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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차문화의 산실인 화개골에는 융성했던 불교문화가 태동시킨 범패의 음곡이 서려 있는 쌍계사가 있다. 쌍계교를 지나면 쌍계사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石門"과 "雙溪"라는 글씨가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쌍계와 석문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글씨로, 지리산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화개골을 중심으로 해서 신선이 되고자 했던 고운 최치원 선생의 족적이 곳곳에 스며 있다. <br/>
쌍계사의 원래 이름은 옥천사였다. 신라 성덕왕 22년(732)에 삼법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을 모셔왔을 때 "강주(지금의 진주) 지리산 눈 덮인 산에 칡꽃이 만발한 곳"이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지금의 쌍계사 자리에 정상을 안치하고 이후 진감선사가 이를 봉안할 절을 중창하였다.<br/>
이 때의 절 이름은 옥천사였지만 정강왕이 두 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형을 보고 쌍계사라고 바꾸었다(886). 고운 최치원은 이를 기념해 자연석 바위에 쌍계, 석문 두 글을 새겼다.<br/>
매표소를 지나 숲속길을 조금 오르면 "삼신산 쌍계사"라 쓰여진 현판이 나온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면 최근에 세운 8각 9층 석탑이 있고 한계단을 더 올라야 대웅전이 나타난다.<br/>
대웅전 바로 아래에는 국보 제 47호인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있다. 쌍계사를 크게 중창한 선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도탑비로 최치원이 쓰고 환영스님이 새긴 2천 4백 17자가 음각되어 있다. 이 비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금석문 가운데 으뜸으로 평가받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의해 파괴되고 또 한국전쟁 와중에 토벌대와 빨치산의 총격에 의해 총탄자국이 생겼지만 대체로 온전하게 글자를 판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진감선사의 부도탑은 부도탑비와 떨어진 왼편 산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br/>
경내에는 대웅전, 설선당, 팔영루, 고승당, 금당, 육조정상탑, 적묵당, 팔상전, 청학루 등의 많은 당실이 있으며 이 중 대웅전, 설선당, 하영룽, 일주문 등의 당실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소실된 것을 전란 후 비교적 일찍 재건한 건물이다.<br/>
쌍계사는 국보 1점, 보물 3점,의 지정문화재와 일주문, 청왕상, 정상탑, 사천왕상, 경판 등 많은 문화유산이 있으며 국사암, 불일암 등 속암이 있다. 국사암은 삼법선사의 유지에 따라 진감선사가 개창한 유서깊은 곳이다.<br/>
국사암은 불일폭포로 가는 등산로를 따라 약 2백m가량 내려가면 나오는 조그만 암자이다. 별다른 특징은 없지만 입구에 있는 사천왕수라는 큰 거목이 있는데 진감국사가 심은 나무이다. 사방으로 뻗은 네가지의 사천왕수는 여성의 하반신을 빼어 닮아 많은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br/>
국사암 가는 삼거리에서 불일폭포로 걷다보면 넓은 바위가 나오는데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놀았다는 환학대이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불일평전, 불일휴게소라 불리는 아담한 집이 나온다. 휴게소 정원에는 한반도 모양을 한 조그마한 못이 있는데 반도지라 불리며 바로 곁에는 아기자기한 돌탑이 가꾸어져 있는데 소망탑이라 한다.<br/>
휴게소에서 2백m 비탈길을 내려가면 지리십경 중 하나인 불일폭포를 만날 수 있다. 거대한 물줄기가 중간의 학연에서 한숨 돌려 다시 똗아져 내려온다. 사방이 석벽으로 원통형 수직 직벽 위로 하늘마저 간신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불일폭포는 지리산에서 가장 큰 폭포이다. 높이 60m 폭 3m의 상하 2단으로 된 폭포인데 위쪽에 소가 있는데 학연이다.<br/>
여름철 거대한 물줄기를 흘러 보내지만 겨울철이 되면 그 물줄기가 그대로 얼음이 되어 버려 빙벽등반가들의 훈련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br/>
폭포의 오른 쪽에는 옛 불일암터가 있다. 83년 건물이 완전히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이 절에서 수도했다고 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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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왕자가 성불했다는 소식이 김수로왕과 허황옥께 전해졌다. <br/>
