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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에 복무 및 연합한 한국인들과 일본군에 입대한 한국인들!
1. 신흥무관학교와 봉오동 전투 및 청산리 전투
1) 신흥 무관학교 : 1909년 신민회(新民會) 는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등을 파견해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임시로 터를 잡은후 이동녕을 소장
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으며 1911년 4월 제1기 졸업생 변영태(卞榮泰)등 40여명을 배출합니다.
이후 청년들이 모여들자 1919년 유하현 제3구 고산자가로 이전해 신흥무관학교로 바꾸었으며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는 중에 3·1 운동후 우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였으니, 이때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육군 중위 지청천(池靑天), 윈난(雲南 운남)사관학교 출신
이범석(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들어오면서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날로 증가합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잇단 사고로 1920년 가을 2,100명의 졸업생을 낸 가운데 폐교되니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지역 안도현(安圖縣)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洪範圖)
부대와 연합하였고 김좌진 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密山)에 도착해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합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활동 지역을 보면 주로 만주와 중국 본토 등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지만 학교가 만주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졸업생들은 대부분
만주에서 활동하였으니 그들이 활동했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단체는 여러 곳입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그리고 대한통의부,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 주요 무장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중국 본토 지역에서는 의열단과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을 들 수 있습니다.
2) 봉오동 전투 :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길림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승리한 전투로 삼둔자 - 안산 - 봉오동 전투 3차례를 말합니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鳳梧洞) 에서 홍범도(洪範圖)가 이끈 대한독립군, 안무(安武)가
이끈 국민회군, 최진동(崔振東)이 이끈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
독군부와 한경세(韓景世) 가 이끈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야스카와 지로
(安川二郞)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 에 승리합니다.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 독립군이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 강양동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하자 일본군은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제19사단에 월강추격대대
를 편성하여 중국 영토를 침입해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서니 홍범도
가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추격대대를 삼면에서 포위하여 사격한 후 폭우가 내리자 재빨리 후퇴합니다.
독립운동사와 상하이독립신문등은 임시정부의 호외를 근거로 삼둔자 - 안산 전투 일본군 120명 사살,
봉오동 전투 150명 사살에 아군 전사 4명이라 했으나, 강룡권의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에 따르면
현장을 수차례 답사한 안화춘씨의 말을 근거로 첫번째 6월 5일 삼둔자 전투는 남양수비대 17명이
두만강을 건너 산기슭을 따라 삼둔자 마을 김명오 노인집으로 접근하자 눈치를 챈 신민단원 30명은
서남쪽 마패 방향으로 후퇴했으니 죽은 사람은 김명오 노인의 아내와 장남, 차남의 처와 손자뿐입니다.
2번째 6월 6일 안산 전투는 강용권씨가 현장을 방문해 전투 당시 12살 이었던 최상준 노인을 만나 들은
얘기로는 신민단원 10여명이 최진국 집에 묵고있는데 일본군 척후병 한명이 3채뿐인 집을 수색하다
최진국의 집 방문을 여니 독립군이 사살했고 그 총소리에 일본군이 사격하니 독립군은 뒷문으로
해서 숲으로 달아나는 중에 1명이 죽은게 전부인데 두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했다고 부풀린 것입니다?
6월 7일의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800명 부대가 봉오동으로 들어오는 계곡에 매복해
일본군을 습격한 제대로 된 전투로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했는데 오후 4시 경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더니 폭우가 쏟아진후 독립군은 재빨리 후퇴했으며 일본군은 호박골로 퇴각하면서 조선
풍리에서 두만강을 건너오던 지원병과 피파골에서 저들끼리 오인 사격으로 수십명이 죽었는가 합니다.
강룡권의 동북항일운동유적 답사기에는 연변대학 역사학 교수 박창욱이 도문시 오공촌의
최상준과 홍광향 홍위촌(곡수) 리종만의 증언을 들었고 안산의 김동진(1986년 72세),
남봉오동의 한동선(1986년 75세), 김리환(1986년 75세)등도 폭우가 전투를 종결
지었다고 말했으며 야스가와 소좌 보고서등은 일본군의 전사자는 1명으로 나오며
야스쿠니 신사에 봉오동 전투 희생자는 없고 청산리 전투는 11명 죽었다며 합사했습니다.
3) 청산리 전투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더욱 활발해
졌고 이에 일제의 대만주 독립운동 탄압도 점차 강경해져 갔는데, 이 과정에서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제는 10월에 훈춘 사건을
일으켜 이것을 병력 진입 구실로 삼고서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합니다.
