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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야구해설 10년째가 된 이성득 KNN 해설위원 |
흔히 ‘신의 말씀을 듣는다’고 할 때 그건 볼륨 조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같은 의미로 ‘경기를 본다’고 하면 실제 관전과는 거리가 멀다. 대개 스포츠팬은 중계방송을 통해 경기를 보고 즐기게 마련이다. 그 가운데 야구는 ‘중계방송의 꽃’으로 불린다. 수 십 대의 카메라와 최첨단 컴퓨터그래픽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여기다 수십 명의 중계인력은 덤이다. 그러나 캐스터와 해설가가 빠지면 아무 의미가 없다. 야구처럼 경기 시간이 길고 전문지식이 필요한 스포츠 종목도 없으니까.
야구중계 캐스터와 해설가의 이야기를 다룰 계획이다. 이들을 통해 올해로 야구중계 81년을 맞은 한국야구방송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들을 되짚어 볼 것이다. 국내 야구중계 사상 가장 성공한 지역방송으로 꼽히는 KNN의 이성득(55) 해설위원이다.
어느 전직 프로야구팀 단장은 몇 년 전 부산에서 들은 KNN 라디오방송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쓰자면 “비무장지대 초소에서나 들을 법한 북한방송을 백주대낮 부산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롯데 선수가 홈런을 치면 해설자가 박수를 치면서 ‘만세’를 외치질 않나 역으로 상대팀에서 안타를 치면 대놓고 ‘아쉽습니다’하고 한숨을 내쉬기 일쑤였다. 편파중계도 그런 일방적인 편파가 없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 단장이 방송사에 항의하거나 해설자에게 불만을 토로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듣다보니 재밌었다. 악감정으로 상대팀을 비난하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실컷 롯데를 응원하다가도 조금만 부진하면 매섭게 비판했다. 나중에는 아예 중독이 돼 부산에 내려오면 TV 볼륨을 줄이고 라디오를 켜게 마련이었다.”
단장직을 그만 둔 그가 지금도 KNN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출 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KNN 라디오의 롯데 편파중계는 지금도 여전하다. 이대호가 홈런을 치면 ‘만세’소리가 방송 부스 안을 가득 메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올해로 10년째를 맞은 KNN 라디오의 야구중계는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전망이다. 왜냐? 이성득 해설위원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 롯데 터줏대감의 등장
부산·경남지역에서 이성득 해설위원의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을 넘어선다. 7월 24일 부산 MBC 전성호 PD는 자신이 진행하는 ‘가을의 전설’에 이 위원을 출연시키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이 위원이 타방송사 전속해설위원이기 때문에 출연이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전 PD는 윗선의 도움을 받아 KNN의 양해를 구한 끝에 기어이 이 위원을 출연시켰다. 이렇게까지 출연자 섭외에 공을 들일 필요가 있나 싶지만 “이 위원만큼 롯데를 잘 아는 야구전문가도 없다”는 전 PD의 말을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사실이다. 이 위원만큼 롯데를 잘 아는 야구해설가 아니 야구인도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1982년 롯데 창단멤버로 프로야구에 발을 들여놓은 뒤 올시즌까지 무려 26년간 롯데 곁을 지켰다.
등번호 7번의 프로야구 원년 롯데 내야수 이성득 |
그러나 프로에선 극찬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격은 예전처럼 매섭지 못했고 수비도 인상적이지 않았다. 52경기에 출전해 타율 1할9푼, 2타점을 기록한 이 위원은 그해 눈썹 길이만큼이나 짧은 현역생활을 미련 없이 정리했다.
“늦은 나이에 프로에 간 게 아무래도 마이너스였다. 고질적인 무릎부상도 은퇴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 위원의 회상이다.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롯데와 멀어진 건 아니었다. 되레 더 가까워졌다. 이듬해부터 롯데 프런트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구단 관리과에서 1987년까지 근무했다. 구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 위원의 말이다.
