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이것이 철학의 마음이다.
물이 담긴 투명한 컵에 젓가락을 넣으면 휘어져 보인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휘어져 보이는 것들이 많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산도 돈으로 보고, 물도 돈으로 보고, 사람도 돈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하나님 마저도 돈으로 보려고 한다.
이렇듯 본질(아르케)이 다 휘어져 있는 가운데 우리는 컵에서 젓가락을 꺼내 휘어지지 않은 그 본질을 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고 싶어 한다. 이것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본질을 사모하는 마음이며, 이것이 철학의 마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필요를 위해서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 자체에 철학하는 마음이 있기에 철학하는 것이다.
*강영안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철학을 피하기 위해서도 철학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철학을 알지 못하면 거의 예외 없이 어떤 철학에 붙잡혀 있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사회 운동가들, 신학자들, 목회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어떤 철학을 따르는 것보다 이런 경우가 더 해로울 수 있습니다.”
철학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지적이고 이론적이며 반성적인 작업이다. 파스칼은 "철학을 조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철학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철학을 조롱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철학의 밑바탕인 이성을 절대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철학을 절대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사실 이성을 절대시하지 않을 때 가장 이성적일 수 있고, 철학을 절대시 하지 않을 때 가장 철학적일 수 있다.
철학은 사람의 생각이다. 한 철학자의 생각이 아무리 고매하다 해도 그것은 완전하지 않고 부분적이며 흠이 있다. 또한 철학이란 학문이 본래 비판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철학 그 자체에 파묻히면 철학을 비판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철학적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철학이 없다"라는 것도 하나의 철학인 것이다. 그런데 강영안 교수의 표현대로 플라톤을 전공하면 플라톤주의자가 되기 일쑤이고, 하이데거를 공부하며 하이데거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 철학이 주는 의미가 아무리 크더라도 절대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참된 철학적 자세일 것이다. 이처럼 철학의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철학을 알아야 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골 2:8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마치 하루가 거기에 죽어가기라도 하듯이 저녁을 바라보라. 그리고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기라도 하듯이 아침을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
감탄이 있으면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늙어서 감탄과 감사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다. 감사와 감탄을 잃어버려서 늙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하늘의 음식인 ‘만나’를 내려 주었다. '만나'는 히브리어 '만후'에서 나온 말로 "이게 뭐지?"라는 뜻이다. 이런 감탄어가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먹으면서 신이 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에게, 이게 뭐야!"라고 불평한다. 처음에는 감탄사였던 '만나'가 불평과 원망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게 웬 떡이야!" 하다가 "어제도 스팸 (통조림 햄), 오늘도 스팸!" 하면서 원망한 것이다. 만나를 가리켜 시편 기자는 '힘센 자의 떡'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시 78:24.25
영어 성경은 'angel's food, 즉 천사의 음식, 하늘에서 온 신령한 양식이라는 뜻이다. 만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상징이었다. 이렇듯 귀한 하나님의 만나를 스팸으로 취급해 버리고 원망하는 인간의 교만함과 죄성을 보라.
감탄과 감사를 잊기에 늙어가는 것이다. 감탄과 감사를 잊을 때 교만해진다. 감탄과 감사를 잃어갈 때 철학함이 없어진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감탄과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시 14:18
하나님이 배제될 때 인간의 시선은 오직 인간 자신에게 맞추어진다. 인간이 인간만 바라보면 답이 없다.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넘어선다. 인간은 세상보다 더 크고 인간보다 더 위대하다. 인간에게는 무한, 영원을 사고하는 마음이 있다.
이는 인간 이상의 것이다. 마스칸에 의하면 철학자들은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겸허히 머리 숙여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서 자신의 참된 위치를 발견하라고 한다.
인간이 아르케에 대해 깊이 질문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넘어선 존재, 즉 그 가슴 속에 '영원'과 '무한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원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가? 바로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 3:11
그렇다 하나님이 '아르케, 즉 '영원'에 대한 마음을 주셨다. 인간은 동물을 넘어선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은 인간과 동물이 차이가 없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렇지 않다. 인간은 동물을 훨씬, 훨씬, 훨씬 넘어선다. 또한 인간은 인간을 넘어선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서 그 마음에 인간 이상의 것 '영원'이 심겨 있다. 그래서 인간은 질문 중의 최고의 질문인 영원,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자, 다시 한 번 읽어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너무나 신기하고 통쾌한 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태초'가 지금껏 말해왔던 철학의 아르케와 동일한 단어라는 것이다. 창세기의 ‘태초’는 히브리어로 '베레쉬트'인데, 이를 LXX(70인역)은 아르케로 번역했다. 하나님은 왜 성경을 ‘태초에’라는 시작하셨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의 모든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내용을 이끌어가는 기관차 구절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창세기인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018
이 구절의 '태초'도 역시 '아르케'이다. 하나님은 영원에 대한 질문, 즉 철학자들이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아르케'를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가르쳐주고 계신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르케는 하나님이!"
그리하여 철학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마침내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참 눈물 나는 구절이다. 깊은 고난을 당해 본 사람이 이 구절을 읽고 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 또한 깊은 고난을 경험했고,하나님의 긴 침묵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으며 “아멘,믿습니다!”라고 수없이 외치며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욥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욥의 모든 것 을 회복시켜주셨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고난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그가 끝에 발견한 것은 자신의 모든 실존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오묘하고 신비한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욥의 실존적 문제에 대해 답을 해주셔도 하나님이고,답해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 즉 ‘하나님의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야고보서를 통해 욥의 생애에 있어서 핵심 사항을 간략히 기록하셨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약 5:11
욥의 인내,그리고 주께서 주신 결말! 하나님은 욥이 이 지독한 부조리 가운데서도 인내한 것을 눈물겹게 기뻐하셨다. 참을 인(忍) 자는 칼날을 심장에 꽂고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 가운데서도 욥은 인내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인내’는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하면서 무작정 막연히 버티는 것이 아니다. 인내는 하나님을 믿고 참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인내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인내의 끝에는 ‘주께서 주신 결말’이 있다.