러시아 내전에 개입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귀국하면서 1920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
에서 일부 병사들은 무기를 북로 군정서에 판매하였으며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는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 수비대가 송화강
을 건너 서진해 북로 군정서군을 3면에서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됩니다.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을 피해 화룡현 서부 지역으로 이동해 홍범도부대와 만났으며 10월
19일 회의에서 전투를 피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미 일본군이 근접한 상황이라 추적
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하니, 10월 21일 김좌진
의 제1제대와 이범석의 제2제대는 청산리 백운평 위쪽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해 전투준비를 하는데 청산리 계곡은 25km 에 달하며 울창한 삼림지대 였습니다.
21일 아침에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매복 중이던 이범석 부대와
교전을 벌였고 야마다가 지휘하는 본대가 도착해 총격전이 벌어지자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를 지시하는데, 독립군은 일본군 960명을 사살하는
등 큰 피해를 줬다고 기록했으나..... 일본측 기록에는 반대로 독립군을 격퇴했다고 나옵니다.
김좌진 부대가 일본군 본대를 피해 철수하던 시각에 인근 이도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해 일본군
이 자기들 끼리 서로를 오인 사격하는 상황이 벌어져서 독립군이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했지만.... 그러나 일본측 기록에서는 아예 전투 자체를 벌이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22일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 고지로 이동시켜 포위 공격해 오는 일본군 가노 노부테루
대좌가 지휘하는 27기병연대와 교전했는데, 날이 저물자 탄약 부족과 일본군 증원 부대를
우려한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는 어랑촌 부근 고지에서 철수했으며 23일 부터 추적
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 를 따라 상류로 이동합니다.
24일 저녁 8시 천보산의 일본군 중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
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해 급습하니 난전이 벌어졌는데.... 새벽에
일본군을 피해 안도현 지역으로 부대를 옮겼으며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아져
오자 북만주로 후퇴를 거듭하다가 부대 유지가 불가능해져서 독립군은 해산합니다.
독립군은 3천~4천명 중에 1,200~3,000 명이 교전에 참가했으며 일본군은 3만 중에 5,000명
이 교전했는데 아군은 60명 전사에 90명 부상이고 일본군은 한국의 주장은 1,000명
사살에 3,300명 부상이고 반면에 일본의 기록은 11명 전사에 24명 부상이니 엄청 차이가
나는데 고구려 연구재단 장세윤 교수는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전과가 과장됐다고 말합니다.
박은식이 독립군 사기진작을 위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에서 가노 연대장 이하 1,600명을
사살했다고 했고 해방 후 이범석이 쓴 자서전에는 3,300명으로 늘렸는데 박창욱 연변대 교수
는 야스가와 소좌 1개 중대 병력이 선두부대로 21일 백운평에서 김좌진 부대와 9시 반 부터
접전하니 전투는 30분간 이어졌으며 그후 야마다지대는 오후 2시 반까지 북로 군정서 부대를
추격해 노령까지 갔으나 후퇴한 북로 군정서 부대를 잃어버리고 철군하니 '백운평 전투' 입니다.
한국측에서는 이 전투를 대서특필하지만 전투 시간은 한 시간도 못 되며 일본군의 추격·수색 시간
까지 합해도 4시간 정도이며 설령 야스가와가 인솔한 1개 중대가 전멸되었다고 하여도 백여명
남짓일 것인데 이를 가노 기병 대좌 이하 960명을 사살했다고 말하니 백운평이나 야지골,
완루구나 고동하 현장에 가본 이들은 가파르고 협소한 산지라 큰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실명이 거론되는 '연대장 가납' 은 가노 노보테루 연대장인데, 제27기병 연대는 퇴로 차단을 위한
기동에 나섰으나 습지가 너무 많아 퇴로 차단은 실행하지도 못하고 어랑촌에 포진한 것으로
나타나니 현장에서 멀리 있었으며 가노 노보테루는 1922년까지 군 생활을 계속한 것으로
나오고 제3자인 중국측 기록에도 11월 13일 중국 지방 군경들이 조사한 보고서에도 나옵니다.
