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순창읍 옥천골 한정식 순창읍에 위치한 옥천골 한정식집은 20년 전통의 맛집이다 12000원/인당 한정식으론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지만 한상 푸짐하게 나온다 소고기 돼지고기 굴비등을 숯불에 구어서 맛이 좋고 다른 반찬도 가지수는 많아도 비교적 깔끔하게 나온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모두들 잘먹었다고 한다 역시 음식은 남도가 최고인것같다
[구례 화엄사]
화엄의 근본 도량 화엄사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 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며 민족의 영산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54년)에 인도에서 온 연기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율사와
도선국사에 의한 중건과정을 거치며 번성하다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인조14년(1636년)에 다시 중건되였다 화엄경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화엄사라 명명되었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각황전과
세련된 조각이 아름다운 4사자 삼층석탑,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기가 큰 각황전 앞 석등,각황전 안의 영산회괘불탱 등
4점의 국보와 대웅전 화엄석경 동.서 오층석탑등 4점의 보물을 비롯해 천연기념물 1004호로 지정된 올벚나무까지
빛나는 문화 유산을 간직한 천 년 고찰이다 화엄사 대웅전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달려있고 대웅전 건물보다는 각황전이
이절에서는 더유명하다
[각황전]
각황전(覺皇殿) 1702년에 완공된 현재의 각황전(국보 제76호)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2층의 건물이지만, 내부는 툭 트여 있는 통층으로 돼 있으며 각황전은 우리나라 사찰 옛 목조 건물 중에서는 가장 거대하다. 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장중하고도 세련된 기품, 그리고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각황전의 원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화엄사를 중수하면서 처음 전각을 지었을 당시는 석가모니의 등신불(等身佛)만한 황금 부처상인 장육존상을 봉안하고, 벽에는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두르고 ‘장육전’이라 불렀다. 부처의 몸을 일컬어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말한다. 당시에는 금색 장육불상을 모시는 신앙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 장육전은 다른 전각과 함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다. 이후 1636년 대웅전이 중건되고, 장육전은 1702년(숙종 28)에 중건되었다. 장육전 완공 후 숙종 임금은 이 전각에 ‘각황전’이라 사액했고 글씨는 당시 형조 참판이였던 성재(省齋) 이진휴(1657∼1710)가 썼다.
각황전 상량문 기록에 의하면, 각황전은 숙종의 아들로 나중에 영조가 되는 연잉군과 그 모친인 숙빈 최씨가 대시주자인 것으로 되어 있다. 각황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양쪽으론 아미타불과 특히하게 다보불을 모시고 여래 사이에는 지장보살,관세음보살,문수보살,보현보상을 모셨다 각황전이란뜻은 ‘왕을 깨우쳐 전각을 중건하게 했다’는 의미와 깨달음의 경지가 황제의 경지에 도달했다 의미라고 한다
[화엄사 석등]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1962년12월20일 국보 제 12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6.36m이다 한국에 현존하는 석등중에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도 가장크고 부분적으로 균열은 있으나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전해진다 이석등은 통일신라 헌강왕4년(860)에서 경문왕13년(873)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간주 이하가 상층부에 비해
대표적인 작품이다 석등은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불상을 모시는 불전 앞을 밝히는 석조물이다 불교에서 등불은 부처님의 진리를 비춰줌으로