왕과 왕후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일곱왕자를 찾아 지리산 운상원으로 찾아 왔다. 그러나 칠왕자의 스승이자 외삼촌이신 범승 보옥선사는 불법의 엄한 계율에 따라 대면을 시키지 않았다. 대신 경내에 있는 연못을 지켜보라했다. 과연 연못 속에는 성불한 일곱왕자의 금빛 찬란한 모습이 비쳐졌다.<br/>
이것은 칠불사의 탄생 설화로 수로왕 62년, 신라의 파사왕 24년, 서기 103년 8월 보름이다.<br/>
칠왕자의 모습이 비쳐진 연못은 영지, 칠왕자가 수행하던 운상원은 지금의 칠불사, 당시 수로왕이 머물던 곳을 범왕사, 허황옥이 머물던 절을 대비사, 3정승이 기다리던 곳은 삼정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지명으로 굳어졌다.<br/>
가락국의 수도인 김해와 상당한 거리에 있는 지리산에 가락국의 역사 흔적이 곳곳에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찬란한 불교문화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진 가락국 왕조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는 측면에서 칠불사는 의미가 큰 사찰이라 할 수 있다.<br/>
신라에서는 법흥왕 15년(서기 528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후 16년만에 지리산에 화엄사와 연곡사를 지어 불교중흥에 나섰지만 가락국은 신라 눌지왕 36년인 서기 452년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가락국은 최소한 신라보다 한 세기 앞서 지리산에 칠불사를 지었다고 볼 수 있다. 가락국의 역사연구가 답보상태에 있는 지금 이러한 사실은 하나의 비사로만 남아 있지만, 사천 곤양의 다솔사와 함께 칠불사는 남방불교전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br/>
칠불사는 지리산의 중봉격인 반야봉에서 출발한 거대한 혈맥이 남쪽으로 40여리 뻗어내린 해발 83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br/>
가락국 불교는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 공주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동으로 오면서 전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은 수로왕의 왕비가 된 뒤 왕자 열명과 공주 둘을 낳았는데 태자 거등(居登)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 석(錫)왕자, 셋째 명(明)왕자는 어머니 허왕후의 성을 이어 김해 허씨의 시조로 봉해졌다.남은 일곱왕자는 허왕후의 오빠인 인도승려로 가락국에 온 보옥선사(장유화상이라고도 함)를 따라 승려가 되었다. 칠왕자는 보옥선사를 따라 합천 가야산에서 3년 수도 후 산음(지금의 산청) 휴식재를 넘어 의령 수도산, 자굴산, 사천 와룡산과 구룡산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t서기 101년 지리산으로 들어와 반야봉 동남의 주능선인 토끼봉 아래에서 운상원을 짓고 수도생활을 시작했다.<br/> 그리고 2년 여의 피나는 수도생활 끝에 달밝은 어느날 밤 드디어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광불, 당불, 상불, 행불, 향불, 성불, 공불 등 일곱부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br/>
일곱왕자를 성불시킨 보옥선사는 거문고의 명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불교음악 범패가 쌍계사에서 태동했지만 실상 범패의 기원을 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반영한다.<br/>
신라 영덩왕 때는 옥보고가 이곳에 입산하여 50년간 거문고 곡 30곡을 지었다. 그 비법을 제자 명득에게 전하였고 명득은 귀금에게 전수하였다.<br/>
칠불사에서 주목할 것은 세계건축대사전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는 벽안당 아자방이다. 아자방은 운공선사가 당안에 아자방울 축조하였고 칠불선원 사적기에는 신라 지미왕 8년(119)에 벽안당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서산대사가 좌선하고 순조 28년(1828) 대은선사가 율종을 수립하였다.<br/>
칠불사 아자방은 많은 전설도 남기고 있다. '목마 탄 사미승'이야기가 그 대표적이다.<br/>
조선 중기때의 이야기다. 새로 부임한 하동군수가 쌍계사로 초도순시 차 왔다가 그 말사인 칠불암에 있는 아자방 선원이 보고 싶었다. 외인의 출입을 금했지만 군수는 억지로 선방문을 열게 하였다. 늦봄이기 때문인지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들은 혹은 천장을 쳐다보며, 혹은 고개를 떨구고, 혹은 좌우로 흔들거리며, 혹은 방귀를 뀌면서 졸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돌아온 군수는 이들을 혼내 줄 심산으로 '목마를 타고 동헌 마당을 돌면 후한 상을 내리고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준다'면서 쌍계사에 통문을 띄웠다. 통문을 받은 쌍계사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묘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 한 사미승이 자신이 이 일을 맡겠다며 다른 스님들에게 목마 만들어 주기를 부탁했다.
