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소백산 오디세이
1. 일자: 2023. 12. 23 (토)
2. 산: 소백산(1439m)
3. 행로와 시간
[죽령(09:40, 연화봉 7km) -> (도로) ~ 제2연화봉대피소/전망대/기상돔(11:25~35, 1357m) -> 소행성쉼터/중식(11:55~12:20) -> 소백산천문대/연화봉(12:32~45, 1383m, 비로봉 4.2km) -> (산길) -> 제1연화봉(13:33, 1394m) -> 천동 갈림(14:38) -> 정상(14:51) -> 천동 갈림(15:05, 천동 6.8km) -> (주목 군락/쉼터/계곡/소백산북부사무소/다리안) -> 주차장(16:47) / 18.76km]
< 죽령 가는 길에 >
집을 나서며 본 바깥 날씨의 온도는 -12도이다. 산에서는 더 춥고, 바람도 몹시 불 게다. 고생 길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도 발길을 끄는 그 무언가가 있다, 산에는. 어제 밤, 허영만 화백의 백반기행을 보다가 '맛집 오디세이' 란 말을 들은 기억이 스친다. 목적을 가지고 떠나는 긴 행위의 여정을 일컸는 말이리라. 그래 오늘 떠나는 산행은 '소백산 오디세이'이다. 비록 바다 건너 먼 곳으로 떠나 전쟁에 나서는 것도 아니고, 아내를 유혹할 이들이 있을리 만무하고, 길지 않은 하루 여행이지만 '모험과 귀환'에 방점을 찍고보면 오늘 하루 나는 주인공 오디세이아와 다르지 않다.
친구와 떠나는 먼 산행 제 4탄이다. 그간의 지리산, 설악산, 영남알프스는 무박이었는데 오늘은 그래도 당일산행이라 마음이 조금은 가볍다. 기영과 사당역에서 만나 커피 한 잔 사들고 버스에 오른다. 자리에 앉는다. 아늑하다. 아는 분들과 눈인사를 한다. 산악회 버스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에게는 많은 게 낯선가 보다.
출발 1시간쯤 지났을까, 버스는 경기도와 강원도, 강원도 경계 어딘가를 지나나 보다. 차밖 온도를 알리는 계기판에 -8.5도 찍힌다. 몹시 추운 날씨다. 바야흐로 한겨울이다. 산에서는 바람이 덜 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버스가 단양에서 죽령으로 오를 줄 알았는데, 풍기로 내려와 거꾸로 올라간다. 뭔 이유가 있으리라. 9:40, 행장을 정비하고 그새 많이 변한 죽령탐방센터 앞에 선다.
< 죽령 ~ 연하봉 >
잠시 탐방센터 안에 들러 스탬프를 찍으며 공단 직원과 이야기를 나눈다. 심심하던 차에 잘 왔다는 듯 이것저것 정보를 준다. 소백산은 바람의 산이라 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이곳 죽령 기온이 정상보다 낮다고 한다. 정겨운 말 한 마디가 장도에 큰 힘이 되었다.
시작 고도 700미터 어름, 눈 덮인 널찍한 도로를 걸어 오른다. 코에 들어오는 공기가 매우 차다. 일행들을 그새 앞서가고 후미에서 걷는다. 빠르게 고도가 올라간다. 기상대 돔이 올려다 보이는 비탈에 서니 해발 1200미터가 넘어선다. 완만하다고 해도 고산에서의 긴 오르막은 부담스럽다. 숨이 차오른다. 쉬어 갈 겸 잠시 멈춘 발걸음, 앞에 산새님과 미쉘님이 보여 그 모습을 담는다. 손이 시려워 엄두를 못 내었는데 한 번 시작하니, 찍을 것들이 꽤 눈에 들어온다. 스키용 고글을 쓴 기영의 모습도 담는다. 코가 낮아 안경이 잘 맞지 않다고 투덜거린다. 사진으로는 그 표정을 읽을 수 없어 낯설다.
