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산골교회 이야기 - 2015 - 04]
시 선 집 중 (3-2)
서울에서 기관 목회를 할 때 나는 아침이면 승용차를 타고 으레 MBC방송에서 하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며 출근을 했다. 가장 인상적인 진행으로 기억되는 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권력이나 가진 자의 갑 질에 밀려 사라지려는 사안에 대해서 인터뷰를 통해 양쪽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도록 뉴스를 진행하고 쟁점에 대한 집요한 질문 공세를 하여 이를 듣는 청취자로 하여금 공정하고 바른 현실인식과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그 이후로 내 의식엔 시선집중이라는 말이 무척 매력적인 말이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자신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경우를 설명하는 내용을 읽으며 문득 시선집중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나에게 마중 말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 신명기서 18장의 말씀에 이어 고린도전서 7장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을 읽어 보면 그 말씀이 나에게 마중 말이 되어 내 속에 잠들어 있던 절절한 경험의 말들을 깨어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즈음 그렇게 성경말씀이 내 의식세계에서 마중 말이 되어주는 것은 인생말년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크나큰 은총임이 새삼스럽다.
나는 여러분이 근심걱정을 모르고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나 처녀는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남편이 있는 여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을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아름답게 살며 딴 생각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섬기’도록 시선집중! 을 요구하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요청이 당시 풍요하고 성적으로 문란했던 고린도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신선한 마중 말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육체적인 관심을 정신과 영적인 관심으로 돌려‘근심 걱정을 모르’는 더욱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 혼자 살라는 말도 아니다. 지금 바울의 이 말씀이 마중 말이 되어 내 가슴 속에서 끌어 올리는 내 가슴 속 말은 시선집중이다.
시선집중이란 어떤 하나에 고정되고 매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제 일상생활에서 이해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는 어떨지……!
무 농사로 무가 지천인 농촌에 아내가 늘 깍두기 한 접시만으로 밥을 먹게 해주는 남자가 건너 마을 친구네에 놀러 가서 그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밥상이 그득하고 반찬이 일곱 가지라 놀란 눈으로 보았더니 모두 다 무로 만든 반찬이었다. 자기 집에는 늘 깍두기 한 접시인데 간장에 졸인 무, 무채김치, 익힌 무채나물, 무국에 깍두기에다가 무말랭이와 맛 들어 시원하고 톡 쏘는 동치미까지…… 그 남자는 깊은 감동에 몸을 떨며 맛있게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무 하나로 일곱 가지 반찬을 만들어 낸 친구네 집 이야기를 잔뜩 했다. 다음 날 아침, 놀랍게도 아침상에는 일곱 개의 반찬 그릇이 풍성하게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그 일곱 그릇에는 깍두기만 가득가득 담겨 있었다. 깍두기를 그릇마다 입곱 그릇에 담아 낸 것이다. 아∼자 이거야 좋구나!
시선집중은 무에 집중하여 깍두기 한 가지를 일곱 그릇에 담아내는 고정관념의 확대가 아니라 시선집중은 무에 집중하여 무를 중심축으로 삼아 일곱 가지 반찬을 만들어내는 생명변화와 창조를 일컽는 말이다. 하나님에게 시선이 집중되면 한가지의 고정관념으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새 창조와 생명의 변화와 기쁨으로 확산되어 오히려 하나님과 마주 선 서로가 되며 전인적인 자유로운 생활이 된다는 말이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에 앉아 계시는 이여,
내가 눈을 들어 당신을 쳐다봅니다.
상전의 손만 쳐다보는 종의 눈처럼
마님의 손만 쳐다보는 몸종의 눈처럼
우리 하느님 야훼의 자비를 바라 우리 눈이 그분을 쳐다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야훼여, 불쌍히 보아 주소서.
너무나도 멸시를 받았습니다.
배부른 자들의 비웃음 소리,
교만한 자들의 그 모멸,
이제 그만 지긋지긋합니다.
(시편 123편 전문)
시선집중! 신앙인에겐 참으로 좋은 말이다. 이런저런 많은 말들 중에는 잡다함을 넘어 많은 생명의 파동을 일으키는 중심축이 되는 특별한 말이 있다. 오늘 우리에게 마중 말이나, 시선집중 같은 말이 그런 말이겠다. 이제 우리는 마중 말과 함께 시선집중이라 말을 무시로 듣고 무시로 말 할 수 있는 정돈된 생각의 길을 따라 예수님의 처음 일하시던 마가복음서의 현장으로 가보기로 한다. 가는 길에 한 곳만 더 들려 보자.
어느 날 9시 KBS 뉴스를 시청하고 있는 나에게 아들이 툭 한마디 한다.
“아빠, 아직도 고루하게 KBS 뉴스를 봅니까?”
“그럼, 뭘 봐야 하는데……?”
“손석희의 9시 뉴스를 봐야죠.”
“손석희……! 그건 어디서 하는데……?”
“JTBC……! 이참에 우리도 유선방송으로 바꿔요.”
아들은 그때 인터넷으로 손석희의 9시 뉴스를 보고 있었고 나는 이 대화 이후로 유선방송을 신청하고 손석희의 9시 뉴스를 보게 되었다. 작년 4월 16일 이후에는 오랫동안 JTBC 손석희의 9시 뉴스는 언제나 진도 팽목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절망의 시절에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행보였다.
손석희 기자가 MBC라디오 방송 시선집중에서 하차하고 성신여대 교수로 갔다가 교수직을 그만두고 종편 JTBC로 옮겨가자 한동안 시끌법적한 논란이 있었다. 그때 내 기억에 남는 손 기자의 한마디는 이런 것이었다. 사장이라는 책임자로 가는 것이니 좀 달라지지 않겠느냐며 어찌되는지 지켜봐달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참 흥미로웠다. ‘어찌되는지 지켜봐 달라’는 그 말에 실려 있는 진심이 느껴졌다. 시선집중이라는 말을 자기 말로 삼은 손 기자가 어찌되는지 지켜보는 일은 색다른 기대감이었다.
생각해보면 누구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책임자가 되었으니 어떻게 그 판을 만들어갈까? 과연 어찌 될지 기대가 되었다. 일하는 현장으로 돌아간 손 기자는 우리 사회에 상존하는 사장직에 걸맞지 않은 행보를 시작한다. 뉴스 앵커로 돌아와 직접 9시 뉴스를 맡은 것이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굳이 설명할 이유가 없었다. 손석희의 9시 뉴스는 진실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숱한 마중 말이 되어 주었다.
사장의 자리에서 본연의 기자인 자리로 내려와 사장이지만 뉴스 앵커인 기자가 된 손석희 기자의 행보를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평범한 육신이 된 사람으로 일상생활에 뛰어든 예수님의 행보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도 세례(영세)를 받고 이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데…… 나는 육신을 가지고 평범한 일상생활에 들어와 어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니 참 막막하기만 하다. 이럴 때 일수록 얼른 예수님이 일하시던 삶의 현장으로 가보아야겠다. 마중 말이라는 가방과 시선집중이라는 가방은 잊지 말고 꼭 챙겨 가시길 바랍니다. (다음 편으로 계속됩니다.)
2015. 2. 1
덤 목사
첫댓글 저희 집에서도 손석희 사장(^^)을 매일 만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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