중생을 착한길로 인도하고 탑과 불상앞에 등불을밝히면 내세에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기복적인 의미를 갖고있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求禮 華嚴寺 四獅子 三層石塔)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 위치한 천년고찰 화엄사. 사찰 뒤편 작은 언덕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다.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듯 생동감 넘치는 사자의 모습은 물론 기단과 탑신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들은 통일신라의 빼어난 예술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탑은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국내 탑중이 가장 아름답고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석탑 안에는 여승으로 보이는 조각상이 합장한 채 서 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석탑과 마주하고 있는 석등. 석등 안에는 무릎을 꿇고 손에 그릇을 든 채 있는 스님상이 앉아있다. 석탑과 석등 속, 마주한 남녀의 사연은 무엇일까. 석등 속 스님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석탑 속 여인은 조사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설화에 의하면 이 석등의 주인공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緣起)스님이며 탑 상층기단에 있는 스님상은 연기스님의 어머니로 출가한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는 효심이 지극한 연기스님이 어머니를 위하여 차를 공양하는 모습으로 이곳을 효대(孝臺)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설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화엄사 구층암(華嚴寺 九層庵) 구층암은 화엄사 대웅전 뒤쪽에 위치한 암자이고 천불전엔 천분의 부처님을 모신 암자이다 이암자은 야생 녹차가 유명한 곳으로 봄에 지리산에서 나는 녹차를 따서 직접 차를 만들어 지나는 길손과 참배객들에게 대접을 하고 있다 우린 일행은 날씨가 더워서 녹차를 마시지 않고 왔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선방에 앉아서
여유있게 차한자 마시고 오고 싶다 그리고 또 이절에서 유명한것은 선방의 기둥을 모과나무 기둥으로 만든것이 유명하다 이암자가 만들어진지 400년 가까히 되고 이정도 굵기의 모과나무라면 천년은 족히 된것 같은데 그럼 이 모과나무 기둥이 생과 사를 합쳐서 약 1500년정도라고 하니 놀라울 따릅이다 가공하지 않은 모과나무 기둥에 기대여 앉아서 여유롭게 녹차 한잔 마시면서 이기둥을 스쳐간 많은 군상들을 생각해보고 삶의 여유도 함게 누려 볼 날을 생각해보면서 구층암을 나섰다
[화엄사 구시]
무엇일까요?
생긴 것은 소먹이를 주는 여물통 비슷하게 생겼지만 여물통이 아니고 스님들 밥을 담는 화엄사 구시라고한다. 오늘날로 생각하면 큰 밥통이라고 생각하면되고 길이가 무려 7m나되는 거대한 구시통이다.
구시통의 표준어는 구유다. 구유는 가축의 먹이를 담아주는 큰 그릇이다. 예로부터 사찰에서는 구시 또는 구시통이라 불리었다. 1천여 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여 대중생활을 하는
사찰에서는 쌀을 씻는데 사용하거나 법회 등 큰 행사 때 밥을 비벼서 내놓는데 사용한 것으로 전해져온단다.
화엄사 대웅전 뒤뜰에 있는 구시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무슨 쪽배인 줄 알았다. 그렇게 큰 밥통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고. 이구시통에 밥을 비벼서 천여 개의 밥숟가락을 들고 천여 명의
사람들이 밥을 떠 먹는다고 생각하면 재미있다 이런 소중한 유물을 대중전뒤에 아무렇게 방치하는 것이 안타값고 이구시통은 싸리나무로 만든것인데,순천 조계산 선암사 구시가 크다고 하지만 그보다도 1.5배나 되는 규모여서 구시중에
가장 큰 이 구시는 쌀7가마의 밥을 담을 수 있는 용량이라고 한다 이 구시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염라대왕이 화엄사에서 싸리나무로 만든
구시를 보았는냐고 묻고는 이것을 보았다고 하면 좋은 곳으로 보내고 못보았다고 하면 그것도 못보았느냐면서
나쁜곳으로 보낸다고 하는 황당한 이야가도 전해져 온다 난 보았으니 좋은곳으로 갈 수 있을까??