후퇴를 거듭한 독립군은 소련 국경에 이르러 해산했음에도 일본군의 추격이 멈추지 않자 국경인
밀산으로 불러모으니 10개 독립군 단체 3,500명은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해 강을 건너 소련땅
자유시로 들어가는데,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지휘권 다툼에 휘말리게 됩니다.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자 거부하다 소련군과 이르쿠츠크파의 공격을 받아 전투에서 수십명이 죽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어 소련군에 편입되었고..... 소련으로 가지 않은 이범석과 탈출한 김좌진
을 제외한 독립군은 소멸되니 이후 10여년간 만주에서의 부대 단위 독립군 전투는 전혀 없습니다.
홍범도 부대는 소련군의 무장해제 요구에 응했던 덕분에 피해는 없었는데 포로가 된 독립군에 대한
재판관으로 참석한후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을 만나 권총을 선물받고 소련 공산당원으로 연금을
받으며 살다가 1943년에 죽으니 “저명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 묘,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의 일홈은 천추만대에 길이
길이전하여지리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시의 홍범도장군 묘에 세워진 철비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한국에서는 독립군 측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군 1,000여명
(훗날 이범석은 3천명?)을 사살한 대전과를 올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교차연구를
통해 너무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전투는 추격하는 일본군을 피해 독립군이
계속 후퇴하는 양상이었으며 적을 수없이 죽였다는 백운평 전투는 일열 종대로 통과
하는 좁은 길이고 불과 1시간 짜리 전투 인데다가 일본군은 모두 1개 중대에 불과 합니다.
1979년 일본 사학자 사사키 하루타카의 청산리 전투 논문에 따르면 일본 제19사단 사령부
의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 측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일본인 사상자가 1천명 이라는 한국측
기록 보다 훨씬 적은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파악하였으며.... 그리고 이 수치는
후생성의 명단 및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사자 명부와 정확히 일치하며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에서 편찬한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 도 피해가 미미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 서전에서 승리한 독립군이 일본군 본대의 포위를 피해 달아나자.... 일본군은 독립군을
뒤쫓았으나 소련땅으로 도주해버리니, 독립군에게 군자금과 식량을 제공했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만주의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 학살하고 불질러 폐허로 만들었는데 화룡현 장암동에서 28명
의 기독교인을 세워놓고 소총 사격을 했으며, 연길현 의란구에서는 30여호 전 주민을 몰살했습니다.
연길현 와룡동에서는 얼굴 가죽을 모두 벗기고 두 눈을 빼냈고 어린아이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시체를 태워
버렸으며 어린 소녀를 폭행한 뒤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으니 미국인 선교사 마틴은
“피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 라고 개탄하고 있으며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학살된 조선인은 3,469명이었다니 만주에서 독립군의 근거지는 사라진 셈입니다.
2. 중국군에 복무내지 연합한 조선인
1917년 군벌 단기서가 세력을 키워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쑨원(손문) 은 "모자라는 군사력을 절감"
하는 중 국제공산당 대표 마린을 만나니 군관학교를 세울 것을 권고받고는, 장개석 등을 소련에
파견하여 소련 공산당 홍군 학교를 시찰하고 보로딘 등 군사 고문과 교관을 중국에 초빙해 옵니다.
1924년 6월 소련의 도움과 국공합작을 통해 장개석을 교장으로 주은래를 정치부 주임으로
하여 광주에 황포 육군군관학교가 개교하니, 1927년에 장개석의 상해 쿠데타로 국공
합작이 결렬되어 폐교될 때 까지 이후 3년간 무려 15,000 명의 장교를 배출하게 됩니다.
1) 중국군에 복무한 조선인 : 상해 임시정부 신규식은 손문을 찾아와 임시정부 승인과 조선학생들
입학을 협의하고 의열단장 김원봉도 부탁하니, 모두 73명의 조선 학생들이 광주 황포군관학교
에 입교하는데 학교에는 조선인 사진이 3명 전시되어 있으니 양림과 이범석 그리고 최용건 입니다.
양림(楊林)은 운남 육군 강무학교를 졸업한후 광주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을 지냈고 이후 1932년에는
만주의용군을 조직했으며 공산당 모택동의 군대인 중국 홍군 23군의 군단장 까지 지낸 인물 입니다.
이범석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싸운후 일본군에 쫃겨 만주를 떠나 다른 독립군들이 소련땅
으로 달아나 자유시 참변에서 2,800명이 죽거나 행불 또는 항복해 소련군에 편입되었지만,
그는 용케 중국 본토로 달아나서는 운남 육군 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
을 지낸 후 광복군 참모장을 지내고 해방후 귀국해 대한민국 국무총리겸 국장장관을 지냅니다.
