 실각시켰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장은 대대적인 포상인사로 군의 환심을 샀다. 군부에 남아 있던 양씨 형제 지지 세력은 일거에 제거됐다. 장쩌민이 ‘총구’를 장악하는 데 3년이 걸린 셈이다.
후진타오와 군부 태자당의 경쟁
4세대 최고지도자 후진타오는 신중하고 단호한 리더십의 소유자다. 그가 군권을 장악한 과정은 험난했다. 90년대 중반 인민해방군은 산하에 15만 개 이상의 군사기업을 보유한 공룡 조직이었다. 인공위성에서 호텔업까지 손을 뻗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특권을 이용해 탈세와 밀수까지 자행했다. 98년 8월 장쩌민은 골칫덩어리인 군부의 비즈니스 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심했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중국 전문가 양중메이에 따르면 장은 군부의 돈줄을 끊는 악역을 후진타오에게 맡겼다. 군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후진타오는 당근과 채찍을 교묘히 병행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이 업적으로 후진타오는 이듬해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취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부는 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중국의 당·정·군·재계 중 태자당(고위간부 자제)의 비율이 가장 높은 조직은 군이다. 이유는 문혁이다. 60~70년대 문혁은 중국 경제를 마비시켰다. 변변한 일자리는 씨가 말랐다. 고위 간부들은 연줄을 동원해 자녀들을 군대에 입대시켰다. 이들은 진급을 거듭해 현재 군부 내 최대 계파를 이루고 있다. 후진타오의 정치 기반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이다. 군부 내 지지 세력이 취약하다.
그는 직계 세력을 키워 태자당과 겨뤘다. 과거 서부 변방에서 근무할 당시 스킨십이 있었던 란저우(蘭州) 군구 출신의 ‘서북벌(西北閥)’ 과 2004년 중앙군사위 주석에 취임한 뒤 소장파 장교 50명을 엄선해 편성한 ‘장군반’ 이 양대 직계 세력이다. 올 초 술에 취해 후진타오에게 언성을 높였다는 설이 돌았던 장친성(章泌生) 부총참모장은 ‘장군반’의 반장격이다. 전문가들은 ‘후진타오 키즈’들이 올가을 제18차 당대회에서 중앙군사위 다수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올 봄 보시라이 사건이 군부로 번졌던 이유도 태자당 세력과의 연계다. 혁명 1세대인 보이보(薄一波)의 아들인 보시라이는 호형호제하는 장군이 많았다. 장전(張震) 전 중앙군위 부주석의 아들로 2009년까지 청두(成都) 군구 정치위원을 지낸 장하이양 제2포병 정치위원, 류샤오치의 아들인 류위안 총후근부 정치위원은 대표적인 친보시라이 인물이다.
보시라이의 행보 또한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후 주석이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하와이를 방문했던 지난해 11월 10일 충칭에서 청두군구 국방동원위원회 실전훈련이 열렸다. 보시라이는 량광례(梁光烈) 국방부장과 훈련 을 참관했다. 위험한 행동이었다. 올 2월 왕리쥔(王立軍)이 미국영사관에 진입한 이틀 뒤 보시라이는 부친이 창설한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의 제14집단군 부대를 찾았다. 불온한 시도를 짐작하게 하는 행보였다.
올가을 18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는 총서기직을 넘긴다. 관심사는 그가 중앙군사위 주석직까지 이양할지 여부다. 아직은 후진타오의 유임과 이양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 시진핑의 권력은 군부를 장악할 때 완성된다. 2004년 장쩌민이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후진타오에게 넘기기 전까지 중국의 태양은 두 개였다. 사실상의 1인자는 장쩌민이었다.
천안문 사건 이후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수준은 낮아졌다. 겉으로 당은 총을 지휘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총과 당은 끊임없이 갈등해왔다. 양중메이는 “2013년 중국에서 친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하기도 한다. 군부가 장막을 걷고 무대 전면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마오의 ‘7년 동란설’ 이 재현될지 중국은 지금도 군의 문민통제라는 엄중한 과제와 맞서고 있다.
- 중앙일보 신경진 기자 2012.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