스님들이 만들어 준 목마를 메고 하동 관아로 간 사미승은 자신이 그것을 타고 동헌을 돌아보겠다고 군수에게 이야기했다. 군수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자신이 아자방에서 본 것을 사미승에게 이야기했고 거기에 따라 사미승은 답변하였다. "칠불암에 도인이 많다더니 내가 접 때 가보니 참선한다는 중이 모두 졸기만 하더구나." "도인이라고 하여 특별한 사람은 아니지요." "천장을 쳐다 보며 졸고 있는 것이 무슨 공부란 말이냐?" "앙천성수관(仰天星宿觀)이지요. 하늘을 우러러보며 별을 관찰하는 공부로 상통천문(上通天文) 하여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조는 자는?" "지하망명관(地下亡命觀)이지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되는데 그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이지요. 있음과 없음에 집착해도 안되며 전후좌우 어느 것에도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달관의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귀는?" "타파칠통관 (打破漆桶觀)이지요. 사또같이 우매한 칠통배들을 깨닫게 하는 공부입니다." 말을 마치고 사미승은 목마를 타고 동헌 마당을 한바퀴 빙돌더니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br/>
아자방은 신라 때 금관가야에서 온 구들도사 담공선사가 만든 온돌로 넓이가 8평방미터, 방안의 네 구석에 70cm 높은 곳은 좌선처이며 중앙의 십자형 낮은 곳은 행경처인데 한번 불을 지피면 49일 또는 겨운 훈훈한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방은 100명이 좌선할 수 있으며 건축이래 한번도 보수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아자방에서 수도하여 득도한 스님은 수없이 많다.<br/>
그러나 1800년에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신선당 벽안당 미타전 칠불상각 보설루 요사 등 10여동의 건물이 불탔다가 복구되고 그 후 한국전쟁 중 지리산 공비와 내통했다는 의혹을 받아 다시 불타는 비운을 겪었다.78년에 다시 복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br/>
우리나라 근세의 다성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동사송을 지은 곳도 이곳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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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에 진주에서 서쪽으로 140리의 거리에 청학동이 있다고 했다. 지금의 청학동이라는 사람도 있고 불일폭포 근처라는 사람도 있고, 악양면 청학골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의 청암면 묵게리 학동마을을 청학동이라 지칭하는데 대해서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br/>
예로부터 지리산에는 유토피아, 이상향인 청학동이 있다고 많은 시인묵객과 은둔자(비결쟁이)의 글과 행적에서 나타나고 있고 또 오늘 날에도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에 드는 사람들도 있다.<br/>
청학동의 실존 여부는 증명된 바가 없지만 정감록을 비롯해서 이인로의 파한집 등 다수의 문헌에서 청학동이라는 개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청학동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된 것으로 보인다.<br/>
그러던 것이 지금의 청학동, 청암면 묵계리 학동마을은 생각보다 최근에 들어선 마을로 "유불선합일갱정유도(儒佛仙合一更正儒道)"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 교를 신봉하는 청학동 사람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머리를 땋고 상투를 틀고 흰 옷 도포자락을 입고 있다. 일명 일심교인 갱정유도교는 신흥종교로 교조는 전북 순창군 구림면 태생의 강대성(1890-1954)이다. 강대성은 39세때인 1928년 인생무상함을 느껴 처자와 함께 수도를 했는데 이듬해 7월 죽었다가 7일 후에 소생하여 도를 통하고 중일전쟁과 2차대전을 예언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국에체포되어 전주에서 옥사하여 교도들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1958년 서계룡이 교도 20여가구를 데리고 다시 들어와 이곳에 정착하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금 교주는 없고 서로가 형제라 칭한다.<br/>
유명세를 너무 타는 바람에 엣정취는 많이 사라져 버렸지만 20km에 이르는 청암계곡 덕택에 여름철 좋은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다.<br/>