최용건 역시 운남 육군 강무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황포 군관학교에서 교관을 지낸후 1928년 만주
흑룡강성 통하현에서 반일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후 김일성 처럼 모택동이 만든 중국인과 조선인
연합 부대 동북항일연군에서 7군 참모장을 지내고 해방후 귀국해 북한에서 국가 부주석을 지냅니다.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 나라" 의 주인공 김산이며 김성숙, 장건상과 김원봉을 포함한
의열단원등 조선인들은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후 일부는 1927년 7월
중국인 엽정, 화룡, 엽검영등 후일 공산군 수뇌들과 연합해 강서성에서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에 대항해 남창기의를 일으키고 "좌파 조선의용군" 을 조직하게 됩니다.
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은 손문이 죽은후 1927년에 장개석이 상해에서 쿠데타
를 일으켜 좌파 공산당원을 숙청하면서 일단락 되었지만, 상해에서 멀리 충칭까지
쫃겨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에서는 국공합작을 유지하여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해방되는 그날까지 임시정부에서 함께하지만 1940년 창설된 광복군은 숫자가
400명 정도에 불과하고 재정이 열악하니 일본군과 공식 전투는 단 한차례도 벌이지 못합니다.
조선인들은 1926년 장파쿠이(張發奎)의 북벌 부대 2천명 중에 200여명을 시작으로 1927년 12월 광주
공산당 봉기 때는 최용건이 조선인 학생 160명과 함께 참가했으며, 이후 김원봉 부대 400명 중에
100명은 충칭의 광복군에 남았으나 김두봉, 최창익, 무정, 박일우등 300명은 일본군과 전투를
해야 한다면서 전투를 치를 능력이 없는 광복군을 버리고 연안으로 가서 공산당 홍군에 합류 합니다
장개석은 1926년 북벌에 나서 상해로 진입해 돌연 국공합작 중이던 좌파 공산주의자 노동자
를 색출해서 처형하자 국공(國共) 합작이 깨지니, 이후 좌파 공산당원들이 광주에서
궐기하여 1927년 9월 28일 광주시내를 점거하나 열강을 등에 업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공격해오니 광동 코뮌은 불과 3일 천하로 끝나는데 이때 무려 5천명이 죽었습니다.
5천명 중에는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다니던 조선인 200명도 중국인 엽검영과 조선인 리용
등 공산당이 주도한 궐기에 참가하여 75% 인 150명이 죽었으니.... 광주 혁명 열사능원에는
이들 150명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능 안에 특별히 "조선열사 기념비" 를 세워 두었습니다.
전남 광주 태생의 정율성은 1933년 19세 되던 해에 중국으로 건너가 김두봉, 무정등 조선
독립동맹원들이 있던 공산당의 보루인 연안으로 찾아가서는 옌안송, 연수요를 작곡해
모택동의 신임을 받은후 1939년에 팔로군 행진곡(八路軍進行曲)을 작곡하니 오늘날
중국 인민군 공식 군가인 "인민해방군가" 인데 그는 "신중국 창건 100대 영웅" 에 뽑힙니다.
2) 1930년대 중국군 부대와 연합한 조선 독립군 : 1911년에서 1920년까지 서간도에 신민회 가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김원봉, 이범석등 3,500명을 배출했는데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후
독립군은 일본군에 쫃겨 소련땅으로 달아났으니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 전투는 전혀 없었습니다.
조선인 단독으로는 일본군에 대적할수 없으니 십여년간 숨만 쉬고 살다가 마침내 1931년 만주
사변이 일어나고 괴뢰 만주국이 수립되자.... 먼산에 불보듯 하던 중국인들이 비로소 투쟁에
나서니 독립군은 12년 만에 드디어 중국인과 연합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기회를 잡게 됩니다.
1932년 3월 1개 대대 정도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은 중국인과 연합해 영릉가전투와 1933년 흥경성
전투를 벌였고, 1932년 9월 지청천의 독립군 3천명과 중국군 2만 5천명으로 편성된 한중연합군
은 쌍성보(雙城堡) 전투를 벌였으며... 1933년 4월 사도하자(四道河子) 전투, 5월 동경성(東京城)
전투 그리고 7월에는 독립군 2,500명과 중국군 6,000명이 연합해 대전자(大甸子) 전투를 벌입니다.
