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넘어 한민족의 통사通史인 <정역사>가 2020년 8월 21일 정수화에 의해 일단계 정리되어 8월 29일 정식 발표되었다. * 2020년 12월 20일 약간의 수정이 있었다. 7. 발해 대진국(정역사)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왕의 성씨는 대씨大氏이며 고구려가 망한 뒤 그 백성들을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근거지로 나라를 세웠는데 그곳은 지금 심양의 동쪽 20리에 있는 천주산天柱山이며 이때가 개화(開化보장왕) 27년인 668년이다<요사><신당서>. 이곳은 고구려때 계루부桂婁部 땅으로 영주營州로부터 동쪽으로 2천리 거리에 있고 남쪽은 신라의 북쪽과 이하(泥河.지금 요하遼河의 동쪽에 위치한 강으로 과거 패수浿水였다.)를 경계로 하고 서쪽은 거란과 경계를 이루었다. 왕도인 홀한성忽汗城은 홀한하에서 얻어진 이름이며 홀한하는 지금의 호이합하(呼爾哈河. 호수 위쪽에서 합해 지는 강)이다. 강은 길림오랍(吉林烏拉)의 경계에서 발원하여 필이등호(畢爾謄湖. 제2도시를 끼고 흐르는 강 주변에 위치한 호수=경박호)와 만나 동으로 흘러 회녕성會寧城 북쪽을 지나간다. 다시 90여리를 흘러 영고탑성寧古塔城 남쪽을 휘감아 북쪽으로 700리를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간다. <당서唐書>에 발해 상경은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에 있으며 옛 숙신의 땅이다. <신당서 지리지>에 안동도호부에서 개모성(蓋牟城. 개주盖州)을 지나고 또 발해의 장령부(長領府)를 지나서 1천5백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닿는다. 성(城. 홀한성)은 홀한해를 내려다 보고 있으며 그 서남 30리에 옛 숙신성이 있다. 또 신주(神州. 임강)에서 육로 길로 4백리를 가면 현주(顯州. 서고성 주변)에 닿고 또 정북으로 4백리를 가면 발해 왕성(상경성)에 닿는다. 하였다.
만세통천萬歲通天(696년-697년=696년)시기 거란 장수 이진충李盡忠의 반란으로 혼란한 시기에 걸걸중상(乞乞仲象. 대중상大仲象)이 도읍을 태백산(太白山 연변 왕청현 소재. 신시환웅과 단군조선의 성산聖山)동북쪽으로 도읍을 옮겨 경박호鏡泊湖 주변에 위치한 지금의 상경성(上京城.흑룡강성 영안)에 자리했다. 이 시기에 즈음하여 국호를 후고구려에서 대진국大震國으로 바꾸고 이때 주周(690년-705년. 당唐에서 국호 변경)나라 측천여제則天女帝는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했다. 이에 발해 대진국은 세조世祖 대중상으로부터 애제哀帝 대인선까지 15세(대위해大瑋瑎를 포함하면 16명)를 전하여 926년에 거란에 의해 홀한성(상경성)이 함락될때 멸망하여 259년(668년-926년)간 존속되었다.
1세. 세조世祖 열황제烈皇帝 대중상(大仲象. 걸걸중상乞乞仲象) 재임기간 668년-699년 열황제 대중상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속말말갈의 소국小國인 진국振國의 장수이면서 고구려장수였다. 그가 서압록하(西鴨綠河. 현 서요하)에서 당군唐軍과 싸우고 있었는데 668년 9월 21일 고구려 평양성이 당黨 장군 이세적李世勣에 의해 함락되자 대중상(大仲象. 걸걸중상乞乞仲象)은 이 소식을 듣고 서압록하西鴨綠河에서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택해 부여성(지금의 개원)을 지날 때 이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이 8000명이나 되었다. 대중상은 이들을 이끌고 심양 동쪽에 위치한 동모산(東麰山. 고구려 계루부가 있던 곳. 심양瀋陽동쪽 20리=천주산天柱山)에 터전을 잡고 나라를 세워 국가 명칭을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였는데 이때가 668년 겨울이다.
669년 당唐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675년에 안동도호부를 옛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기고 677년에 신성新城으로 714년에 평주平州로 743년에 요서군성遼西郡城으로 옮겼다가 758년에 폐지되었다.)를 설치하고 고구려 유민 3만 8000호戶 약 20여만명을 끌고 가 이들을 당나라 곳곳에 분산 시켜 살게 했는데 고구려 부흥 운동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그 대표적 인물이 안승(安勝)과 검모잠劍牟岑 그리고 대중상(걸걸중상)이었는데 안승과 검모장은 서로 격심한 의견 대립으로 안승이 검모장을 죽이고 신라로 망명하면서 이후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당唐과 대립 갈등관계에 있는 신라를 돕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677년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동모산에서 5백리 거리에 있는 신성(新城.심양 서북쪽 150리 지점)으로 옮기면서 대중상의 후고구려後高句麗는 상당한 안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후 696년과 697년에 걸친 거란인 송막도호松漠都護 이진충李盡忠의 반란에 당의 요동지배의 근거지가 되었던 영주營州가 함락되고 낙양과 장안까지 점령되면서 파죽지세를 유지하던 이진충과 손만영孫萬榮의 군대가 당과 돌궐 연합군에 패퇴하는 과정을 보면서 대중상은 동모산이 절대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자신들의 고향인 경박호가 있는 홀한주忽汗州 홀한성(忽汗城.상경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대진국(大振國. 大震國)으로 변경했는데 이때가 만세통천萬歲通天연간(696년-697년)이다. 하지만 <발해고渤海考>에서는 성력聖曆연간(698년-700년)에 국호를 변경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도읍을 이전할 때 국호를 변경한 것이 아니라 대조영이 즉위할 때 국호를 변경했다는 의미가 된다. 관심있게 보아야할 부분이다.
697년 주周(무주武周)나라 측천여제則天女帝는 대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이란 봉호를 내렸다. 하지만 말갈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는 자신에게 내린 허국공許國公이란 봉호를 거부함으로 측천여제는 거란 출신 장수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를 파견하여 그들을 치게 하였다. 결국 걸사비우는 697년 이해고에 의해 살해되고 걸사비우를 따르던 무리들은 대중상(대중상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은 병환으로 도성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의 아들 대조영의 무리에 합류하게 된다. 걸사비우를 격파한 이해고는 그 분위기에 편승해 계속 동쪽으로 진격해오자 대조영과 걸사비우의 무리들은 천문령(天門嶺. 토호진하 북쪽 300리 지점=<자치통감>)에서 이해고의 당唐군을 완파하고 결국 영주營州까지 그 세력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唐이 추가 공격을 하지 못한 것은 신라와 고구려의 항쟁으로 국력이 상당히 소진된 상태에서 송막도독松漠都督이었던 거란 장수 이진충李盡忠과 귀성주歸誠州자사刺史 손만영孫萬榮이 일으킨 반란을 돌궐의 힘을 빌어 진정시키면서 당의 영향력은 급격히 소진消盡되어 갔기 때문이다.
대중상은 중광重光32년인 699년 5월에 병환으로 죽게 되자 당시 영주營州 계성薊城을 지키고 있던 그의 아들 대조영이 대중상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대중상은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로 하고 시호諡號를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로 추증되었다.
대중상의 집권시기인 후고구려는 사실 대국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걸사비우의 세력이 합류되고 그의 아들 대조영이 즉위하면서 대국의 기초를 다지고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를 거치면서 대국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발해국(대진국)의 시조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는 사가史家들도 견해를 달리한다. 발해 대진국의 시조는 대중상인가? 대조영인가?
말갈은 단군조선 진국(振國. 진한辰韓)의 주된 부족이다. 국호를 대진국大震國으로 한 것도 말갈의 (고구려부터의) 독립과 진국(숙신. 단군조선의 진국)의 계승을 의미한다. 진국의 진(震. 辰)은 숙신과 같은 의미이고 숙신은 환웅桓雄의 주류(주력) 세력이고 단군조선 때는 진한辰韓, 진국(辰國. 振國)의 한 축으로 우리 선조의 아주 큰 줄기이다. 말갈= 제2도성(ㄹ)이 있는 호수주변(마. 경박호 주변)과 제2도성(ㄹ.= 홀한성) 그 주변(가)에 사는 사람들(부족). 1대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대조영大祚榮 699년-719년 고황제 대조영은 699년 아버지 대중상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그해 국가 명칭을 대진국(大震國. 또는 진국震國)으로 고치고 연호를 중광重光에서 천통天統으로 바꾸었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이다. 국호를 대진국을 바꾼 것이 도읍을 옮긴 만세통천(萬歲通天. 696-697년)연간인지 대조영의 즉위년(699년)인지 명확하지가 않지만 기록물들을 참고해 보면 도읍을 옮긴 시기에 국호 변경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호 변경 시기를 도읍을 옮긴 시기로 보면 대중상(발해)이 직접 국호를 지은 것이 되고 대조영 즉위년에 국호를 변경했다고 하면 당唐에서 국호를 지어준 것이 된다. 이것은 697년에 당唐에서 대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했기 때문이다.
만세통천(696년.3월-697년.9월 측천여제의 연호)연간에 도읍을 동모산(東牟山.고구려 계루부. 심양 동쪽 지역)에서 홀한성(忽汗城.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으로 옮겼다. 그의 재임 시기 이미 옛 고구려 영토를 상당부분 되찿고 개척하여 국토가 6000리나 되었다. 이 당시에 관한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을 보면 발해는 영주의 동쪽 2000리에 있으며 남으로는 신라에 접하고 북으로는 월희말갈越喜靺鞨의 동북에 위치한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이르고 인구는 10만戶에 군사는 수만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신당서新唐書>에는 부여(扶餘.개원)와 옥저(沃沮.남옥저.동옥저=해성. 북옥저=장춘) 그리고 조선朝鮮시대 변한(弁韓. 요녕성과 하북성일부=단군조선때 변한 땅) 땅인 조선(朝鮮.)과 해북(海北. 발해만 북쪽 지역)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하였다.
당唐은 선천先天 연간(713년-714년)인 천통天統16년(대조영 즉위 16년=713년)에 최흔崔盺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 겸 홀한주忽汗州 도독都督으로 봉하였다. 이후 진국은 발해말갈渤海靺鞨 또는 발해로 불렀다. 발해는 당唐과 유주(幽州.북경 주변)절도부節度府를 통해 통교하였으며 이웃하고 있는 거란을 방비하기 위해 부여부扶餘府에 최정예 군사를 두어 만일을 대비하였다. 고황제 대조영은 천통21년인 719년 봄에 대안전大安殿에서 죽어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성무聖武 고황제高皇帝라 하였다.
발해渤海=강가에 위치한 제2도성(발) 그 주변에 위치한 호수나 바다(해) = 제2도성 옆에 위치한 호수나 바다. =>경박호, 홀한주忽汗州=제2도성이 있는 호수(홀=경박호)와 도읍을 끼고 북으로 흐르는 강 주변(한=홀한하. 호이합하 주변)에 위치한 주(州.주) 아동수고(亜東水庫. 아동저수지. 화룡시 투도진 용문촌에 위치)=연변 서고성 12시 방향에 위치한 호수. 해란강=해란강의 상류는 장인강이며 화룡 투도진 용문촌에 있는 아동저수지에 저수되어 그 아래부터 해란강으로 불린다. 해란강은 연길시 소하룡촌부근의 성자산 남쪽에서 부르하통하에 합류된다. 강의 길이는 145km 평균너비 80-100m 평강평원(서고성 주변)과 세전평원이 있다.(연변일보)
2대 광종光宗 무황제武皇帝 대무예大武藝 719년-737년 무황제 대무예는 대조영의 아들로 계루군왕(桂婁君王. 옛 고구려 권력의 산실. 동모산 주변지역=심양동쪽 주변지역)으로 있다가 대조영의 죽음과 함께 진국(振國.발해)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하였다. 당唐 조정은 719년 6월 홍려경鴻臚卿 오사겸을 파견하여 대무예大武藝를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홀한주忽汗州도독都督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다. 무왕4년인 722년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대진국大震國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조공하고 725년에는 당에서 그곳에 흑수주黑水州를 설치하는 등 일련의 사태가 당唐이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발해의 뒤를 치려는 속셈이 있다고 판단한 대무예大武藝는 이를 차단하기 위해 흑수말갈을 치도록 하고 숙위宿衛로 당에서 머물다 돌아 온 동생 대문예大門藝와 외숙 임아상任雅相을 그 책임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당唐을 잘 아는 대문예는 이러한 행위가 당의 노여움을 사 고구려처럼 발해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상소를 올렸지만 대무예는 그 계획을 강행하였다.