지리산에서 청학동이라 지목되는 곳은 아주 많다. 지금의 청학동 도인촌, 악양 등촌리 청학골, 선비샘 아래 중봉골에 있는 상덕평마을, 구례의 피아골 지리산 세석평전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악양 등촌리 청학골이 진짜 청학동이라고 악양사람들은 주장한다. 모두 정감록과 여러 문헌속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설정된 것이다.<br/>
지리산에서 청학동을 찾아 나선 최초의 사람은 고운 최치원선생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기록에 의한 것이다. 최치원은 청학동을 삼신동의 개념으로 파악했다. 신라말 혼란한 나라의 상황을 뒤로 한 채 가야산과 지리산을 전전하면서 은거하다 짚신만 남기고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이 파악한 이상향은 청학동이라기 보다는 삼신동으로 설정하고 쌍계사 부근에서 학을 타고 노닌 것으로 보아 청학동을 쌍계사가 있는 화개동천 부근으로 파악한 것 같다. 지금도 불일폭포 아래에는 최치원이 학을 불렀다는 환학대, 그리고 지금도 삼신동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br/>
고운 최치원 이후로 고려시대에는 선비 한유한이 이상향을 찾아 지리산을 찾아나섰다는기록이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지리산에서 이상향 청학동을 찾아 나섰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고려시대 쌍명재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이다. 여기서 "청학동"이 처음 등장하게 된다.<br/>
최치원의 삼신동과 이인로의 청학동 개념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청학동 개념보다 앞선 삼신동의 의미는 최치원이 말하는 삼신동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신선이 되어 영생한다는 의미로 풀이되고, 청학동은 정감록에서 등장하는 내용으로 보아 살면 무병장수하고 죽으면 신선이 된다고 풀이된다. 삼신동은 청학동에 비해서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br/>
이인로는 그의 파한집에서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 한다. 처음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봉우리와 골짜기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대방군에 이르는데 수천리를 서리고 얽혀 산주위를 둘러싼 것이 십여주나 되어 열흘에서 한달은 걸려야 그 끝 경게에 닿을 수 있다고 했다. 옛날 노인들이 서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그 사이에 청학이 있는데 길이 아주 좁아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하다. 기어서 수십리쯤을 가야 비로소 아주 넓은 곳에 다다른다. 주위가 다 양전옥토로 씨뿌리고 나무 심기에 알맞으며 그 안에 오직 푸른 학이 서식하고 있어 청학동이라 부른다 했다. 그러나 이인로는 스스로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고백했다.<br/>
이인로 이후 청학동에 관련된 기록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 김일손, 남명 조식의 두류산 기행문에서 등장한다. 저마다 최치원의 삼신동개념과 이인로의 청학동 개념을 근거로 해서 일부는 청학동을 확인하기 위해서,일부는 청학동을 전설적인 삼신동으로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규명해보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br/>
조선시대 두류산 기행문을 가장 만저 쓴 김종직은 "두류록"에서 청학동의 동쪽에 쌍계사, 서쪽에 화엄사가 있다고 했다.<br/>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지리산 기행문을 통해 불일폭포주변을 사람들이 청학동으로 부르고 있다며 그 현장을 살피고 청학동에 대한 비판을 기록했다.<br/>
조식은 명종 13년(1558) 지리산을 16일 동안 유람한 결과 불일폭포를 청학동이라 결론지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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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궁의 정확한 명칭은 지리산청학선원삼성궁이다. 청암면 묵계리 삼신봉 아래, 청학동 못 미쳐 있다. 청학동 1km 못미쳐 왼쪽으로 삼성궁으로 가는 안내판이 보인다.<br/>
삼성궁은 이 고장 출신 강민주씨(한풀선사)가 1983년 오랜기간 동안 건립한 환인, 환웅, 단군 삼성인을 모신 배달민족성전이다. 궁은 고조선시대의 수두를 복원한 모양으로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도장으로 삼았다.<br/>
수두란 곧 배달민족의 정통도맥인 선도의 맥을 지키며 선도를 수행하고 민족고유의 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 인개작공을 실현하는 민족대화합의 장인 것이다.<br/>