1933년 9월 1일 한국독립당 독립군은 동녕현의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전리품 분배에서 감정이
상한 중국군 부대가 지원군을 보내오지 않으니 한중연합을 깨어지고 그후 일본군에 전멸에
가까운 대패로 흩어지니 이후 소멸하였고, 조선혁명군도 1934년 9월 양세봉이 피살된 후 만주
에는 민족주의자 독립군은 없어져 버리니 불과 1~2년 반짝하고 사라진 독립투쟁 전투 였습니다.
3) 동북항일연군의 공산당계 조선인 : 불과 1~2년 전투 끝에 1933년에 민족주의 독립군
이 소멸한 이후.... 1936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모택동의 홍군 8로군은 조선인들을
받아들여 1936년에 공산당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 개편한 “동북항일연군” 을 창설
했으니 김일성, 최현, 김책, 최용건, 강건, 김일, 리홍광등 40% 가 조선인들 이었습니다.
동북항일연군은 제1군, 제2군이 남만주에서, 제4, 5, 7, 8, 10군이 동만주, 제3, 6, 9, 11군이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는데 후에 남만주는 제1로군으로 동만주는 제2로군으로 북만주는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으며, 제1로군은 보천보 전투 이전 부터 제1군의 김일성이나 최현
의 이름은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을 통해 조선에 알려져 있었으니 일본은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이들은 만주국과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자 일본은 만주국의 경찰·군대와 관동군
등을 동원해 게릴라의 거점이나 협력하는 촌락 등을 섬멸하고 활동을 고립시키며 귀순 공작을
하니, 연군은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으로 부터 물자의 보급을 받았고 만주국 내부에서도 동북항일
연군에 비밀리에 무기를 공여하거나 또 사적인 이익을 위해 무기를 밀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37년에 제1로군 제2군 제6사(사장은 김일성)는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은 언론
에 보도가 되어 한국 내에도 알려졌는데 동북항일연군의 전성기에는 참여인원이
1만명이 넘어 일본제국의 만주 및 중국 침략에 커다란 장애였으니 동북항일 연군은
한반도 내로 진공작전을 펼치기도 해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도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1939년부터 관동군과 만주국군 특설대 등에 의한 대규모 소탕 작전을 전개하여 동북항일연군은 양징위
(楊靖宇) 등 많은 전사자를 내었고 1940년 일제는 관동군을 76만명으로 늘려 항일연군 토벌을 강화
하니 무정은 연안으로 철수하고 주보중(88연대장 중공 중국인) 최용건, 김책, 김일성 (88대대장) 등
1~3로군의 지도부와 잔여 병력 상당수는 1941년까지 소련 영내로 달아나 제88 특별 여단에 편입됩니다.
여단장은 저우바오중(주보중)으로 소련 망명 후에도 그들은 수시로 만주와 북조선에 잠입하여
정찰 및 기습, 민중 조직화 등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여단은 소규모 부대를 만주로 파견해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주민들 사이에 들어가 비밀 조직을 만들어 내기도 했으나 1943년 이후
활동은 급감했으니, 장개석처럼 일본의 패망 이후를 겨냥한 역량 보존으로 진로를 바꾼 것입니다.
4) 국공내전 홍군에 참가한 조선의용군 : 1946년에 국공내전이 벌어지니 장개석은 30만 국민당군
을 만주에 상륙시키자 조선인 200만은 국민당 군대에는 거의 지원하지 않고 16만명이 모택동
의 공산당 군대에 호응하니, 1942년에 연안에서 창설된 조선의용군에 참가해 국민당 군대
를 물리치는데... 이때 정규군 6만 중에 무려 4만명의 조선의용군이 북한으로 넘어와
6. 25 남침의 선봉에 서서 천안에서 미 24사단을 몰살시키고 “딘 사단장을 포로”로 잡게 됩니다.
6.25 인민군 21개 연대 중 10개 연대가 중공 8로군 출신 조선의용군이니 사단장만 보더래도 8로군
연대장인 김웅은 인민군 1군단장이고 김광협은 1940년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정치위원을 지낸후
소련 군정의 동북민주군의 군관구 사령관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제3사단장을 거쳐 2군단장이
되었으며 4사단장 이권무, 5사단장 김창덕, 7사단장 전용, 10사단장 이방남, 12사딘장 전우와 최인
이며 땅크사단장 류경수는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다 소련을 거쳐 들어온 자입니다.