성도는 영원히 부조리의 돌을 굴리지 않는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은 분명 살아 계시고 섭리하신다. 그리고 모든 부조리함의 결산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8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들을 얻게 하신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허탈한 웃음이 진짜 웃음이 되게 하신 것이다. 허탈한 웃음과 진짜 웃음, 그리고 아들의 이름이 '웃음'이라니! 얼마나 유머러스하신 하나님이신가?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런 불경스러운 표현을 써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농담(divine joke), 하나님의 유머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을 보라. 로마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빌라도는 군대를 거느리고 건장한 말을 타고 입성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도 아닌 조그만 나귀 새끼를 하나 빌려서 그 위에 옷을 깔고 타고 입성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깔았을 뿐이다. 이 모습 그 자체가 하나의 희극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초라한 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자체가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셨다(마 22장, 눅 14장). 혼인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분명 웃으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일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잃었던 양을 되찾은 후 잔치를 벌이는 이야기를 해주셨고, 돌아온 탕자에게도 잔치를 베풀어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듯 축제이다. 웃음이며 기쁨이다.
반면, 마귀가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유머이다. 마귀는 유머가 없다. 미소도 없고 쓴웃음과 냉소만 있을 뿐이다. 마귀는 어둡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거라사의 광인이 무덤 사이에 거처했듯이 마귀는 칙칙한 이미지이다. 마귀는 우리가 기뻐할 때 가장 고통스러워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기쁨이기 때문이다.
*웃음은 건강의 비타민이고, 관계의 윤활유이며, 얼굴의 꽃이다. 한바탕 웃음은 에어로빅 5분과 맞먹는다. 탈무드에는 "미소 짓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가게 문을 열지 마라"라는 말이 나온다. 웃음이 대인관계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말이다. 웃음은 두 사람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웃음꽃이 피어나야 한다. 성도의 웃음은 세속적인 웃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천국의 소망을 가진 웃음이다. 그러니 더욱 진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도,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람이 꽃 모양이 될 때가 있다. 미소 지으며 웃을 때이다. 멋진 웃음으로 호감 지수와 품격이 높아진다. 이런 묘비명이 있다고 한다.
"여기 오기 전에 웃어라!"
얼굴과 낙하산은 펴져야 산다. 항상 기뻐하고, 미소와 웃음이 가득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웃음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성도들은 ‘복음’을 전한다. '복음'이 무슨 뜻인가?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마음은 얼마나 기쁜가. 하나님의 나라에는 '웃음'이 피어난다. 웃음꽃이 만발한 나라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보다 좀 더 해석의 틀을 넘어서 하나님은 이중적으로 결핍되었다고 한다. 거듭거듭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존의 신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부재하고, 새로운 신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재한 시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 신학자 마르틴 부비는 하나님이 안 계신 듯한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신의 일식'이라고 했다. 일식은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자리잡음으로써 일시적으로 태양 빛을 차단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 성경적이며 기막힌 통찰력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 통쾌한 변호이다. 일식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달이 개입하여 빛의 부분을 차단하듯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어떤 개입물이 있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상황을 ‘신의 일식’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뭔가가 끼어들어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부비는 좀 더 전문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직접성, 실재성, 대화성이 결여된 현대의 상황을 '신의 일식' 혹은 '숨은신'(The Eclipse of God)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빛이 차단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숨은 신의 결과로,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이까지도 단절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비는 '신은 죽었다'라는 서구의 무신론적 경향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부재가 아니라 일식이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부재'와 '일식'은 다르다. 부재는 절망의 상태이고 일식은 희망이 있다. 일식으로 인해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태양이 죽은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언가가 끼어서 마치 하나님이 없어 보이는 세상 같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차단하는 장애물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 인간의 죄이다. 인간의 죄악을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대화가 결여된 상태가 '신의 일식'이다. 이렇듯 '신의 일식'에는 인간의 책임이 크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식은 태양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지 태양 그 자체에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암흑의 벽 뒤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주님 어디 계십니까?"
이런 기도를 드려보지 않은 성도가 있을까? 나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난 속에서 이런 처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분명히 믿는다. 하나님의 잠시 동안의 일식임을 믿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말씀하심을 믿는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욥 38:1
*야스퍼스의 방대한 철학 세계를 다 논할 수는 없지만, 가장 큰 핵심인 '암호'와 '한계상황'은 큰 울림을 준다.
먼저 '암호'에 대한 이야기이다. 야스퍼스는 이 세상이 초월자의 암호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철학의 과제는 형이상학적 사유는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초월자의 암호를 읽어낼 때, 현존재 인간은 신적 존재의 품에 안길 수 있고, 그때 인간은 가장 내면의 충만함을 느낀다고 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암호로 가득하다는 말은 참 신비롭고 가슴 뛰게 한다. 시인 보들레르도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 만물은 상형문자이고, 시인은 번역자이며 암호 해독 자다."
참 멋진 말이다. 이 세상 만물은 초원자의 암호, 신앙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스며있다. 하나님은 이 진리를 바울 사도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19.20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에 주님의 권능이 가득 차 있다. 정욕의 눈을 벗고 경이로운 눈을 회복하면 꼬불꼬불한 달팽이집과 개들의 꼬리, 토끼 주둥이를 보아도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신비를 본다. 해가 지고 뜨고 바람이 부는 사소한 일도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이렇듯 작은 것에서 하나님의 암호를 풀고 감탄하며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겠는가.
*야곱이 이 진리를 체험했다. 형 에서의 장자권 복을 가로챈 야곱은 도망자가 되었다. 어느날 야곱이 들판에서 돌을 베게 삼아 잠을 자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를 지어 도망자 신세인 야곱에게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며 불호령을 내려야 할 하나님이 이렇게 따뜻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 감동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 여기에도 계시는구나!" 창조 창 28:16)
하나님은 도망자의 자리, 거친 들판의 자리에도 여전히 함께 하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우리 삶의 영광과 환희의 자리뿐 아니라 모든 실패의 자리, 눈물의 자리에도 함께하신다. 우주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숨결이 듯이,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숨결이다.
