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 찾아 삼만리 / 2012-11-23(금)~24(토)
경북 안동이 고향인 제이(J)는 초등학교 4학년(1967년) 어느 날 우리 동네에 불쑥 나타났다. 부농은 아니었지만 중농 이상의 집안으로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에 5남매 중 막내를 제외한 2남 2녀가 서울로 유학을 온 것이었다.
강한 인상에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던 제이, 경상도 스타일 무뚝뚝함도 그대로였기에 오다가다 마추쳐도 우리 서로 모르는 척 스쳐 지나쳤다. 다른 또래의 친구들 또한 꺼리기는 마찬가지여서 제이와 함께하는 친구가 없는 외톨이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나와 한 반이 되어 알고보니 인정 많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절대 양심이었다. 호감이 가고 한동네 한 반이라 자연스럽게 등하교를 함께 하면서 서로 죽이 딱딱 맞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중학교 진학을 하고 나는 운동(유도 학교 대표선수)에 전념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내 인생의 모든 꿈이었던 유도를 포기해야만 했다. 왜 그런지 중 1때와 별다른 성장이 없는 작은 체구에 체중 미달이라 체육 특기생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른 후유증…. 운동을 한답시고 공부를 등한시 한 나, 일찌감치 인생의 쓴맛을 통감하며 내가 원하는 공업계 고등학교를 꿈꾸며 재수를 결정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찢어지게 가난해 이집 저집 옮겨 다녀야만 했던 산동네 단칸 전세방의 현실에 인문계는 사치라 생각했던 나, 그 놈의 돈, 돈, 하루 빨리 쩐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제이는 약수동 또래 모든 친구들이 그러했듯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 얼마 전(11월 12일) 유명을 달리한 약수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즉 나의 친구 NO 1은 약수, NO 2는 J가 된 나의 약수동 친구 관계였다. 그러나 약수가 제이를 친구라 여기지 않아 절대로 함께하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한동네에 사는 당연함에 제이가 함께 학교에 가자고 일찌감치 약수네 집에 가서 기다려도 못 본 척 상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다리는 제이의 인정이었는데 싫다고 도망가는 약수, 오죽했으면 내가 "약수 너는 나뻐" 했을까. 그래도 단호하게 싫다고 했던 약수를 더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중 략 |
▼ 제이와 나와의 지난 시절 추억~
고2 어느 날 폭행사건으로 인해 서울 학교에서 짤려
고향 지보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야만 했던 제이
물론 친구의 잘못이었지만
나는 이해했다.
내 생각은 정당한 정의감이었으니까...
그리고 성년이 되어 다시 서울 생활을 해 자주 만나는
우리의 끈끈한 우정이었는데 아무말 없이 잠적(1984년)
사북 탄광촌에서 노동운동을 한다고 했다.
엉뚱한 면이 많은 친구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어느 날(1994년) 영등포 가까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접해 찾아갔다.
이런 세상에나 그야말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사람 구실 못할 줄 알았다.
사북 탄광촌에서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자해를 가한
제이의 행동~ 자기가 무슨 전태일이라도 되는 양
흥분하며 정의! 정의~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나도 이해하기 힘든 참으로 미련하기
짝이없는 친구였다.
.
.
그리고 낙향
안동 고향집에서 부모님에 기대어사는
철없는 친구, 물론 결혼도 안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덧없이 세월은 흐르는데 이번에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안동병원에서 응급 수술 처치를 받고 고대구로병원에서
2차 수술 후 우리 동네 근처 정형외과에 입원(2008년 6월)
가료 중 나를 찾아왔다.
병원에서는 치료가 끝났다고 하는데 본인은 아픈 통증에
매일 술로 지내는 제이, 몇 안되는 친구 모두 떠나고
찾는이 나 밖에 없는 친구의 외로움...
결혼도 안한 아니 못한 제이, 그런 와중에 친구 아버지
돌아가시고(2009년) 부모가 없는데 형제도 지쳐 완전
포기 했다. 그래도 나는 이해했다.
어렸을 적 제이가 자기의 목숨을 걸 정도로 나를 도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요, 곁에 아무도 지켜주는이
없는 외로움에 대한 연민이요, 흔히 말하는
의리이기도 했다.
.
.
.
우리 동네 병원 가까운 곳에 입원해 있던 제이를 환자복
상태로 부르고 꺼리는 약수를 집으로 오게 해
함께했던 지난 시간(2008-06-25)
몸을 어느 정도 추스려 고향으로 다시 내려간
제이(2011년 11월) 소식을 들으니 매일 술~에
쩔어 생활한단다.
아픔의 통증, 고통을 술에 의지해 지내는 알콜 중독~
몇 달 전 연락이 왔었다.
"진호야 나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파."
친구가 있는 안동에 간다 간다고 하고
차일피일 미루는 만보, 내 여자 동백이가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그치기에 친구도 보고 안동 하회마을도
구경하는 일정을 잡았는데...
그러나 약수는 저 멀리 가버린 인생무상...
그것도 나를 만나기로 한 날 스스로 유명을 달리한
이런 약수의 제기랄...
공허한 마음에 문득 떠오르는 친구 제이...
금요일 퇴근 후 집을 나선다.
생활고에 끊겨버린 친구의 손폰~
서울에 있을 때는 내가 막아주었는데
미안했던지 연락이 없었다.
