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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라(엡 6:5-9)
초대교회 당시의 노예들의 실상은 참으로 처참하였습니다. 인격은 전혀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가축과 같이 살아 있는 상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인에게 불복종하면 채찍질을 당하였고, 심한 경우는 십자가에 달렸으며, 맹수에게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 에베소서를 쓰고 있을 무렵에 로마에서 원로원 한 사람이 노예에게 피살당하였는데, 그 형벌로써 그의 노예 400명이 한꺼번에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죄악상에 어찌 기독교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세운 교회 중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고린도 교회에는 상당수의 노예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숫자의 성도들이 문자 그대로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들에서 노예에 대한 이런 특별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주경가 바클레이의 기록에 따르면 육천 만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로마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입니다. 막노동을 하는 사람은 노예였고, 물론 가정에서 부리는 가정부나 일꾼도 노예였고, 노동자도 노예였으며, 재미있는 것은 의사도 노예였습니다. 요즘은 의사가 아주 존경받는 직업입니다만 그 당시에는 의사도 노예였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교사나 교수도 당시에는 노예 계급이었고, 행정가도 노예였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일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제기하거나 반항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는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도 “야만인이 아닌 헬라 사람으로 태어난 것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노예는 살아 있는 기구일 뿐입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면 생명 없는 로봇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에게는 인격이나 인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노예는 동물과 똑같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때려도 괜찮고 감금하거나 화형을 시켜도 양심에 전혀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노예가 되는 과정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였습니다. 전쟁에서 지게 되면 많은 남자들이 죽고, 자유가 억압되고,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할 것 없이 모든 백성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비참한 현실이 옛날에는 있었습니다. 이들 포로로 노예가 된 사람 가운데는 말씀드린 대로 의사도 있었고, 교사도 있었고, 편지를 쓰고 재산을 관리하는 비서도 있었고, 목숨을 바쳐 상전과 구경꾼들을 즐겁게 하는 검투사도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죄수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빚 때문에 팔려서 노예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단 노예가 되면 그 사람은 물건으로 대우받게 됩니다. 따라서 노예가 도망을 치면 죽음이 있을 뿐이고, 최선의 경우 이마에 도망자라는, 당시 로마 단어로 ‘F’라는 낙인이 찍혀져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로마 사회에서 살아가는 노예들 가운데 적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기독교인 종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섬김의 생활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사회적 정의로는 종이나 노예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성경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기독교인의 직장 윤리를 잘 가르치고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기독교인이 피고용자로서 남의 직장에서 일을 할 때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그리고 고용자로서 기독교인은 자기 밑에서 일하는 부하 직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흔히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일을 시켜보면 너무 이론이 많고 말과 원망과 불평이 많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부정적인 평가가 얼마나 정당한지는 모릅니다. 또한 예수 믿는 사람 밑에서 일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너무 여유가 없고, 임금도 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한 불만이 어느 정도 정당한 근거를 가지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종과 상전의 처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아멘.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이 말은 굽신거리고 아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인을 주인으로 알고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 2:3절에서 사용한 말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했는데, 바울이 왜 두려워했습니까?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떨게 만들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두려움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다가 잘못 전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그것을 범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두려워하고 떨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복음을 설교하는 일을 아주 심각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리로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면 그는 결코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처럼, 주인을 존경함으로, 사랑함으로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바른 눈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눈 팔지 말고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에 따르면 성실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 하지 않는 행위를 말합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두 가지는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는 자기 양심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성실하게 한다는 말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오늘 세대의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경우를 예사로 합니다. 무슨 이유로든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변명하고 합리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속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속지도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온 모세는 광야에서 열두 명의 정탐군을 가나안에 보냅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이 주신 땅이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자”고 긍정적인 보고를 했음을 우리는 압니다. 먼 훗날, 세월이 지나 갈렙이 85세가 되었을 때, 가나안 땅을 분배하게 되었는데, 그때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다”(수 14:7)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헬라어로 ‘성실하다’는 말은, 종이를 말할 때, 두 장이 아니라 단 한 장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맡은 일을 감당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종은 성실한 마음으로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맡겨진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이 있을 때에나 없을 때에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맡은 일을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맡은 일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으로서 기독교인의 올바른 삶의 자세일 뿐 아니라, 남의 직장에서 일하는 현대 기독교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16세기 초에, 영주 한 사람이 산책을 하다가 한 청년 정원사가 나무들을 열심히 손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아하니 정원의 나무만 잘 가꾸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나무 화분에다 조각을 하여 예쁘게 꽃무늬를 새기고 있었습니다. 가상히 여긴 영주가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가 그런 일까지 한다고 해서 임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정성을 들이고 있는가?”