그러던 1988년 이 위원의 신분에 변화가 생겼다. 6년 만에 현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물론 선수는 아니었다. “어우홍 전 롯데 감독이 수비코치를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리저리 망설이던 끝에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1988년부터 다음해까지 코치로 활동했다.”
1988년 롯데 2군 코치가 된 이성득 |
1990년 김진영 전 감독이 새로운 롯데 사령탑으로 선임되며 이 위원은 다시 프런트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해부터 1997년까지 롯데 매니저 겸 기록원을 지냈다. 9월의 가을 호수처럼 잔잔하기만 했던 이 위원의 인생은 그러나 1998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IMF 외환위기가 터진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구조조정 몸살을 프로구단들도 겪어야 했다. 롯데에서도 여러 사람이 정리됐다. 물론 그 안에는 나도 포함돼 있었다.”
막막할 따름이었다. 40대 중반이 되도록 그의 인생은 인공위성처럼 야구를 중심으로만 맴돌았다. 예외란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야구가 인생의 중심에서 이탈하자 그는 중력을 잃은 우주인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현실을 배회해야 했다. 사업구상도 해봤지만 새로운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즈음이었다. 1997년 9월 9일 개국한 PSB(KNN의 전신) FM에서 연락이 왔다. PSB에서는 1998년부터 프로야구를 중계하고 있던 참이었다. “당시 원년 롯데 투수였던 김 모씨가 해설을 맡고 있었다. ‘왜 나한테 전화가 왔을까’하고 궁금하던 차에 그쪽에서 조심스럽게 ‘해설을 맡아주실 수 있겠느냐’ 고 의사를 타진했다.”
이 위원에 따르면 김 씨는 평소 언변이 좋고 농담도 잘해 좌중을 압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방송이 시작하면 김 씨가 과묵하고 진중한 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부산 사투리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가령 “투수가 손에 공을 끼었습니다”라고 한다면 김 씨는 “투수가 고마 손에 공을 낀가 갖고예”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단점으로 지적된다면 이 위원도 별 다르지 않았다. “나 역시 사투리를 많이 쓰고 거기다 쉰 목소리라 해설자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해설에는 관심이 있기나 했던 걸까. 이 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구연(MBC 해설위원), 하일성(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선배의 해설을 들으면서 관심은 있었다. 야구인이 야구 그만두고 할 일도 마땅치 않고. 그래
‘한 번 해보겠다’고 운을 띄웠다.”
1998년 7월 11일 롯데와 해태의 후기리그 첫 경기가 사직구장에서 열렸다. 이 경기는 이 위원의 야구해설 데뷔전이기도 했다. 지인들로부터 ‘라디오 중계는 말을 많이 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지만 좀체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당시 호흡을 맞춘 임경진(현 MBC) 캐스터가 하늘처럼 우러러 보일 뿐이었다.
“주변분들 조언처럼 말을 많이 하세요. 가만히 계시면 되레 움츠려 듭니다. 편하게 말하시면 제가 다 보조를 맞춰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하고 싶은 말 다 하세요.” 임 캐스터의 배려가 약이 됐는지 이 위원은 작심하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롯데 선수들이 오시다시(밀어치기)로 잘 쳤는데 그기 다 라이나(라인드라이브)로 잡혔어요. 네네. 찬스 뒤에 위기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네네. 우라(말)공격을 조심해야 합니다. 네네.”
중계스텝은 이 경기를 녹음해 임원진에 전달했다.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녹음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징후는 좋지 않았다. 장내 해설이라면 모를까 멀쩡한 FM방송에서 ‘우리 롯데’라고 부른 건 큰 실수였다. 게다가 일본인이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면 자국방송을 듣는 줄 착각할 만큼 일본식 야구용어를 쏟아낸 것도 오점이었다.