그 이념은 왕검성조의 큰 사상을 바탕으로자유롭고 평화롭게 광명정대를 누려온 그 위대한 우리의 얼과 뿌리를 되찾고 천지화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br/>
한풀선사가 70년대 제자들과 함께 1천여개의 다양한 솟대를 세우면서 자리를 잡았는데 모두 3천3백33개의 솟대를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br/>
청학동과 갈림길에서 등산로보다는 산책로에 가까운 길을 조금 오르다 보면 커다란 징을 걸어놓은 입구가 나온다. 징을 세번 치고 조금 기다리면 안내자가 나와서 맞이한다. 안내자를 따라 궁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짧은 설명과 함께 단군을 모신 천제단에 참배하는 순서를 거치고 구경할 수 있다.<br/>
약 3만여평의 땅에 전통가옥, 멧돌, 돌탑, 옹기 전시장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골동품이 신비스럽게 진열되어 있다. 돌탑들은 그냥 돌탑이 아니라 우리 전통의 솟대라는 것이다.<br/>
이곳에서는 해마다 개천대제를 올린다. 이 날은 북을 두드리고 말을 달리며 화을 쏘는 시범과 전통무예를 일반인들에게 선보이는 날이다. 평소에는 수행자들이 전통 무예를 연마하고 방학이나 휴가철에는 학생과 일반인들이 찾아와 배달민족학교에 참여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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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예전의 번화한 장터는 온데 간데 없고 한적한 시골장으로 변해버린 곳.<br/>
한 때는 노량에서 출발한 장사치 배가 섬진강을 따라 하동장에서 한몫 잡고 다음날이면 부푼 꿈을 가지고 화개장으로 모이던 곳. 험준한 지리산 화개재를 넘어 남원, 함양에서 모이고, 돌고지재를 넘어 등짐을 메고 덕산에서 장꾼들이 모이던 화개장터였다. 바다에서 나는 것, 땅에서나는 것, 산에서 나는 것 없는 것이 없던 화개장터가 오늘날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해 가는 장이 되어버렸다.<br/>
화개장은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장이었다.<br/>
가수 조영남씨의 노랫말 마따나 있을 것 다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그런 장이었다.<br/>
그러던 화개장이 교통의 발달과 높아진 하상에 의한 배운항 정지, 상설시장의 등장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시장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br/>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유명세 때문에 화개장터를 찾는 사람이 꾀나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막상 화개장터에 와서 화개장터가 어딨냐고 묻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br/>
"이게 무슨 화개장턴가?"하고 실망만 하지 말고 옛날 번창했던 화개장을 한번 그려 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된다.<br/>
화개장터는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수 많은 물줄기가 크게 모이는 대성골 물이 섬진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대성골이라는 이름은 지리산 남부능선의 물이 모두 모여든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성골을 따라 차를 타고 올라가면 신흥에서 좌회전하면 범왕리 칠불사 가는 길이고, 계속 직진하면 길이 끝나는 의신마을에 도착한다. 세석과 빗점골로 가는 등산로가 이곳에서 시작된다.<br/>
의신에서 세석까지는 10km. 이 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등산은 험난한 코스가 별로없이 비교적 평탄한 길이 계속된다. 남부 능선과 갈라지는 1,400m 갈림길에 못미쳐 조금 힘들 뿐 등산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조금 지루한 산행은 각오해야 하는 게 대성골 등반의 특징이다. 대략 오르는데 4시간30분에서 5시간은 걸리며 내려오는데도 3시간 30분은 각오해야 한다.<br/>
지리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한번쯤은 관심을 가져 보는 남부군 총책 이현상이 사살된 곳이 빗점골, 그리고 백선엽이 이끄는 토벌대에 의해 쫓겨 대성골로 모인 수 많은 빨치산 들이 불벼락을 맞고 죽어간 곳이 대성골이다.경찰기록에 의하면 약 1천명 정도, 정순덕의 증언에 의하면 1만명 정도가 대성골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어떤 기록이 맞는지는 따지지 말자(차후에 정리해서 올리겠슴).<br/>
대성골은 지리산 계곡 중에서도 가장 큰 계곡에 속한다. 그래서 섬진강에서 이어지는 대성골은 여름철 휴양인파로 몸살을 겪기도 한다.<br/>
지리산 대성계곡은 오랜 옛날부터 보기드문 기도처로, 가장 좋은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br/>
