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조선행궁 건축의 백미
수원 화성행궁 탐방 (1)
민통창설 제31주년 민통 전국대회(수원체육관) 참가겸
동해시협의회 회원 단합대회의 일환으로 수원 화성행궁을 탐방한다.
화성열차를 이용할려고 했으나 1시 이전에는 모두 예약이 완료되어 화성행궁만 돌아보기로 하였다.
입장료는 통합관람권으로 1인당 2,000원(20명 이상 단체 할인)
[수원화성의 지도]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부터 96년(정조18년~20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축조 기간에 화성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릉원(현재 융릉)을 13차례나 찾았던
정조는 참배기간내 화성행궁에서 유숙하였다.
건립당시에는 600여칸으로 정궁(正宮)형태를 이루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행궁이었으나
일제강점기때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 역사 말살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화성행궁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하게 되었다.
화성행궁을 탐방하는 민족통일동해시협의회 회원의 단체인증
먼저 수원행궁을 둘러 보기전에 무예 24기 공연 관람한다.
무예 24기는 정조의 명을 받은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무예의 달인 백동수가 조선 전통의 무예와
중국 , 일본의 우수한 무예를 적극 수용하여 만든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로
화성에 주둔했던 정조대왕 시대 조선의 최정예부대인 장용영 외영군사들이 익혔던 실전무예이다.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 개최되는 장용영수위의식 관람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210여년전 수원화성에서 펼쳐진 장용영수위의식은 정조대왕이 계신 화성행궁을 지키는
수위의식 및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보여주는 의식으로
서울에 광화문과 대한문을 대표하는 수문장 교대식이 있다면, 장용영수위의식은 수원을 대표하는 고유문화상품이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화성행궁은 역사적인 가치뿐 아니라 '대장금', '이산', '무사 백동수', '뿌리깊은 나무', '해를 품은 달', '왕의 남자' 등
화제의 드라마와 영화의 철영지로 주목받고 있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남군영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