이윽고 결론이 나왔다. “경험이 쌓이면 괜찮아질 것도 같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 의외였다. ‘일단 유보’라는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린 이 위원은 이날 이후 하루 종일 방송 준비에 매달렸다. 아침마다 스포츠신문의 주요 내용을 스크랩했고 평소 최고의 해설가로 꼽던 허구연 위원의 경기를 녹화해 몇 번이고 돌려봤다. 이것도 모자라 메이저리그 중계도 놓치지 않았다. 선진야구 이론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해설 스타일도 스스로 개발했다. 이른 바 화끈한 롯데 편파해설은 순전히 본인의 작품이었단다. “어차피 부산·경남지역을 주 무대로 한 롯데 위주의 방송이라면 다소의 편파중계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회사(PSB)에서도 이래라 저래라 말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회사에서도 상황파악이 됐는지 ‘긴가 민가’하는 눈치였다.”
여론의 동향을 파악한 KNN은 오래지 않아 이 위원의 해설관이 옳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이후 이 위원의 든든한 후원자역을 자처했다.
1989년 롯데 코칭스태프. 이성득(사진 왼쪽부터), 임태호, 조창수, 허구연 수석코치. 허구연은 이성득의 고려대 2년 선배이자 해설가 롤모델이었다 |
롯데와 함께 한 희노애락
이 위원과 PSB의 팀워크는 머지않아 성과로 나타났다. 놀랍게도 방송 3년 만에 타 방송국의 야구중계 시청률을 금세 따라 잡은 것이다. 뭐니해도 '권성욱-이성득 콤비'의 공이 컸다.
1999년까지 PSB TV에서 야구중계를 하던 권성욱 캐스터는 임경진이 MBC로 소속을 옮기자 라디오 중계를 자청했다. '야구캐스터라면 라디오 중계를 최소 1, 2년은 해야지'하는 게 권 캐스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상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으나 현실은 그만큼 차가웠다. "부산에서 경기가 끝나면 바로 봉고차에 방송장비를 싣고 그 틈새에 나, 이 위원, 기술 스텝이 탄 채 서울이나 인천으로 출발해야 했다. 새벽에 도착하면 방송준비를 하고 잠시 눈을 붙인 뒤 일어나 구장으로 갔다. 지금이야 좋아졌겠지만 당시는 전국 여관방을 전전하며 방송을 하던 때였다." 권 캐스터의 회상이다.
2000, 2001시즌을 소화한 권 캐스터는 2001년 12월 KBS N 스포츠로 소속을 옮겼다. 현재 한명재(MBC ESPN), 임용수(SBS스포츠)와 함께 '프로야구 3대 캐스터'로 꼽히는 권 캐스터는 이때의 열정이 KNN 청취율 상승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운도 따랐다.
“1999년 롯데가 드림리그에서 2위(75승5무52패)를 했다. 부산에서 야구인기가 억수로 좋았다. 덩달아 야구중계 청취율도 부쩍 올랐다. 그땐 펠릭스 호세, 마해영, 임수혁, 박정태, 공필성 등 좋은 타자들이 많았고 주형광, 박석진 등 투수들도 좋았다. 그해 호세가 대구구장에서 플레이오프 삼성전에서 야구방망이를 집어 던질 땐 ‘아차’싶었다. 하지만 드라마 같던 7차전의 감동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다.” 이 위원은 야구해설을 하며 가장 즐거웠던 때로 지금도 1999년을 꼽는다.
1998년 해설가로 데뷔했을 무렵 |
그렇다면 가장 안타까웠던 때는 언제일까. “다음해인 2000년 4월 18일 잠실구장 LG전을 중계하고 있을 때다. 갑자기 2루 주자가 ‘픽’쓰러졌다. ‘어찌 된 일인가’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봤는데 그 선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임)수혁이, 우리 수혁이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잠시 먼 산을 바라보던 이 위원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재미났던 에피소드로 화제를 돌리려는 기자의 의도에 마지못해 따랐다.