5) 광복군 : 한국독립당군(韓國獨立黨軍)을 모태로 지청천(池靑天), 이범석(李範奭) 등이 이끌고온 만주의
여러 독립군들이 연합해 1940년 9월 17일 광복군(光復軍)이 창설되었습니다만 그 숫자는 불과 30명
이니 초라하기 그지 없었는데, 1942년 김원봉(金元鳳)이 이끈 400여명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참여하고 일본군에 징용되었다가 탈영한 조선인들이 가담하면서 규모가 500여명 수준까지 확대 됩니다.
하지만 중경의 광복군은 내일 아침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재정이 빈약하고 숫자도 적으니 일본군과 전투
를 치를 수가 없는지라.... 저 조선의용대 400명 중에 300명은 일본군과 싸우겠다면서 광복군을 버리고
연안의 모택동을 찾아 떠나니 더 빈약해진 광복군은 일본군과 단 한 차례의 전투조차 치르지 못했습니다.
6) 기타 : 광복군은 일본군과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한 가운데 소수 병력이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미얀마의 영국군에 배속되어 감청, 정보 획득 활동을 벌인 인면전구공작대(印緬
戰區工作隊) 활동을 벌인게 고작이며 그 외 김준엽과 장준하등 18명이 CIA 의 전신
인 OSS 에서 조선에 침투하기 위한 간첩 훈련을 받았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됩니다.
김홍일은 1920년 구이저우의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23년에는 한국 의용군사령관을 지냈고 중일전쟁 당시
중국 국민 혁명군 장교로 1932년 국민 혁명군 상해 병기창 주임때에 이봉창, 윤봉길
의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지원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임관되었습니다.
그 외에 운남 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해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된 권기옥이
있으니 중국 공군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대령에 까지 올랐는데, 1931년 일본의 기습
점령으로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자 일본군에 기총소사를 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발발후에는 충칭에서 육군참모학교 교관을 했으며 해방후 한국 공군 창설에 기여합니다.
3.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1910년 9월 1일 일본군으로 편입한 대한제국군 출신 조선인은 중장 2명 등 4명, 대령 1명등 영관급
9명 대위 8명등 위관급 12명등 25명에 특례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홍사익이나 영친왕
등이 있으니, 1883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가운데 일본 육사에 입학한 인원은 141명인데
메이지와 다이쇼 시기의 인원은 85명으로 그중에 육군무관학교가 폐쇄할때 편입한건 33명 입니다.
육군 헌병대 헌병보조원은 일등병 대우를 받았으니 1910년 헌병경찰의 숫자는 2,019명
이었는데 이중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1,012명이었으며 헌병을 합친 전체 경찰의
숫자는 7,712명이며 이중 조선인의 숫자는 4,440명이었고 1919년엔 헌병 대신
조선총독부 경찰이 업무를 맡았으며 헌병보조원들은 이후 일본제국 경찰의 순사가 됩니다.
조선인 일본병은 1938년부터 시작된 지원병, 1943년 시작된 학병, 1944년 시작된 징병제
가 있는데 육군은 94,978명이 징집되어 5,870명이 전사하고 89,108명이 귀환했으며
중국에 배치된 조선인 육군병은 15,941명 중 15,287명이 살아 돌아왔지만 사망률이
높았던 필리핀 전역에 배치된 육군병은 3,107명 중 불과 951명만이 귀환(생존률
30.6%) 할수 있었으며 뉴기니등은 2,877명 중 1,014명이 귀환(생존률 35.2%) 했습니다.
조선인으로 일본군 중장(별 2개)에 까지 오른 자는 홍사익, 조동윤, 이병무, 조성근, 어담,
고종의 아들 영친왕 이은이고 소장(별 하나)은 이희두, 김응선, 왕유식등이며 대좌
(대령)는 김석원등이고 그 아래에는 군악대 나가타 겐지로(김영길)에 학병 소위
김달삼과 김수환등이 있고 학병으로 끌려가 탈출한 사람은 김준엽과 장준하등 입니다.
1948년부터 1972년까지 육군참모총장 19명은 1대 이응준은 일본 육사 26기, 2대와 4대 채병덕은
일본육사 49기, 3대 신태영은 일본육사 1914년 졸업, 5대 및 8대 정일권은 일본육사 55기, 6대
이종찬은 일본육사 1935년 졸업, 7대 및 10대 백선엽은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9대 이형권은
일본육사 1942년 졸업, 11대 송요찬은 일본군 상사, 13대 최경록은 일본육사 예과졸업 준위,
15대 김종오, 16대 민기식, 17대 김용배, 18대 김계원, 19대 서종철 5명은 일본군 소위 출신입니다.