눈 쌓인 비탈에 진한 갈색의 관목들이 겨울 햇살을 받으며 존재를 뽐낸다. 그 씩씩한 모습에 반한다. 그 뒤로는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살아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만에 눈 덮인 산과 새파란 하늘을 보아서 인가 보다. 일견 단조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흥미로운 일들이 꽤 있다. 오늘도 그루터기와 돌 주변으로 눈이 녹아 동심원을 그리는 모습을 보았다. 무생물에도 온기는 존재하고 그 작은 온기가 눈을 녹인다.
제2연화봉에서 잠시 멈춘다. 해안선님이 사진을 찍어 준다. 친구와 내 모습이 궁금하다. 한참 전부터 빤히 보이는 기상돔은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부근에 예전엔 없었던 제2연화봉대피소 건물이 보인다. 무척 커 보였다.
11:25 제2연화봉 전망대 앞에 선다. 바라보는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한 골곡진 산맥의 골격이 선명하다. 어느 분이 멀리 뾰족히 솟은 특이한 봉우리가 월악산 영봉이라고 알려준다. 모처럼 뻥 뚫린 풍경을 보니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전망대 부근을 서성이며 사진을 찍고 찍힌다. 실증나지 않는 즐거운 놀이에 빠져든다. 일행들은 먼저 떠나고 파노라마 사진 한 장을 찍어볼까 하고 남았는데, 해안선님이 영상 촬영을 하고 있다. 카메라를 당겨 인물사진을 찍어 본다. 살짝 웃는 모습이 멋지다.
산에서는 잠시 쉬더라도 앞사람과의 거리는 상당히 벌어진다. 쫓아가느라 힘에 겹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눈길에서는 캠프라인보다 비브람창 등산화가 안 미끄러져 효과적이란다. 몰랐던 사실이다. 참고해야겠다.
꽤 많이 걸어 일행들이 식사를 하려고 멈춰선 '소행성' 데크에 도착했다. 이상하리만큼 바람이 잦아드는 따스한 곳이다. 길가에 앉아 컵라면과 휴게소에서 산 샌드위치로 맛있게 식사를 했다. 따듯한 국물이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먹는 즐거움은 산에서는 특히 배가 된다.
오면서 뒤쳐저 걷는 게 부담스러웠기에 먼저 길을 나선다. 소백산천문대를 지나 연하봉으로 오르며 돌아본 풍경에는 기상돔, 월악산, 첨성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기가 막히게 날씨가 맑다. 연신 풍경에 취한다.
마침내 연화봉에 서니 아침에 차로 지나왔던 풍기, 영주 그리고 멀리 봉화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어딘가에 지난 가을에 올라 단풍에 감동했던 청량산도 있으리라. 반대 방향으로 제1연화봉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소백의 주 능선이 아아하게 이어진다. 흔히들 갖고 있는 선입견, 태백산은 거칠고 소백산은 크지 않다는 오해는 산에 올라보면 금방 풀린다. 특히 소백은 결코 작은 산이 아니다. 높이 말고 그 크기 만으로 본다면 태백을 앞선다. 먼 풍경의 다이나믹도 태백보다 한 수 위라 여겨진다.
< 연화봉 ~ 비로봉 >
연화봉을 지나며 길은 가파른 산길로 변한다. 온통 눈밭이다. 도로와는 차원이 다른 눈의 향연이 여기저기서 목격된다. 무릎 깊이로 빠지는 사면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옮겨 놓은 눈들이 쌓인 나무줄기도 이색적이다. 한겨울이라 풍성하고, 고산이라 더욱 멋진 풍경에 빠져든다. 흰색과 회색, 연한 푸른 기운만으로 최고의 그윽한 풍경화를 그려낸다.
내려서고 나니 긴 계단이 나타난다. 제1연화봉 가는 길이다. 왠지 낯설다. 길에서 제임스님을 만난다. 반가운 마음에 인물사진을 찍었다. 온화한 미소가 번지는 모습이 근사하다. 힘겹게 연화1봉에 올라선다. 지나온 풍경과 가야 할 곳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소백산 제 1의 풍광은 이곳이라 여겨졌다. 그간 소백산에 여러 번 왔지만, 늘 흐리고 바람 불고 짓궃은 날씨가 대부분이어, 제대로 된 풍경을 감상하기 어려웠는데 오늘은 달랐다. 참으로 복 받은 날씨다. 옆에서 걷는 친구는 자기 덕이라 말한다.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간 몇 번의 산행이 이를 증명한다.
