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최근의 한반도 상황을 바라보면, 열강들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하는 모습이 비교적 잘 보인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북한, 미국, 중국의 3자회담에서 제외된 일본이 초조감을 보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다자회담의 틀에 하루라도 빨리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그 한 단면일 것이다. 또 북한 핵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위기의 심각함도 국내에서보다 훨씬 잘 느껴진다. 이런 것은 어떤 물체를 볼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는 것이 전체의 모습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는 이점과 같은 것일 것이다. 최근 일본을 방문한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도 "일본에 와서 여러 사람을 만나 보니,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움직임이 굉장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정치는 너무 내부적인 문제만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반도 위기 해소에 일본의 역할 중요
한반도 핵 위기는 `핵을 먼저 포기하라'는 미국과 `먼저 적대정책을 포기하라'는 북한의 주장이 대립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북한과 미국간의 문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위기가 현실화될 경우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러시아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동북아의 지역문제, 즉 국제문제이기도 하다.(물론 남북을 비롯해 북-일, 북-중, 북-러 등의 양국관계 문제이기도 하다) 더욱이 북한과 미국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를 중재할 수 있는 주변국들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
주변국 중에서 특히, 일본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북한정책을 둘러싸고 강온으로 갈려 있는 한국과 미국을 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한국 미국 일본 3국의 정부 고위관료들은 1993년 1차 북한 핵 위기 이후 수시로 모여 대북 정책 전반을 조정하고 있는 데, 이 회의에서 일본이 어느 편을 드느냐에 따라 어느 쪽이든 2대1로 저울추가 기울게 됨으로써 대북 정책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둘째, 동북아지역 국가이며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이 함께 같은 주장을 펼 경우, 아무리 무소불위의 미국이라도 이를 무시하고 단독행동을 하기가 어렵다. 일본은 북한 위기가 현실화될 경우 정치 경제 안보 등에서 겪게될 지역국가로서의 위험성과, 안보와 경제번영의 안전장치로서의 미-일 동맹의 필요성 속에서 고민을 하는 위치에 있다. 물론, 최후로 한국이냐 미국을 선택하는 상황에 몰리면, 국익을 위해 당연히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게 많은 학자들의 주저 없는 의견이긴 하다. 셋째, 조지 부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관계가 매우 친밀해, 고이즈미 총리를 통한 미국 설득 카드가 어느 때보다 유효하다. 한 자민당의 국회의원은 "예전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사이를 `론-야스'라고 부르면서 친밀함을 과시한 적이 있었는데, 나카소네는 재임 5년 동안 7번 밖에 만나지 않았다"면서 "고이즈미 총리는 재임 2년도 안되는 사이에 7번이나 만나고, 만나서 얘기를 할 때도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깊이 있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넷째, 일본은 북한의 핵 위기가 타결되고, 국제지원이 필요할 경우 현실적으로 가장 많은 경제 지원을 할 수 있는 나라이다. 다섯째, 일본은 한국이 열심히 노력을 하면 미국보다는 비교적 쉽게 설득을 할 수 있는 상대이다. 나라의 크기가 미국보다 작은 것도 있지만, 일본이 과거 한반도를 식민지 지배한 것에서 나오는 부담 때문에 한국의 발언권이 주위의 다른 큰 나라보다는 잘 먹히는 편이다.
극우 분위기로 치닫는 일본
그러나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분위기는 한국이 바라는 방향과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 지난해 9월17일 북-일 평양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납치 문제를 시인, 사과한 뒤 일본 안의 `북한 때리기' 분위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본 안의 매파들이 급격히 세를 얻어가고 있다.
배외주의와 민족, 여성 차별 등의 잇단 문제발언으로 `작은 히틀러'라고 불리는 이시하라 신타로가 4월13일 실시된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308만7190만표-70.21%의 득표율을 올리며 압승한 것은 일본의 우경화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시하라의 이번 득표율은 사회당 출신으로 1967년부터 79년까지 도쿄도지사를 역임한 미노베 료기치가 기록한 71년의 득표율 64.77%를 갈아치운 새기록이다. 득표수는 아직 미노베 전 지사의 361만5299표를 깨지 못했지만, 훨씬 낮은 투표율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놀란 만한 일이다. 75년 선거에서 미노베 지사는 3선 출마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소장 우파로 이름을 날리던 이시하라가 출마 움직임을 보이자 "파시스트에게 도쿄를 맡길 수 없다"면서 출마하기로 마음을 가다듬고 압승을 거뒀다. 미노베 지사의 위세에 눌린 이시하라는 출마 뜻마저 접어야 했다. 이시하라의 압승은 30년전의 상황과 비교할 때 일본의 이념지도가 얼마나 우쪽으로 이동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고이즈미 정권 이후 미국의 `네오컨서버티브'(신보수주의)와 비견되는 일본판 `네오컨서버티브'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정부에서는 아베 신조 관방부장관, 이시바 시게루 방위청 장관이 선두이다. 자민당에서는 야마사키 다쿠 간사장, 아소 다로 정조회장, 나카야마 타로 외교조사회장, 하마다 야스카즈 국방부회장이 도사리고 있다. 당정에 포진한 이들은 냉전체제가 붕괴된 1989년 당시 자민당 파벌 가운데 매파로 분류되는 아베파(모리, 에토카메이파로 분열)와 나카소네파(에토카메이파와 야마사키파로 분열)의 흐름을 이어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고이즈미 총리와 그의 후견인인 모리 요시로, 아베 관방부장관이 아베파 출신이고, 야마사키 간사장은 나카소네파의 후예이다. 적 기지 공격능력과 미사일방위 검토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이시바 방위청 장관은 현재 하시모토파 소속이나 원래 나카소네파를 이어받은 와타나베파 출신이다. 나카야마와 하마다 의원도 현재는 무파벌이지만, 원래는 각각 아베파의 후신인 미쓰즈카파와 와타나베파 출신이다.
