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양의 가장 우수한 근대 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땅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다.
140여 년 전 국토의 얕고 깊은 곳까지 속속히 알고자 했던 한 사내의 꿈!~ 그것은 한 장의 지도로 남겨졌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해 알고자 노력해왔고 이것은 지도라는 형식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 같은 노력을 계속 해왔던 것일까요?
지도는 단순히 그 땅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 속에 담고 있는 각가지 정보들을 종합하고 활용하기 위한 일종의 그릇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도가 얼마나 활용하기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알아보기 어렵다면 그 속에 담겨진 정보가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활용하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 최고의 고지도로 꼽히는 대동여지도는 매우 특별한 지도입니다. 이전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자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도 사용에 편의만을 사용한 게 아니라 정보의 체계화를 통한 정보의 네트워크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자, 지도를 통한 네트워크의 완성! 오늘 이 시간에는 그동안 묻혀 있었던 대동여지도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지도역사>라고 하는 이 책은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전 세계 지도의 발달과정을 집대성 해놓은 현존 최고의 지도역사서입니다.
1980년대부터 발간하기 시작해서 모두 8권의 시리즈가 나올 예정인데요, 바로 이 책 속에 대동여지도가 상당히 많은 페이지에 걸쳐 나오고 있습니다.
동양의 전통지도들 중에서 가장 우수할 뿐아니라 또 목판본 지도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면서도 품격을 갖춘 지도라고 격찬을 하고 있는데요, 여러분들 중에서 대동여지도의 이름을 모르는 분은 거의 없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동여지도를 직접 보신 분 또한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도대체 이 대동여지도의 어떤 부분 때문에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동안 이름만 들어온 대동여지도의 실제 모습부터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대동여지도는 모두 십여 권. 그 중에서도 성신여대 지도본이 보물 8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태가 가장 양호할 뿐만 아니라 지도에 색을 칠한 것이 조화를 이루어 예술적 가치도 높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철종12년인 1861년,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 일이다. 그런데 이 지도는 우리가 접해온 한 장짜리 지도와는 달리 책의 형태로 되어 있다.
가로 20센치미터, 세로 30센치미터의 종이를 옆으로 길게 이어 붙여 놓았는데 이 같은 책이 22권 모여 하나의 지도를 이루게 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전국을 남북으로 29층, 동서 19판으로 나눠 만든 분첩 절첩식 지도입니다. 여기서 분첩이라고 하는 것은 남북 29층 중에 하나의 층을 하나의 첩으로 만들었다는 뜻이고 절첩이라고 했을 때 동서 19판을 접어서 아코디언식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분첩절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굉장히 큰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다니기에 너무 편리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 양보경 교수, 성신여대 지리학과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지도인데 만약 이것을 한 장으로 만들었다면 그 크기가 워낙 커서 사용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때문에 떼어놓으면 분리도가 되지만 합하면 전도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동여지도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진본과 똑같이 만든 영인본을 가지고 확인해보기로 했다. 바닥에 펼쳐진 지도들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한반도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22권의 지도책을 모두 붙이자 엄청난 크기의 전국지도가 완성되었다.
"스물두 층으로 된 지도를 남북으로 펼쳐 이어붙이면 남북 6.6미터, 동서 4.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도가 되어서 3층 정도의 벽이 있어야 걸 수 있습니다.
또한 대동여지도는 목판지도로써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지도로 유명합니다. 지도가 커짐에 따라서 그 안에 담긴 내용 또한 매우 섬세하고 풍부하고 그 어느 지도보다도 정확한 것이 특징입니다." - 양보경 교수, 성신여대 지리학과
이 거대한 지도 속엔 과연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맥이다. 산봉우리를 각각 떼어서 그리지 않고 줄기와 줄기를 이어서 마치 하나의 구조물처럼 표현하고 있다.
땅을 살아있는 사람의 몸과 동일시 했던 당시 사람들의 국토관이 반영된 결과다. 산맥은 국토의 골격을 형성하는 뼈대이며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혈맥으로 봤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백두대간의 개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인데, 백두산에서 시작된 국토의 큰 흐름이 남북을 관통해 마치 척추처럼 한반도를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동여지도 속에 나타난 산봉우리는 모두 3천여 개. 전체를 하나로 표현하면서도 각각의 산들이 가진 개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
< 백 두 산 >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백두산은 실제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그렸다. '백두(白頭)'라는 것을 연상시키려는 듯 흰봉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함경북도 명주군에 위치한 칠보산. 마치 보석을 박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 금 강 산 >
금강산은 무수한 봉우리를 표현해 일만이천봉의 이미지를 살리고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오대산.