[화개장터]
화개 장터는 해방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장터 중에 하나일 정도로 큰 시장이였으며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와 더덕을 갖고 나왔고,내륙의 구례,함야 사람들은 쌀,보리 같은 농작물을…그리고 여수,광양,남해들의 바닷가
사람들은 섬진강 뱃길을 따라 수산물을 갖고 올라왔다고 한다.또 보부상들도 생활용품을 가득 갖고 화개장터로 모였다고한다 그러나 교통과 유통구조의 발달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김동리 선생님의 소설 역마와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로 다시 알려져서 1997년부터 4년간에 걸쳐서 옛 모습을 복원하고 다시 장을 세웠다고한다 화개장터엔 온갖 약초와 농수산물과 음식점들이 많고 화개장터의 유래비와 조영남의 화개장터 노래비가 함게 있다 잠시 들려서 몇가지 물건들의 사서 광양으로 출발했고 요즘 화개장터 파출소엔 가수 조영남과 동명이인의 경찰이 근무한다고 해서 메스컴도 탔다
[POSCO 광양제철소 백운산 수련관] 전남 광양 백운산 중턱의 포스코 수련관은 산중턱 숲속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의 풍광과 공기가 정말 좋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수련관 주위를 둘러보니 계곡물도 흐르고 아이들을 위한 물놀이장 시설도 잘되어있다 포항제철소 백암수련관은 온천물이외에는 별다른 시설이 없지만 여기는 주변에 편백나무도 많아서 산림욕하기도
좋고 백운산 등산도 할수도 있다 산중턱 숲속에 수련관이 있어 백암과 달리 상가등이 없어 주당들은 술떨어지면 살곳이 없다
[이순신대교]
이순신 대교
광양제철소 부근과 여수사이에 놓여진 현수교로 그동안 국내의 현수교는 전부 외국의 기술과 장비 및 기술진에
의존해서 만들어?으나 이순신대교는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다리이며 세계에서 6번째로 현수교 기술
자립국이 되었다 이순신대교는 왕복 4차선,총길이 2,260M, 주탑과 주탑사이의 경관 거리 1,545M,주탑의 높이 270M의
(63빌딩249M,서울 남산 262M) 세셰적으로 멋진 다리가 광양시 금호동과 여수시 묘도 사이에 놓여져 있다 이순신 대교가 놓이기전에는 광양제철소에서 여수를 가려면 광영읍으로 해서 순천을 거쳐서 한참을 돌아서 가야햇지만 지금은 잠시면 여수를 갈 수 있어서 물류가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향일암 석문]
여수 돌산도 금오산 향일암과 원통보전사이에 있는 바위 터널이다 거대한 바위 사이에 한사람이 통행 할 수 있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터널 통로이다 일주문을 지나 이곳쫌이면 일반 사찰에는 천왕문 또는 불이문이 있는데 이 바위 터널을 천왕문 정도로
생각하면 될것같다 그러니까 이터널을 지나면 비로써 사바세계에서 부처님 세상 또는 이곳의 주법당이 원통보전이니까 극락세계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될것같다
[여수 돌산도 금오산 향일암]
여수 돌산도 금오산 향일암은 우리나라 4대 기도처중의 한곳으로 3대 기도처는 대구 팔공산 갓바위 설악산 봉정암,
남해 금산 보리암이고 4대 기도처가 향일암이라고 하며 사시사철 관광객과 기도객들의 발길이 끈기지 않는곳이다 향일암의 앞바다에 용궁이 있다고 하는데 향일암과 남해 금산 보리암 향일암 앞바다의 세존도를 삼각형으로 연결하고 삼각형의 중간이 용궁이라고 한다 향일암이 있는 금오산은 거북이가 불경을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상으로 바로 금오산 중턱에 향일암이 위치하는것이다 향일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 말사로 1500여년 전(선덕 여와 8년,의자왕 19년 서기 659년)원효대사가
현재의 관음전에 원통암이란 이름으로 창건 후 고려 광종 9년(958년)윤필대사가 산의 형세를 보고 금오암(金鰲庵)이라 개명하였고 이때부터 거북바위 신앙이 시작되였다 그뒤 조선 숙종때 인묵대사가 돌산 주민들의 논과 밭을 시주받아 관음전 아래에 대웅전을 짓고 금불상을 조상 봉안하였으며 암자의 이름도 해를 향하는 암자라고 향일암으로 변경을 했다고 한다 향일암은 200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12년 원형이 가깝게 복원을 햇는데 화재전에는 주법당이 대웅전이였는데 복원후에는 원통보전으로 현판을 바꾸어달았다 원통보전안에는 분명히 석가보니불을 주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을 모신 삼존불이 분명한데 원통보전이라니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원통보전이란 사찰에서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실 때 원통전 또는 원통 보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향일암을 복원하면서 이사찰의 역사를 원효대사가 원통전을 만들었다는 전설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았나 행각을 하니 절도 이제 너무 세속에 물들은 것 같아서 씀쓸햇다