12대 촤영희와 14대 장도영은 미군 군사영어학교 졸업이고 20대 노재현은 해방 당시 19세로
일본 육사에 진학할 나이가 안됐으니 대한민국 육사 3기 출신으로 이후 참모총장들은 모두
한국육사 출신들인데.... 20명 중에 17명이 일본군 출신으로 광복군 출신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중에 유명한 사람 두명을 꼽으라면 백선엽과 박정희이지 싶은데, 백선엽은
6.25 때 개성의 1사단장으로 서울 장교구락부 낙성식에 참가해 술과 여자에 댄스파티를 즐기고
서울에서 잠들었다가 4시간 후 일요일 새벽에 기습 당하니 사단장과 연대장등이 대부분 서울 댄스
파티에 참가했고 비상경계령이 풀려 병사의 3분지 1이 휴가, 외박 외출로 비운 1사단은 괴멸됩니다.
주한미군 철수, 애치슨라인 미국 방어선에서 한국 제외, 비상경계령 해제, 장교구락부 댄스파티,
병사 3분지 1 휴가및 외박에 6.25 가 난지 불과 일주일 만에 전광석화 처럼 한반도에 공수된
미군등 잘 짜여진 올가미 처럼 보이는데, 백선엽은 대구 다부동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32세에
대한민국 최초의 대장으로 승진하고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으니.... 그는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해서는 독립군과 중공 홍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에서 장교로 복무 했습니다.
박정희는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하고 국민소득 100$ 로 세계 최빈국이니 봄이면 보릿
고개로 굶어죽어 시체가 거리에 늘렸던 한국에서.... 1965년 원수놈인 일본에 머리를
숙이고 한일청구권 협정을 체결해 당시 일본 외환 보유고의 35% 가 넘는 6억불 거액의
돈을 얻어와 포항제철, 울산공업단지, 경부고속도로, 소양감댐에 부두항만시설을 건설합니다.
저 6억달러 돈 중에서 55%는 공장과 도로, 발전소등 기간시설에 썼고 나머지 45%는 석유와
철광석, 고무, 목재, 나프타와 부품에 기계설비와 기술을 사와서는 경공업과 중공업을
건설해 국민소득 3만$ 부국으로 만들어 우리 민족을 살린 "민족의 은인" 이라 할 인물 입니다.
한일청구권 협정은 원수인 일본놈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돈을 구걸하는 것이니 야당과
대학생들의 반대 데모가 극심하자..... 박정희는 서울의 대학교에 탱크를 진입시켜
대학을 휴교시키고 대학생들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고는 협정을 체결했는데 야당
의원들은 전국에 차가 몇대 되지도 않는데 피 같은 돈으로 경부고속 도로를 건설하느냐?
경부고속도로가 완성돼도 부자한량들이 기생을 태우고 놀러다니는데나 유용할뿐이라고 성토
했는데, 산업화와 물류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니.... 저 돈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한국은
농업국가에서 탈피하지 못해 경제적으로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베트남 수준일 것입니다?
1965년 국민소득 100$의 한국은 농촌사회로 포항제철 같은 공장을 지어 산업화(공업화)를 하려면
돈과 기술이 필요한데 미국에 매달렸지만 지원을 거부하니..... 빅태준은 하와이 호텔에서
낙담해 실의에 빠졌다가 청구권자금 중에 농업 지원에 쓸 8천만 달러가 남아 있다는데 주목합니다.
박정희의 지원을 얻어 원수놈들인 일본으로 달려가니 돈이 부족한지라 신식설비는 불가능하니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이 일본의 제철 설비를 뜯어와 포항에서 조립하고 한국인들을 기술자
로 훈련시켰으며.... 첫 쇳물을 뽑을 때 까지 과정을 주도해서는 종합 제철소를 세워준 것입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에 근무했는데... 집안에서 맺어준 구식 시골 부인
과 떨어져 혼자 사는 중에 봉급날 마다 찾아오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치려고 군인에 지원합니다.
하지만 나이 초과로 인해 만주 군관학교에 불합격하자 천황에게 충성맹세(一死以テ御奉公,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를 쓰고는 사범학교때 교련을 담당했던 일본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의 추천
으로 간신히 입교해서는 1등으로 졸업하고 동경 육사에 편입해 일본군 장교로 만주에서 복무합니다.