그래도 내 친구이기에
마음이 움직여 몸이 따르는 무작정
친구 찾아 삼만리...
안동병원에 입원해 있다하여 찾아 가니
용상안동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일단 있는 곳이 확실하게 확인 되었기에 차분한 마음으로 핸들을 잡아
병원에 도착 했다. 그런데 이런 G랄~ 병실이 일반 병실이 아닌
격리 수용되어 가족으로 등록된 사람 외에는 면회가 안 된다고 한다.
절친을 강조하며 서울서 왔다고 떼를 쓰며 억지를 부려보지만
절대 불(不)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당직자 내일 과장한테 부탁하면 면회가 될지 모른다 하여
일단 철수~ 늦은 저녁을 먹는다.(23시)
식당 TV 긴급 방송
안철수 사퇴~ 내 코가 석자라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룻밤이 지나고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원무과 앞
새벽 잠이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TV 연속극 재방송을 본다.
그런데 거동이 쉽지 않은 할머니 커피 한 잔을 자판기에 빼서
원무과 당직자에게 건네고, 다시 자판기로 가시더니 또 뺀다.
할머니 당신이 드실 줄 알았는데 나에게 건넨다.
당황해 멈칫 했더니 손짓으로 어여 마시라고 한다.
말을 못하시는 할머니의 배려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아 ~ 할머니...
끝내 면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될 줄 알았지만
혹시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고
에라~
병실로 올라가 벨을 누른다.
당연히 안 된다고 정중하게 설명하는 담당자
멀리서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게만 해 달라고
서울서 왔다고 통사정을 해 보지만
부질없는 짓...
아 또 하나의 내 친구~ 제이 J
만보의 파~란 꿈은 사라지고
맥이 빠진 만보
해는 서산에지고 쌀쌀한 바람부네
날리는 오동잎 가을은 깊은데
꿈은 사라지고 바람에 날리는 낙옆
내생명 오동잎 닮았네
모진 바람을 어히견디리
지는해 잡을 수 없으니
인생은 허무한 나그네
봄이오면 꽃피는데
영원히 나는가네
면회를 포기한 나는 완전 깜깜한 밤~
어제 찾지 못했던
친구네 고향집이 그리워
다시 찾아 나선다.
친구와의 추억이 서려있는 낙동강 줄기~
강산이 네 번 변하고 있는 시점~
잘 정비되어 있는 세월의 흐름이다.
나는 고딩 여름방학이 오면
제이네 집을 찾아가 1주일 정도 지내고 왔다.
함께한 친구들은 죽마고우가 아닌 좀 멀리 떨어진 건너 동네 친구들
우리 동네에 원정 패싸움을 와 알게 된 친구들~
하지만 삥을 치고 남에게 절대 헤코지를 하지 않았다.
다만 놀기 좋아해 동네 탁구장을 접수해 동네 똘만이들을 선도하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었다.
나와 제이는 그런 친구들이 좋아 아삼육 친구가 되어
제이의 고향 낙동강 줄기에서 놀았던 지난 추억이다.
그런데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리 곁을
모두 떠나고 없는 세월의 흔들린 우정이었다.
나를 한 번 이겨보겠다고 덤빈 제이
그러나 실제 상황~ 몇 번 붙었지만 나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나는 지난 프로였으니까 ~
옛날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던 친구네 집
고2 때 서울 학교에서 짤려
고향 지보고등학교로 전학간 친구
물론 친구의 잘못이었지만
나는 이해했다.
내 생각은 정의감이었으니까...
"진호야! 우리 제이 사람 좀 맹글어줘~"
나를 믿는다며 신신당부 했던 친구 엄니~
찾았다. 친구네 집~
▲ 제이네 옆집~
40년 가까운 세월이지만 옛날 모습 그대로다.
▼ 앞집 할머니 가라사대~
"서울서 왔는데 아무도 없으니 어쩐다요.
제이 매일 술로 살았어요 쯧쯧..."
마을 중앙에 자리한 큰 나무
밤이면 이곳 평상에 앉아 노래 부르고 놀았던 곳의
추억이 서린 곳이 아니던가.
우리는 이젠 삶의 여유를 누려할 70~80 세대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물질 만능에 윗사람에게 눌리고
아랫사람한테 치이는 빡빡하고 냉정한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병원에 있는 제이를 데려와 저녁을 함께하는 우리 집 풍경
하루 이틀도 아닌 1주일에 2~3번은 그랬기에
동백에게 감사했다.
오른쪽 사진 제이 동생이 자기 두 아들을 데리고
방문한 어느 날(2008년 여름) 동생은 자기도 못하는 일을
내가 대신해 주니 고맙다고 했다.
친구 몸 회복하라고 영양탕 집에서 함께한 시간
오른 쪽 횟집에서 엄니와 함께한 어느 날
내가 좋으면 아내도 엄니도 무조건 따르는
인정의 사랑
친구가 좋아하는 당구장에서 함께한 시간
어찌 이 사진으로 우리의 우정을 다 말하리오
제이의 서울 병원 생활 3년을 나와 우리 가족 모두는
최선을 다했다.
내 친구이니까 그랬다.
암튼 현실의 벽에 힘들지만
나, 만보(漫步) 이젠 미련에 대한 냉정함 찾아
씩씩하게 걸어야겠다.
그게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