[ 여수 시장 수산물 특화 시장]
여수시장 항구부근에 수사물특화 시장을 만들어 관광객을 상대로 다양한 수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포항의 죽도 시장과 같이 수산물을 회를 떠서 초장집에서 먹는 시스템으로 되여있고
어종은 포항보다 다양하지만 회값과 초장집은 조금 비싸고 매운탕값까지 받는다
비싸다는 농어와 자연산 광어 그리고 다양한 어패류를 함게 사서 점심 식사를 했다
[돌산대교]
여수와 돌산대교를 연결하는 현수교
[진남관]
여수 전라좌수영 진남관[ 麗水 全羅左水營 鎭南館 ]
전남 여수시 군자동. 국보 제304호.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에 속했던 건물. 여수8경 가운데 제4경에 속하며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4월 17일 국보 제304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건물이 있는 자리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인데 당시에는 진해루라는 누각이었다. 진해루가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 소실되자 1599년(선조 32) 삼도 수군 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李時言)이 전라좌수영 건물로
75칸의 거대한 객사를 지어 진남관이라 이름 짓고 수군의 중심 기지로 사용하였다. 후에는 역대 임금의 궐패(闕牌)를 봉안하고
군수가 망궐례를 올렸으며 국경일에는 군민들이 모여 봉도식(奉道式)을 거행하였다. 1716년(숙종 42) 불에 타버린 것을 1718년 전라 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다시 건립하였다. 1910년(순종 4)부터 50여 년 동안 여수공립보통학교와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교실로도 사용되었다. 정면 15칸, 측면 5칸, 건평 240평(약 780㎡)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로, 현존하는 지방 관아 건물로는 제일 크다. 높은 언덕 위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사괴석(四塊石)과 장대석(長臺石)을 섞어 쌓은 기단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놓고 둘레 2.4m의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평면 전체가 통칸으로 뚫려 있고 벽체도 없으며 창호도 달지 않았다.
[여수 석인] 임진왜란 당시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전해 오는 석조물이다.
원래 7개였다고 하나 6개는 없어지고,두건에 도포를 입고 팔짱을 낀 전형적인 문인 형상을 하고 있는
이 석상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 하나의 비석으로 당시의 의인전술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조선중기 돌 신앙으로서의 민속학적 가치와 조각
작품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라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
‘생태계의 고문서’,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 불리는 우포늪은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 늪지다. 1억 4,000만 년 전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 백악기에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고 낙동강 유역의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강물이 흘러들어
늪지와 자연호수들이 생겨나면서 우포늪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공룡 발자국 화석이
우포늪 인근 유어면 세진리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옛날부터 인근 주민들이 소를 풀어 키우던 곳이라 해서
우포(牛浦)라 불리기 시작했으며 무분별한 개발과 농경지 확장으로 인해 가항늪, 팔랑늪, 학암벌 등 10여 개의
늪이 사라졌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백조 도래지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는다.
현재 가로 길이 2.5㎞, 세로 길이 1.6㎞로 담수 면적 2.3㎢를 유지하고 있으며 1997년 생태계보존지역으로
지정되고 1998년 람사르조약에 의해 국제보호습지로 지정되어 보호·관리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전체 식물
종류의 약 10%인 430여 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그중 수생식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50~60%나 된다.