마지못해 출정한 대문예는 현지(전장戰場)에서 거듭 공격 명령을 거두어 줄 것을 건의하자 무왕은 이를 항명으로 받아들여 종형從兄 대일하大壹夏로 지휘관을 교체하고 그를 소환하려하자 죽음을 두려워한 대문예는 그 길로 당唐에 망명하니 당 현종玄宗은 그에게 좌효위佐驍尉장군이라는 관직을 주었다. 이에 화가 난 대무예는 당에 마문궤馬文軌를 파견하여 대문예의 죄상을 밝히고 그를 죽여 줄 것을 요청했지만 당 현종은 그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신장위구르로 그를 피신시키고 귀양 보냈다 거짓으로 말하면서 형제의 우애를 논하며 대무예를 탓했다. 이에 화가 난 무황제 대무예는 당의 공격을 준비하면서 재임 9년인 727년 고인의高仁義를 책임자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국교를 맺었다.
재임14년인 732년 무황제 대무예는 장문휴張文休 장군을 보내 당唐의 등주登州와 동래東萊를 공격하여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죽이고 이곳을 성읍으로 삼았다. 이곳은 해상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적 요충지인데 이곳을 공격받은 당나라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좌령군左領軍 장군 개복순蓋福順을 등주로 보내고 좌효위左驍衛장군 대문예를 유주(幽州. 현 북경 주변)로 보내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고 신라에게도 병력 요청을 하여 후방 공격을 부탁하였으나 출정한 신라군 3만은 큰 눈으로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철수하는 등 발해에 대한 압박 공격은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무황제 대무예는 대문예에 대한 원한을 삭이자 못하고 자객을 동도東都로 보내 대문예를 암살하려는 시도도 해 보았지만 자객들은 발각되어 모두 죽었다.
당唐과의 결전으로 발해대진국은 대외적으로는 국제 위상을 크게 높였고 내적으론 체제 안정화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결과를 얻었다. 당의 동북방으로의 진출에 걸림돌이 되었던 돌궐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이 지역에 당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자 무황제 대무예는 돌궐이 발해에 원군을 청한 사실을 당에 알리며 당과의 화해를 시도하였다. 이때의 발해 영토가 서쪽은 거란을 경계로 하고 남쪽은 신라를 경계로 했으며 인안16년(734년) 개마蓋馬 구다句茶 흑수(黑水.흑수말갈)를 신하국으로 만들고 북방을 개척했다. 특히 동북아 맹주였던 당나라의 등주登州와 동래(東萊.래주의 동쪽지역)를 공격하여 그곳을 성읍으로 삼았다. 또 연충린淵忠麟이 이끄는 병사가 요서遼西의 대산帶山 남쪽 대방(帶方. 백제 개국지) 유역에서 당나라를 크게 격파하였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을 추격하여 요하의 서쪽에 위치한 이하(泥河)에 이르러 국경을 정했는데 그곳이 북이하北泥河이다.
해주 암연현岩淵縣의 동쪽 지역은 신라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요녕성 대석교大石橋시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공물을 바쳤고 임진강臨津江 이북의 여러 성은 모두 발해에 속했다. 인안17년 송막松漠에 12성을 쌓고 또 요서遼西에 6성을 쌓았는데 이때 발해는 5경京 60주州 1군郡 38현縣을 가지게 되니 땅의 한쪽 폭이 9000리가 되었다. 이해 당나라와 신라 왜도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해동海東의 성국盛國이라 칭송하였다. 오곡이 풍성하고 나라는 안락하여 대진국을 찬미하는 대진육덕大震六德이라는 노래가 있어 사람들이 즐겨 불렀다. 3월16일(단군왕검 제삿날) 서압록하 강변에서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서압록하는 옛 고리국高離國 땅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 대진국본기大震國本記> 무황제 대무예는 재임 19년인 737년에 사망하여 묘호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는 그의 통치행위에 어울리는 무황제武皇帝로 추증되었다.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대흠무가 즉위하였다.
3대 세종世宗 문황제文皇帝 대흠무大欽茂 737-793년 문황제 대흠무는 무황제武皇帝 대무예大武藝의 아들로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했다. 대흥 원년인 737년에 도읍을 동경(지금의 연변 혼춘琿春)에서 상경으로 옮기고<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오랜 재임기간 동안 내치에 치중하여 제도개편으로 관직제도 정비와 주자감胄子監설치 등 정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흠무는 넓게 확장된 영토를 안정되게 운영하기 위한 통합과 화해를 바탕으로 당과의 우호관계도 강화하고 당의 앞선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도하여 738년 6월에는 당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삼국지三國志>와 <진서晉書> <삼십육국三十六國 춘추春秋>등 역사서와 <당례唐禮>를 필사해 왔는데 <당례唐禮>는 당唐이 국가 통치를 위해 정비한 율령과 격식에 관한 5례禮가 담긴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를 말한다. 이것은 발해의 제도 개편에 많은 참고가 되었다.
738년에 태학太學을 세워 천경天經신고神誥와 환단桓檀의 역사를 가르쳤다.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국사 1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文治는 예禮와 악樂을 일으키고 무력으로 주변 나라들을 제압하여 그 곳에 태백太白의 현묘玄妙한 도道를 널리 전했다. 문황제 대흠무는 재임기간 동안 도읍을 여러 번 옮겼는데 상경(上京. 흑룡강성 영안)에서 옛 단군조선의 도읍지였던 중경(中京.현 길림성 화룡시에 위치한 서고성 주변)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시기(742년)를 <신당서>는 천보연간天寶年間이라 했다. 천보는 당 현종의 연호로 그의 재임기간은 742년에서 756년이다. 중경 주변에 위치한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용수향龍水鄕 용해촌龍海村의 용두산龍頭山 고분군古墳群에서 1980년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묘비의 기록에 보면 그녀는 757년에 태어나 792년 6월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돌궐突厥계 영주營州사람으로 당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총애를 받아 평로平盧 범양范陽 하동河東 3개 지역 절도사를 겸임하던 안록산安祿山이 범양에서 천보14년(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을 점령하면서 이듬해 756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대연大燕 연호를 성무聖武라 하고 스스로를 웅무황제雄武皇帝라 하며 위세를 떨치다가 757년 둘째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 즈음하여 문왕 대흠무는 도읍을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기고 또 재임 말년인 정원貞元연간(785년-805년)에 상경에서 동경 용원부(혼춘琿春. 경원 지역)로 도읍을 옮겼다.
발해의 중앙관제의 제도개편은 당唐의 3성(省.상서성 문화성 중서성 ) 6부(部.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를 참고하여 정당성政堂省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의 3성省과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 지부智部 예부禮部 신부信部의 6부를 두었다. 최고 권력기관인 정당성(政堂省)은 당나라의 상서성과 비유할 수 있고 선조성은 문화성과 중대성은 중서성과 유사한 역할을 했다. 최고의 권력기구인 정당성 아래 좌사정(左司政)과 우사정右司政이 있어 6부를 관할했는데 좌사정은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를 관할했고 우사정은 지부(智部.) 예부(禮部) 신부(信部)를 관할했다. 권력이 집중된 이러한 정당성(당나라의 상서성)의 중앙관제 형태는 이씨 조선(의정부)까지 유사한 형태로 이어졌다. 5경京의 설치와 함께 주변국으로 통하는 교통로도 정비했는데 5경은 용천부龍泉府에 위치한 상경(흑룡강성 영안)과 함께 현덕부顯德府에 위치한 중경(길림성 화룡) 용원부龍原府에 위치한 동경(혼춘. 경원) 압록부鴨綠府에 위치한 서경(길림성 임강) 남해부南海府에 위치한 남경(요녕성 해주)이며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신라로 가는 길이고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는 당나라 장안으로 가는 길이고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는 일본으로 가는 길이고 거란은 부여부扶餘府를 통해 갈 수 있고 영주營州는 장령부長領府를 통해 갈수 있었다.
문왕 23년(759년) 3월에 일본으로 파견된 고남신高南申의 직책명칭은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압아관押衙官 현토주玄兎州 자사刺史였다.
762년 당唐은 조서를 내려 문황제文皇帝를 발해군왕渤海郡王에서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승진시키고 검교태위(檢校太尉. 군사엄무를 담당하는 정1품 명예직. 사도司徒 사공司空과 함께 3공公이라 한다)를 제수했다. 대흥45년(781년) 고구려계로 평로平盧사람인 치청(淄靑. 임치와 청주)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당唐에 항거하니 제帝는 장수를 보내 그를 돕도록 하였다. 대흥 57년에 대흠무가 죽어 묘호를 세종世宗 시호를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라 하였다.
대문예 때의 도읍과 천도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737년(대흥원년)=<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상경에서 중경으로 천도=742년=천보연간(742년-756년)=<신당서>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755년(756년)=천보 말년=<신당서> 상경에서 동경으로 천도=785년(793년)=덕종 정원연간(785년-805년)=재임말년(737년-793년) *단군조선의 건국시조인 단군왕검이 재임시절 여러 번 도읍을 옮겼다.
4대 대원의大元義 793년-794년 793년 문황제가 사망할 때 그의 아들 굉림宏臨이 이미 죽었고 굉림의 아들 대화여大華璵도 나이가 어려 종제從弟인 대원의大元義가 즉위하였으나 그의 성품이 포악하여 갑술년인 794년에 국인(國人.나라를 지키는 사람=국방관련 직책으로 주로 지방의 군軍 세력을 일컫는다.)들이 그를 폐廢하고 문황제의 손자 화흥華興을 보위에 올렸다. 이것은 오랜 기간 강력하고 안정적 권한을 유지했던 문황제의 죽음으로 그의 통치력을 대체할 권력이 형성되지 않아 일어난 혼란으로 볼 수 있다.
5대 인종仁宗 성황제成皇帝 대화여大華璵 793년-794년. 성황제 대화여는 대원의大元義를 살해한 국인國人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이름은 화흥華興이라고도 하는데 문황제의 손자이다. 연호를 중흥中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였으나 즉위한지 반년도 되지 않아 병사病死하였다. 묘호는 인종仁宗이고 시호는 성황제成皇帝이다.
6대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 대숭린大嵩璘 794년-809년 강황제 대숭린은 문황제 막내 아들로 선대 성황제成皇帝 대화여大華璵의 숙부로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다 갑자기 성황제成皇帝가 죽어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연호는 정역正曆이라 하였는데 정력5년인 798년에 당唐은 내상시(內常侍. 내시보다 한 단계 낮은 계급) 은지섬殷志贍을 보내 그를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홀한주忽汗州도독都督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다. 이에 대숭린은 문황제의 예를 들어 계급이 낮아진 것에 대한 항의를 하자 당唐은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승진 책봉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검교사공檢校司空을 더하여 제수하였다. 일본과 교류를 활발히 하여 관련 기록이 일본에 의해 다소 전해졌다. 원화元和 원년인 806년과 807년 809년에 당으로 사신을 보냈다. 807년에는 단오절 축하사절로 간 양광신楊光信이 도망 와 산해관(山海關. 유관楡關)을 지키던 관리가 잡아 돌려보냈다. 강황제 대숭린은 재임16년인 809년에 죽어 묘호廟號를 목종穆宗이라 하고 시호를 강황제康皇帝라 하였다.
7대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 대원유大元琉 809년-812년 정황제 대원유는 강황제康皇帝의 아들이며 연호는 영덕永德이다. 당唐 원화4년(809년) 대원유를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종3품) 검교비서감(檢校秘書監.종3품) 홀한주 도독 발해국왕으로 봉했다. 아버지 강황제의 정책을 이어받아 일본과의 교류를 이어갔다. 810년에는 왕자 대연진大延眞과 신하 고재남高才南을 당나라로 보내 조회했다. 812년에는 당 황제가 인덕전仁德殿에서 사신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고 관직을 적은 사령장辭令狀 35통과 그에 맞는 관복을 1벌씩을 내려 주었다. 정황제 대원유는 재임4년이 되는 812년에 죽어 묘호를 의종毅宗이라 하고 시호를 정황제定皇帝라 하였다.