청년은 대답합니다.
“나는 이 정원을 사랑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시간이 남으면, 더 아름답게 만들어보기 위해 이 화분에 꽃무늬를 조각해보고 있는 것입니다”
영주는 그 청년의 마음씨가 하도 성실하고, 손재주도 있는 것 같아서, 자기 집에 불러다가 조각 공부를 시켰습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조각공부를 한 결과, 그 청년은 위대한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그 청년 정원사가 바로 미켈란젤로입니다. 그의 성실성이 그를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해준 것입니다. 이처럼 성실한 사람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윗상이나 모세상을 보면 앞부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뒷부분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훗날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를 불러 유명한 시스틴 성당의 천지창조 벽화를 그려 달라고 의뢰했습니다. 그는 거꾸로 누워 4년 동안 천장만 바라보며 벽화를 그리는 일에만 자신의 열정과 땀을 모두 쏟아 부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전 인생을 바친 벽화가 완성되었는데, 그는 여전히 천장에 붙어서 계속 작은 선을 그려 넣고 있었습니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어느 추기경이 성당에 들어와 둘러보더니 “그림이 다 완성되었는데 뭘 그리는가? 내가 볼 때는 다 끝났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내가 볼 때는 끝났을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직 안 끝났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시편 31:23절을 보면,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열왕기상 3:6절을 보면, 솔로몬이 말하기를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실함으로 섬기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성실히 행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풍성한 복을 모두 다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아멘.
골로새서 3:22절에도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고”
소위 보는 데서만 일하는 체 하는 눈치작전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의 종된 기독교인이나 오늘날 직장에서 일하는 기독교인에게나 다 해당되는 말일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눈가림으로 일하는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눈치작전만 펼치는 사람, 말로 일을 때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두 싫어하십니다.
주경학자 바클레이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그들이 하는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다른 말로 하면 “목숨을 다하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는 말은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라는 뜻입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식으로 주어진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그 일을 안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해도 안될 것입니다. 일을 하되 얼굴을 찌푸리고 합니다. 기분이 나빠서 뾰루퉁해서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무슨 일을 맡아서 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목숨을 다하여” 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해야 합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해야만 할 때 마지못해 그 일을 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마시고, 마음을 다하여, 심령을 기울여 정성껏 하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아멘.
“기쁜 마음으로”
“기쁜 마음”이 무엇입니까? 다른 번역에 따르면, 기쁜 마음을 친절한 마음 혹은 준비된 마음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을 보면,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섬기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할 때 죽지 못해서,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성도된 종은 주인이 요구하는 일을 할 때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주인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것, 사명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교회 일만 주님이 맡겨 주신 것이 아니라 직장생활 또한 주님이 허락하여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 위해 그 몸이 찢기시고, 그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값으로 산 바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깨닫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매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부분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거기서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전도의 열매를 맺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주께 하듯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일터에서 신용을 잃고, 불친절하고, 게으르고, 되는 대로 진심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독교를 깎아내리는 나쁜 간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입니다. 세상 사람은 최소의 일을 하고 최대의 보수를 요구합니다. 일에서 빠져나올 기회만 있으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만일 주인이 거기에 없으면 일하는 시늉만 내고, 주인이 갑자기 나타나면 눈에 띄게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와 정반대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큰 해를 끼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언제나 맡은 일을 잘 해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맡은 것에 무관심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큰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주목하여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서 보는 바를 가지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판단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이 그가 속해 있는 곳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는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 다섯 달란트 맡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더 유능할 수도 있습니다. 뛰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든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선을 다해 최대로 발휘한다면, 그는 아마 큰 능력을 가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맡았으면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언제나 부지런해야 합니다. 언제나 정직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언제나 믿을 만하고, 사랑할 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없고 특수한 기술이 없고, 권력이 없고, 돈이 없는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잘못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용있는 사람, 믿을 만한 사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야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종들아,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그 일이 무엇이든지 맡았으면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 너희가 종일지라도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실례를 많이 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하나였지만 이방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서 일하든지 총애를 받게 되었고, 승진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보디발 장군 집에 있을 때 총무로 승진했고, 감옥에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환경과 조건에 있든지, 언제나 거기에서 총애를 받았습니다. 