서울의 삼각산 역시 세 개의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공주 계룡산은 마치 용이 드러누운 모습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살아있는 땅의 이미지를 지도 속에 옮겨놓은 것이다.
대동여지도에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도로에 대한 표현이다.
모든 도로가 고속도로를 연상시키듯 직선으로 그어져 있는데 이것은 실제와는 크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사실과 다르게 도로를 왜곡해서 그려넣은 것은 물길과의 구분을 위해서다.
도로는 직선으로, 물길은 곡선으로 표현함으로써,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하는 목판인쇄의 단점을 보완하려 한 것이다.
이전 지도들과 대동여지도를 구분 지어주는 가장 큰 특징은 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모두 스물두 개의 기호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처럼 사용되지만 우리나라 지도에선 대동여지도가 최초였다.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면 영아(營衙)를 표시하는 지도는 병영 등의 군영을, 읍치(邑治)는 오늘날의 시청이나 군청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군사지역을 나타내는 진보(鎭堡)나 역참(驛站), 봉수(烽燧) 등 다양한 기호가 사용되었는데 글자수를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지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도가 현대화 될수록, 근대화 될수록 글씨로 쓰는 것이 아니라 기호화해서 간략하고 명료하게 하는 효과를 높이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에서는 현대식 지도처럼 표로, 또는 기호로 축약해서 현상을 표현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 지도의 선구라 할 수 있습니다." - 양보경 교수
140여 년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현대 지도 못지 않은 아이디어가 활용된 지도. 대동여지도는 크기 뿐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당대 최고 지도였다.
2. 대동여지도, 조선의 물류 네트워크를 형성하다!~
" 먼저 이 지도의 크기에 압도당하는데요, 사진으로 볼 때는 이렇게 크리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 복잡해서 요즘 지도들과 상당히 다를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차근차근 들여다보니까 오히려 더 보기 쉬운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색으로 나타내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산맥, 도로, 물길의 구분이 확실하니까 말입니다.
모두 펼쳤을 때는 엄청나게 큰 지도지만 한 줄 한 줄 이렇게 떼어서 접으면 작아지니 가지고 다니기에 매우 좋았을 것 같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필요한 부분만 가지고 다니기만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휴대성이 대동여지도가 가지고 있는 큰 장점 중에 하나였을텐데요,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여행을 하거나 물건을 운반할 때 이 지도를 가지고 다니면서 활용을 하려면 길이나 운송로에 대한 정보가 정확해야 할 것입니다.
대동여지도! 얼마나 정확하고 실용적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예나 지금이나 지도를 가장 많이 볼 때는 길을 찾을 때다. 고지도를 연구하는 이상태 선생님과 함께 대동여지도의 도로망을 확인해봤다.
직선으로 표시된 도로는 지도에선 짧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라 훨씬 더 멀 수도 있다.
도로의 길이만 가지고는 실제의 길이를 가름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엔 이 같은 단점을 보완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도로 위 십 리마다 점을 하나씩 찍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방점들은 길이가 일정하지 않다. 산악지역의 경우엔 주로 조밀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조밀한 곳은 1.5센치미터로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넓은 곳은 얼마나 될까? 2.5센치미터. 주로 평야지대에서 확인된다.
"산악지대는 조밀하고, 평지에는 좀 넓게 찍혀 있는데, 그건 산악지대는 고개 같은 곳이 있기 때문에 같은 십 리지만 그걸 평면으로 나타냈을 경우에는 구분이 안 되는 거죠.
산악지대는 조밀하게 찍음으로써 여기에는 고개도 있고 그렇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고
평지는 넓게 방점을 찍음으로써 십 리가 평탄한 길이다 이렇게 표시해주는 거죠.
그래서 평면지도면서 입체감을 느낄 수 있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보다 편리할 수 있게 제작된 거죠." - 이상태 자료조사실장, 국사편찬위원회
방점의 진정한 가치는 두 지점간의 거리를 파악하는데만 그치지 않는다.