8대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 대언의大言義 812년-817년 희황제 대언의는 정황제의 동생이며 연호를 주작朱雀이라 하였다. 당唐은 재임2년인 813년 그를 발해국왕으로 책봉했다. 813년에는 신문덕辛文德과 함께 97명을 사신단으로 보냈고 재임3년인 814년에는 고예진高禮鎭과 함께 37명 또 대효진大孝眞과 59명을 당나라에 보내 조회했다. 또 그해(814년)에 문사文士 왕효렴王孝廉을 일본에 파견했다. 815년 왕자 대정준大庭俊 등 101명을 당唐으로 보내 조회하였다. 816년 고숙만高宿滿을 당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관직을 받고 돌아 왔다. 재임6년인 817년에 희황제 대언의가 죽어 묘호를 강종康宗이라 하고 시호를 희황제라 했다. 묘호=종묘에서 사용하는 이름. 시호=제帝나 왕이 내리는 이름.
9대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 대명충大明忠 817년-818년 간황제 대명충은 희황제의 동생이다. 817년과 818년에 당에 사신을 보냈다. 재위 2년(818년)에 죽어 묘호를 철종哲宗이라 하고 시호를 간황제簡皇帝라 하였다. 아우=나(아)를 위에서 보호 보좌하는 사람(우). =나보다 계급이 낮은 사람.
10대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 대인수大仁秀 818년-830년 선황제 대인수는 대조영의 직계손이 아니라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大野渤의 고손(高孫.4대손)이다.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했는데 간황제 대명충의 죽음을 원화元和 13년인 818년에 당唐 조정에 알리니 당은 5월에 대인수를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홀한주 도독 발해국왕으로 봉했다. 그의 통치 시기는 발해 최전성기를 이루어 남으로는 신라를 공격하여 이물泥勿 철원鐵圓 사불沙弗 암연岩淵 등 7주를 얻고 북으로는 염해鹽海 갈사曷思 나산羅珊 조나澡那 남북 우루虞婁를 공격하여 북쪽에 여러 부를 만들었는데 장백의 동쪽을 안변安邊이라 하고 압록강 남쪽을 안원安遠이라 하고 목단(牧丹. 모란)의 동쪽을 철리鐵利라 하고 흑수의 강변을 회원懷遠 이라 하고 난하의 동쪽을 장령長嶺이라 하고 장령의 동쪽을 동평東平이라 하고 우루는 북쪽에 있어 북대개마 남북에 있었다. 이렇게 하여 5경 15부 62주를 완성하였다. 이때 서경은 압록부의 임강에서 서안평西安平으로 옮겼다.<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서안평은 난하 주변 요동성과 파림좌기가 유력시 된다. 대인수가 830년에 죽어 묘호를 성종聖宗이라 하고 시호를 선황제宣皇帝라 하였다.
11대 장종莊宗 화황제和皇帝 대이진大彛震 830년-857년 화황제 대이진은 선황제 대인수의 손자로 아버지 대신덕大新德이 일찍 죽어 830년에 보위에 올랐다. 연호를 함화咸和로 정하고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면서 831년(태화5년)에 당으로부터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홀한주도독 발해국왕으로 책봉 받았다. 왕자 대명준(大明俊.832년)과 대선성(大先晟. 833년)을 당나라에 파견했다. 당에서도 발해를 다녀간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 장건장張建章 같은 사람은 많은 서적을 가지고 발해를 방문했다가 돌아 가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집필하였는데 이 <발해국기>는 중국에서 <신당서>나 <송사宋史>를 집필할 때 참고 서적으로 많이 이용하였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일본과의 교류도 적극적이어서 841년에는 하복연賀福延을 848년에는 왕문구王文矩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특히 841년 방문 때 주고받은 문서첩인 <중대성첩中臺省牒>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발해 중대성中臺省에서 일본 태정관太政官에게 보낸 외교문서이다. 이 내용을 보면 대사大使 1명과 부사副使 1명 그리고 중간관리인 판관判官 2명과 외교관련 일을 기록하는 록사錄使 2명과 통역을 담당하는 역인譯人 2명 천문과 기상관측에 도움을 주는 천문생天文生 1명 일행에 관한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생史生 2명 교역 실무를 담당하는 대수령大首領 65명과 뱃사공인 초공梢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략 100명에서 110명 정도였다. 화황제 대이진은 함화 27년(857년)에 죽어 묘호를 장종莊宗 으로 하고 시호를 화황제和皇帝로 추증하였다. 당 선종宣宗 대중大中 12년(858년)에 왕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발해는 무왕때부터 즉위한 해부터 연호를 사용하는 즉위년칭법卽位年稱法을 사용하다가 대이진부터 즉위한 다음해부터 연호를 사용하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으로 고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 인해 기록서에 따라 1년의 오차가 생기고 있다.
* <고려사>에는 당唐 선종宣宗이 고려 왕실의 선대先代라는 기록이 있다. -선종이 황제가 되기전 신라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들 작제건(作帝建. 추존=의조懿祖)이 태조 왕건의 조부祖父라는 기록이 <편년통록編年通錄>(김관의) <편년강목編年綱目>(민지)에 실려 있다. 설화에 가깝다.
12대 순종順宗 안황제安皇帝 대건황大虔晃 858년-871년 안황제 대건황은 화황제 대이진의 동생이다. 대중(大中. 당唐 16대 선종宣宗 연호. 847년) 12년인 858년 2월 20일에 당나라가 조서를 내려 왕위 계승을 허락했다. 연호를 대정大定으로 정하고 일본과의 교류를 활발히 했는데 재임 기간 중 7차례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특히 858년 오효신吳孝愼을 일본에 파견하여 당나라 서앙徐昻이 만들어 장경(長慶. 당唐 12대 목종穆宗 연호. 821년) 2년인 822년에 채택된 장경선명력(長慶宣明曆. 1년=365.244일)을 일본에 전했다. 일본 조정은 장경선명력을 862년에 공식으로 채택하여 1684년까지 사용하였는데. 우리는 이 장경선명력을 고려 충렬왕 때까지 사용하였다. 제帝가 871년에 죽어 묘호를 순종順宗 시호를 안황제安皇帝로 하였다.
13대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대현석大玄錫 871년-894년 경황제 대현석은 안황제 대건황의 아들(<발해고> 참고)로 871년에 즉위하였는데 연호를 천복天復이라 하였다. 경황제景皇帝에 관한 기록은 빈약하다. 다만 <신당서>나 일본 기록에 경황제 통치 시절 당시 발해 사람들의 활동이 다소 보이는 정도이다. 872년에 오소도烏昭度가 당唐의 빈공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892년에는 고원고高元固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발해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일본과의 교류는 872년에 양성규楊成規가 877년에는 양중원揚中遠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제帝는 재임24년인 894년에 죽어 묘호를 명종明宗 시호를 경황제景皇帝로 하였다.
14대 대위해大瑋瑎 894년-900년(901년) <신당서>나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발해고>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당회요唐會要>와 <한림군서翰林群書>에는 그가 즉위한 기록이 있다. 이것을 최근(1940년)에 중국학자 김육불金毓黻이 <당회요>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여 현 발해역사에 편입되었는데 연호 묘호 시호 모두 전하는 것이 없고 그의 가계家系도 명확하지가 않다. 그가 실제 제위帝位에 올랐다면 왜 대위해 만 유독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건녕(乾寧. 당唐 소종昭宗 연호. 894년) 2년인 895년 10월 발해왕 대위해大瑋瑎에게 칙서를 내리고 관직을 올려 책봉했다’는 당회요唐會要의 기록이 있고 또 그 이전에 대위해가 일본에 배정裵珽을 파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쓴 <동사강목東史綱目>이나 이맥이 쓴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유득공柳得恭이 쓴 <발해고渤海考>에도 관련 내용은 없다.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대위해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 시기와 관련된 기록이 다수 있다 894년 문적원감文籍院監 배정裵珽을 일본에 파견했다 897년 신라 정벌을 논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897년 당唐에 조공을 갔다가 신라 사절과 자리(서열) 다툼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906년에 유학생 오광찬吳光贊이 공물을 바치러 갔을 때 신라 최언위崔彦撝 다음 자리에 배정을 받아 항의 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15대 애제哀帝 대인선大諲譔 901년(900년)-926년 *발해는 대무예 때부터는 즉위한해부터 연호를 사용하는 즉위년칭법卽位年稱法을 사용하다가 대이진부터 즉위한 다음해부터 연호를 사용하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계속 지속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즉위년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발해의 마지막 제帝로 연호는 청태淸泰이며 청태 원년이 901년이다. 9세기 후반들어 패권국이었던 당唐이 혼란을 거듭하면서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과정에 주전충朱全忠이 결국 당唐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를 폐위 시키고 후양後梁을 세운다(907년). 대인선은 왕자를 대표로 하는 사신을 보내 후양後梁에 조공하고 개평(開平. 후양後梁 태조 연호. 907년) 2년인 908년과 그 이듬해 909년 건화(乾花. 후양後梁 태조 연호. 911년)2년인 912년에도 사신을 보내고 장종(莊宗. 후당後唐 시조) 동광(同光. 후당 태조 연호. 923년)2년인 924년에도 왕자를 후당으로 보냈다. 후당後唐 명종明宗 천성天成 원년인 926년에도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후양後梁이 시작되면서 5대代 10국國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이 시기 여러 세력이 세력 다툼을 하는 사이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부족을 통일하여 임황(臨湟.파림좌기)을 도읍으로 하는 거란국을 세우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 이때가 916년으로 신라도 후삼국으로 나뉘어 분열되어 있던 시기이다. 거란의 급성장에 위기를 느낀 대인선은 신라와의 관계를 우호관계로 만들고 일본과도 사신을 보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924년 5월에는 거란이 빼앗은 요주(遼州. 신성新城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신민시新民市 주변)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장수실長秀實을 죽이고 그곳에 있던 발해인들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거란은 925년 9월 돌궐突厥과 토혼吐渾등 서쪽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서방 정벌이 완성되자 925년 12월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천祭天하고 발해 공격에 나서 발해 최고의 전략 요충지인 부여성을 대원수 요골(堯骨. 야율아보기의 차남)과 함께 포위(12월31일) 공격하면서 3일 만인 926년 1월 3일(경신일) 부여성이 성주城主의 죽음과 함께 함락되었다. 침략군을 저지하기 위해 나온 발해 노상老相의 군사 3만 도 거란의 북부재상北部宰相 아고지(阿古只. 소아고제蕭阿固齊)가 이끄는 기병 1만의 선발대에 격파당해 수도 상경(상경용천부)으로 진군하는 거란군에게는 장애물이 없었다. 이에 애제哀帝 대인선은 대진림大陳林을 대표로 하는 사신을 후당後唐으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부여성을 함락시킨 거란의 태자 야율배(耶律倍. 야율아보기의 장자)와 그의 동생 대원수 요골(堯骨. 요의 2대 황제 태종)은 거침없이 쳐들어 와 발해 상경 홀한성忽汗城을 포위(1월 9일)하고 압박하자 애제哀帝 대인선大諲譔은 926년 1월 12일 항복을 청하고 이틀 뒤 14일 신하와 가족 300명과 함께 흰 소복을 입고 양羊을 끌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고 <요사遼史>는 전하고 있고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서는 이때를 청태(淸泰. 애제 대인선 연호.= 901년) 26년(926년) 봄 정월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대인선의 항복에 반감을 갖는 발해인이 많아 거란은 17일 이들을 회유하는 조칙과 함께 19일 강말달姜末怛과 함께 13인을 보내 상경성 내의 병기兵器 수거에 나섰는데 이에 반발한 발해병사들이 이들을 죽임으로 대인선도 다시 반反 거란契丹 입장을 표명하며 저항하게 되었고 이에 화가 난 거란은 다시 홀한성忽汗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2대 명종 연호) 원년인 926년 4월(1월에 출발) 사신 대진림大陣林 등 116명이 낙양에 도착하였는데 어린아이와 여자3명 인삼 다시마 백부자白附子 호랑이 가죽 등을 바쳤다. <구오대사舊五代史><책부원귀冊府元龜>의 기록을 보면 천성 원년(926년) 11월 청주靑州에서 곽원위가 보고하기를 “등주에서 온 장계에 의하면 거란 왕이 죽은 뒤에 일부 병사가 철수 했지만 부여성에는 아직 거란의 군사가 남아 있어 발해왕의 동생이 부部의 군사를 동원하여 부여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다” 하였다. (거란)태조가 발해를 아우르고 103개 성城과 읍을 얻었다.<요사지리지>