“한 번은 강민호가 ‘여자친구를 구한다’는 공개구혼을 부탁했다. 대전 한화전을 중계할 때 ‘청취자 여러분. 네네. 강민호 선수가 여자친구를 구한다고 합니다. 네네. 많은 여성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하고 말했다. 주위에서 ‘재밌다’고 난리가 났다.” 순간 이 위원의 입가에 지문만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도 가장 잊을 수 없는 건 경남 창녕의 열혈팬들이다.”이 위원이 다시 먼 산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번엔 임수혁의 이야기 때와는 달리 표정이 밝았다.
“마산에서 롯데 경기를 하면 경남 창녕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선 KNN FM을 잘 들을 수가 없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포기할 텐데 창녕의 열혈야구팬 세 분은 항상 라디오랑 음식을 싸들고 산으로 오른다고 했다. 왜긴. 산에 올라가야 KNN 야구중계를 제대로 들을 수 있으니까. 중계탑 하나 세우면 해결될 일이지만 어디 그게 쉽나. 회사에서도 그분들의 열의가 고마워서 찾으려고 애를 썼다.”
어디 이 위원의 팬이 경남 창녕에만 있겠는가. 부산·경남인들이라면 누구나 ‘야구해설가는 이성득’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명성만큼 지역 내 정보망도 대단하다. 정보원 수만 치자면 웬만한 국가정보원 요원을 능가한다. 단적인 예가 정수근 음주폭행사건이다.
“7월 16일 오전 집으로 전화가 왔다. 목소리를 들으니까 모르는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내 팬이었다. 내 전화번호를 알기 위해 1달을 캐묻고 다녔다기에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까 ‘뭔가 제보를 하려고 했다’고 했다. 들어보니까 정수근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구장에 나가면 (정)수근이한테 쓴소리를 해야겠다 싶었는데 컴퓨터를 끄려는 찰나 인터넷에 수근이 기사가 떴다. 음주폭행으로 경찰에 붙잡혔다는.”
이 위원은 평소 “선생님”하며 자신을 따르던 정수근이 수갑을 차고 경찰서에 앉아있는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잘못은 잘못이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 다만 좀 더 일찍 수근이를 타이르지 못한 내 자신이 미울 뿐이었다. 지금쯤 동료들이 야구하고 있는 걸 보면서 지도(자기도) 얼마나 야구를 하고 싶겠나.”
이 위원은 롯데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비판도 주저하지 않는 해설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나름의 원칙이 있다고 했다.
“좋은 건 좋다고 하고 나쁜 건 나쁘다고 한다. 특히나 열심히 하는 선수들은 칭찬하기 바쁘다. 가끔 야구장에서 팬들이 그런다. ‘(손)광민이가 위원님 아들인갑지예. 너무 감싸주시는 거 아입니꺼(웃음).’ 그럴 수도 있지 싶다. 난 헝그리 정신으로 야구를 대하는 젊은 선수들이 좋다. 배장호 같은 투수 말이다. 얼마나 대견한가.”
'아, 김명성'
7월 11일 두산과 롯데의 경기가 열리는 사직구장. 어쩐 일인지 경기 시작이 코앞인데도 이 위원이 그라운드를 서성이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와는 달리 롯데 유니폼을 걸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이 위원이 공을 쥐고 마운드 위로 오른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일까.
“이 위원의 야구해설 1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구단에서 특별히 시구자로 모셨다.” 롯데 서정근 홍보팀장의 설명은 그랬다. 해설가의 시구라, 해외에선 간간히 있는 일이지만 한국프로야구에서 현역 해설가가 시구를 하기는 이 위원이 거의 처음이었다.
7월 11일 사직 두산-롯데전에 앞서 시구자로 나선 이성득. 롯데는 이성득의 따끔한 비판을 곡해하지 않고 수용한 구단이었다 |
따지고 보면 야구해설 10년은 대단한 업적이다. 몇몇 해설가를 빼곤 5년 이상 마이크를 잡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것도 한 방송사에서 10년을 넘기기란 꿈같은 일이다. 게다가 이 위원은 1998년 7월 11일 처음 마이크 앞에 선 뒤 10년이 되도록 1경기도 쉬지 않았다. 8월 2일 현재 이 위원은 1327경기 연속 중계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최태원(KIA 코치)의 현역시절 최다경기 연속출전기록(1014경기)과 비교될 만한 대기록이다.