전국 어디에서나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거리와 일정을 예상함으로써 전국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모든 도로망이 서울을 중심으로 표기되던 이전 지도에선 발견할 수 없는 획기적인 변화다.
경기도 38관도.
"1일이라고 써 있는데 이것은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하루 걸린다는 뜻이구요. 안성은 2일이라고 서울에서 안성까지 2일 걸린다는 겁니다."
조금 더 후대에 만들어진 지도에선 이전보단 조금 더 발전된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기전도.
이 지도는 옆에 따로 표를 만들어서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자리에 두 지점간의 거리를 표시해 두었다. 이 표를 활용할 경우 거리는 알 수 있지만 여전히 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동여지도의 표기 방법이 왜 탁월한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이전의 지도들은 서울까지 얼마라고 적어놨거든요. 하루 거리, 반일 거리, 그런데 대동여지도는 눈금만 보면 10리다, 80리다 금방 알 수 있도록 만든 거죠. 사용하기 굉장히 편리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거죠." - 이상태 사료조사실장
조선시대, 물길은 도로 못지않게 중요한 교통로였다.
때문에 대동여지도에도 물길이 매우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한 가지 눈길을 끌고 있는 게 있다.
물줄기가 어떤 곳에서는 한 줄기로, 어떤 곳에서는 두 줄기로 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쌍선과 단선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 마을 옆을 흐르는 강물은 낙동강의 본류다. 상류임에도 불구하고 강폭이 넓어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건널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점을 기준으로 상류쪽은 강의 깊이가 급격히 얕아져서 돛단배는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곡물을 실어나르던 조운선들의 종착지가 이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 남쪽의 곡물을 바다를 통해 가지고 서울로 가던 것을 해난사고가 많이 나기 때문에 낙동강 배편을 이용해서 우리 고장 상주까지 실어 올라왔습니다.
저기까지 이르러서는 저 다리를 건너서 이쪽 앞산을 너머 큰 길과 큰 내를 따라 계속 가다보면 문경새재가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충주까지 가서는 배편으로 한성으로 수송이 되었습니다." - 고재하, 향토 사학자
결국 대동여지도에서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돛단배를 이용할 수 있는 구역인 동시에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야만 하는 구역을 나타낸 것인데, 여기서 다시 한양을 가려면 육로로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다는 것이다.
나루터에서 멀지않은 경북 문경시 유곡동. 도로로 변해버린 이곳은 조선시대 문경새재를 오가던 여행자들에게 말을 제공하거나 숙소를 알선하던 역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공덕비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대동여지도엔 유곡역의 위치도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때문에 대동여지도만 들여다보면 조선시대 서울에서 부산까지 물류운송체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곡물을 싣고 동래에서 출발한 조운선은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게 된다. 물줄기가 단선으로 바뀌는 문경에 다다르면 유곡역에서 교통편을 마련하고 육로를 따라 문경새재를 넘는다. 다시 충추에서 배를 갈아타면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곧장 한양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대동여지도엔 당시의 교통, 물류 정보가 완벽하게 담겨 있어 매우 실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즘 지도들과 비교할 때 대동여지도의 정확도는 어느 정도일까?
대동여지도를 현대지도와 동일한 크기로 축소해서 그 외곽선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남해안과 서해안 지방에서는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북부지역으로 가면서 오차가 발생했는데 주로 산악지형에선 실제보다 조금 더 넓게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국립지리원의 100만 분의 1로 축소해서 해안선을 비교해 본 결과 중부와 남부지방쪽은 거의 일치합니다.
한쪽에선 조금 과정되었지만 이것은 고지도로 봐서는 상당히 정확한 지도라고 생각이 됩니다." - 최선웅, 지도 전문 제작자
인공위성에서 찍은 서울의 모습이다. 하천 매립 등으로 일부 지형이 변했다는 것을 감안해도 대동여지도의 정확도는 140여 년 전에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정확하면서도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이 같은 특징 때문에 대동여지도는 당시 조선의 물류 네트워크를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불태워졌는가?...
"그러니까 지금 제 앞으로 흘려가는 곡선이 물길, 즉 강이구요, 또 도로들은 거미줄처럼 아주 조밀하게 그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색을 칠해 놓으니까 뚜렷하게 구별이 되죠?