야율아보기는 그해 2월 이곳에 동단국(東丹國=동란국=동쪽에 위치한 거란)을 세워 자신의 맏아들 태자 야율배耶律倍를 동란국왕(東丹國王. 동단국왕)으로 임명하고 거란의 수도首都인 상경임황부로 돌아오던 길에 그는 부여부(扶餘府. 현 개원)에서 병病을 얻어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발해병사들은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라 생각하여 부여성을 공격함과 동시에 막힐부鄚頡府 안변부安邊府 정리부定理府 남해부南海府 등 여러 곳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가 성城을 되찿기도 하지만 발해 대진국의 군사력이 거란을 압도하지 못함으로 거듭되는 거란의 공격에 다시 패배로 이어지고 그해 8월에 장령부가 마지막 함락 되면서 더 이상의 저항은 하지 못했다. 거란군은 그해 3월 발해 대인선과 그 왕족을 상경 임황부(파림좌기)로 끌고 가 머물게 하면서 애제哀帝 대인선에게 오로고烏魯古라는 이름을 황후에게는 아리지阿里只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이 이름은 항복 할 때 그들이 탔던 말의 이름이다.<발해고>
926년 2월 요遼의 태조가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장자長子 야율배를 인황왕人皇王으로 삼고 왕은 연호를 감로甘露라 하고 발해의 홀한성(忽汗城.상경성)을 천복성天副城으로 개칭하였다. 동단국東丹國은 왕의 숙부 질자迭刺를 좌대상左大相으로 삼고 옛 대진국大震國의 노상(老相. 3만의 발해군을 이끌고 거란군을 막다 항복한 사람)을 우대상右大相으로 삼고 대진국의 사도(司徒. 정승. 삼공三公의 하나) 대소현大素賢을 좌차상左次相으로 삼고 야율우지耶律羽之를 우차상右次相으로 삼았다. 감로甘露 27년(952년) 겨울 요遼는 동경 중대성中臺省을 쳐 동단국東丹國도 없애 버렸다. 926년 발해 패망에 이어 952년 이후는 발해와 관련된 역사는 그 끝을 보게 된다. 거란 태조가 발해를 아우르고 103개 성城과 읍을 얻었다.<요사지리지>
발해인들 중 일부가 고려로 망명했는데 그 시작은 야율아보기의 발해 정복 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인 고려태조 8년(925년) 9월에 발해 장군 신덕申德이 군사 500을 이끌고 고려에 내투하였고 그 뒤를 이어 지금의 장관급인 예부경禮部敬 대화균大和鈞과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募를 비롯하여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 등이 고려로 넘어 왔다. 야율아보기의 발해 침략이 시작되는 12월에도 좌수위소장座首衛小將 모두간冒豆干과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등이 무리를 이끌고 내투했는데 이런 현상들은 내부에 심한 권력투쟁이거나 자연재해가 있어 민심이 이반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요사> 야율우지(耶律羽之. 동란국 재상. 동단왕이 후당으로 망명하자(930년) 민심을 수습하여 좌상으로 승진했다.) 전傳에는 “발해의 민심이 갈라진(이심離心) 틈을 타(승乘) 싸우지 않고 이겼다.”는 기록이 있다. 발해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사가史家들은 이 기록을 발해 멸망의 주된 이유 중 하나로 삼고 있다. 강력한 거란의 군사력과 정보전(야율할저) 발해의 민심 이반이 발해 멸망의 주된 이유이며 민심 이반의 주된 원인은 권력 내부의 분열이나 자연재해로 생긴 경제적 어려움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926년 발해의 멸망 이듬해인 927년(고려 태조 10년)에도 공부경工部卿 오흥吳興이 내투하였고 928년 929년에도 소수의 발해인이 고려로 망명했다. 특히 934년에 발해세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내투하자 고려태조는 그에게 백주白州의 땅을 주고 발해 왕가를 유지하게 하였다. 그 이후 937년에도 박승朴昇이 발해유민 3천호를 이끌고 고려에 내투하였다. 그런데 발해세자 대광현이 고려로 망명한 934년 시점은 백두산 화산폭발 시점과 겹친다는 지질학자의 의견도 있지만 백두산 화산 폭발은 946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과학계 다수의 의견이다.
발해 멸망이후 일부의 망명자를 제외한 대부분은 결국 동단국(東丹國.동란국)에 의지해 살았지만 927년 동단국(東丹國. 동란국) 도읍을 홀한성忽汗城에서 요양遼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 발해인 9만 4천여호가 강제 이주 당했다.
발해 대진국의 중앙관제 발해의 중앙관제 제도개편은 당唐의 3성(省.상서성 문화성 중서성 ) 6부(部.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를 참고하여 정당성政堂省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의 3성省과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 지부智部 예부禮部 신부信部의 6부를 두었지만 명칭이나 운용면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최고 권력기관인 정당성(政堂省. 책임자= 대내상大內相=총리급)은 당나라의 상서성과 비유할 수 있고 선조성은 문화성과 중대성은 중서성과 유사한 역할을 했다. 최고의 권력기구인 정당성 아래 좌사정(左司政)과 우사정右司政이 있어 각각 6부를 관할했는데 좌사정은 충부(忠部.당나라의 이부吏部) 인부(仁部.호부戶部) 의부(義部. 예부禮部)를 관할했고 우사정은 지부(智部.병부兵部) 예부(禮部.형부刑部) 신부(信部. 공부工部)를 관할했다. 권력이 집중된 이러한 정당성(당나라의 상서성)의 중앙관제 형태는 이씨조선까지 명칭만 달라졌을 뿐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졌다. 당의 3성 6부 제도는 사실 신시환웅시대 삼사(三師.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오가(五加. 호가虎加 마가馬加 양가羊加 노가鷺加 응가鷹加) 제도에서 유래된 제도라 할 수 있다.
발해풍속 발해의 풍속에 왕을 가독부(可毒夫.제단 주변(가)과 도읍 위쪽(독)을 지키는 국방책임자란 뜻)라 부르다가 후에 성주聖主 기하(基下.북방지역을 다스리는 최고 우두머리)라 하고 왕의 명령을 교敎라 하고 왕의 아버지를 노왕老王이라 했으며 어머니를 태비太妃 왕비를 귀비(貴妃)라 하고 맏아들을 부왕副王이라 하고 왕의 다른 아들들은 그냥 왕자라 했다.<발해고>
귀비貴妃=왕의 부인=귀한 사람을 지키고 보좌 하는 여인=한문 귀비=높은 사람(북방 변방 지역 사람)을 지키고 보좌하는 사람(아내) 귀비=북방(변방) 출신 비. 왕비=왕을 보좌하고 지키는 사람.=왕의 부인 왕후=(공식석상에서)왕의 뒤에 서 있는 사람.=왕비 중 으뜸 왕비=정실 왕비 부=물위. 강위. 보좌. 보조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부副의 의미를 가진다. 비=강(물)의 중간지점. 물을 지키고 보호하는 사람으로 주로 참모(보좌진)급 계급이다. 장비. 비장 [부](참모장=2인자)가 [비](참모=보좌진)보다 계급이 약간 높다.
처=같은 처소를 사용하는 사람.≒안 사람 처=처소에 남아 있는 사람≒집사람 아내=나의 아들(내)과 가장 가까운 사람(아). 부인婦人=인人을 보좌하는 사람(부)=인(人. 지역책임자)의 아내 마누라=초원지대 작은 나라(누라)의 여성 최고지도자(마). 안사람=나를 가까이에서 보호하는(안) 사람. 집안(집을 보호하는)을 책임지는 사람
발해의 물산 발해의 특산물은 태백산의 토끼, 남해부(南海府.해성)의 곤포(昆布. 다시마), 책성부(柵城府.혼춘 경원)의 된장, 부여부(扶餘府. 개원)의 사슴, 막힐부(鄚頡府. 공주령시 북쪽 옛 고구려현이 있던 한주韓州 주변지역)의 돼지, 솔빈부(率賓府.정리부의 동쪽. 집안에서 12시방향 250리 지점 유하현柳河縣이나 화둔지역=비류지역)의 말. 현주(顯州.화룡시 서고성 주변)의 삼베, 옥주(沃州.옥저 지역)의 솜, 용주(龍州.용천부의 중심. 현 영안 주변 지역)의 명주, 위성(位城 현덕부 철주鐵州 위성현位城縣)의 철鐵, 노성(盧城. 현덕부 노주盧州)의 벼, 환도(丸都. 길림성 집안)의 오얏. 미타호湄沱湖의 붕어가 유명했다.<발해고>
발해 대진국의 도읍과 천도 대중상 668년=동모산(東牟山. 심양 동쪽 20리에 위치한 천주산天柱山. 고구려 계루부가 있던 곳)에 도읍 만세통천萬歲通天연간(696년 3월-697년 7월)에 동모산에서 홀한주忽汗州 홀한성(忽汗城. 상경성)으로 천도遷都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도읍을 동모산에서 경박호 주변의 홀한성(상경성)으로 옮기자 측천여제는 697년 대중상大仲象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했다. 이후 대중상이 병사하자 대조영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고 홀한성(도성=상경성)을 완성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국호를 후고구려에서 대진국으로 변경했다.
대무예 홀한성忽汗城에서 동경용원부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상경성은 흑수말갈의 배후 침략에 취약하다.=>추정=737년 대흠무 원년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한 내용이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등장하기 때문에 대무예때 상경에서 동경으로의 천도를 추정하게 된다.
대흠무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737년(대흥원년)=<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상경에서 중경으로 천도=742년=천보연간(742년-756년)=<신당서>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755년(756년)=천보 말년=<신당서> 상경에서 동경으로 천도=785년(793년)=덕종 정원연간(785년-805년)=대흠무 재임말년(737년-793년) *단군조선의 건국시조인 단군왕검이 재임시절 여러 번 도읍을 옮겼다.
대화여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794년= 즉위시기 상경=794년-926년까지 도읍 발해 도읍의 천도遷都 내용은 자료들이 역사서에 부분적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교차 확인이 되지 않는 것이 다수 있다.
발해강역渤海疆域 5경 15부 60주(62주)
5경 상경上京은 용천부龍泉府 지역에 위치했으며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寧安에 위치했다. 중경中京은 현덕부顯德府 지역에 위치했으며 현 연변 화룡시和龍市에 위치했다. 동경東京은 용원부龍原府 지역에 위치했으며 지금의 연변 혼춘琿春 지역이다. 남경南京은 남해부南海府 지역에 위치했는데 현 요녕성 해성海城이 그곳이다. 서경西京은 압록부鴨綠府에 위치했는데 압록부는 현 압록강의 임강(臨江. 임황臨潢)에서 서압록하西鴨綠河 상류에 위치한 임황(臨潢. 파림좌기)으로 위치를 옮겼다.
*남경 남해부는 신라로 가는 신라도新羅道이고 서경압록부는 당나라로 가는 길이고 동경용원부는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日本道이고 부여부扶餘府는 거란으로 가는 거란도契丹道이고 영주營州는 장령부長領府를 통해 갔다.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는 본래 옛 고리국高離國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임황臨潢이라 하고 서요하西遼河라 하는데 서요하는 옛 서압록하西鴨綠河이다. 서압록하의 동쪽에 안민현安民縣이 있고 그 강 서쪽에 임황臨潢이 있는데 임황은 후에 요遼나라 상경上京 임황부臨潢符가 설치된 곳이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과거 한漢나라 요동군의 서안평西安平이라 하던 곳이고 신新나라 왕망 때는 북안평北安平이라 하기도 했다.<요사遼史>
15부府와 62주(州. 60주) 상경 용천부龍泉府=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 3개 주가 있고 대략의 위치는 발해 상경성上京城이 있는 흑룡강성 영안寧安과 경박호(京泊湖. 삼신사상의 발상지) 주변지역이다. 상경성은 발해의 도성都城의 지위를 오래도록 유지했다. 왕도인 홀한성(忽汗城. 상경성上京城)은 홀한하忽汗河에서 얻어진 이름이며 홀한하는 지금의 호이합하(呼爾哈河. 호수 위쪽에서 합해 지는 강)이다. 이 강은 길림오랍(吉林烏拉.길림중심도시)의 경계에서 발원하여 필이등호(畢爾謄湖. 제2도시를 끼고 흐르는 강 주변에 위치한 호수=경박호)와 만나 동으로 흘러 회녕성會寧城 북쪽을 지나가고 다시 90여리를 흘러 영고탑성寧古塔城 남쪽을 휘감아 북쪽으로 700리를 흘러 혼동강(混同江=호수와 접해있는 동강)으로 들어간다. 동강=제2의 강=제2도시를 끼고 흐르는 강.