늪임에도 불구하고 우포늪이 맑은 물빛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수생식물들이 우포늪의 수질을 자연 정화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 순창읍 옥천골 한정식 순창읍에 위치한 옥천골 한정식집은 20년 전통의 맛집이다 12000원/인당 한정식으론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지만 한상 푸짐하게 나온다 소고기 돼지고기 굴비등을 숯불에 구어서 맛이 좋고 다른 반찬도 가지수는 많아도 비교적 깔끔하게 나온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모두들 잘먹었다고 한다 역시 음식은 남도가 최고인것같다
[구례 화엄사]
화엄의 근본 도량 화엄사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 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며 민족의 영산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54년)에 인도에서 온 연기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율사와
도선국사에 의한 중건과정을 거치며 번성하다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인조14년(1636년)에 다시 중건되였다 화엄경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화엄사라 명명되었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각황전과
세련된 조각이 아름다운 4사자 삼층석탑,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기가 큰 각황전 앞 석등,각황전 안의 영산회괘불탱 등
4점의 국보와 대웅전 화엄석경 동.서 오층석탑등 4점의 보물을 비롯해 천연기념물 1004호로 지정된 올벚나무까지
빛나는 문화 유산을 간직한 천 년 고찰이다 화엄사 대웅전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달려있고 대웅전 건물보다는 각황전이
이절에서는 더유명하다
[각황전]
각황전(覺皇殿) 1702년에 완공된 현재의 각황전(국보 제76호)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2층의 건물이지만, 내부는 툭 트여 있는 통층으로 돼 있으며 각황전은 우리나라 사찰 옛 목조 건물 중에서는 가장 거대하다. 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장중하고도 세련된 기품, 그리고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각황전의 원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화엄사를 중수하면서 처음 전각을 지었을 당시는 석가모니의 등신불(等身佛)만한 황금 부처상인 장육존상을 봉안하고, 벽에는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두르고 ‘장육전’이라 불렀다. 부처의 몸을 일컬어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말한다. 당시에는 금색 장육불상을 모시는 신앙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 장육전은 다른 전각과 함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다. 이후 1636년 대웅전이 중건되고, 장육전은 1702년(숙종 28)에 중건되었다. 장육전 완공 후 숙종 임금은 이 전각에 ‘각황전’이라 사액했고 글씨는 당시 형조 참판이였던 성재(省齋) 이진휴(1657∼1710)가 썼다.
각황전 상량문 기록에 의하면, 각황전은 숙종의 아들로 나중에 영조가 되는 연잉군과 그 모친인 숙빈 최씨가 대시주자인 것으로 되어 있다. 각황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양쪽으론 아미타불과 특히하게 다보불을 모시고 여래 사이에는 지장보살,관세음보살,문수보살,보현보상을 모셨다 각황전이란뜻은 ‘왕을 깨우쳐 전각을 중건하게 했다’는 의미와 깨달음의 경지가 황제의 경지에 도달했다 의미라고 한다
[화엄사 석등]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1962년12월20일 국보 제 12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6.36m이다 한국에 현존하는 석등중에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도 가장크고 부분적으로 균열은 있으나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전해진다 이석등은 통일신라 헌강왕4년(860)에서 경문왕13년(873)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간주 이하가 상층부에 비해