그럼 제가 개성에서 파주까지의 거리를 한 번 가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개성에서 파주까지 이렇게 방점이 일곱 개 찍혀 있으니까 거리는 70미터.
그리고 이렇게 길을 가다보면 임진강을 만나게 됩니다. 물길은 이렇게 쌍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니까 여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건너야겠군요.
도로의 방점이나 물길, 이렇게 몇 가지만 이해한다면 저 같이 지도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대동여지도를 사용하기에 힘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요즘 사람들이 컴퓨터를 잘 몰라도 인터넷을 통해서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듯이 당시 사람들은 이 지도를 통해서 교통정보나 운송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대동여지도는 국토 전체의 도로와 물길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함으로써 당시 조선의 물류 네트워크를 한 장의 지도로 완성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말 지도를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할 줄 알았던 김정호.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오가는 차량들로 붐비는 중림동 로타리. 몇 해 전 이곳에 김정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고산자 김정호. 이곳에 비석을 세운 이유는 지금까지 밝혀진 김정호에 대한 유일한 단서로 그가 이 일대에서 거주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지금부터 150년 전 인물입니다. 그분의 출생이라든지 생몰 연대에 대해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일제 때 고산자 선생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한 결과 이 중림동 일대에 거주했던 것으로 밝혀졌던 바 있습니다." - 박경룡, 역사문화연구소장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정호에 대해서는 지도 제작자였다는 사실외엔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 때문에 그를 둘러싼 과장된 이야기들이 진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당대 김정호에 대해 적은 유일한 기록은 <이향견문록(里鄕見門錄)>이란 책이다. 이 책엔 김정호가 만든 지도가 매우 훌륭했다는 매우 간단한 내용만 적혀 있다.
다만 중인 이하 사람들만 기록한 이 책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김정호의 신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중인이나 일반 평민들 중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없어서 잊혀지는 걸 안타까워 하면서 이 책을 만들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김정호 선생도 양반 신분은 아니지 않겠나 그렇게 짐작이 됩니다." - 이상태 사료조사실장
김정호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제 때 간행된 <조선어독본(1934년)>을 통해서였다.
이 책엔 김정호가 나라에 정확한 지도가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혼자서 백두산을 여덟 차례나 오르고 전국을 수없이 답사한 결과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대원군에게 가져갔지만 지도가 너무 상세해서 국가의 기밀이 새어나갈까 염려해서 대원군에 의해 옥에 갇혔고 결국 옥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정호가 평생에 걸쳐 만든 대동여지도는 모두 압수되어 모두 불태워졌다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90년대 초반까지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지난 90년대초 국립중앙박물관 지하수장고에서 여러 장의 목판이 발견되면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대동여지도'라는 글자가 선명한 목판본을 두고 정밀 조사가 실시되었다.
수장고에서 발견된 목판은 모두 11매. 하나의 목판엔 앞과 뒤, 각각 2매씩 총 4개의 면이 새겨져 있다. 확인 결과 이 목판은 대동여지도 인쇄본과 완벽하게 일치되는 걸로 판명되었다.
"저희들이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는 흥선대원군이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불태웠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저희 박물관에 현존하는 11장의 목판본을 확인 결과, 모두 김정호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김정호가 옥사했고, 김정호가 판각한 목판이 불태워졌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 오상학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목판의 존재는 대동여지도가 압수, 소각된 적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또한 김정호의 옥사설 또한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는 단서다.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책에선 김정호의 죽음을 '몰(沒)'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약 옥사를 했다면 '물고(物故)'라고 적어야 옳다.
또한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대동여지도를 한 질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김정호가 처벌을 받았다면 결코 적지 않았을 내용이다.
결국 조선어독본은 대원군을 우매한 지도자로 묘사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려 했던 일본의 역사왜곡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김정호의 작품은 대동여지도 하나만이 아니다.
김정호가 만든 수선전도는 역시 목판으로 만든 서울지도인데 현존하는 가장 큰 목판지도일 뿐 아니라 서울지도 중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대동여지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지리지의 편찬이다.
지리지는 국토의 정보를 집대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인데 김정호는 일생 동안 여도비지, 대동지지, 동여도지 등 세 종류의 지리지를 만들었다.
그는 지도와 지리지를 상호 보완적으로 보았는데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야만 국토의 지리 정보가 집대성 되리라 보았던 것이다.