<당서唐書=구당서> 발해 상경은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에 위치하고 옛 숙신의 땅이다. 발해는 옛 숙신 지역을 상경으로 삼고 용천부龍泉府라 하고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 3주를 관할했다 <신당서 지리지> 발해의 장령부(長領府)를 지나서 1천5백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상경성)에 닿는다. 상경성은 홀한해를 내려다 보고 있으며 그 서남 30리에 옛 숙신성이 있다고 했고 또 신주(神州. 임강)에서 육로 길로 4백리를 가면 현주(顯州. 서고성 주변=중경)에 닿고 현주에서 정북으로 4백리를 가면 발해 왕성(상경성)에 닿는다. 하였다.
<명일통지明一統志>금나라가 요나라를 없애고 발해 상경에 도읍을 설치했는데 홀한성(忽汗城. 상경성. 지금의 동경성)이며 옛 숙신성肅愼城이 주변에 있는데 이들 모두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관내에 있고 그 북쪽은 흑수 지경이다. 영고탑성寧古塔城은 발해의 홀한주로 뒤에 상경 용천부로 불렸다. 성城의 서남60리 거리에 있는 호이합하(呼爾哈河.혼동강의 지류)의 남쪽에 옛 성이 있고 그 둘레가 30리이고 내성은 5리라 하였다.
<송막기문松漠紀聞> 옛 숙신성은 둘레가 5리 정도 되고 성城의 잔재가 남아 있는데 발해국 도읍에서 (서남쪽으로) 30리 떨어져 있으며 성의 밑은 돌로 쌓았다. <진서晉書> 숙신肅愼은 일명 읍루이며 불함산(不咸山. 태백산=왕청현에 위치)의 북쪽에 위치하며 부여까지는 60일 노정에 있다. 숙신의 서북쪽에 비리국卑離國이 있고 비리국에서 50일을 가면 양운국養雲國이 있고 양운국에서 말을 타고 100일을 가면 구만한국寇漫汗國이 있다. 동쪽은 대해에 닿고 서쪽은 구만한국寇漫汗國과 닿고 북쪽 끝은 약수弱水이다.
중경 현덕부顯德府=현주顯州를 비롯하여 노주盧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6주를 관할했으며 중경성中京城은 화룡和龍과 연길 중간지점 두도頭道평원에 위치한 서고성西古城에 위치했는데 이곳은 오래도록 단군조선의 도읍이 있었던 곳이다. <당唐가탐도리기賈耽道理記> 신주(神州.임강)에서 육로로 4백리를 가면 현주(顯州. 화룡시 서고성)에 닿는다. 천보연간(742-756년)에 도읍한 곳이다. 광녕廣寧은 본래 양라군陽羅郡으로 발해의 현덕부이다.<압강행부지鴨江行部誌> <요사>귀덕주貴德州 귀덕현歸德縣은 원래 한漢의 양평현襄平縣이다. 발해에서 숭산현崇山縣이 되었다. 봉덕현奉德縣은 발해의 녹성현綠城縣이다. 숭주崇州는 본래 한漢의 장잠현長岑縣 지역으로 발해에서 주州를 설치하고 숭산현崇山縣 규수현潙水縣 녹성현綠城縣 세 현이 있었으나 폐지되었다
노주盧州는 발해의 삼로군衫盧郡이 있던 곳으로 삼로杉盧 한양漢陽 산양山陽 상암裳巖 백암白巖 현縣이 있었다. 현주顯州= 현덕부顯德府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금덕金德 상락常樂 영풍永豐 계산鷄山 장녕長寧 현縣이 있었다. 철주鐵州= 중경(거란의 중경=현 요양시遼陽市)의 서남쪽 60리 거리에 있으며<요사>. 위성位城 하단河端 창산蒼山 용진龍珍 현이 이곳에 있었다. 탕주湯州= 동경에서 서북쪽으로 1백리 거리에 있으며 이 지역에 영봉靈峯 상풍常豊 백석白石 균곡均谷 가리嘉利 5개현이 있었다. 영주榮州= 숭산崇山 위수潙水 녹성綠城 현이 있었다. 흥주興州= 성길盛吉 철산鐵山 산산蒜山 3개의 관할 현이 있었다.
동경 용원부龍原府=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가 있고 위치는 발해 동경성東京城이 있었던 연변 혼춘琿春과 함경북도 경원시 주변 지역으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했다. <신당서> 옛 예(濊. 부여나 경京급 도시를 [예]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예는 여러 곳에 존재한다)의 지역을 동경으로 삼아 용원부 또는 책성부柵城府라 불렀다. 경주慶州 목주穆州 염주鹽州 하주賀州 네 주를 관할했다. 용원龍原의 동남쪽은 바다와 닿는데 일본으로 가는 길(일본도日本道)이다. <통고> 당나라 정원연간(785년-805년)에 발해왕 대흠무가 동남에 위치한 동경으로 옮겼다(東南徒東京) <요사> 동경 개주開州는 본래 예의 지역으로 발해 때는 용원부가 되었고 도독이 다스렸다. 고려 때는 이곳에 경주(慶州.함경북도 경원시의 유래)를 설치하였고 영안현永安縣은 본래 용원부 경주현慶州縣의 이름이다. <일통지> 개주開州는 요나라 말에 다시 고려에 편입되어 촉막군蜀莫郡으로 불렸다. 폐지한 개원현開原縣은 옛 개주開州의 치소이며 발해에서 용원현龍原縣이 경주慶州의 치소가 되었다 그러므로 경주는 용원부를 다스리는 부곽주附郭州이며 용원현은 부곽현이 된다. 하주賀州성이 요나라 말에 조선에 편입되었다.
<요사> 동경 목주穆州는 본래 회농군會農郡이다. 회농會農 수기水岐 순화順化 미현美縣의 4개현은 모두 폐지하고 개주開州에 속하게 했다. 경주慶州= 발해 용원부龍原府이다. 용원龍原 영안永安 오산烏山 벽곡壁谷 웅산熊山 백야白楊 현縣을 관리했다. 목주穆州= 발해의 회농군會農郡이다. 회농會農 수기水岐 순화順化 미현美縣이 있었다. 염주鹽州= 발해의 용하군龍河郡이다. 해양海陽 접해接海 격천格川 용하龍河 현이 있었다. 하주賀州= 발해의 길리군吉理郡이다. 홍하洪賀 송성送誠 길리吉理 석산石山현이 있었다.
남경 남해부南海府=옥주沃州 청주睛州 초주(椒州. 암연현이 있다)가 있었으며 남경성(南京城)이 있던 요녕성 해성海城 주변 지역이다. 이곳은 옛 남옥저(南沃沮. 동옥저)가 있던 곳이며 고구려의 사비성(泗沘城. 비사성)이 있던 곳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보면 동옥저(東沃沮.우리가 보면 남옥저)가 개마대산 동쪽에 위치하며 큰 바다와 접하는데 남북으로 1천리(남옥저 해성에서 북옥저 장춘까지 1천여리)이다. 해성 북쪽에 부여(개원)와 읍루(심양)가 있으며 예맥의 남쪽과 접하고 있다.
빈주嬪州는 본래 발해의 청주(晴州.지금의 요녕성 반금시)이며 천청 신양 연지 낭산 선암 다섯 개 현으로 되어 있었다. 동남쪽으로 해주까지 120리이다.<요사> 오소리강烏蘇哩江은 요하 동쪽과 해성 서쪽에 위치하는 강이다. <성경통지> 패수浿水인 니하泥河는 해성현 서남쪽 65리 개평현(개주蓋州) 북쪽 65리에 위치한 성수산에서 발원하여 미진산 서쪽으로 흘러 흩어져서 요나라 당시 한우박蓒芋泊이 된 것이다.
<신당서> 옛 옥저沃沮 지역을 남경(南京. 해성海城)으로 삼고 남해부南海府라 하였으며 옥주沃州 청주晴州 초주椒州 3주를 관할했다. 남해는 신라로 가는 신라도新羅道이다. <요사지리지> 진주辰州는 본래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이다. 발해의 개주(盖州.지금의 요녕성 개주)가 진주로 바뀌었으니 진한(辰韓. 후삼한의 진한)에서 얻은 이름으로 여러 고을 중 가장 요충지가 되는 곳이다.
<후한서> 동옥저(남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단단대령=요동의 천산산맥) 동쪽에 있다. 개주盖州를 개마蓋馬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현도에 속했다. 개마산은 평양성(개모성=개주)의 서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대해의 동쪽 바닷가 지역이고 북쪽은 읍루(심양) 부여(개원)이며 그 남쪽은 예와 닿는다.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위만조선)을 없애고 옥저(沃沮.중국에서 보면 동옥저= 해성 주변)의 땅을 현도군玄菟郡으로 삼았다. 뒤에 현도군을 고구려(高句麗. 고구려현)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다시 옥저沃沮를 현縣으로 만들어 <낙랑樂浪 동부도위東部都尉> 아래 두었다가 광무제光武帝때 도위都尉의 관직을 없애고 그 우두머리를 옥저후沃沮侯로 봉하였다. 북옥저(장춘)는 남옥저(동옥저=해성)에서 8백여리 거리에 있으며 남쪽으로 읍루와 닿는다. 여기서 남옥저와 동옥저는 같은 지역을 지칭하는데 해성 주변이다. 중국에서는 남옥저를 동옥저라 불렀다.
<삼국지 위지> 동옥저는 개마대산(단단대령單單大嶺=선선대령.=요동에 위치한 천산산맥. 개마=개주, 개모성이다)의 동쪽에 있다. 그 지형은 동북쪽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리정도 된다.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연간(전110-전105년) 그 땅은 현도군玄菟郡이 되었다. 뒤에 현도군을 구려句麗 서북쪽으로 옮겼으니 옛 현도군부가 그곳이다. 옥저(지금의 해성)는 다시 낙랑(낙랑 동부도위東部 都尉)에 속하게 되었는데 한漢은 땅이 넓고 멀다는 이유로 선선대령(單單大嶺.단단대령) 동쪽 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가 다스리도록 하고 치소는 불내성不耐城에 두었으며 별도로 영동7현을 관할토록 하였다. 광무 6년(30년)에 도위를 없애고 옥저현의 거수渠帥를 옥저현沃沮縣후侯로 삼았다. <요사> 해주(海州=해성) 남해군南海軍은 본래 옥저국沃沮國이다. <구오대사舊五代史> 철주(鐵州. 철리 지역)에서 7-8일을 가면 남해부에 이른다. <원일통지元一統志> 징주澄州는 본래 해주海州 남해부로서 옥저지역이다. 고구려때는 비사성卑沙城으로 금나라때 해주海州로 고쳐 부르다가 천덕3년(1151년)에 징주澄州로 바꿨으며 임명현臨溟縣에 그 치소가 있다.
옥주沃州=옥주는 남해부를 관할하던 부곽주인데 창주昌州는 정관 2년인 628년에 송막부락松漠部落을 설치하였고 690년에 당唐은 창주昌州를 나누어 옥주를 설치했으며 696년에는 이진충이 이곳을 접수했다. 옥주 관할에 옥저沃沮 취암鷲巖 용산龍山 빈해濱海 승평昇平 영천靈泉 6개의 현이 있었다 청주晴州=빈주嬪州는 본래 발해의 청주이다. 동남쪽으로 해주까지 120리 거리에 있다. 관할에 천청天晴 신양神陽 연지蓮池 낭산狼山 선암仙巖 다섯 개 현이 있었다. 초주椒州=요주(耀州. 웅악성熊嶽城?)는 원래 발해의 초주이며 동북쪽으로 해주까지 2백리 거리에 있고 암연현(巖淵縣. 대석교大石橋시)을 관할하는데 그 동쪽 경계는 신라이며 이 현의 서남에 평양성(개모성=개주盖州)이 있고 동북쪽으로 120리 거리에 해주가 있다. 초산椒山 암연巖淵 초령貂嶺 시천澌泉 첨산尖山 다섯 개 현이 있었다<요사> 폐지한 요주(耀州)는 해주 서남쪽 2백리 거리에 있으며 발해의 초주지역이다<명일통지>
서경압록부鴨綠府=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가 있으며 서경이 있던 압록강변 임강(臨江. 신시환웅시대 도읍지)과 집안(集安. 환웅시대 제2도성인 환도성과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이 있던 곳)주변 지역이다. <신당서> 발해는 옛 고구려 지역을 서경으로 삼고 압록부라 하였으며 신주 환주 풍주 정주 4주를 관할했다. 압록부는 조공朝貢 길이다. <가탐도리기> 압록강 어귀에서 배를 타고 1백리를 가서 또 작은 배로 동북 30리를 가면 박작구(泊汋口. 단동)에 닿는데 이곳이 발해의 지경이며 여기서 물길을 따라 5백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닿으니 이곳이 옛 고구려왕성이다. 여기서 다시 2백리를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닿는다.
