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철(權轍)
[생졸년] 1503년(연산군 9)~1578년(선조 11) / 壽 75세
조선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江華府使) 권적(權勣)이고, 어머니는 충좌위부사과(衝坐衛副司果) 안탁(安濯)의 딸이다.
조부는 양근군수(楊根郡守) 권교(權僑)이다.
권철(權轍)은 중종(中宗) 29年(1534) 32세(歲)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의 한림(翰林)으로 뽑혀 벼슬을 시작(始作) 하였다.
이때의 한림(翰林)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의 별칭(別稱)인데 이들은 항상(恒常) 왕(王)의 측근(側近)에서 사실(史實)을 기록(記錄)하고 왕명(王命)을 대필(代筆)하는 등(等), 권좌(權座)의 최근거리(最近距里)에서 왕(王)의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과 언행(言行)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직분(職分)이였기에, 비록 하급직(下級職)이었으나 조선시대(朝鮮時代) 최고(最高)의 청요직(淸要職)으로 선망(羨望)을 받는 자리였다.
그런데 평소(平素) 권력(權力)앞에 굽히기를 싫어한 권철(權轍)은 그 무렵 좌의정(左議政)으로 정국(政局)을 주도(主導)하던 김안로(金安老)의 어긋난 태도(態度)를 진실(眞實) 그대로 기록(記錄)하였다가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그만 좌천(左遷)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안로(金安老)가 패망(敗亡)하자 권철(權轍)은 다시 바른 길에 들어서서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에 발탁(拔擢)되고, 이후(以後) 박사(博士) 겸(兼)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병조좌랑(兵曺左郞)· 이조좌랑(吏曺左郞)을 거쳐, 이조(吏曺)· 병조(兵曺)· 형조(刑曺)의 정랑(正郞)을 차례(次例)로 역임(歷任)하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헌납(獻納) 등(等)의 장래(將來)가 촉망(囑望)되는 직위(職位)를 두루 거치며 경륜(經倫)을 쌓았다.
이어 경상도경차관(慶尙道警次官)을 비롯한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명종(明宗) 11年(1556) 권철(權轍)은 형조판서(刑曺判書)에 올랐는데, 전라도(全羅道)에 왜구(倭寇)가 소란(騷亂)을 피우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겸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왜구(倭寇)를 소탕(掃蕩)하고 이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명(明)나라 사신(使臣)을 맞이하는 일에 역할(役割)을 다하고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명종(明宗) 20年(1565), 권력(權力)을 함부로 부리던 천하(天下)의 흉상(凶相) 윤원형(尹元衡)이 패망(敗亡)하여 정승(政丞)자리가 비자 권철(權轍)은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선조(宣祖) 즉위(卽位)와 함께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가 선조(宣祖) 4年(1571) 5月, 69歲의 나이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이듬해 나이 70歲에 이르니 왕(王)으로부터 궤장(机杖)을 하사(下賜)받고, 선조(宣祖) 6年(1573)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9月 다시 두 번(番)째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선조(宣祖) 11年(1578) 8月에 권철(權轍)은 76歲의 나이로 일생(一生)을 마치니 강정공(康定公)으로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오늘날의 경기도(京畿道)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석현리(石峴里)에 공(公)의 묘소(墓所)가 마련되었는데, 5年뒤에 숨진 정경부인(貞敬夫人) 창년조씨(昌寧曺氏)와 합장묘(合葬墓)로 지금에 이른다.
묘역(墓域)에는 헌종(憲宗) 13年(1847) 권철(權轍)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는데, 비문(碑文)은 이조참판(吏曺參判) 이민구(李敏求)가 짓고, 권철(權轍)의 11代孫(대손)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권응기(權應夔)가 글씨를 쓰고, 전액(篆額)은 고종(高宗)때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그의 外11대孫(외11대손) 이유원(李裕元)이 의정부 검상시절(議政府檢詳時節)에 새겼다.
권철(權轍)은 낮고 작은 관직(官職)에 있을 때부터 몸가짐이 신중(愼重)하여, 일찍부터 재상(宰相)이 될 인물(人物)로 손 꼽혔다.