온 천지에 가득한 하나님의 암호, 우리의 삶에 가득한 하나님의암호,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진정 복이 있다.
*이제 이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암호'와 더불어 '한계상황'을 살펴보자. 야스퍼스에게 '상황'(Situation)은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 속에서 생활하고 사유한다. 따라서 야스퍼스는 인간을 상황 내 존재 (Inder Situation Sein)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상황'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일상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일반적 상황이다. 둘째,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다. 한계상황이란 우리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낭떠러지 같은 것, '우리가 거기에 부딪쳐 난파하는 (scheitem) 벽'과 같은 것이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대표적인 한계 상황에는 죽음, 고통, 갈등, 죄책감 같은 것이다.
이러한 한계상황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존재의 기반을 잃고 방황할 수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한계상황 속에서 초월자의 암호를 풀어 실존적 도약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후자가 중요하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 속에서 각성적 진단을 통해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인간 현존재가 초월자 앞에 설 때, 자신을 발견하고 행복이 절정에 달한다고 했다.
더 철학적으로 말해보자. 야스퍼스는 현존재(Dasein)와 실존(Existenz)을 구분했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 만족하고 오직 그 세계의 유지 및 보존 확대에 관심을 걸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실존은 본래적 자기이다.
'나'라는 현존재는 이 세상의 조건에 매여 있다. 그러나 한계 상황은 이 세상의 현실을 초월하는 실존으로서 진정한 나 자신에게 도달하도록 해준다. 한계상황은 실존의식이 태어나는 장소라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쉽게 말하면, 한계상황은 하나님을 찾게 하고, 그리하여 참다운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비슷한 말을 했다. 하이데거는 사람을 가리켜 죽음 앞에 선 존재라고 했다. 자신이 이렇게 죽음 앞에 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죽음으로의 선구(先驅,선구자)"라고 표현했다.
죽음을 진짜 생각해보는 것, 이러한 죽음으로의 선구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죽음을 직시하기 전엔 결코 몰랐던 삶의 소중함이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인식하면서 참다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흔히들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을 이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좋은 죽음이 좋은 삶을 이끈다.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전3:11). 따라서 죽음과 영원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존재론적인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은 축구가 아무리 즐거워도 전반전만 즐거울 뿐이다. 후반전, 아니 종료가 가까울수록 불안하다.
웰빙(well being)은 웰다잉(well dying) 속에서 나온다. 카르페 디엠(현실을 즐겨라)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속에서 나온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대한 깊은 사유는 지금 우리의 삶을 더욱 진지하고 가치 있게 이끈다.
'궁즉통(通)이라는 말이 있다. '궁하면 통한다', '닥치면 다 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을 야스퍼스적으로 살짝 비켜 해석하면 하늘이 무너질 때, 즉 한계상황 속에서 진짜 통하는 것,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한계상황이 아닌 일상 상황에서 주로 발휘되는 것은 '잔머리'다. 그러나 한계상황은 모든 꾀와 잔머리를 불태우고 '진짜'를 만나게 한다.
세상을 뒤집는 아이디어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한계상황에 직면했을 때 나오는 경우가 많다. 믿음도 그러하다. 한계상황 속에서 믿음이 결정적으로 성장하고 새로운 창의력이 생긴다. 믿음의 사람들은 한계상황이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희망의 계기가 된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 32:27a
참 기막힌 질문이다.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어보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름은 존재의 집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진짜 그의 모습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 질문은 일전에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했던 질문과 같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창 27:18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그때 야곱은 자신을 에서라고 하며 이삭을 속여 장자의 복을 가로챘다. 야곱으로서의 복이 아니라 에서의 복을 받았다. 그날 이후 야곱은 자신의 삶이 아닌 에서의 가면 속에서 살았다.
하나님은 지금 "너는 야곱이냐? 에서나?"라고 물으신 것이다. 아직도 에서의 장자권이 네 삶의 전부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제 그만 에서의 가면을 벗으라는 것이다.
야곱은 대답한다.
"야곱이니이다!"
이 고백은 "저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입니다. 저는 사기꾼입니다. 저는 거짓말쟁이입니다"라는 말이다. 20년이 지나서야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야곱이니이다"라는 대답을 들으신 하나님은 야곱을 이제 '이스라엘'이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신다(창 32:28). 이제 자신의 꾀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아를 찾아주셨고, 평생을 에서에게 갇혀 살던 삶에서 자유하게 해주셨다.
야곱은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초월자의 암호를 풀면서) 에서의 가면(현재)에서 벗어나 야곱 자신(실존)이 되었다.
'작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스몰'(small)에는 '모든 것'을 뜻하는 '올'(all)이 들어 있다. 이 세상은 모두, 아무리 작은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암호'로 가득하다. 꼭 한계상황 속에서만이 암호를 풀어서 결정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계 상황'은 자신의 자아를 다 벗고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자리가 될 수 있다. 깊고 깊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절박'이 '대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를 확대해 간 인간은 이렇듯 스스로 결단하며 책임지는 자유가 너무 버거워졌다. 더군다나 거대한 산업사회가 되어가면서 인간은 더욱 큰 고독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히틀러 같은 비합리적인 권위에 자신을 복속시키고, 대신에 '안전'을 제공 받으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치즘에 헌신하여 자신과 나치를 동일시하면서, 역설적인 편안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프롬은 이러한 경향을 가리켜서 '자유로 부터의 도피'라고 했다.
쉽게 설명해보자. 자유를 열망하여 힘겹게 자유를 찾고 보니, 자유가 무거운 짐이 되었다. '자유가 주는 부담'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무엇엔가 종속되어야 할 것을 찾고, 부담스러운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한다. 이런 현상을 세계적인 정신의학자 스캇 펙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맡아주세요. 당신이 내 보스가 되어주세요!'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항상 그 책임을 다른 사람이 나 조직이나 존재에 떠넘기려고 한다. (중략) 책임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종교 사상가인 니콜라스 베르자예프(Nicholas Berdyaev)도 같은 말을 했다. 인간은 평화와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쉽게 포기한다. 인간은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간신히 짊어지고 이 짐을 보다 강한 어깨에 옮겨 놓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본다.