연하1봉에서 비로봉 가는 등로는 해안선님 말대로 지리산 연하선경을 연상시킨다. 걷고 나니 그 거리와 볼거리는 그 이상이다. 내려다 보는 눈에 푸른 호수가 들어오고 그 뒤로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정상까지 이어지는 눈 덮인 겨울 산의 시원한 눈맛은 그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만큼 황홀하다. 데크에 서서 산이 주는 감동에 졌는다. 기대보다 훨씬 다양한 풍경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덕분에 시간은 꽤 지체되었지만 그 가치는 충분했다.
천동 갈림에 선다. 일행들은 이곳에서 바로 하산할 모양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비로봉에 인사는 해야지 하는 마음에 배낭을 중간에 벗어 놓고 맨 몸으로 정상으로 향했다. 배낭이라는 짐을 푸니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산정에는 인증 샷을 위한 긴 줄이 이어진다. 욕 먹어 가며 정상석 뒤편에서 간단히 사진 몇 장 찍고는 바람이 몹시 부는 길을 돌아나왔다.
< 비로봉 ~ 천동 주차장 >
14:51 비로봉, 날머리인 천동까지는 7km 가까운 만만치 않은 거리다. 주목이 벗이 되어 준다. 옛 기억은 고사목이 많았는데 이제는 새로 심었는지 커 가는 나무들이 눈을 한가득 머리에 이고 길을 안내하고 있다. 지능선에 들어서니 거짓말처럼 바람은 잦아든다. 돌 많은 비탈을 조심스레 내려선다. 중간 쉼터를 지나며 등로는 더 넓어진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등로, 지켜 간다. 계곡에는 얼음이 얼어 있고 길 풍경에는 변화가 없다. 예전 소백산에서 선글라스를 잃어버렸다는 기영은, 길에서 누군가가 흘린 색안경을 줍는다. 앞선 이를 불러세운다. 아니라 한다. 잠시의 어수선함은 이내 잦아든다.
다시 지겨운 하산 길, 말수가 적어진다. 짧은 겨울 해는 꼬리를 길게 내리려 한다. 지겨움에 지쳐 한계에 도달할 즈음에 다리안 유원지에 도착했다. 후미가 보이고 이내 버스가 서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19km 7시간에 가까운 긴 여정이었다.
우리의 소백산 오디세이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 에필로그 >
곤하게 자고 일어난 일요일 아침, 창 밖을 보니 길과 공원에 눈이 소복히 쌓여 있다. 어제 산에서는 그리도 바람이 불더니만 오늘 도시의 날씨는 고요 그 자체이다. 산에서와 같이 도시의 설경도 꽤 근사하다.
커피 한 잔 내려서 노트북 앞에 앉는다. 사진을 정리한다. 소백산의 설경과 먼 풍경이 어우러진다. 완만하게 굴곡지며 먼 곳으로 이어지는, 흰 눈을 안은 짙은 회색의 사선으로 기억되는 소백의 정상 능선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상하게도 친구와 둘이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그래서 나중에 아산 카페에 올라올 사진이 더 기대된다.
등산은 집을 나서 산에서 여러 일들 겪고 집으로 돌아오는 행위이다. 그 반복되는 행위는 늘 다른, 기대하지 않은 양상으로 전개된다. 오늘은 오랜 만에 아산을 찾았고 친구와 함께 해서 더 뜻깊었다. 설산에서의 먼 풍경, 그 중에서도 연하1봉과 비로봉 능선은 가히 최고의 풍광길이라 칭해도 허언이 아닐 것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생각해 보니 올 해도 내겐 또 다른 다이나믹한 오디세이의 일년이 아니었다 싶다. 소사에 감사하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고 아직도 믿는다.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이 온 누리에 퍼졌으면 좋겠다.
첫댓글 기가막힌 풍광은 즐겼으되 모처럼 노고가 느껴지는 산행이네 ㅋㅋㅋ 그래도 같이 먼길 나서자고 하는 친구가 있어서 좋지않소??
맞아요. 좋습니다.
생각보다 길었고 설산이라 에너지 소모가 많았지만, 자고 나니 즐거운 기억만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