비록 출중(出衆)한 재기(才氣)는 없었으나 청신(淸新)하게 법도(法度)를 지켜, 감(敢)히 누구도 트집을 잡지 못하였고, 세상(世上) 사람들이 복상(福相)이라 칭송(稱頌)하였으며, 혹(或)은 거공(鉅公)이라 했다.
거공(鋸公)은 큰 인물(人物)이라는 뜻이었다. <국역연려실기술(國譯燃黎室記述)>에 이런 글이 있다. 『권철(權轍)을 영상(領相)에 제수(除授) 하더니, 임금은 어깨로 메는 가마(駕馬)로 조정(朝廷)에 들어 올 것을 명(命)하고, 매양(每樣) 임금에게 조알(朝謁)할 때는 내시(內侍)로 하여금 부액(扶腋) 받아 출입(出入)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의정부(議政府) 마당에서 있던 큰 괴목(槐木)이 폭풍(暴風)으로 부러지니 공(公)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죽을 징조(徵兆)이다!” 하더니 과연(果然) 얼마 안가 병(病)으로 자리에 누워 세상을 하직했다.』
권철(權轍)은 항(恒)·개(愷)·순(恂)·율(慄)等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관직(官職)에 나가 가문(家門)을 빛냈다. 장자(長子) 권항(權恒)은 광흥창수(廣興倉守)였고,차남(次男) 권개(權愷)는 호조좌랑(戶曺左郞),삼남(三男) 권순(權恂)은 여주목사(驪州牧使)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事)에 이르렀다.
막내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도원수(都元帥)로 유명(有名)한 권율(權慄)이었다.
권율(權慄)은 문과(文科)에 올라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역임(歷任)하고 광주목사(廣州牧使)였을 때 왜란(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금산(錦山)에서 왜군(倭軍)을 격파(擊破)하고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에 승진(昇進)하였다.
뒤에 행주산성전투(幸州山城戰鬪)에서 크게 이겨 도원수(都元帥)에 오르니, 오늘날로 말하면 국군(國軍)의 총사령관격(總司令官格)이다. 문관(文官)으로 입신(立身)하여 문무최고(武官最高)의 직위(職位)에 올라 왜란(倭亂)뒤에 선무일등공신(宣撫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올랐다.
나라 보전(保全)에 큰 업적(業績)을 세우고 일생(一生)을 마치니 왕(王)은 그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여 기렸다. 권철(權轍)의 손자(孫子)인 권항(權恒)의 아들 권인경(權仁慶)이 있어 그는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였고, 권항(權恒)의 사위 이유중(李有中)은 이조참판(吏曺參判),한종수(韓宗洙)는 공주목사(公州牧使),이충원(李忠元)은 공조판서(工曺判書)였다.
권철(權轍)의 차남(次男) 권개(權愷)의 사위가 또한 유명(有名)하니 병자호란(丙子胡亂)때의 척화파(斥和派)의 선봉(先峰)이었던 좌의정(左議政) 김상용(金尙容)이었고, 권철(權轍)의 삼남(三男) 권순(權恂)의 아들 진경(晉慶)·이경(履慶)·익경(益慶)이 있어,권진경(權晉慶)은 황해병사(黃海兵使),권이경(權履慶)은 금성현령(金城縣令),권익경(權益慶)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었고,권순(權恂)의 사위 이수준(李壽俊)은 길주목사(吉州牧使)였다.
권철(權轍)의 막내아들 권율(權慄)은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이 있었는데, 사위가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큰 공(功)을 세워 이름을 떨친 영의정(領議政) 이항복(李恒福)이었다.
권율(權慄)은 조카 권익경(權益慶)을 양자(養子)로 맞이하여 뒤를 이었다.
이리하여 권철(權轍)은 외손자(外孫子) 사위에 판서(判書)·좌의정(左議政)·영의정(領議政) 등(等),공경(公卿)을 여럿 둔 복(福)많은 재상(宰相)이 된 셈이다.
2011. 11. 14. 伍民 轉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