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빅뱅[big-bang]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데오빌로 각하께. 첫번째 편지에서 나는 예수의 생애와 그 교훈과 예수께서 친히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여러가지를 지시하시고 하늘로 되돌아가신 일까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40일 동안 여러번 사도들에게 나타나 몸소 자신을 보이며 살아계시다는 것을 확실한 증거로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1~3절 지난주 1월 20일까지 제 1이사야서를 학습했다. 이사야는 '우시야 왕이 죽던 해'(BC 742)에 소명을 받았고, 그의 마지막 활동은 BC 701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해당되는 본문은 1~39장, 40~66장은 훨씬 후대에 작성되었 으며, 제2이사야(Deutero-Isaiah)로 알려져 있다. 때로는 제2이사야를 제2이사야 (40~55)와 제3이사야(56~66)로 세분하기도 한다. 한 세월을 고독하고 처절했던 선지자 말씀을 들으며 당시 앗시리아, 바빌론, 이집트, 페르시아를 거치면서 전개된 멸망과 재건의 이야기가 남의나라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나라 내 이야기로 들리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 혹독하고 녹녹치 않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16절) 마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Eli, Eli, lama sabachthani ”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을 받으시며 외마디 절규를 하신 것처럼 예언자도 열방의 파멸이 마치 자신의 일이라는 듯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온몸으로 아픔을 겪고 때론 벌거벗은 채로 몸부림치며 민족의 파멸을 예고했던 선지자 이제 잠시 이사야 선지자 말씀을 멈추고 다음장은 훗날을 기약하며 새로운 역사적 정황 과 현실 속에서 몸살을 앓았던 신앙의 선진들의 삶과 말씀 속으로 들어가보고자 한다. 문득 소나무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흘러나온 사도행전, 이 사도행전을 선택하면서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예수님 앞에서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전개된 상황을 보고 들으며 초대교회의 모습과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열게된다. 이 책을 데오빌로 각하에게 드린다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사도행전의 저자는 루가복음서 저자인 의사 루가. 의사다운 정밀하고 섬세한 필치를 통해서 누가복음을 봤고 또 사도행전을 보게 된다. 이 사도행전은 데오빌로 각하께 쓴것이다.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에게 보이는 명칭이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의 이름에서 수신자 를 추측케 한다. 누가복음에는 “데오빌로 각하”(눅1:3)라고 호칭하고 있으나, 사도행전에서는 평이하게 “데오빌로여”라고 부르고 있다. 데오빌로의 어의는 “데오스+필로스”(Theophilus),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자 혹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이며, 각하라는 호칭은 로 마 총독 벨릭스와 그의 후임 총독인 베스도 (AD60-62년까지 네로 황제[AD54-68]에 의해 임명된 유대총독)의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유대인 대제사장 (AD37-41)의 이름이기도 하고, 동시대의 철학자 세네카의 편지의 수신인의 이름이기 도 하다. 누가는 로마의 지식인층에 속했던 데오빌로라는 사람을 기독교에 대한 지금 까지의 생각에서 벗어나 우호적인 관점에서 전달코자 했고, 일정 부분 그 목적이 달성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가의 목적은 그에게 더욱 정확하고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여 보고 들은 바를 설득렸있고 명료하게 전달하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여기서 데오빌로는 특정한 고위층 인물이 아니라 고 김대중 대통령이 대중 연설시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여러분' 이라고 어두에 친근하게 인사말을 꺼낸 것처럼 누가 역시 어려운 현실과 고난 속에서도 굳세게 신앙을 굳건이 하고 묵묵히 신앙의 처소 를 지키고 있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을 자랑스럽고 친근하게 높여 부른 말일 수도 있다.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행1-3)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라.'(행1-4)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 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 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 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누가10:8~12)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 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 에 깃들였느니라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누가13:18~20)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 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누가18:16~17)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 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라(누가19:11) 그리하여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 으시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시라' 고 간구하고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이와 같이 말씀을 받아 전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아픈 역사 고통받은 역사에서 민중의 희망이요 가장 위대한 복음임에 틀림없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과 반대되는 개념이 지옥인데 지옥이라는 말과 지구라는 말이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내가 밟고 사는 이 지구가 천국이기도하고 지옥(地獄)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옛날 감자가 유럽에 전래되었을 때 가축 사료로나 쓰였을 뿐 누구도 먹지 않았다. 사람들은 성경에도 나오지 않으며 특별한 맛도 느껴지지 않고 모양도 이상한 감자를 악마의 뿌리라고 부르며 기피했다. 한편 계몽주의 국왕이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1712~1786)는 다르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빵이 없어 굶주릴 때 감자는 이를 구휼 할 수 있는 훌륭한 작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당시 유럽은 전쟁의 연속이라 먹을 것이 부족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종교적 관점에서 흙에서 나온 감자를 먹지 않으려 했고 프리드 리히 대왕은 감자를 보급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했으며 사람들이 개도 안먹는 감자 라고 비웃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매일매일 자신의 식단에 감자를 올리게 된 것이다. 국왕이 감자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