대표적인 작품이다 석등은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불상을 모시는 불전 앞을 밝히는 석조물이다 불교에서 등불은 부처님의 진리를 비춰줌으로
중생을 착한길로 인도하고 탑과 불상앞에 등불을밝히면 내세에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기복적인 의미를 갖고있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求禮 華嚴寺 四獅子 三層石塔)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 위치한 천년고찰 화엄사. 사찰 뒤편 작은 언덕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다.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듯 생동감 넘치는 사자의 모습은 물론 기단과 탑신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들은 통일신라의 빼어난 예술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탑은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국내 탑중이 가장 아름답고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석탑 안에는 여승으로 보이는 조각상이 합장한 채 서 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석탑과 마주하고 있는 석등. 석등 안에는 무릎을 꿇고 손에 그릇을 든 채 있는 스님상이 앉아있다. 석탑과 석등 속, 마주한 남녀의 사연은 무엇일까. 석등 속 스님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석탑 속 여인은 조사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설화에 의하면 이 석등의 주인공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緣起)스님이며 탑 상층기단에 있는 스님상은 연기스님의 어머니로 출가한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는 효심이 지극한 연기스님이 어머니를 위하여 차를 공양하는 모습으로 이곳을 효대(孝臺)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설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화엄사 구층암(華嚴寺 九層庵) 구층암은 화엄사 대웅전 뒤쪽에 위치한 암자이고 천불전엔 천분의 부처님을 모신 암자이다 이암자은 야생 녹차가 유명한 곳으로 봄에 지리산에서 나는 녹차를 따서 직접 차를 만들어 지나는 길손과 참배객들에게 대접을 하고 있다 우린 일행은 날씨가 더워서 녹차를 마시지 않고 왔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선방에 앉아서
여유있게 차한자 마시고 오고 싶다 그리고 또 이절에서 유명한것은 선방의 기둥을 모과나무 기둥으로 만든것이 유명하다 이암자가 만들어진지 400년 가까히 되고 이정도 굵기의 모과나무라면 천년은 족히 된것 같은데 그럼 이 모과나무 기둥이 생과 사를 합쳐서 약 1500년정도라고 하니 놀라울 따릅이다 가공하지 않은 모과나무 기둥에 기대여 앉아서 여유롭게 녹차 한잔 마시면서 이기둥을 스쳐간 많은 군상들을 생각해보고 삶의 여유도 함게 누려 볼 날을 생각해보면서 구층암을 나섰다
[화엄사 구시]
무엇일까요?
생긴 것은 소먹이를 주는 여물통 비슷하게 생겼지만 여물통이 아니고 스님들 밥을 담는 화엄사 구시라고한다. 오늘날로 생각하면 큰 밥통이라고 생각하면되고 길이가 무려 7m나되는 거대한 구시통이다.
구시통의 표준어는 구유다. 구유는 가축의 먹이를 담아주는 큰 그릇이다. 예로부터 사찰에서는 구시 또는 구시통이라 불리었다. 1천여 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여 대중생활을 하는
사찰에서는 쌀을 씻는데 사용하거나 법회 등 큰 행사 때 밥을 비벼서 내놓는데 사용한 것으로 전해져온단다.
화엄사 대웅전 뒤뜰에 있는 구시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무슨 쪽배인 줄 알았다. 그렇게 큰 밥통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고. 이구시통에 밥을 비벼서 천여 개의 밥숟가락을 들고 천여 명의
사람들이 밥을 떠 먹는다고 생각하면 재미있다 이런 소중한 유물을 대중전뒤에 아무렇게 방치하는 것이 안타값고 이구시통은 싸리나무로 만든것인데,순천 조계산 선암사 구시가 크다고 하지만 그보다도 1.5배나 되는 규모여서 구시중에
가장 큰 이 구시는 쌀7가마의 밥을 담을 수 있는 용량이라고 한다 이 구시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염라대왕이 화엄사에서 싸리나무로 만든
구시를 보았는냐고 묻고는 이것을 보았다고 하면 좋은 곳으로 보내고 못보았다고 하면 그것도 못보았느냐면서
나쁜곳으로 보낸다고 하는 황당한 이야가도 전해져 온다 난 보았으니 좋은곳으로 갈 수 있을까??