이들 매파들은 과거 같으면 말도 꺼내지도 못했을 법안과 정책을 마구 밀어붙이고 있다. 9.11테러와 북한의 납치 인정 및 핵 개발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있지만, 자위대를 전시에 파견하는 테러지원특별법 제정, 유사법제 관련 법안 추진, 개인정보법안 추진, 교육칙서 시대를 방불하게 하는 교육기본법의 개정 등은 자민당과 사회당의 동거 체제였던 55년체제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도 마찬가지이다.
비둘기 세력의 급격한 퇴조
일본에서 강경 우파가 기승을 부리는 데는 시대적인 흐름도 있지만, 비둘기파의 급격한 퇴조도 큰 원인이다. 자민당에서 비교적 온건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하시모토파, 호리우치파, 고무라파는 고이즈미 정권에서 소외돼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로서 온건파의 대표주자인 노나카 히로무 전 간사장이 그나마 목소리를 내고 있으나 역부족인 상황이다. 자민당 안에는 고가 마코토 전 간사장, 고노 요헤이 전 외상 등의 온건파 인물들이 몇 명 있으나, 이들을 이을 젊은 의원들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한국의 젊은 의원과 교류를 많이 하고 한국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의원들로 야마모토 이치타 참의원과 고노 외상의 아들인 고노 다로 의원이 있지만, 이들도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강경하다. 이들이 중심이 된 젊은 의원들은 납치 문제와 관련해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와 만경봉호 입항 등을 금지하는 등의 법안 제정을 준비중이다. 이들은 그래도 한국에 관심이라도 있으니까 난 편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젊은 의원들은 한국 등 주변국에는 관심을 쏟기는커녕 미국중심주의에 매몰돼 있는 지경이다. 여기에 한때 총리 후보로 각광을 받던 가토 고이치 전 간사장이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 지난해 의원직을 사퇴한 것은 온건파로서는 매우 큰 손실이다. 가토 의원은 외무성 관료출신으로, 간사장 시절에 김영삼 정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북 식량지원을 추진하는 등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에 대해 온건책을 구사해온 대표적 정치인이었다.
야당이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도 강경파의 독주를 가져오게 하고 있다. 자민당과 사회당의 혼합으로 이뤄진 제1야당 민주당은 목소리가 강온으로 분열돼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국내 주도권 차원에서 자민당보다도 더 우파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 간 나오토 대표가 고이즈미 총리에게 "이라크보다 북한이 더 위험한 것 아니냐"고 북한에 대해 보다 강경한 정책을 취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기도 한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정책은 선명하지만, 선거를 할 때마다 세가 줄어들고 있다. 여당 안의 야당 노릇을 하는 공명당도 자위대 무장 강화 등의 문제에 대해 예전처럼 확실한 제동을 걸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온건파 지원, 강경파 억제가 최선
그나마 일본 안에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강경파의 폭주를 억제하는 온건파가 존재한다면, 관저와 외무성의 일부 정치인과 관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관저에서는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이 대표 인물이고, 고이즈미 총리의 외교 자문역인 오카모토 유키오가 있다. 이들 둘은 고이즈미 총리와 접촉 빈도가 가장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또 아시아대양주국장 때 9.17 평양회담을 물밑에서 성사시킨 주역인 다나카 히토시 외무성 심의관도 대북 대화파의 핵심 전략가로 가와구치 요리코 외상을 빼고는 고이즈미 총리를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이다.
이 가운데 오카모토 자문역과 다나카 심의관은 모두 미국통의 외교관 출신이거나 외교관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동맹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동맹이라는 것은 서로 할 말을 다 하면서 한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지, 꼭 한쪽이 다른 쪽 말을 일방적으로 듣는 관계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즉, 미국과 일본이 같은 방향을 향해 가지만, 어느 정도 일본의 독자외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북한 문제가 그런 사안의 하나라고 본다. 이들은 북한 문제를 단지 문제가 것의 해결 뿐 아니라, 앞으로 동북아의 평화 안정을 어떻게 구축할 것이냐는 큰 틀에서, 즉 동북아 평화구축이라는 전략적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오카모토 자문역은 고이즈미 총리의 외교태스크포스를 이끌고 있고, 다나카 심의관은 정무담당 심의관(관료로서는 사무차관에 이어 제2인자)으로서 북핵 문제를 포함한 모든 정무 사안을 챙기고 있다. 또한 그는 아직도 북한 쪽 실세와 창구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일본 쪽 인물이다.
북한의 핵 보유 발언에도, 일본 정부는 한-미-일 공조와 외교해결이라는 종전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대북 강경파인 매파들이 목소리를 죽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매파의 힘이 축소되거나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다. 이들의 침묵은 미국의 태도가 아직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무리 매파라도 한반도 위기의 직접 피해권에 드는 일본 사람으로서, 미국보다 먼저 주변국인 북한에 대해 강경 방침을 주문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의 매파는 미국의 태도에 편승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미국의 신보수주의 세력이 미국 안의 강온 싸움에서 이겨 대북 강경 자세로 나설 경우 일본의 매파들도 일제히 가담하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한반도 위기는 가능성에서 현실 쪽으로 기울고 위험이 크다.
한반도 뿐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파멸을 막고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이 일본의 매파를 견제하고, 비둘기파를 성원하고 지지하고 협력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이런 일을 하겠지만 시민단체나 일반 시민들도 이런 일본의 상황을 읽으면서 진지하게 대응을 할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