<요사> 녹주(淥州.록주) 압록군鴨綠軍은 본래 옛 고구려국으로 발해에서 서경 압록부라 하였다. 성의 높이는 3길(205cm*3=6m15cm)이고 둘레는 20리로 도독을 책임자로 두었으며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 4주를 두었다. <요사> 서경 압록부 정주正州는 본래 옛 비류왕의 땅이다. 발해에서 비류군沸流郡을 설치했고 비류수가 있으며 거주민은 500호이다. 녹주(淥州.임강)에 속하며 녹주에서 서북으로 380리 거리에 있다.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과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이곳 비류에서 싸웠다. 비류땅의 상당부분은 솔빈부에 속한다. <요사외기遼史外紀>의 기록에 의하면 거란이 여진국의 압록강 동쪽 수백리 땅을 떼어서 고려에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재기高麗載紀>거란이 압록강 북쪽 땅을 고려에 떼어 주어 고려는 6성을 쌓았는데 그 중에 용주龍州성이 있다고 했다.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는 본래 옛 고리국高離國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임황臨潢이라 하고 서요하西遼河라 하는데 서요하는 옛 서압록하西鴨綠河이다. 서압록하의 동쪽에 안민현安民縣이 있고 그 강 서쪽에 임황臨潢이 있는데 임황은 후에 요遼나라 상경上京 임황부臨潢符가 설치된 곳이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과거 한漢나라 요동군의 서안평西安平이라 하던 곳이고 신新나라 왕망 때는 북안평北安平이라 하기도 했다.<요사遼史>
서안평西安平 고구려 태조대왕 94년(146년) 8월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대방帶方현령縣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잡았다.<삼국사기>고구려 동천왕18년(242년) 장수를 보내 요동군 서안평을 습격했다.<삼국사기>고구려 미천왕12년(312년)가을 8월 요동군 서안평을 점령했다<삼국사기>고구려. *여기 서안평은 난하 하구에 위치했던 요동성(창려현)을 지칭하는 듯하다.
서개마현 마자수가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가는데 염난수는 서남으로 흘러 요동군 서안평에 이르러 해海로 들어가는데 이강은 2개의 군을 지나 1100리를 흐른다. 왕망은 서안평을 현토정玄菟亭이라 했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현도군 서개마현
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 말하길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해海로 들어간다. 구려(고구려)의 별종이 있어서 그 이름을 따라 소수맥小水貊이라 한다.<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요동군 서안평 서안평西安平의 북쪽에 소수小水가 흐르는데 남으로 흘러 바다(해)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도 소수에 의지해 나라를 이루며 살고 있어 이들을 소수맥小水貊이라 하였다. 좋은 활이 나는데 소위 맥궁貊弓이란 이것이다.<위지동이전>고구려편
*서안평西安平은 한漢4군의 서쪽을 지키는 대도시란 의미를 갖고 있고 서안평을 설명하는 데 등장하는 소수小水는 지금의 난하灤河로 제단을 위에서 보호하며 흐르는 물이란 뜻이며 과거 패수浿水라고도 했다. 고구려 태조대왕때 서안평을 공격하여 낙랑태수의 부부를 체포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데 이곳은 오래전부터 낙랑군이 자리했고 낙랑의 중심도시가 현 낙정樂亭과 창려현 주변에 위치했다. 이곳을 전통적으로 조선(조수와 선수사이)지역이라고도 했는데 단군조선 번한의 도읍지인 왕검성이 있었던 곳이며 기자조선의 도읍지이며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던 왕험성도 이곳에 위치했다. 이곳을 전108년 한漢나라 무제가 침략하여 4군郡을 설치하고 이곳을 서안평이라 했는데 이곳이 한4군의 정치중심지였다. 후에 한漢4군의 서안평을 접수한 고구려는 이곳을 요동성遼東城이라 이름했고 제2도읍의 역할을 하는 평양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래서 요동성은 평양성으로도 불렸다. 수隨나라는 고구려를 침략 했지만 이곳을 함락시키지 못함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서안평의 정확한 위치는 현 낙정樂亭과 창려현昌黎縣 사이에서 찿으면 된다. 거란의 상경이 있던 파림좌기는 이 당시 북안평北安平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서안평으로 기록된 사서史書가 많이 있다. 서西=한문에서는 서쪽이란 의미로 많이 사용되지만 정한글에서는 서쪽외에 도읍(왕)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西安平=서쪽을 보호하는 행정중심도시(거점도시)=한문 서안평=도읍을 보호하는 행정중심도시=정한글
좋은 자료=>고구려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도해渡海) 신라, 서북으로 요수遼水를 건너면 영주營州,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백제,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구당서>고구려 좋은 자료=>옛 책(구지舊志)에 요서遼西에 창요현昌遼縣이 있다고 했는데 이곳을 당나라때 요주遼州로 개명했다. 요주의 남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그 밑에 백암성白巖城이 있다. 당나라때 암주岩州가 그곳이다. 건안성建安城은 당산唐山의 경내에 있고 그 서남西南을 개평開平 또는 개평蓋平이라 하는데 당나라 때 개주蓋州라 한 곳이 이곳이다.<삼한비기三韓祕記> 현토군玄菟郡은 유성柳城과 노룡盧龍 사이에 있다.<자치통감資治通鑑> 마수산馬首山은 유성柳城의 서남에 있다<한서漢書> 요서遼西=요하(지금의 난하)의 서쪽으로 해석될 수 있고 요서를 요하 주변에 위치한 도읍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요서를 요하 주변 지역으로 확대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요서에 창요현이 있을 수 있다. 창요현昌遼縣은 이름이나 실제에 있어서 요수(난하)의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창=동북. 동쪽 높은 곳. 창용문=화성의 동문. 청=서북. 서쪽 높은 곳을 나타내며 곰족을 나타낼 때도 [청]을 사용한다. 청구=곰족의 중심도시.
신주神州=압록부의 부곽주이며 옛 신시환웅시대 배달국의 중심으로 신시神市가 있던 곳이며 초대 단군 시절 잠시 도읍지역할을 했던 곳으로 발해의 서경이 있던 곳이다. 신록神鹿 신화神化 검문劍門 3현을 두었다. 환주桓州=신시환웅시대 제2도시였으며 고구려의 왕성이었던 환도성丸都城과 국내성國內城이 있던 곳으로 환도桓都 신향神鄕 기수淇水 3현을 두었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3대 소제少帝때 연호) 5년(244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현도를 나와 고구려를 칠 때 비류沸流에서 싸웠다. 고구려 동천왕(위궁位宮)이 패하여 달아나자 관구검이 추격하여 환도산에 올라가 도읍을 도륙하였다<통고> . 풍주豐州=발해의 반안군盤安郡이고 녹주淥州에서 동북쪽으로 210리 거리에 있고 관내 안풍安豐 발각渤恪 습양隰陽 협석硤石 4현이 있었다. 정주正州=정주는 본래 옛 비류땅이다. 발해에서 비류군을 설치하였고 비류수가 있다. 녹주에서 서북쪽으로 380리 거리에 있고 관할 현으로는 동나현東那縣이 있다.
장령부長領府=하주瑕州 하주河州가 있으며 장령부는 단단대령(單單大嶺. 개마대산蓋馬大山= 요동의 천산산맥) 서쪽 지역으로 선황제 대인수 시절 난하灤河 동쪽까지 확장된다. 발해에서 영주營州로 갈 때 이곳을 지나야 한다. <신당서 지리지> 발해의 장령부(長領府)를 지나서 1천5백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인 상경성에 닿는다. <요사. 본기> 태조 천현天顯 원년(926년) 강묵기康默記와 한연휘韓延徽를 보내 8월에 장령부를 무너뜨렸다.
하주河州=하주河州 덕화군德化軍에 군기방軍器坊을 두었다<요사>. 명나라 사람이 쓴 <지志>에 “폐지한 하주는 황룡부 북쪽에 있고 요遼나라가 하주를 두고 군기방을 두었다”고 되어 있고 <일통지>에는 개원 동북 5백리 거리에 은도하隱圖河가 있는데 방주坊州의 북쪽에 있는 산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막힐부鄚頡府=발해 때는 막주鄚州 고주高州이고 거란 때는 한주韓州로 옛 고리국(고구려현) 땅이며 옛 치소는 유하현柳河縣이다. 두막루(豆莫婁. 과이심좌익科爾沁左翼 추정) 지역으로 개원의 서북 변두리 지역이며 거란 상경(파림좌기)이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1천리 거리에 있다. 길림성 요녕성 내몽골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신당서> 막힐부는 막주鄚州와 고주高州 두 주를 관할한다. <위서魏書><북사北史>에 두막루豆莫婁는 물길(흥경興京)북쪽 천여리에 있으며 옛 북부여이다. 실위의 동쪽에 있는 해海에 닿고 사방 2천리이다. <금사金史> 동경 한주韓州는 본래 발해 막힐부鄚頡府이다.
<요사> 동경 한주韓州는 본래 고리국槀離國으로 옛 치소는 유하현柳河縣이다. 고구려에서 막힐부鄚頡府를 두었고 막주鄚州와 힐주頡州 두 주를 관할하였다. <요사> 천현 원년(926년) 2월 막힐부절도鄚頡府節度가 항복하고 조회하였는데 3월에 막힐부가 배반하여 아돈阿敦을 보내 평정하였다. <흠정만주원류고> 거란 태종太宗 시절 유하柳河와 삼하三河 두 주를 설치했다. 성종聖宗때 두 주를 합쳐 유하현이라 했는데 유하현은 발해때 월희현越喜縣으로 만안현萬安縣을 합쳐서 설치되었다.
고주高州=(거란시기) 수주水州는 본래 발해 고주高州지역으로 상경 파림좌기의 동남 1천리 지점에 있다. 한주韓州와는 1백리 거리에 있다. 상경의 봉주鳳州는 옛 고리국 지역이며 발해의 안녕군安寧郡 지경으로 한주의 북쪽 2백리 거리에 있다<요사>. 수주水州는 봉주鳳州와 가까운데 봉주도 고리국槀離國 지역으로 한주 북쪽 2백리 거리에 있다.<흠정만주원류고>
동평부東平府=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沱州 흑주黑州 비주比州가 있고 18개현을 관할했는데 옛 불녈拂涅지역이며 장령부 동쪽에 위치한다. 심양 서북 지역으로 불열국성이 있던 곳이며 당唐의 안동도호부가 있었던 신성(新城=심양에서 10시 방향 150리 지점) 주변 지역이다. 옛 한漢의 양평현襄平縣 지역에 발해가 동평채東平寨를 설치했다.
<신당서> 옛 불열지역을 동평부로 삼고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沱州 흑주黑州 비주比州 다섯 주를 관할하였다. <요사> 동경 요주遼州는 본래 불열국성拂涅國城으로 발해가 동평부東平府로 삼았다. 당 고종이 정명진과 소정방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도록 할 때 신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는데 그 신성(新城. 심양 서북 150리 지점으로 안동도호부가 있었던 곳이다)이 이곳이다. <흠정만주원류고> 발해 동평부는 실제 지금의 광녕 동북에 있으며 요나라 동평부 치소는 요빈현遼濱縣으로 옛 성은 승덕(承德.심양) 서북쪽에 위치한다. <금사> 함평부咸平府 동산현銅山縣은 요遼의 동주同州이며 본래 한漢의 양평현襄平縣인데 발해가 이곳에 동평채東平寨를 설치했다. 남쪽에 시하柴河가 있고 북쪽에 청하淸河 서쪽에 요하遼河가 있다.
<당唐 가탐도리기賈耽道里紀> 요수를 건너 안동도호부까지 5백리이며 안동도호부는 옛 한나라 양평성(襄平城)이다 평양에서 의봉연간(676-67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동남으로 평양(개주?)까지 8백리이고 서남쪽으로 도리해구都里海口까지 6백리이고 건안성建安城까지 3백리이고 옛 평곽현平郭縣이다. 669년 당唐은 평안도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675년에 옛 요동성遼東城으로 677년에 신성新城으로 714년에 평주平州로 743년에 요서군성遼西郡城으로 옮겼다가 758년에 폐지되었다.
몽주蒙州=<요사>동경의 자몽현紫蒙縣은 불열국拂涅國에 설치하였고 동평부는 몽주를 관할한다. 발해에서 자몽현을 설치하고 요나라에서 그대로 두었다가 요양부遼陽府 관할에 두었다. 타주沱州=<요사>귀덕주貴德州는 본래 한漢의 양평현襄平縣 지역으로 타하沱河가 있다.