[화개장터]
화개 장터는 해방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장터 중에 하나일 정도로 큰 시장이였으며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와 더덕을 갖고 나왔고,내륙의 구례,함야 사람들은 쌀,보리 같은 농작물을…그리고 여수,광양,남해들의 바닷가
사람들은 섬진강 뱃길을 따라 수산물을 갖고 올라왔다고 한다.또 보부상들도 생활용품을 가득 갖고 화개장터로 모였다고한다 그러나 교통과 유통구조의 발달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김동리 선생님의 소설 역마와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로 다시 알려져서 1997년부터 4년간에 걸쳐서 옛 모습을 복원하고 다시 장을 세웠다고한다 화개장터엔 온갖 약초와 농수산물과 음식점들이 많고 화개장터의 유래비와 조영남의 화개장터 노래비가 함게 있다 잠시 들려서 몇가지 물건들의 사서 광양으로 출발했고 요즘 화개장터 파출소엔 가수 조영남과 동명이인의 경찰이 근무한다고 해서 메스컴도 탔다
[POSCO 광양제철소 백운산 수련관] 전남 광양 백운산 중턱의 포스코 수련관은 산중턱 숲속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의 풍광과 공기가 정말 좋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수련관 주위를 둘러보니 계곡물도 흐르고 아이들을 위한 물놀이장 시설도 잘되어있다 포항제철소 백암수련관은 온천물이외에는 별다른 시설이 없지만 여기는 주변에 편백나무도 많아서 산림욕하기도
좋고 백운산 등산도 할수도 있다 산중턱 숲속에 수련관이 있어 백암과 달리 상가등이 없어 주당들은 술떨어지면 살곳이 없다
[이순신대교]
이순신 대교
광양제철소 부근과 여수사이에 놓여진 현수교로 그동안 국내의 현수교는 전부 외국의 기술과 장비 및 기술진에
의존해서 만들어?으나 이순신대교는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다리이며 세계에서 6번째로 현수교 기술
자립국이 되었다 이순신대교는 왕복 4차선,총길이 2,260M, 주탑과 주탑사이의 경관 거리 1,545M,주탑의 높이 270M의
(63빌딩249M,서울 남산 262M) 세셰적으로 멋진 다리가 광양시 금호동과 여수시 묘도 사이에 놓여져 있다 이순신 대교가 놓이기전에는 광양제철소에서 여수를 가려면 광영읍으로 해서 순천을 거쳐서 한참을 돌아서 가야햇지만 지금은 잠시면 여수를 갈 수 있어서 물류가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향일암 석문]
여수 돌산도 금오산 향일암과 원통보전사이에 있는 바위 터널이다 거대한 바위 사이에 한사람이 통행 할 수 있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터널 통로이다 일주문을 지나 이곳쫌이면 일반 사찰에는 천왕문 또는 불이문이 있는데 이 바위 터널을 천왕문 정도로
생각하면 될것같다 그러니까 이터널을 지나면 비로써 사바세계에서 부처님 세상 또는 이곳의 주법당이 원통보전이니까 극락세계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될것같다
[여수 돌산도 금오산 향일암]
여수 돌산도 금오산 향일암은 우리나라 4대 기도처중의 한곳으로 3대 기도처는 대구 팔공산 갓바위 설악산 봉정암,
남해 금산 보리암이고 4대 기도처가 향일암이라고 하며 사시사철 관광객과 기도객들의 발길이 끈기지 않는곳이다 향일암의 앞바다에 용궁이 있다고 하는데 향일암과 남해 금산 보리암 향일암 앞바다의 세존도를 삼각형으로 연결하고 삼각형의 중간이 용궁이라고 한다 향일암이 있는 금오산은 거북이가 불경을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상으로 바로 금오산 중턱에 향일암이 위치하는것이다 향일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 말사로 1500여년 전(선덕 여와 8년,의자왕 19년 서기 659년)원효대사가
현재의 관음전에 원통암이란 이름으로 창건 후 고려 광종 9년(958년)윤필대사가 산의 형세를 보고 금오암(金鰲庵)이라 개명하였고 이때부터 거북바위 신앙이 시작되였다 그뒤 조선 숙종때 인묵대사가 돌산 주민들의 논과 밭을 시주받아 관음전 아래에 대웅전을 짓고 금불상을 조상 봉안하였으며 암자의 이름도 해를 향하는 암자라고 향일암으로 변경을 했다고 한다 향일암은 200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12년 원형이 가깝게 복원을 햇는데 화재전에는 주법당이 대웅전이였는데 복원후에는 원통보전으로 현판을 바꾸어달았다 원통보전안에는 분명히 석가보니불을 주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을 모신 삼존불이 분명한데 원통보전이라니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원통보전이란 사찰에서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실 때 원통전 또는 원통 보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향일암을 복원하면서 이사찰의 역사를 원효대사가 원통전을 만들었다는 전설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았나 행각을 하니 절도 이제 너무 세속에 물들은 것 같아서 씀쓸햇다
[ 여수 시장 수산물 특화 시장]
