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남쪽을 동서로 나누는 소백산맥의 끝머리에 크게 솟구친 지리산. 이 산의 서남부인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는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으뜸 도량인 화엄사가 있다.
화엄사는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가 보게 되는 명소이다. 지리산 곳곳에 이 절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음은 물론 독특한 생김을 자랑하는 석탑과 석등, 조선 중기에 지어진 건물 각황전의 중후한 건축미, 도량에 스며 있는 신비한 전설 등 볼거리와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곳으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의 보고와 같은 이 가람에는 화엄사상이라는 고아한 정신이 흐르고 있어, 단순한 눈요기 이상을 기대하는 순례자들도 충분히 만족시켜 준다. 지리산의 동북쪽 기슭과 서남쪽 기슭을 잇는 861번 도로, 일명 노고단길이 절 가까이 지나고 있어 교통 또한 편리하다.
신라 진흥왕 5년(서력 544년)에 인도의 승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한 화엄사는 신라 문무왕 10년(서력 670년)에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교학을 전파한 10개의 도량, 화엄십찰의 하나로 중창하였다.
불교의 경전 가운데 으뜸을 꼽으라면 <화엄경>과 <법화경>을 들고 그 중ㅇ에서도 <화엄경?이 <법화경>보다 진리면에서 더 깊고 넓다고 한다. 모든 것을 다 포괄하여, 또 포괄된 그 하나하나에 제가끔의 개성을 갖게 하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인 화엄의 세계, 부처님 말씀 가운데 가장 궁극적인 이치가 담겨져 있으며 부처님이 깨달으신 경지가 그대로 드러난 화엄정신…. 화엄사는 부처님이 36세 때 보리수 아래서 설교한 <대승화엄경>의 이름을 딴 것이다.
우람하게 세워진 일주문을 지나서 불이문(不二門),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을 차례로 넘어 보재루 앞에 서면 대웅전(大雄殿 : 보물 제299호)과 각황전(覺皇殿 : 국보 제67호)을 비롯한 사찰의 여러 당우들이 지붕을 맞대며 지리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형제봉과 원사봉 사이의 아담한 봉우리를 배경으로 의젓하게 앉아 있는 고아한 전각과 문화재들이 피워 내는 시간의 향기가 순례자들의 가슴에 은근히 스며드는 듯하다.
마당에는 오층석탑 2기(보물 제132호, 제133호)가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 서 있는데, 지난 1995년 서쪽의 오층석탑에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불교게의 비상한 주목을 끌었다. 마당 너머 자연석을 높이 쌓아 올린 석축 기단 위에는 조선 중기의 건물인 대웅전과 각황전이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특이하게도 기단은 신라인의 작품이고 위로 오르는 계단은 백제의 양식이라 한다.
계단으로 오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국보 제12호)과 위풍당당한 건물 각황전이 서로 어우러지며 웅장하고 준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당에 닿는다. 각황전은 정면 7간에 팔작지붕을 이층이나 얹은 건물로 빛 바랜 나무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귀꽃이 크게 솟은 석등은 언뜻 불꽃을 연상시키다. 변화무쌍한 지리산의 날씨 덕분일까, 대웅전과 석등 그리고 각황전은 서로 합주하듯 어울리면서 빛의 각도와 밝기에 따라 조용한 경내를 우아하게, 때로는 근엄하면서도 화려하게 연출해 낸다.
대웅전은 인조 14년(서력 1636년)에 중건된 고건물로 절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 화엄의 도량답게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긴 추녀가 그리는 곡선이 날씬하다.
화엄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각인 각황전은 임진왜란 때 타 버린 장륙전(丈六殿)을 숙종 28년(서력 1702년)에 다시 중건한 건물인데, 숙종으로부터 그 이름을 하사받았다. 부처님의 몸을 일컬어 장륙금신(丈六金身)이라 하는데 신라 때 석가여래의 모습을 한 장륙의 금색불상을 모시는 신앙이 있었다 하니 장륙전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듯 하다.
원래의 장륙전은 3층이었고 사방 벽에는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새겨져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석경은 파괴되어 지금은 그 파편 조각만을 영전(影殿)에 보관하고 있다. 각황전은 훗날 조선 제21대 영조가 되는 연잉군과 그 어머니인 숙빈 최 씨가 대시주가 되어 지은 것이라 한다.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풍기는 이 건물의 중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벽암스님의 재자였던 계파스님은 스승의 위촉을 받아 장륙전 불사를 시작했으나 화주할 길이 막연하여 걱정이었다. 비록 "모기가 이룸에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먼저 부처님께 가호 있기를 빌자"라는 서원을 세우고 100명의 스님이 대웅전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긴 하였으나 불사에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구할 일이 막막하기만 했다. 어느 날 대웅전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대사에게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햇다. "그대는 걱정 말고 내일 화주를 떠나라. 그리고 맨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 가르침을 따라 다음날 아침 맨 먼저 만난 거지 노파에게 장륙전 건립의 시주를 부탁하였다. 대사의 간청에 감동한 노파는 마침내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불사를 성취하리니, 문수대성은 가피를 내리소서"라는 말과 동시에 길가에 있던 늪에 몸을 던졌다. 몇 해가 지나, 걸식을 하면서 서울에 나타난 스님은 궁궐 앞에서 "우리 스님"하면서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어린 골주를 만났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손을 꼭 쥔 채 펴지 않았느데 스님이 공주를 안고서 쥔 손을 만지자 신기하게도 손이 펴지고 그 안에 장륙전이란 세 글자가 씌여 있었다. 거지 노파가 숙종의 공주로 환생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한 나머지 장륙전을 지을 수 있도록 시주하였다."
신비한 전설이 감도는 각황전 옆으로 108계단을 오르면 화엄사가 자랑하는 특이한 석탑과 석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언덕 위에 있는 이 탑이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 : 국보 제35호)이며, 그 앞의 삭등은 공양석등(供養石燈)이다.
연화좌 위에 웅크리고 앉은 네 마리의 사자가 연화대를 받쳐 그 위에 실린 탑을 머리로 받들고, 그 가운데서 대덕이 연꽃을 이고 있는 모양의 이 탑은 다보탑과 쌍벽을 이루는 신라 이형탑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석등에는 한 무릎을 꼻고 한 손에 공양기를 들고 공양하는 승려의 조각이 있어 공양석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화엄사의 창건주인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탑을 세우고, 공양하는 자신의 모습을 석등의 형태로 조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사자석탑과 공양석등이 있는 이 언덕은 '효대(孝臺)'라 불리는데, 왼쪽 한 켠에 비스듬히 서 있는 소나무와 함께 경건한 부위기를 자아낸다.
효대에 서면 아래로는 절 마당이, 위로는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길상봉이 시원하게 모습을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시 한 수를 남겼다.
寂滅堂前多勝景 적멸당 앞에는 빼어난 경치도 많은데
吉祥峰上絶纖埃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끊겼네
彷徨盡日思前事 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薄暮悲風起孝臺 날은 저무는데 효대에 슬픈 바람 이누나
효대에서 되돌아 내려가 각황전 옆의 원통전 앞에 서면,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석단을 받들고 있는 특이한 생김의 사사자감로탑(보물 제300호)이 눈길을 끈다. 이 탑은 보통 '노주(露柱)'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감로법으로 중생들에게 청정한 지혜를 얻게 하여 생사 윤회에서 벗어나 연화장세계로 인도하는 감미로운 탑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