이 위원은 이날 시구를 하며 두 사람을 떠올렸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중계를 할 수 있던 건 다행스럽게 시즌 중 집안에 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시즌이 끝난 뒤였다. ‘방송에만 집중하라’는 아버지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다른 한명은 누구였을까. “고 김명성 감독이다. 김 감독 생전에 내가 이런저런 비판을 많이 했다. 김 감독 지인들 가운데 교수들이 많았는데 내가 방송 중에 한 말을 김 감독에게 들려준 모양이었다. 하루는 김 감독이 날 보더니 ‘성득아, 니 내한테 너무 뭐라 하는 거 아이가’하면서 아쉬워했다.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 뒷머리만 긁었다. 그리고 이듬해 전반기가 끝났을 무렵. 갑자기 김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다도,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분이셨는데…. 지금도 그때 김 감독의 원망어린 시선이 생각난다. ‘성득아’하면서 부르던 따뜻한 목소리도 그립고….”
이 위원의 눈이 붉어지는 것과 때를 같이해 하늘엔 충혈된 달이 뜨고 있었다.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지난해 강병철 전 롯데 감독(히어로즈 2군 감독) 주변에는 항상 이 위원이 있었다. 두 사람은 매우 죽이 잘 맞는 파트너처럼 보이기까지 했는데 실제로 강 감독은 이 위원의 조언을 즐겨 듣곤 했다.
“강병철 감독? 우리가 또 의리하면 죽고 못 살지 않나. 흔히 여자들이 하는 것처럼 손이 많이 간 음식이 있으면 지금도 강 감독에게 보내드리고 있다.” 그러나 강 감독이라고 이 위원의 독설에 예외일 순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강 감독은 단 한 번도 이 위원에게 언잖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누가 강 감독한테 ‘이성득이 그러더라’하고 전달을 해줘야 하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강 감독은 나만 보면 항상 즐거워했다.”
이 위원은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 술과 담배를 멀리 했지만 “매경기에 집중하다보니까 신경을 너무 쓴 탓”이라는 게 이 위원의 자체 진단이다. 이 위원은 입이 아닌 온몸으로 중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 김명성 전 감독. 이성득은 지금도 김 전 감독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언제쯤 김 전 감독의 영정 앞에 롯데의 우승컵이 전시될 수 있을까 |
여기서 다소 의외의 사실을 공개한다. 이 위원은 카메라만 비추면 얼굴이 붉어진다. “라디오 중계만 해선지 카메라가 비추면 아직 어색하다. TV중계를 한다면 팬이 늘어날 것 같기도 하고 시청율도 좀 더 오를 것 같기도 한데 아직….”
언뜻 라디오를 떠나 TV로 진출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실제로 지난해 모 스포츠케이블방송사에서는 이 위원 영입을 긍정적으로 고려했었다. 그러나 이 위원이 ‘제안을 거부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흐지부지됐다.
“그렇지 않다. 아직까지 (TV 방송사에서)정식으로 제안이 온 적이 없었다. 다들 내가 어디로 옮길 생각이 없다고 단정한 모양이다. 꼭 그런 건 아닌데….” 이 위원의 웃음 뒤에 감춰진 진심이다.
이 위원은 앞으로도 지하에 흐르는 하천처럼 야구계 이면을 따라 끊임없이 흐르는 온갖 야구 이야기를 퍼 올려 야구팬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롯데는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나머지 7개 구단을 압도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부산·경남인은 이성득의 목소리를 통해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 소식을 가장 먼저 듣고 싶어할 것이다.
만세 삼창을 하며 “롯데가 우승을 차지해쓰요! 네네!”하는 이 위원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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