"김정호는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선의 지도 제작의 전통, 그리고 지리지 제작의 전통, 더우기 실학적 제작의 전통을 모두 집대성 한 종합적 지리학자였다 말할 수 있습니다." - 양보경 교수
살아 생전 김정호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평생을 바쳐 완성한 지도와 지리지는 국토와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과 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김정호를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4.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기까지!~
"고산자 김정호는 평생을 지도와 지리지 제작에 열중했을 뿐 자신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지도와 지리지들은 김정호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리학자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정호는 어떻게 이런 위업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요?
일제 때 만들어진 조선어독본의 말처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전국을 돌아다니고 정말로 백두산을 일곱 번 오르내리며 이 지도를 제작했을까요?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 김정호의 지도 제작 과정을 추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우리나라 전통 지리와 천문학에 관한 유물들이 한 자리에 모인 전시회장.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들도 대거 선보였는데 대동여지도 이전에 지도들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가름해볼 수 있다.
<여지전도(1824년)>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여지전도(1824년) 대동여지도보다 40여 년 앞섰을 뿐인데도 지도의 정확성은 매우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글씨는 지도라기보다 지리지를 연상시킨다.
<곤여전도(1860년)>
대동여지도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곤여전도(1860년)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주며 이 지도 속에서도 한반도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현대 지도 제작 과정을 통해 확인해보기로 했다.
측량을 위해 먼저 GPS 장비를 설치했다. 인공위성을 통해 이 지역의 경, 위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현재 전국에 측량 기준점들이 정해져 있는데 이것은 측정할 때마다 생길 수 있는 오차를 줄이기 위한 조치다.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요?) 예. 지금 여기를 보시면 현재 37도 16분 43.51초라는 위도가 나타났구요, 경도는 127도 03분 586초가 나타났습니다. 지도 제작을 위해선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입니다. 만약에 이런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지도의 정확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 안기덕, 국립지리원 항공측량과
국립지리원. 각 지점에서 산출한 데이터를 종합하면 지점과 지점간의 거리, 경, 위도상에서 정확한 위치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한 현재까지도 지도 제작의 상당 부분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 지명이나 경계 등을 확인하는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엔 지도 제작에 인공위성이나 항공사진을 이용함으로써 오차가 생길 가능성이 더욱 줄어들었다.
"예전에 지도 제작 방식은 직접 필드에 나가서 거리를 재고 각을 재는 평판측량방식에 의해서 지도를 제작했습니다만,
현재 지도 제작은 항공사진, 인공위성에 의해서 모든 지형, 지물을 취득하고 지명과 경계를 준수하여서 평면상에 표시하는 방식으로 지도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 박범식 시설서기관, 국립지리원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지도가 제작된 것은 일제가 토지측량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렇다면 그것 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실측 자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단서를 찾던 중 김정호의 지리서 속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정호가 쓴 첫번째 지리지인 <여도비지>는 도별로 지역을 나눠놓은 일종의 군현지리지인데 친구였던 최성한과 함께 지은 책이다.
이 여도비지 속에 매 지역마다 그 지방의 경위도를 기록한 표가 들어있다. 여기에 적혀 있는 경위도는 북극 고도를 기준으로 측정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우리나라에 독자적인 경위도 기준표가 있었고 실제 지도 제작에도 활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김정호가 직접 기록했던 것일까?
"그 당시의 측량수준이라든지 기술로써는 혼자서 그 많은 자료를 측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더우기 여도비지 속에 보면, 정조 15년에 신하들에 명을 해서 팔도 관찰사령의 경위도를 작성을 하고, 서울 경위도 좌표를 측량하게 했고, 그것을 비변사에 있는 여지도에다가 요즘 말로 업데이트 시킨 것까지 기록한 걸 본다면
김정호 선생은 그 이전에 있었던 데이타 하고 자신이 측량한 데이타 하고 종합해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 김상수 박사, 인하대 지리정보공학과
김정호의 또 다른 지리지에도 이와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정조 15년 8도 관찰사영의 북극고도와 편동서도를 측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때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측량을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한 결과 세종 23년에 이미 측량을 시작했고 전국 도로 30리 마다 토석(土石)을 세우게 했다고 한다.
또한 거리 측정을 위해 기리고차라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이 기구는 스스로 북을 치고 종을 울리는 반자동 거리측정기구였다.