참 고통스러운 역설이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안전과 평안은 노예의 평안일 뿐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역사를 자유가 확대되어 가는 역사라고 했지만, 인간의 역사는 사실 '자유'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역사이다. 이런 점에서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는 사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God)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으면서,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 후 이성주의, 합리주의에 기초한 인간 문명은 근대에 이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거기 계십시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살겠습니다"라면서 살아 왔다. 그 결과, 자유가 가득한 삶이 아니라 죄와 전쟁과 물질에 대한 탐욕에 붙잡힌 세상이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추구한 인간은, 더 큰 굴레 속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의 죄와 죄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나와 그것’으로 만들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신(神)은 자신들을 도와주는 '수호신' 정도이다. 따라서 신의 뜻에 맞게 산다던가 신을 찬양한다던가 하는 일은 없다. 자신들에게 복을 달라고 신을 달랠 뿐이다. 죄로 물든 인간은 하나님을 '그것'으로 본다.
아라비안나이트를 보면 마법의 램프가 나온다. 이 램프를 문지르면서 주인님 하며 거인이 등장한다. 이 거인은 배고프다. 하면 먹을 것을 가져오고, 어디가야겠다하면 나는 융단으로 실어 나른다. 말이 거인이지 사실은 종이다.
죄에 빠진 인간은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램프의 종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을 도깨비들이 들고 다니는 요술 방망이로, 혹은 지폐 한장 넣어주면 원하는 상품을 제공하는 자판기 정도로 여기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겨우 ‘그것’으로 존재할 뿐이다.
*먹고 먹히는 정글 같은 세상 속에서 만남은 드물고 '그것'과의 ‘스침’만 가득하다. 이 메마름을 느끼기에 누구나 '만남'을 갖고 싶어 한다. 나는 당신의 배경이 되어주고, 당신 또한 나의 여백이 되어주는 참 만남을 원한다. 그리하여 '만남'이 맛남'이 되기를 원한다.
그렇다. 만남의 복은 주님이 주신 최고의 복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시려 할 때 사람을 보내주신다. 하나님이 최상의 사람을 만나게 해주셨는데, 우리가 그 만남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소홀히 여긴다면 복을 발로 차는 꼴이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그 사람’과 '나와 너'가 되어야 하는데, ‘나와 그것’이 된다면 비극이다.
태초에 만남이 있었다. 태조에 관계가 있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만남의 복, 만남을 볼 줄 아는 영성, 참 만남과 동행하는 불꽃같은 삶! 그런 복과 삶을 누리게 되기를.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 사람만큼은 법 없이도 살았고 멋지게 살았으며 천국이 있다면 갈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더라도 사람의 평가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할 수는 없다.
좋은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민감하게 몰두하는 것을 보면 내가 하나님에 속했는지 사람에게 속했는지 알 수 있다."
약간의 비판에 심히 분노한다거나, 약간의 거절감에 너무 우울해하고 약간의 칭찬이나 성공에 심히 흥분하는 인생,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요동치는 인생은 인정 중독에 빠진 삶이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판단을 잘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판단이 작은 유익은 있지만 큰일은 아니라고 한다. 파도가 쳐도 내가 탄 배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늘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
맺집이 필요하고 ‘미움 받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에게 미움을 받았다. 죄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았기에 그러하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그러한데,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것은 안개같은 꿈이자 또하나의 교만이다. 진리 안에서 살려면, 미움 받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맷집을 길러야 한다.
*같은 새라도 밤에 노래하는 새가 있고 낮에 노래하는 새가 있다. 봄에 피는 꽃이 있는가 하면 가을에 피는 꽃도 있다. 한 곳만이 성공지점이라고 해서 모두 그 방향으로만 뛰면 1등은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동서남북으로 뛰면 네 사람이 1등을 하고, 180도 방향으로 각자 달리면 360명이 모두 1등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선 위에 줄을 세워놓고 1등, 2등 순위를 매기시지 않으신다. 둥근 원 위에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사명대로 자신의 독창적인 방향으로 뛰어가게 하셨다. 직선 위에 서면 1등, 2등, 꼴찌가 있어 괴롭지만, 각자의 사명으로 살면 모두가 1등이다.
수(秀)는 '태어날 수'이다. '우수하다'라는 뜻이다. 우(優)는 ‘우등생을 말할 때의 '우', 즉 '넉넉하다'라는 말이다. 미(美)는 '아름다울 미'이다. '좋다'는 뜻, 역시 잘했다는 의미이다. 양(良)은 ‘양호하다'는 의미로 '좋다. 어질다, 뛰어나다'의 뜻이 있다. 말 그대로 '괜찮다'는 뜻이다. 등급 네 번째를 차지하는 '양'마저 좋은 뜻이다. 마지막 가(可)가 남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는 ‘가능하다’ 할 때의 ‘가’이다. 희망의 말이다.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 '옳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영혼은 모두 좋고 옳다. 하나님은 이런 기대를 안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다. 우리 모두는 우수하고, 넉넉하고, 아름답고, 뛰어나고, 옳다. 아름다운 창조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창조, 아름다운 기대는 다시 한번 바울 사도의 고백을 통해 더욱 드러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배경이 없으면 꽃이 풍경으로 피어나지 못하듯이 말 또한 침묵의 배경이 없으면 깊이가 없다. 침묵이 금이라는 말은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이 있으면 하라는 뜻이다. 말을 배우는 데는 2년밖에 안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평생 배우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침묵은 말없이도 무겁다. 그러나 말은 침묵의 배경이 없으면 깊이가 없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침묵은 이순신의 침묵이다. 그 침묵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침묵은 예수님의 침묵이다. 그 침묵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유대의 신앙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모함하여 유대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겼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기에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권한이 없었다.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 사형을 요구한다. 이에 빌라도는 부당하게 끌려온 예수께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네 말이 옳도다."