회원부懷遠府=달주達州 월주越州 회주懷州 기주紀州 부주(富州. 신흥현新興縣) 미주美州 복주福州 사주邪州 지주芝州가 있으며 옛 월희越喜 땅이다. 한주韓州가 있던 곳으로 옛 고리국高離國 땅이며 지금의 공주령시公主嶺市는 옛 회원현이 있던 곳이다. 개원과 철령 동부와 북부 지역. <신당서>옛 월희 지역을 회원부로 삼고 달주達州 월주越州 회주懷州 기주紀州 부주(富州. 신흥현新興縣) 미주美州 복주福州 사주邪州 지주芝州 9주를 관할했다. <요사지리지> 동경 한주韓州는 발해때는 월희현越喜縣이며 (거란시기)은주銀州 신흥현新興縣은 발해시기 회원부 소속의 부주富州였다. 신흥현은 금나라 함평부(개원)에 예속되었으며 월희국성은 지금의 철령현에 있었다. 동경 신주信州는 본래 옛 월희성이 있던 곳으로 빈주濱州의 서쪽 개원의 동쪽에 위치하여 고려와 이웃해 있었다. 특히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은 월희말갈越喜靺鞨의 땅으로 발해 회원부의 치소治所가 있던 곳이다.
<금사金史> 상경 신주(信州. 지금의 공주령시로 원래는 회덕현懷德縣이다)는 본래 발해의 회원군懷遠軍으로 요나라 개태開泰 7년(1118년)에 설치했다. 현縣은 무창현茂昌縣 하나인데 원래 발해 회복현懷福縣 지역이다. 함평부의 신흥현新興縣은 요나라의 은주銀州 부국군富國軍으로 본래 발해의 부주富州이다. <금사지리지> 한주韓州 유하현柳河縣은 본래 월희땅으로 구하와 유하柳河가 있다. <원일통지元一統志> 옛 유하현성柳河縣城은 본래 월희 땅이다. <요지> 신주(信州. 공주령시)는 개원에서 동북쪽으로 310리 거리에 있다. <흠정만주원류고> 신주信州는 과이심(科爾沁. 과이심좌익중기科爾沁左翼中旗)에서 동남쪽으로 380리 거리에 있다.
부주富州=<요사>동경의 은주銀州 부국군富國軍은 본래 발해의 부주이다. 은을 생산하는 곳이어서 태조가 이름을 바꾸었다. 관할현은 셋이며 연진현延津縣은 본래 발해의 부수현富壽縣이며 신흥현新興縣은 본래 월희국 지역으로 은銀을 생산하여 은주銀州를 설치했다. 영평현永平縣은 본래 우부현優富縣이다. <금사>함평부 신흥현은 요나라 은주銀州 부국군富國軍으로 본래 발해의 부주이다. 황통3년인 1143년에 주를 폐지하고 이름을 바꾸었다. <흠정만주원류고>발해의 부주는 치소가 부수현富壽縣으로 요나라는 부수를 연진으로 바꾸었다. 옛 신흥성은 철령의 치소 동쪽에 있으며 폐지한 영평현永平縣은 지금의 철령 동북쪽에 있었다
미주美州=<요사>동경 수주遂州는 본래 발해의 미주美州지역이며 관할현은 산하현山河縣이 하나 있는데 흑산현黑山縣과 녹천현麓川縣 두 현을 합쳐 설치한 것이다.
복주福州=<요사>상경의 복주는 황제의 장인 소녕簫寧이 세웠으며 남쪽의 한민漢民을 잡아 옛 북안평(北安平. 과이심좌익후기科爾沁左翼后旗)에 살게 한 것이다. 원주原州의 북쪽 20리 거리에 있고 서북쪽으로 상경(파림좌기)까지 780리이다.
안변부安邊府=안주安州 경주瓊州가 있으며 장백의 동쪽이며 부여부(개원)의 서북에 위치하고 통주(通州. 통요通遼 주변)와 가까운 곳이다. <신당서> 안변부는 안주安州와 경주瓊州 두 주를 관할한다. <요사> 천현天顯 원년(926년) 2월에 안변부절도安邊府節度가 항복하고 알현하였으나 3월에 반란을 일으켜 아돈阿敦을 보내 평정하였다.
안주安州=안주에 자사刺史를 두고 군사에 관한 일은 북여진병마사北女眞兵馬使가 관할했다.<요사> 귀인현歸仁縣의 옛 성城은 함평부(咸平府. 개원지역) 북쪽에 있다. 옛 안주는 금나라 황통皇統 3년(1143년)에 현縣으로 강등되고 뒤에 폐지되었다<원일통지元一統志>. 귀인현은 금나라때 함평부에 속했고 요나라에서는 통주通州에 속했는데 발해의 강수强帥와 신안현新安縣 지역이다. 강수는 부여부에 속하였고 신안은 안주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흠정만주원류고> 신주信州에서 290리를 가면 안주安州와 남포南鋪에 닿는다.<송막기문>
부여부扶餘府=부주扶州 선주仙州가 있고 고려高麗의 땅이며 옛 예(濊. 부여)의 땅으로 지금의 요녕성 개원開原 주변 땅이다. 요나라 때는 부여부가 황룡부에 속하기도 했다. 개원은 단군조선때는 장당경藏唐京으로 단군조선 제2의 도읍이며 단군조선 후반기와 북부여 시기에는 이곳에 도읍을 두었던 곳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건국도 이곳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해 시기에도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로 수도 방위를 위해 이곳에 발해 최정예 병사들이 대규모 주둔했지만 이곳이 거란에게 너무 쉽게 무너지면서 발해는 급작스럽게 패망하고 말았다.
옛 부여지역을 부여부로 삼았다. 항상 강병을 두어 거란을 대비하게 하였다. 부여는 거란으로 가는 거란도契丹道이다.<신당서> 동경의 용주龍州 황룡부黃龍府는 본래 발해의 부여부扶餘府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돌아오다 이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황룡현은 본래 발해의 장평현長平縣으로 부리富利 좌모佐慕 숙신肅愼을 합쳐 설치했다. 천민현遷民縣은 발해의 영녕현永寧縣으로 풍수豐水와 부라扶羅를 합쳐 설치했다.<요사>
동경의 통주通州 안원군安遠郡은 본래 부여국 왕성이다. 발해에서 부여성으로 불렀고 태조가 용주龍州로 바꾸고 성종때 지금의 통주로 바꿨다. 보녕 7년인 975년 황룡부의 반란자 연파燕頗의 잔류 무리들로 통주 통원현通遠縣에 소속 시켰는데 통원현은 발해의 부여현扶餘縣이며 포다현布多縣을 합쳐 설치했다. 안원현安遠縣은 본래 발해 강수현强帥縣이며 신안현新安縣을 합쳐 설치했고 어곡현漁谷縣은 발해 때도 어곡현이었다.<요사> 태조 천찬天贊 4년(925년) 12월 정사일 밤에 부여부를 포위하고 천현天顯 원년 정월(926년) 이를 함락시켰다.<요사>
후당後唐 천성天成 원년(926년) 12월에 등주에서 보낸 장계에 거란이 발해를 쳐서 점령하고 있는 사이 거란 왕이 죽어 일부 철수 했으나 아직 부여성에는 거란군이 남아 발해의 왕제王弟가 부여성을 공격하기 위해 그 성城을 포위하고 있습니다<구오대사舊五代史>. 후당 천성 연간(926-929년) 초에 거란이 부여성을 쳐서 무너뜨리고 부여성을 동단부로 삼고 그 아들 탁운託雲을 남겨 지키게 하였다. 거란왕이 죽어 발해왕(발해왕 동생)이 다시 부여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태종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979년)에 오사성烏舍城 부유부浮渝府의 발해 염부왕琰府王에게 조칙을 내려 거란을 치는데 돕도록 하였다<송사宋史>. 부여의 옛 땅은 발해에서 부여부가 되었다. 항상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에 대비했다. 부주扶州와 선주仙州 두 주를 관리했다.<통고通考> 송 태평흥국 6년(981년) 안정국왕安定國王 오원명烏元明이 말하길 “신臣은 본래 발해 유민으로 변방에 차지하고 거란에 항복하지 않았는데 부여부가 거란을 배반하고 어제 우리나라에 귀속하였습니다”하였다<통고>
부여국(夫餘國. 황룡부 지역)은 현도(玄菟. 해성)의 북쪽 천리 거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닿고 동쪽은 읍루(挹婁)와 닿고 서쪽은 선비와 닿고 북쪽에 약수弱水가 있어 사방 2천리이다.<후한서後漢書>. 부여의 남쪽은 고구려와 닿고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닿았다.<통전通典> 부여는 본래 현도玄菟에 속한다. 한漢말에는 요동에 속했다. 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여 그 사이에 있었다. 북명北溟사람 농부가 발견한 인장印章에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쓰여 있었다. 부여의 옛 성은 예성濊城이라 하는데 본래 예의 땅이고 부여왕도 그곳에 살았다.<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북명=명의 북쪽 지역. 동명=명의 동쪽지역. 명=ㅁ+영=물이 모이는 곳(ㅁ) 주변 둘레지역(영)
부여는 한漢나라 때 현도군玄菟郡의 북쪽에 있었고 현도는 지금의 해성海城 개평(盖平.개주) 복주復州지역이다. 부여국 왕성은 통주通州에 있었으며 통원通遠 안원安遠 귀인歸仁 어곡漁谷 4개현縣을 관리했다.<흠정만주원류고> *현도는 옛 옥저 땅인 지금의 해성 지역에 위치했다가 부여 서북쪽으로 이동했다.
정리부定理府=정주定州 반주潘州가 있으며 옛 읍루挹婁인 심양瀋陽과 그 동쪽 땅으로 흥경(興京.영릉永陵) 주변 지역이다. 고구려의 계루부(桂婁部. 읍루挹婁)와 발해의 건국지인 동모산이東牟山이 이 지역에 있다. 흥경興京은 현 영릉永陵주변으로 발해 정리부에 속하며 주周나라때 숙신肅愼, 한漢나라와 진晉나라때는 읍루挹婁이며 성경성(盛京城. 심양)에서 동남으로 270리에 위치한다. 청의 왕조가 처음 일어난 곳이다.
<신당서><통고>옛 읍루 땅을 정리부(심양과 그 동쪽지역)로 삼고 정주定州와 반주潘州 두 주를 관할하였다. <신당서>발해 대씨가 처음 읍루의 동모산을 그 근거지로 했다. <구당서> 계루桂婁에 동모산이 있고 계루부는 고구려 5부의 하나로 서한西漢 이후 계루부에서 왕을 배출하는 것이 오래 되었다 <명일통지明一統志> 동모산東牟山이 심양위성瀋陽衛城 동쪽 20리에 있다. 승덕현성(承德縣城.심양성) 동쪽 20리에 있는 천주산天柱山이 곧 동모산이다.
<요사> 심주瀋州 소덕군昭德軍은 본래 읍루 땅으로 발해시대에 심주를 두었고 쌍주雙州 보안군保安軍은 본래 읍루 땅이다. 정리부에 자사를 두었는데 옛 읍루 땅이다. 발해의 정리부定理府 안정군安定郡과 요遼와 금金의 심주瀋州 쌍주雙州 흥주興州가 모두 옛 읍루이다. 발해 대씨가 처음 읍루의 동모산을 그 근거지로 했다. 심주 읍루현은 요나라에서 이곳 정리부에 설치하고 자사가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대정29년인 1189년에 금나라 장종章宗이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 범하范河와 청하淸河가 있다<흠정만주원류고>. 범하와 청하는 모두 지금의 철령현鐵嶺縣성 남쪽에 있고 <금사>를 참고해 보면 지금의 철령현 남쪽 가까운 곳에 금나라 읍루현이 있는데 이곳은 정리부 관할이고 발해 정주定州이며 안정군安定郡의 치소이다.