이 놀라운 거리측정 기구에 대한 이야기는 홍대용이 쓴 담헌서(湛軒書)속에 그 측정 원리를 짐작케 하는 구절이 있다.
기록에 따라 복원해보면 기리고차의 모습은 마차와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 구조는 톱니바퀴가 맞물러 돌아가는 상당히 복잡한 형태다.
수레가 반 리를 가면 종이 한 번 울리고 1리를 갔을 때는 여러 번 울리게 했다.
사람은 수레 위에 앉아 소리를 기록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북소리는 오 리에서 한 번, 십 리에선 여러 번 울렸다고 한다.
"세종 말에는 반자동 거리측정 기계인 기리고차를 만들어서 전 국토를 측정을 했는데 당시에 줄자에 비해서 기리고차를 사용을 하면 거리 오차가 거의 없었습니다." - 이종호 박사, 과학 저술가
조선시대 궁궐의 모습을 그려놓은 동궐도. 당시 궁궐 안 설치되었던 천문관측기구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경위도 측정이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경위도를 측정한 가장 큰 이유는 날씨를 측정해서 농사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측정된 기록은 어떻게든 사용되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 간의와 같은 것을 그 이후로도 사용하였을 것이고 후대로 가면 적도의라든가 간평의라든가, 또 그것보다 사용이 간편한 상한의와 같은 기구를 이용해 측정을 하였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 문중양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미 측정을 해놓은 기록이 있다면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기 위해서 매번 측정을 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김정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동지지 속에 자신이 참고한 저서를 밝혀 놓았는데 모두 65종으로 고금의 지리학 서적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것은 김정호가 정통지리학을 계승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토대에 자신의 노력을 더해서 1861년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던 김정호.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과 1864년, 두 차례 간행되었는데 이 두 시기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이 지도는 산맥을 새로 삽입했다. 지명이 새로 추가된 경우도 있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도 십여 군데가 넘는데 대동여지도의 수정이 목판 작업임을 감안을 한다면 이것은 간단치만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완벽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김정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김정호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 현재 진행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19세기 이양선 출몰!~ 김정호의 꿈!~대동여지도를 통한 부국강병!~
"결국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조선의 지리학의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지리학의 성과를 계승, 집대성하고 다시 거기에 지도표나 방점과 같은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집어넣어 만든 것이 바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정호는 왜 자신의 평생을 바쳐 이와 같은 지도를 만들었던 것일까요?
김정호가 살았던 시기는 실학이 융성하고 또 상공업이 발달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비해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해졌고 또 지도의 필요성도 커졌을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김정호가 당시 사람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 대량으로 보급하기 위해 목판 지도까지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을 해왔습니다. 실제로 대동여지도는 당시 사람들이 활용하기 더 없이 편리한 지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제 활동을 하기위해 만든 지도라면 봉수라든가 군사시설 같은 것을 굳이 표시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이런 시설을 아주 자세하게 표시해놓고 있습니다.
실제 일반 사람들의 생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런 군사시설을 표시해 놓은 것에는 필시 또 다른 이유가 숨어있는 게 아닐까요?"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 화도진 공원.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맺어진 강화 조약이 바로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강화 조약이라고 하지만 열강들의 무력 앞에 어쩔 수 없이 개방을 해야 했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측 대표로 참석한 이는 전권대사 신헌(1811~1884).
대원군 시절 대표적인 무인이었던 그는 누구보다도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한 인물이었다. 신헌은 자신의 문집 <금당초고> 중에서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로써는 국가 일급 기밀 서류에 속하는 비변사나 규장각 소장 지도들도 모두 참고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정호가 당대 최고의 지도들을 볼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영남대학교 박물관.
그렇다면 당시 군사 지도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18세기 관서청북전도>
18세기 만들어진 관서청북전도는 당시 청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지형을 그려놓은 관방지도다. 이 지역의 지형, 성곽, 도로 등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19세기 정방산성도. 역시 이 지역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해 만들어진 군사지도다.