여수시장 항구부근에 수사물특화 시장을 만들어 관광객을 상대로 다양한 수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포항의 죽도 시장과 같이 수산물을 회를 떠서 초장집에서 먹는 시스템으로 되여있고
어종은 포항보다 다양하지만 회값과 초장집은 조금 비싸고 매운탕값까지 받는다
비싸다는 농어와 자연산 광어 그리고 다양한 어패류를 함게 사서 점심 식사를 했다
[돌산대교]
여수와 돌산대교를 연결하는 현수교
[진남관]
여수 전라좌수영 진남관[ 麗水 全羅左水營 鎭南館 ]
전남 여수시 군자동. 국보 제304호.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에 속했던 건물. 여수8경 가운데 제4경에 속하며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4월 17일 국보 제304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건물이 있는 자리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인데 당시에는 진해루라는 누각이었다. 진해루가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 소실되자 1599년(선조 32) 삼도 수군 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李時言)이 전라좌수영 건물로
75칸의 거대한 객사를 지어 진남관이라 이름 짓고 수군의 중심 기지로 사용하였다. 후에는 역대 임금의 궐패(闕牌)를 봉안하고
군수가 망궐례를 올렸으며 국경일에는 군민들이 모여 봉도식(奉道式)을 거행하였다. 1716년(숙종 42) 불에 타버린 것을 1718년 전라 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다시 건립하였다. 1910년(순종 4)부터 50여 년 동안 여수공립보통학교와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교실로도 사용되었다. 정면 15칸, 측면 5칸, 건평 240평(약 780㎡)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로, 현존하는 지방 관아 건물로는 제일 크다. 높은 언덕 위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사괴석(四塊石)과 장대석(長臺石)을 섞어 쌓은 기단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놓고 둘레 2.4m의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평면 전체가 통칸으로 뚫려 있고 벽체도 없으며 창호도 달지 않았다.
[여수 석인] 임진왜란 당시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전해 오는 석조물이다.
원래 7개였다고 하나 6개는 없어지고,두건에 도포를 입고 팔짱을 낀 전형적인 문인 형상을 하고 있는
이 석상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 하나의 비석으로 당시의 의인전술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조선중기 돌 신앙으로서의 민속학적 가치와 조각
작품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라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
‘생태계의 고문서’,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 불리는 우포늪은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 늪지다. 1억 4,000만 년 전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 백악기에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고 낙동강 유역의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강물이 흘러들어
늪지와 자연호수들이 생겨나면서 우포늪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공룡 발자국 화석이
우포늪 인근 유어면 세진리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옛날부터 인근 주민들이 소를 풀어 키우던 곳이라 해서
우포(牛浦)라 불리기 시작했으며 무분별한 개발과 농경지 확장으로 인해 가항늪, 팔랑늪, 학암벌 등 10여 개의
늪이 사라졌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백조 도래지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는다.
현재 가로 길이 2.5㎞, 세로 길이 1.6㎞로 담수 면적 2.3㎢를 유지하고 있으며 1997년 생태계보존지역으로
지정되고 1998년 람사르조약에 의해 국제보호습지로 지정되어 보호·관리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전체 식물
종류의 약 10%인 430여 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그중 수생식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50~60%나 된다.
늪임에도 불구하고 우포늪이 맑은 물빛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수생식물들이 우포늪의 수질을 자연 정화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