이후 빌라도는 계속해서 여러 고발 사항에 대해 예수께 묻는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부당하게 끌려온 사실에 대해 변호해야 할 상황이다. 노련한 빌라도는 이러한 경우 피고인이 얼마나 구구절절하게 자신을 변호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충분히 자신을 변호하실 수 있었다.
“빌라도 그대는 내가 누군지 어렴풋이 느끼지 않는가? 그리고 이제껏 수많은 재판을 해왔던 노련한 그대는 내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도 알 것이다. 유대 지도자는 나를 모함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을 그대는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날 풀어다오.”
그러나 예수님은 변호 대신 침묵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태도를 보고 빌라도는 큰 놀라움을 느낀다. 예수님의 침묵이 우레와 같은 울림을 준 것이다.
*예수님은 왜 생과 사의 결정적인 갈림길에서 침묵하셨는가? 저들의 모욕과 조롱과 말도 안되는 누명을 왜 변론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자신이 가야 하는 길임을 잘 알고 계셨다. 이 길이 하늘 아버지의 뜻인 것을 아셨다. 그래서 변호 대신에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
마침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만일 이때 예수님이 억울하고 괘씸하다며 하늘에서 벼락을 몰고 오면서 유대인 지도자들과 로마 군인들을 휩쓸었다면, 길거리의 온 뱀을 괴룡으로 바꾸어 불을 뿜게 했다면, 속은 시원할망정 우리에게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괴력을 발휘하는 대신에 침묵하시며 하늘 아버지의 뜻 앞에 순종하셨다.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듯이, 털 깎는 자 앞에서도 잠잠한 양처럼 침묵하시며 십자가를 지셨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이기는 그 침묵이 우릴 구원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어린 양 예수님의 침묵은 오늘과 내일의 하나님 나라를 여는 천근 같은 몸짓이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말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칼을 집어넣으라!"
'칼의 노래, 칼의 힘은 잠깐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영원하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자신을 배신했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다. 그리고 조반을 만들어 놓으신 후 “와서 먹으라”라고 하셨다. 제자들에게 왜 나를 배신했었냐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다시 침묵하신 것이다. 이 침묵이 큰 사랑이었다.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였다. 이 침묵의 사랑이 제자들을 살렸고, 지금 우리를 살리고 있다.
칼보다 강했던 침묵, 사랑의 침묵이
*고대 이집트는 신의 이름이 파라오이고 왕의 이름도 파라오였다. 왕이 곧 신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신을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땅을 보라. 그가 신의 형상이다. 바로 그 의미이다. 백성은 쫄따구이고 완만이 신의 형상이면 백성의 자존감은 어떻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왕만이 신의 형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이것이 우리가 자신감 있고 자존감 넘치게 살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그러기에 모두 왕같이 살라고 하신다.
*안디옥교회는 유력 가문 출신의 정통파 유대인인 바나바, 흑인 노예 출신의 시므온, 무명의 이방인 루기오, 유대인의 대적자였던 마나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이었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데 어우러져 일을 했다.
또한 안디옥교회에는 선지자와 교사 등 은사도 각각이었다. 안디옥교회는 한마디로 서로서로 만리장성을 쌓고 하나 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벽을 허물고 진정한 사랑과 소통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시인의 시 <꽃>에 나오는 구절이다. 너와 나, 안과 밖,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금이 '경계' 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그 경계에 꽃이 피는 꿈을 꾼다.
또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담을 고치며>의 마지막에도 아름다운 구절이 나온다.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드나니”
담이 없으면 이웃이 아니라 한 집안이다. 이웃이 한 집안이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모든 이웃이 한 집안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담 없는 사회는 이상일 뿐이다. 담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담은 충분히 낮아야 하고, 제주도 돌담처럼 구멍이 송송 뚫려 있어 바람이 자유롭게 넘나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꽃담이면 최상이다. 꽃의 월담은 무죄이다.
인류의 역사는 길을 통해서 발전되어 왔다. 소금 장수의 길에서부터 이른바 비단 길이라 일컬어지는 실크로드, 그리고 황금길과 석유 길, 그리고 지금은 인터넷과 방송이라는 무한한 길을 통하여 발전하고 있다. 독점, 소유의 시대에서 공유의 시대로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수직 사회에서 수평 사회로, 승패의 시대에서 같이 이기는 윈-윈(win-win)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돛단배는 강풍으로 인해 더 빨리 갈수도, 혹은 침몰할 수도 있다. 역사와 인생 또한 항해와 같다. 세계 역사상 위대한 민족과 위대한 개인은 고난과 그 고난에 대한 창조적인 응전을 통해 형성되었다.
“바람이 분다. 나 죽었다!”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인 폴 발레리처럼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하는 사람이 이긴다. 바람이 불면 나무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꽃도 그러하다. 물을 머금어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 법, 봄바람은 가지를 힘들어 뿌리를 깨워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한다. 꽃은 바람이 없으면 늘어진 꽃 팔자가 되어 주야장천 잠만 잔다. 바람이 불어야 아차차 놀라 꽃대를 올린다. 그래서 꽃 피는 것을 시샘하는 '꽃샘바람'이 아니라 ‘꽃세움바람’이라 해야 옳다.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흔들리지 않고 핀 꽃은 없다. 수많은 바람을 맞으며 물을 길어 오르고 비로소 줄기 세우는 법을 배운다.
대추 한 알도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를 머금어야 붉어진다. 비단 꽃과 대추 뿐 만이 아니다. 굽이치지 않고 흐르는 강물은 없듯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흔들리면서 몸부림치며 자라난다. 주님 안에 있을 때, 고난은 꽃샘바람이 아니라 꽃세움바람이 된다. 이 바람을 맞으며 잠을 깨고 비로소 주님의 율례들을 배운다. 그리하여 고난은 위대한 민족, 위대한 개인을 만드는 하나님의 자궁이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는 캐나다 록키산맥의 단풍나무는 명품 바이올린의 재료가 된다. 모진 바람과 추위를 견뎌낸 그 나무에서 나온 소리는 깊고 그윽하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훌륭한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냇물의 노래 소리는 물과 자갈이 다 있을 때 만들어진다. 무지개는 햇빛과 비, 둘 다가 있을 때 피어난다. 도전이 있을 때 문명은 무지개 같은 발전을 이루어간다.