성벽과 진, 보 등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우물과 창고까지 표현해 전쟁시 실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전에 관방지도라는 것들은 관방시설에 대한 정확한 표시였다면,
대동여지도는 전국적인 대비를 할 수 있도록 성이 있는가 없는가, 그 다음에 도로가 어느 방향으로 나 있는가, 그래서 중앙에서 볼 때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방어를 용이하게 하게 되고,
어떤 개별 작전보다는 전체적인 관방계획을 세우거나 전체 전략을 세우는데 굉장히 도움이 되는 지도입니다." - 강석화 교수, 인천교육대 사회교육과
대동여지도는 특정 지역에 치우침이 없이 전국을 동일하게 표시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
봉수체계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전국의 봉수표시를 모두 연결하면 된다. 이것만으로도 한 장의 훌륭한 봉수도가 완성되는 셈인데 역참이나 창고, 진, 보 등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전국지도지만 개별지역에 대한 정확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울의 외곽 방어를 담당하는 강화도를 살펴보면 먼저 성곽의 위치가 꼼꼼하게 표시되어 있다.
강화도에 주둔하는 군대의 위치가 한 눈에 들어오고 봉수나 창고 등 각종 군사시설에 대한 파악도 손쉽다.
이것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군사지도로 활용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동여지도가 갖는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정확성입니다.
어느 지도보다도 정확한 방위, 정확한 거리, 관방시설이나 도로, 수로, 이런 것들이 기호화 되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되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군사지도로써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죠." - 강석화 교수
대동여지도의 군사지도로써 활용가치는 이미 입증된 바 있다.
1925년 10월 8일 동아일보에 실린 김정호에 대한 기사를 보면 청일전쟁 당시 청일 양국 군대가 모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작전 지도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지리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조차도 대동여지도를 이용해 군사작전을 실시하는 게 어렵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상세한 지도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대동여지도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지도도 그 중 하나인데 서해안과 한강 주변을 표시한 것이다. 서울까지 배를 이용해 들어올 경우에 대비해 한강까지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근대 측량기법으로 만든 정밀한 지도를 가졌음에도 대동여지도를 활용한 것은 이 지도가 현대지도 못지않게 편리하고 정확했다는 것이다.
그 누구봐도, 그 어디서 봐도 똑같은 정보를 갖도록 의도했던 김정호의 생각 속에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의 공유라는 현대적인 사고가 녹아있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어디에서 누가 봐도 똑같은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나의 시점을 적용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볼 때 현재 있는 사람하고 군인들을 좀 멀리에서 지휘하고 있는 사람하고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게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강석화 교수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만든 시기는 이양선과 외국 함대의 출몰이 잦아지고 있던 시기였다.
지도와 지리지 편찬 과정에 군사적 활용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당시로선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저술인 대동지지 속에 유독 군사 용어가 많았던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전고(典故)이란 항목인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이 같은 항목을 통해 국방을 중시했던 김정호의 지리적 사고를 읽을 수 있다.
"대동지지에는 이전에 어떤 책에도 없었던 '전고'라는 항목이 아주 비중있게 다뤄져 있습니다.
이 전고(典故)라는 항목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각 지방에서 일어났던 전투나 전쟁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쭉 정리해놓은 것입니다.
그 밖에 성곽이나 목장, 군사적인 시설들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김정호는 당시 외세가 밀려오는 정세에 국가적인 필요,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가져야 할 지식과 인식을 지도와 지리지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했다고 봅니다." - 양보경 교수
김정호가 지도를 만든 궁극적인 목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대동여지도 첫머리에 실린 지도유설이다.
그의 뜻은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지도로써 적을 막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전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그래서 무모하게까지 여겨지는 한 사내의 꿈에서 비롯되었다.
국토 전부를 지도상에 네트워크로 연결함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꿈은 지금 우리 앞에 6.6미터의 초대형 지도로 남겨졌다.
"세계 역사상 길이 빛날 마지막 고지도 대동여지도. 140여 년 전 미천한 한 사내가 평생에 걸쳐 만든 집념의 프로젝트였습니다.
비록 이 지도가 만들어진 뒤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일제 강점이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맞이함으로써
지도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김정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는 한 개인의 힘을 통해 당대 최고의 지도와 지리지를 편찬하고 이를 통해 19세기 우리나라 국토 정보를 체계화하고 집대성 해냈습니다.
이렇게 볼 때 6.6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지도 속에 담긴 것은 국토 정보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전 방면에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자 했던 선각자 김정호의 시대정신인 것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보고(추운 날씨에 건강하세요!~~)
|
출처: 열기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