경건하게 무슨 일에든지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환경과 조건에 있든지,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께 하듯”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나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가 발견한 위대한 진리입니다. 그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위대한 교리를 깨닫게 될 때 모든 입장이 바뀌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하녀가 방을 쓰는 것으로도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꼭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눈가림만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단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누가 우리가 일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나는 이렇게 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 이 사람은 무슨 일이든 맡으면 최선을 다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나도 예수 믿으면 이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종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합니다. 아내가 요리할 때는 그리스도께 대접하듯 요리해야 합니다. 청소할 때도 그렇습니다. 손님을 대접할 때도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칠 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울 때 내가 높은 위치가 있고 명령 내릴 수 있는 위치가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쥐고 흔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학생이기 때문에, 내 권위 밑에 있기 때문에 내가 마음대로 쥐고 흔들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쁜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 함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아멘.
“위협을 그치라”(공갈을 그치라)
높은 자리에 있다는 그것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아래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습니다. 말이나 행동으로 위협을 가하지 말 것을 성경은 명령합니다.
물론 본문 말씀은 1세기의 로마 사회에서 살고 있던 노예된 기독교인과 노예를 부리는 기독교인 상전들에게 주신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우리가 살펴보는 대로 21세기의 종말을 살아가며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현대 기독교인의 고용주와 피고용자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가져야 할 직장 윤리를 제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적인 교훈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더욱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신앙으로 결단한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복음의 종들입니다.
베드로전서 3:15절을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면 나는 종이 됩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위대한 결단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프란시스코는 무신론자인 친구 앞에서 이렇게 맹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눈을 뜨게 해준다면 내 명령에 순종하겠소?”
맹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어디 순종뿐이겠습니까? 평생 선생님의 충실한 노예가 되어 섬기겠습니다”
프란시스코는 무신론자인 친구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이 맹인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면 평생 노예가 되겠노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자네는 밝은 눈과 명석한 두뇌를 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인가?
친구는 그제서야 프란시스코에게 굴복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종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가 주인이 되고 자기가 예수의 종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마에 예수의 종이라는 낙인을 찍어두기를 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7절을 보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 즉, 낙인, 불도장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원 얻은 모든 성도의 결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종의 자세는 한 마디로 예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종으로서 다른 성도를 섬겨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종된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눈가림만 하지 말라”, “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
여러분! 우리는 완전한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무디 목사님께서 “사람의 크기는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기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너무 크고 높아서 사용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을 원하시지 참모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휘덤 목사님이라는 분이 천국을 방문해서 박물관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무명의 성도가 쓴 깨어진 갑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교황의 반지도, 루터가 마귀에게 집어 던졌다고 하는 그 유명한 잉크병도 없었습니다. 대신에 그곳에는 과부가 드린 동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망치와 세 개의 못과 그리고 가시 면류관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한때 식초에 깊이 담갔던 해융과 은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잔이 아주 귀하게 진열되어 있음도 보았습니다. 그때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천국 박물관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사용했던 그 귀한 대야와 수건은 어디에 진열되어 있습니까?”
그때 안내자는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여기에 없습니다. 당신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그것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사용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종이 많은 교회는 사랑이 넘치고 부흥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전이 많은 교회는 누가 대접을 더 많이 받느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자기의 일을 계속할 종들을 필요로 합니다. 주인인 예수님께 대한 존경심과 자기 자신에게 성실과 눈가림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이 맡기시는 발 씻김의 일을 감당할 충성스러운 종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과 성도들을 섬길 종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 한믿음 교회는 과연 누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말도 없이, 이 섬김의 도리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종이 될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주님을 섬기듯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갈 때에,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복이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주의 종들이 되게 하옵소서.
눈가림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