*카일 아이들먼은 <팬인가 제자인가>에서 예수님을 팬으로 여
기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팬은 관람석에 앉아 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이다. 팬은 선수가 사인한 운동 셔츠를 벽에 걸어 두고 자동차 뒤에 갖가지 범퍼 스티커를 붙인다. 하지만 정작 경기에 나서지 않는다. 경기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거나 공을 차지는 않는다. 선수들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고 최근 기록을 줄줄이 꿰고 있지만 선수들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고함을 지르며 응원은 하지만 경기를 위해 희생을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응원하는 팀이 자꾸만 패하면 그렇게 좋아하던 마음도 조금씩 식어가고, 심지어는 다른 팀으로 옮겨 가기도 한다. 팬은 어디까지나 팬일 뿐이다.
주님이 떡을 줄 때는 열광하고 주님 때문에 고난이 오면 외면하는 사람, 희생과 값 지불은 하지 않으려는 반쪽짜리 믿음,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 아는 사람, 예수님을 그저 여러 애인 중의 하나로 여기는 사람, 예수님을 가슴과 마음이 아닌 교양과 형식으로 만난 사람, 주님은 이런 무리가 아닌 창조적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셨다.
이렇듯 하나님의 나라는 헌신하는 소수, 창조적 소수에 의해 이루어져 간다.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창조적 소수의 역할을 다할 때, 이 땅의 고난은 노래가 되고, 무지개가 되어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사 60:22
도전(고난)이 온다.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기회다. 본질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버려야 할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을 볼 줄 아는 기회다. 사라지는 것과 영원한 것을 볼 수 있는 기회다. 겸손해질 수 있는 기회다. 강해질 수 있는 기회다. 사람들을 공감할 수 있는 기회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히 느낄수 있는 기회다. 창조적 소수, 믿음의 용사들은 이 기회를 보는 사람들이다.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작고하신 소설가 박완서 님이 쓰신 책의 제목이다. 나는 이 제목이 참 좋다. 옳으면서도 아름다운 당신, 옳으면서도 좋은 당신 말이다. 옳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은 사람은 논외이고 옳지만 싫은 사람이 있다. 옳은 듯하지만 그의 마음에 사랑과 긍휼이 없을 때 그러하다. 옳고도 좋은 분이 좋다. 우리 하나님이 그러하다. 하나님은 옳기도 하고 좋기도 그지없다. 옳고도 좋다는 말은 공의도 있고 사랑도 있다는 의미이다.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을 대표하는 두 기둥이기도 하다.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사랑이 되고 진정한 공의가 된다. 사랑이 결여된 공의는 차가운 폭력이 될 수 있고, 공의를 상실한 사랑은 무책인한 방임이 될 수 있다.
불완전한 우리 인간에게는 사랑과 공의의 조화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른다. 공의를 생각하다 보면 사랑을 놓치고 사랑을 생각하면 공의를 잃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는 사랑과 공의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나는 가장 짧고 주는 지혜이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
이 구절만큼 십자가의 비밀을 깊고 푸르게 표현한 구절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만났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를 지은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한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죽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추상같은 공의를 동시에 보게 된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 내가 그 모든 죄를 감당하노니 죄인에게는 자유를 주노라."
이것이 십자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행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형벌을 받게 하셨다. 죄를 지은 우리를 대신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분의 가슴과 등은 채찍에 터졌고, 이마는 가시관에 문드러졌다. 손과 발은 못에 박혀 찢어졌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 쏟아냈다.
또한 몸의 아픔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크게 예수님의 마음도 고통을 당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치면서 열광했던 민중들이 "강도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소서! 못 박으소서!"라고 외쳐댈 때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그 민족을 위해 죽으시면서도 사랑하는 동족들에게 반역자로 낙인 찍히셨던 그 오해 받으심, 죽도록 따르겠다던 제자들이 다 떠나가는 현장에서 경험하셨던 소외감, 사랑했던 제자의 손에 팔리는 그 배신감. 그 제자의 발을 씻기시면서, 마지막 떡을 주면서 그를 향해 연민과 자비를 눈초리를 주시던 마음. 그런 스승을 외면하고 어두운 밤을 향해 나갔던 제자. 그 제자가 군인들을 데리고 와서 거짓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기는 싸늘한 배신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느끼셨던 감정의 흐름은 어떠했을까.
제일 큰 아픔은 여기 있다. 영원 전부터 한 번도 끊어짐이 교제해왔던 성부 하나님이었건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는 성부 하나님조차 고개를 돌리셨다. 그 순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며 비명을 외쳐야만 했던 주님의 심정은, 그 단절의 아픔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은 이 고민과 슬픔으로 인해 얼굴의 땀방울이 핏방울 되기까지 기도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왔던 죄, 손으로 지은 죄, 발로 지은 죄, 몸으로 지은 죄,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품었던 생각과 마음속에서 지었던 죄의 값까지도 빠짐없이 다 치러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온 존재가 무너진 것 같은 데 세상은 무심하게 변화가 없다. 더군다나 올림픽을 한다고 축제로 가득하다. 이것이 세상이다. 시인 이성복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옳다. 세상은 온통 무관심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 내가 고통 속에 죽어가도 나뭇잎은 여전히 자기 색을 띠고, 다람쥐는 무심하게 도토리를 줍는다. 나를 아는 몇 사람들이 잠시 슬퍼하지만 곧바로 일상 속에 파묻힌다. 이 허무함과 쓸쓸함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우리의 삶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취하고 웃고 포장을 해도, '허무'라는 알맹이를 벗어날 수가 없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배경이 된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이 현대전으로 바뀌는 분기점이었다. 그전에는 칼이나 방패, 창을 들고 인간과 인간이 싸우는 몸과 몸이 부딪히는 전쟁이었다. 그러나1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인간과 기계가 싸운다. 총, 대표, 독가스 등으로 적군과 직접 부딪히기도 전에 죽거나 다친다.더욱 비정해지 전쟁터에서 살아도 죽어도 인간이란 없다.