해방후 귀국해 대구의 처자식을 찾지않고 서울에서 근무하다 여순반란 사건에 연루된 남로당 사건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당할 위기에 일본 육사 정일권, 백선엽, 장도영등 구명운동으로 일단 무기징역
으로 감형되고.... 동지들 이름을 제공해 6.25 직전에 군대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는데 공적을 세웁니다.
이 무렵인 1949년 5월 4일 춘천의 8연대 1대대장 표무원과 2대대장 강태무가 훈련이라고 속이고는 대대원
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월북했으니 좌익 남로당원들이 있는채 6.25가 벌어졌다면...... 박정희는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불명예 제대하니 장도영 도움으로 육본 정보국에 촉탁으로 있다가 6.25 전쟁이 나니 구사일생
으로 장교로 복귀해 대대장으로 참전하고 사실상 3번 결혼한 후 육군소장 까지 진급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4. 나라잃은 군인 - 폴란드인 군인과 조선인 병사
임용한 씨가 동아일보에 쓴 칼럼에“나라 잃은 군인”이라는 글이 있으니 "1944년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
로 진군하던 연합군은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다. 이때 벌어진 혈전이 몬테카시노 전투다. 2차
세계대전사에서 가장 크고 격렬했던 전투 중 하나다. 1월 부터 5월 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연합군은
역사인 성소로서, 독일군 마저 보호하려고 했던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폭격하면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무려 네 차례나 대공세를 편 후에 간신히 몬테카시노 점령에 성공했다. 연합군에는
미군, 영국군, 뉴질랜드군, 인도군, 구르카 부대 까지 참전했지만 결정적인
공을 세운 부대는 당시에는 나라를 잃은 군대 였던 폴란드군과 자유 프랑스군 이었다."
"2차 세계대전 내내 폴란드군은 좋게 말하면 전투의 결정적인 국면에, 다르게 말하면 제일
힘들고 어려운 국면에 투입되곤 했다. 노르망디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을 거의 자루 속에 가두었고, 독일군은 마지막 남은 탈출구로 거세게 달려 나갔다."
"압력과 저항이 대단한 자루의 끝을 묶는 임무에 투입된 부대가 바로 폴란드군 이었다.
그렇게 극렬하게 싸웠음에도 폴란드군은 이미 나라를 잃은 상태였기에 국제사회
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없었다. 이후 자신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
하지도 못했다. 생존한 폴란드군과 폴란드 국민은 종전 후에 더 큰 비극을 겪게 된다."
"태평양에서 벌어진 전투에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투입되었다
‘옥쇄(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죽음을 말함)’ 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교리에 따라 미군에 생포된 포로는 극히 적었다. 타라와에서는 겨우 145명
이었는데, 그중 128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때 투입된 조선인은 모두 1,400명 이었다."
"일본 군인 중에도 조선인 병사들이 있었다. 미군은 조선의 사정을 알았고, 조선인
과 일본인을 구분해서 수용했다고 한다. 포로가 된 청년 중에는 미군에 입대
해서 일본과 싸우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그런 사람들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조선인들은 자발적인 의사는 아니었지만 쌀과 콩에 면화 등 군수물자를 공출하고
징용으로 가서 탄광에다가 공장에서 총기와 군복을 만들었으며 남양에서 미군 함정을
공격하는 일본기들을 위해 군용 활주로를 건설하고, 학도병과 징병으로 일본군이 되어
전투에서 미군을 죽였는데 자진해 일본 육사에 진학해 천황의 황군이 된 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일본 육사를 나왔든, 지원병이나 학병 또는 징병으로 끌려갔던지간에 이들 중 조선인
출신을 몇 명이라도 모아 부대에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또는 단독으로라도 연대장이나
대대장을 사살하거나 혹은 유류고나 탄약고를 폭파 하는등...... 일본군에 저항한 자가
10만명이 넘는 조선인 장병 중에서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단 한명도 없었다는!!!"
일본군 복무 중에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미군과 싸우다가 미군에 포로가
된 후에야 미군 입대를 희망한 자가 더러 있었지만, 미군은 제네바 협약에 어긋
난다는 이유로 포로들로 조선인 부대를 편성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니... 나라를
잃으면 싸울 수도 없고 더 많은 피를 흘리고 싸워도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