정주定州=동경의 쌍주雙州 보안군保安軍은 본래 읍루지역이다. 발해가 안정군安定郡을 설치했고 관할현은 쌍성현雙城縣 하나인데 발해 때는 안이현安夷縣이다.<요사> 안정군은 당연히 정주定州지역이다.<흠정만주원류고>
심주瀋州=심주는 본래 읍루지역으로 발해가 심주를 설치했다. 현縣은 9개로 모두 폐지하고 1주州 2현을 관할했다<요사>. 1주州는 암주巖州 백암군白巖軍으로 본래 발해 노주盧州 소속의 백암현白巖縣이다. 요나라 태종때 이를 떼어 심주에 속하게 했다.<흠정만주원류고> 심양로瀋陽路는 본래 읍루挹婁 지역이다. 정리부를 설치하고 도독이 다스렸다. 정리 평구 암성 모미 안이 심수 안정 보산 능리 등 9개 현을 관할했는데 이곳이 모두 심주지역이다. 후에 전쟁으로 인해(병화兵火) 주를 폐지하고 심주는 흥료군興遼軍이 되어 절도節度가 다스렸다. 금나라 말에 심주는 다시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원일통지元一統志> 심양중위(瀋陽中衛. 심양)는 요동도사(遼東都司. 요양遼陽) 북쪽 120리 거리에 있다. 발해에서 심주를 설치했다.<명일통지明一統志>
솔빈부率賓府=화주華州 건주建州 익주益州가 있으며 옛 솔빈의 땅이다. 정리부의 동쪽에 위치하며 흥릉(영릉永陵)과 가까운 곳으로 비류(沸流. 현現유화현柳河縣주변)지역이다. 정리부의 동쪽 현덕부의 서쪽에 위치했다. <진서晉書> 비리국裨離國은 숙신(불함산)의 서북쪽에 위치한다. <요사> 비리군裨離郡은 무순撫順 화둔和屯지역이며 무순은 장백산(현 백두산) 서북쪽에 있다. <신당서>옛 솔빈率賓 지역을 솔빈부로 삼고 화주 익주 건주 세 주州를 관할했다. <흠정만주원류고>화주華州가 솔빈부의 부곽주이다.
<요사>동경 솔빈부는 자사를 두었고 옛 솔빈국 지역이다. 강주康州 솔빈현은 본래 발해의 솔빈부이다. <흠정만주원류고>요나라 솔빈부는 색주拺州와 정리부定理府 사이에 있으며 발해가 예전에 솔빈부를 관할했다. 강주는 현주顯州에 속하게 되었는데 솔빈의 민호를 옮겨 설치한 것이지 솔빈 지역은 아니었다. 현주는 발해 현덕부 지역이다. <금사> 상경의 솔빈로率賓路는 요나라때 솔빈부로 본래 솔빈지역이다. 서북쪽으로 상경까지 1570리이며 동북쪽으로 호리개胡里改까지 1100리이다.
익주益州=<요사>동경 익주는 관찰觀察을 두었으며 황룡부黃龍府에 속한다. <금사>수국收國 원년(1115년) 1월 5일 황상은 친히 황룡부를 치기 위해 군사를 진군하여 익주益州에 이르렀다. <거란국지>송宋 정화政和 5년(1115년) 금나라 태조가 요나라 빈주賓州 상주祥州 위주威州 세주를 빼앗고 익주로 진군하였다.
건주建州= 금金 상경 남쪽을 건주建州라 하였다 <원일통지>.
철리부鐵利府=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가 있으며 옛 철리 땅이다. 본계本溪시와 요양遼陽을 지나는 태자하太子河 주변지역이다. <신당서>옛 철리지역을 철리부로 삼고 광주廣州 분주 포주 해주 의주 귀주 등 6주를 관할했다. <요사> 광주廣州는 고구려 당산현唐山縣이고 발해에서 철리군鐵利郡이며 요나라때는 발해 사람들을 이쪽으로 옮겨 철리주를 세웠다. 통화 8년인 990년에 주州를 없앴다. 광주는 지금의 본계시本溪市 서쪽에 위치한 요양시遼陽市.
<압강행부지鴨江行部誌> 탕지현湯池縣은 본래 요나라 철주鐵州로 그 동쪽에 있는 철령鐵嶺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명일통지> 처음 철령위(철리)는 지금의 철령성 동남5백리 떨어진 곳(본계시 요양시 주변 태자하)주에 설치되었다. 홍무26년(1393년)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그러므로 철령성은 고려와 경계를 접한다.
*명나라가 고려 말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을 요동도사의 관할에 둘 것을 결정하면서 고려에서 요동정벌 논의가 일어났는데 <고려사>42권 공민왕19년(1370년) 7월 요동의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여 동년 12월에 평정하였고 이때 “요양과 심양은 본래 고려의 옛 강토이다”하였다. 명나라는 1371년 요양遼陽에 요동위遼東衛를 설치하고 요동지역으로 영토 확장을 꽤했다. 또 명나라가 우왕14년 1388년에 과거 원元의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철령 이북의 땅을 명이 관할하겠다며 심양 남쪽 진상둔진陣相屯鎭에 철령위를 설치하게 되자 고려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보내 “철령으로부터 북으로 가면서 문주文州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발해 정리부) 함주(咸州. 개원)등 여러 고을을 지나 공험진(공주령시=공주孔州)까지 예부터 우리나라 땅이고 쌍성총관 관할이던 철령 이북 지역은 1356년(공민왕5년) 고려가 탈환하여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해 통치하고 있던 곳이니 철회해 줄 것을 명明 태조 주원장에게 청하였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에 나서게 된 것이다.
광주廣州= <요사>에 광주(廣州. 현 요양시遼陽市)는 고구려의 당산현唐山縣이고 발해에서 철리군이 되었다. <금사> 심주瀋州 장의현章義縣은 요나라의 광주廣州로 황통3년인 1143년 현으로 강등되어 내속來屬시켰다. 요하遼河 동양하東梁河 요하대구遼河大口가 있다. <흠정만주원류고>동량하東梁河는 곧 태자하太子河이고 또 대량하大梁河이다. <명지明志> 장의현성章義縣城이 심양중위 서남60리 거리에 있다. <송막기문松漠紀聞>심주瀋州에서 60리를 가서 광주(廣州.요양시)에 이르고 또 70리를 가면 대구大口에 닿는다.
포주蒲州=<송막기문> 흥주(興州. 지금의 영릉寧陵 주변)에서 40리를 가면 포하蒲河에 닿고 또 40리를 가면 심주(瀋州. 심양)에 이른다. <원일통지元一統志>포하는 심양로瀋陽路에 있다. 철리국鐵利國의 포곡蒲谷에서 발원하여 포수전蒲水田을 거쳐 지나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포하는 심양에서 동으로 40리 거리에 있고 여기서 40리를 동으로 더 가면 흥경에 이르게 된다.
의주義州=<요사>상경의 경주慶州 부의현富義縣은 본래 의주義州이다. 태종이 발해의 의주 백성을 이곳에 옮겨와 살게 하였다. 의주義州는 중희重熙 원년(1032년) 의풍현義豐縣으로 강등되어 영주永州에 관할이 되었고 영주永州 의풍현은 본래 철리부 의주이다. <흠정만주원류고> 부의현富義縣과 의풍현義豐縣은 발해 의주에 소속된 현이다. <금사>의주義州 숭의군崇義軍은 요나라 의주이다. <원사元史>대녕로大寧路에 의주義州가 있다. <명일통지>의주위義州衛는 요나라때 의주宜州이며 금나라때 의주義州로 바뀌었다.
귀주歸州=<요사>동경 귀주는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그 발해 유민으로 설치했다. 통화29년(1011년) 고려를 쳐서 잡은 고려인과 발해 호민들로 귀주를 다시 설치했다. 현縣은 귀승현歸勝縣 하나가 있다.
안원부安遠府=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가 있다. 한반도와 한반도 주변에 위치한다. <신당서> 안원부는 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 네 주를 관할한다. <흠정만주원류고> 영주寧州와 모주慕州는 조선과 가깝고 상주常州는 조선의 평안도 정원부定遠府에 속한다. 미주郿州는 평안도의 매주買州로 추정해 본다
영주寧州=<요사>동경 영주에는 관찰을 두었다. 통화29년(1011년)에 고려를 정벌할 때 고려편에 서서 대항한 발해의 포로들로 설치하고 신안현新安縣 하나를 관할했다.
모주慕州=<요사>동경 모주는 발해의 안원부安遠府 지역이다.
특수(직할)행정구역에 속하는 독주주獨奏州는 영주郢州 동주銅州 속주涑州가 있다. <신당서> 영주郢州 동주銅州 속주涑州 세 주를 독주주獨奏州로 삼았다.
영주郢州=<요사> 동경 영주郢州는 발해가 설치했다. 속주涑州=<요사> 속주는 발해가 설치했다. <통고通考>속주는 속말강과 가까우며 대체로 속말수라 한다. 동주銅州=<요사> 동경 동주銅州 광리군廣利軍은 발해가 설치했다. 석목현析木縣 하나를 관할했는데 발해에서는 화산현花山縣이라 했다. <금사>동주銅州를 폐지하고 석목현析木縣은 징주澄州에 소속시켰다.
<요사> 함주咸州 안동군安東郡은 본래 고구려 동산현銅山縣 지역으로 발해에서 동산군銅山郡을 설치했다. <흠정만주원류고>발해에서 간혹 군郡의 이름이 있는데 예를 보면 노주盧州를 삼로군衫盧郡이라 하고 정주定州를 안정군安定郡이라 했는데 동산군銅山郡은 동주銅州를 나누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금사>함평부(咸平府. 개원지역)는 본래 고구려의 동산현銅山縣으로 요나라 함주咸州가 되었다. <원일통지元一統志> 동산군銅山郡은 옛 성이 함평부(咸平府. 개원지역) 남쪽에 있다. *함주나 함평부는 지금의 개원 지역이고 개원 지역은 오랜 기간 부여의 중심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여의 영역이 북쪽으로 확장되고 있는데 발해시대의 부여부는 개원을 중심으로 했는지 그 북쪽에 위치했는지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집주集州 <요사> 집주集州는 옛 비리군陴離郡 지역으로 한漢나라때 험독현(險瀆縣. 험독은 하북성 창려현과 심양 동남 지역 두 군데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후자를 지칭한다)에 속했고 고구려때는 상암현霜巖縣이었고 발해에서 주州를 설치했다. 봉집현(奉集縣. 철령위 설치) 하나를 관할했다. <흠정만주원류고>폐지한 봉집현은 지금의 무순성(撫順城.심양 옆에 위치한 무순)남쪽 80리 거리에 있다. <금사>귀덕주貴德州 봉집현奉集縣은 요나라에서 집주 봉집현이 되었으며 본래 발해가 설치한 현이다. 여기에 혼하渾河가 있고 귀덕현에 범하范河가 있다.
숭주崇州 <요사> 숭주는 본래 한漢의 장잠현長岑縣으로 발해에서 주州를 설치했다. 숭산현崇山縣 규수현潙水縣 녹성현綠城縣이 있었는데 모두 폐지했다. <요사> 귀덕주貴德州의 귀덕현貴德縣은 발해의 숭산현崇山縣이고 봉덕현奉德縣은 발해의 녹성현綠城縣지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귀덕현에 범하范河가 있다고 <금사>에서 말하는데 범하范河는 철령현성 남쪽에 위치한다
개주蓋州 <요사>진주辰州는 본래 고구려 개모성蓋牟城이다 발해에서 개주蓋州로 고쳤다가 또 진주로 고쳤으며 진주는 진한辰韓에서 따온 이름으로 건안현建安縣 하나를 관할한다. 개주蓋州는 해성 서남에 위치한 지금의 개주盖州이다. <흠정만주원류고>개모는 금나라에서 개주로 고치고 4개현을 관할했다. 탕지湯池는 요나라 철주鐵州이며 수암秀巖은 지금의 수암岫巖이며 웅악熊岳은 요나라 노주盧州 웅악熊岳현이다 금나라에서 주를 폐지했다. 원나라 때 탕지와 웅악을 합쳐서 건안建安에 편입시키고 후에 건안을 없애고 개주蓋州에 편입시켰다. 초기에는 개주로가 되었다가 뒤에 요양로遼陽路에 편입되었는데 지금은 개평현蓋平縣이다. 웅악성은 개주 남쪽 60리에 있으며 웅악산과 웅악하河가 있다.
녹주麓州 <요사>녹주는 발해에서 설치했다. <흠정만주원류고>녹주는 <요사>에는 실려 있으나 <당서>나 <통고>에는 그 주의 이름이 없다. 요나라 건주乾州 소속의 사농현司農縣은 발해의 녹군현麓郡縣으로 녹파麓波와 운천雲川 두 현을 합병하였다. *<흠정만주원류고>개주 숭주 집주 녹주는 <당서>와 <통고>에 실린 60주 이외의 것이다.
계림=계루보다 다소 위쪽 지역. 길림=계림보다 다소 위쪽 지역 혼동강混同江=호수 주변으로 흐르는 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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