비단 전쟁 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상의 죽음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죽는 날에도 버스와 지하철은 여전히 달릴 것이며, 스타벅스의 커피도 계속 잔을 비울 것이다. 한 우주를 품고 살았떤 사람이 죽어도 서부 전선, 동부 전선 남부 전선 북부 전선은 이상 없다. 이것이 삶의 허무이다.
*예수님은 이런 허무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이상(李箱)의 시 <최후>를 보자.
“능금 한알이 추락하였다. 지구는 부서질 정도만큼 상했다. 최후. 이미 여하(如何)한 정신도 발아하지 아니한다.
그런데 대해 이 정도 역사적인 능금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상은 사가 한 알이 떨어지나 마나 내가 사나 죽으나 아무관심이 없어 보인다. 시인은 나의 죽음이 지구에 이 정도 상처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예수님은 썩은 능금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이들은 후에 존귀한 자가 되어 귀하게 쓰임 받았다. 그중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8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세상은 능금 하나 떨어지나 마나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한 능금도 아닌 썩은 능금같은 우리에게 시인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우주적 존재감을 주신다. 하나의 가치를 품은 나. 지구가 충격 받을만한 나로 만들어 주신다.
나에게도 "이제 죽어 주께로 가는구나!" 하는 순간도 있었고, 지금도 투병 중이다. 예수님을 안 믿고 그저 강물에 지푸라기가 흘러가듯 살았다면 육신의 죽음 전에 이미 허무함으로 1차 사망을 했을 것이다. 세상은 내가 죽어도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고 한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수고했다고 안아주신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를 마칠 때 날 반겨준 영원한 하나님과 영원한 하늘나라의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사는 동안 전도와 선교 구제를 하며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생명의 삶을 살고 죽어서도 하나님의 품에서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는 영원한 삶, 허무하지 않은 이 인생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가.
*참 사랑을 하면 갑질을 벗고 갑옷도 벗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힘을 준다. 그러나 참 사랑을 하면 힘을 뺀다. 마치 을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기에 낮아지고, 사랑하기에 힘을 휘두르지 않고 약해진다. 이것이 예수님이 연약해보이시는 이유이다. 힘을 주며 무한대 바람을 먹은 맹꽁이배는 터지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힘을 주는 존재들이었다. 날카로운 칼이었다. 그러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초라한 마구간에서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참 사랑하시기에 마치 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힘을 빼신 채 낮고 헐한 영혼들을 만나고 안아주셨다. 예수님은 힘을 빼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랑 때문에 힘을 빼신 최고의 사건이다.
“그분이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
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사 53:5).
신앙은 자신의 모든 힘을 빼고 자신의 등을 하나님의 등에 기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전 생애를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인생의 키를 붙들고 있는 손의 힘을 빼고, 주께 키를 맡기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힘을 빼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 내 힘을 빼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긁다', '그림', '글', '그리움'은 다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은 그리움이다. 글도 그리움이다. 글은 마음에 사무친 그리움을 긁어서 생긴 삶의 무늬이다. 임어당은 "문장에 파란이 없는 것은 여인에게 곡선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글과 말에는 그 사람이 사무치게 갈구하는 그리움의 숨결이 반영되어 있다. 일상의 모든 것들은 눈을 떠야 보이지만,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이 바로 그리움이다.
기다려주는 시간은 내가 그를 사랑하는 크기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그리움이 다하여 병이 나는 것이 사랑이다. 망부석의 전설이 그것이다. 소월은 이렇게 말했다.
“선 채로 이 자리에서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성경은 더욱더 사랑의 그리움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아 5.8
사랑이 깊으면 그리움도 깊은 법.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인간을 그리워하셨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밤새 문 열어놓고 집나간 이들을 기다리는 그리움처럼 말이다. 죽을 것 같은 사랑의 그리움이다.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되지만, 그리움은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랑의 존재로 여기셨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 십자가에 죽게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그 사랑, 하나님의 그 그리움이 우리를 살렸다.
그런데 참 신비한 것이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도 지울 수 없는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있다는 것이다. 철학함의 시작은 '경이로움'에 대한 감탄 때문이다. 그 감탄이 질문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철학함이 되었다. 그런데 경이로움의 형제가 있다. 바로 그리움이다. 독일의 시인 넬리 작스는 "모든것은 그리움에서 시작한다"라며, 그리움이 모든 것의 동기가 된다고 말했다.
*바로 이 그리움이 우리 시대의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가 하나님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어 배 속에서부터 교회에 드나들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서부터, 하나님이 없다고 반대하다가 극적으로 돌이키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루이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는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분노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차라리 유물론적 세계관이 더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또한 거의 모든 무신론자들이 그러하듯이 세상에 만연한 악과 부조리를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러한 악과 부조리를 지켜보고만 계시겠는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영원을 향한 그리움 때문이다. 그리움의 실체를 찾아가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루이스는 인간의 삶에서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그 무엇, 없앨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갈망’ 혹은 '그리움' (longing, Sehnsucht)이다. 루이스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잠재울 수도 가라앉힐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는 강렬한 갈망과 그리움을 영어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어서, 독일어 단어 ‘젠주흐트’(Sehnsucht)를 하여 표현했다.
"이 갈망에 대한 정체가 무엇일까?'
“우리의 영혼 가운데 유한한 대상으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의 실제가 무엇일까?"
”도대체 누가 인간 안에 이 동경을 심어 놓은 것인가?"
루이스는 이런 점들이 궁금했다.
*인간은 그 어떤 소유를 갖게 되어도, 어떤 성취를 이루어도 그 목표가 성취되면 허무와 권태 속에 빠진다. 이게 전부인가? 하는 생각과 더불어 더 높은 것을 향한 아쉬움이 있다. 눈과 귀는 잠시 현혹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현혹되지 않으며 영원한 대상을 향한 그리움을 느낀다.