그러나 대성골은 온 산하가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변하기도 해 우리에겐 비운의 현장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대성골은 빨치산 투쟁의 최대의 비극으로 이 곳에서 수백여명의 빨치산이 몰살당했다. 정충제씨가 기록한 "실록 정순덕"과 이기형씨가 쓴 "죽음의 골", 그리고 이태의 "남부군"등모든 빨치산 기록들은 1950년대 초 지리산 일대에서 벌어진 군경과 빨치산의 처참한 격전을 기록으로 전해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성골의 비극이 가장 격렬하고 처절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br/>
이들 기록마다 빨치산 몰살 규모와 일시등이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그 시기는 1952년 1월 17일과 18일이 최대 격전기였으며 그 해 1월 한달동안이 백야전사령부 3기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1월 17일 무렵 지리산 온 골짜기는 함박눈이 퍼붓고 있는 가운데 날이 저물자 빗점골, 거림골, 신흥등지에 있던 빨치산이 대성골로 모였다. 다음날 새벽무렵 눈덮인 대성골에는 적게는 1,000명에서 많게는 1만명에 이르는 빨치산이 모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br/>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지리산 곳곳에서 모여든 빨치산은포위되어 수백명이 처참한 최후를 맞은 사실이 전해진다. 당시 몰살 당한 빨치산의 규모는 각 기록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1952년 1월께 남은 빨치산 수를 미뤄볼 때 이기형씨의 "죽음의 골"에 나오는 수백명(대략 800여명)이 근사치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 견해이고 또 어떤 기록에는 죽은 빨치들 중 노역에 동원되어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원통한 죽음일 수 밖에 없다. 빨치산 몰살 사건이 이 곳 대성골에서 이뤄진 것은 대성골이 갖는 지형적 특성 즉 지리산 계곡중 대성골이 가장 깊은 협곡인데다 지세가 험난해 도피하기엔 안성 맞춤이고 따라서 궁지에 몰린 빨치산이 이곳으로 숨었고 때마침 토벌대의 정보와 작전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지만, 정순덕에 의하면 토벌대의 치밀한 작전으로 모든 도주로가 차단되고 오직 대성골로 가는 길만 터 놓았기 때문에 빨치산들이 이곳에 모이고, 이어서 항공기를 동원한 폭격이 가능했다고 한다.<br/>
원래 대성동은 이곳에서 4km 더 들어간 곳에 있었으나 60년대 후반 정부의 배려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4km 위의 집터가 있는 곳을 원대성이라고 부른다. 대성동에는 대성골이 으뜸 기도처임을 입증이라고 하듯 지금도 아무 하는 일없이 정신수양을 하거나 요양을 위해 장기간 민박하는 사람이 10여명이 된다고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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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hadong.pe.kr/tourist/6-to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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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송림은 하동읍 광평리 섬진강변에 있다. 3백여년생 소나무가 울창한 8천여평의 송림은 기게 뻗은 백사장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처럼 곱다. 파란 섬진강의 물결이 어울리며 굽이도는 흐름엔 향수가 어린다.<br/>
하동군 소유로 되어 있는 송림은 조선 영조 22년(1745년)에 하동도호부사 전청상이 방풍, 방사용으로 심었는데 당시의 식재구역은 현재의 하동종합고등학교와 하동중,하동여자고등학교와 광평마을 일부까지였다.<br/>
그후 섬진강 홍수 방지를 위해 하동제방 제2호를 축조하면서 송림은 양단되고 제방의 바깥쪽은 학교와 주거지로 되었으며 제방안쪽의 7,881평의 송림에는 1,000여그루의 노송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간 상당수가 고사하고 현재는 900여그루만이 남아 있고 이것을 보호하기 위해 송림을 2등분하여 자연휴식년제와 보식을 실시하고 있다. 송림 속의 궁도장인 하상정엔 활 시위 소기라 고요를 깬다.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송림 서편에 주차장과 관광객을 위한 매점 센터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야영장이 있다. 송림과 아울러 맑은 섬진강의 물과 넓은 백사장은 시인 묵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최근들어 송림앞 백사장은 골재와 수중사 채취로 인하여날이 가룻록 유실속도가 빨라져 모래의 유실을 우려하고 있다.<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