무신론자들은 이 영원을 향한 그리움을 억제한다. 그들은 대상을 바꾸어가면서 다른 종류의 만족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애써 영원을 향한 그리움을 지우려 한다. 그런다고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영원에 대한 가짜를 내세워 영원을 얻으려 한다. 중국의 진시황을 보라. 영생을 향한 갈망을 불로초가 채워줄 수 있다고 흉내를 낸다. 그러나 가짜에 불과하다.
루이스는 인간이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흔적이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마치 집을 나온 탕자가 아버지를 향한 기억을 지울 수 없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기억을 지울 수 없다. 그림이 화가의 흔적을 자신 안에 담고 있듯이, 시가 시인의 마음을 자신의 시에 담고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자신 안에 담고 있다.
루이스는 이렇듯 자신과 인간들의 마음에 영원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루이스는 무조건 믿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신앙은 지적인 면을 포기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더나아가 지적인 자살을 해야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루이스는 좋은 귀감이 된다. 루이스는 자신의 지적인 정직성을 유지한 채 신앙에 이르렀다.
*독일 베네딕트 수도회의 안셀름 그륀 신부는 욕망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한국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만 남게 된다고 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영원을 향한 그리움을 신의 식(sensus ainmens)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였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영원에 대한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 3:11a
히브리어 원문대로 번역하면 영원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셨다는 뜻이다. 인간은 영원의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에 세상의 기쁨만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그리움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친구보다 스마트폰이 가깝고, 대화보다 SNS가 빠르고, 혼자 먹는 밥이 점점 편해진다.
그리워할 줄 모르는 것은 병이다. 이런 세상 가운데 그리움을 가진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그리움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그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한 사람은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리움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그리움이 만날 때, 지울 수 없는 먹물 같은 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잃은 양 한 마리 비유의 핵심은 바로한 사람의 소중함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경우를 보자. 국가는 충성을 다한 한 사람을 최선을 다하여 존중한다. 이것이 국가의 의무이다. 각 나라마다 자국 병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송환하는 데 마음을 쏟는 이유가 이것이다.
라이언 일병과 그 형제들은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다. 그래서 여덟 명이나 희생하면서까지 그를 데리고 오려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간다. 그러나 잃은 양 한 마리 같은 우리는 아무런 공로도 없는 '찌질한 일병' 같은 존재였다. 그런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은, 마치 이 우주에 나 한 사람만 있는 양, 우리를 찾아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랑'이라는 이유 말고는 해석할 수가 없다. …
사랑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우리 인간을 버리고 새로운 창조를 하시면 그만이실텐데, 새로운 '창조' 대신에 '구원'이라는 기나긴 아픔의 여정을 시작하셨다.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죽게 하시고, 마침내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주셨다. 창조는 당신의 말씀으로 하셨는데, 구원은 당신 아들의 피로 이루셨다. 참 귀한 값을 치루셨다. '사랑'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다. 여기서 '자기 십자가'라는 말이 참 많이 곡해되어 왔다. 어떤 사람은 웬수 같은 남편이 자기 십자가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식들이, 혹은 시어머니가, 어떤 분은 자신의 고질병이 자기 십자가라고 한다. 자기 십자가를 마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업보의 개념으로 바라본다.
"자기 십자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려 십자가를 지셨다. 그것이 곧 예수님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였듯이, 우리 각자의 십자가, 즉 우리 각자 하신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 각자의 십자가는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자기(우리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이다.
쉽게 정리해보자.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하신 일이바로 자기 십자가이다.
에리히 프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에 죽는다고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대부분의 삶에 있어서 비극은 우리가 완전히 태어나기 전에 죽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태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어머니의 태내, 무릎, 손길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도록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갓난아이가 탯줄이 잘리자마자 호흡을 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은 모든 탄생의 순간마다 활동적이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에리히 프롤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에 죽는다. 국자는 국 맛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국자의 일은 국을 떠 나르는 것이지만, 끝내 국자는 국의 달고 맵거나 짠맛을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의 소명이 주는 맛을 모르고 국자로 삶을 마감한다.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걸작품인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창연한 버전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각하기도 전에 죽어간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에, 하나님이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사명 또한 알지 못하고 먹고 사는 일에 칭칭 묶여 살다가 죽는다.
*이에 에리히 프롬은 창조적인 삶을 권한다. 여기서 '창조'란, 한 사람이 죽기 전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죽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이 땅에서 내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불꽃 같은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길가의 바윗덩이를 건축가가 발견하여 다듬으면 집의 주춧돌이 된다. 예술가가 발견하면 아름다운 조각품이 된다. 그러나 그대로 방치하면 행인들의 걸림돌이 된다. 주께서 나를 발견하고 택하신 것을 '은혜'라고 한다.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사명'이 있다.
사람은 자기 목숨을 못 박아도 좋을 만한 보람 있는 사명의 길을 걸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래서 시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러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기꺼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겠다고 말한다.
불과 33년을 사신 예수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이 새도 집이 있는데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에게는 아무 소유도 감투도 없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신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자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를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보고하였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
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 17:4
프로는 끌고 가지만 포로는 끌려간다. 우리 대부분은 세상에 중독이 되어 포로처럼 끌려 다니다가 삶을 마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사명의 길을 당당히 걸어간 삶이 가장 보람되고 의미 있다.
윤동주 시인이 많이 쓴 언어는 하늘, 잎새, 별, 바람, 달, 구름, 강물, 듯, 숲, 추억,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언어는 주로 아파트, 땅, 돈, 출세. 성공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주께서 주신 사명을 잊고 이런 것들이 삶의 전부인 양 살아가면 안개 같은 삶을 살 뿐이라는 말이다.
윤동주 님의 또 다른 시 <서시>의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00년 전 시인이 보았던 그 별이나 오늘 우리가 보는 별이나 같은 별이다. 시인이 별을 통해 십자가를 보았듯이, 주님이 주신 별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행복했던 예수님처럼 사명의 길을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