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 지배의 최심부에는 종교가 있었다. 총칼만으로는 지배할 수 없다는 걸 그들도 알았다. 그래서 신사(神社)를 세웠고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었다.
신도(神道, しんとう)를 통해 일본의 정체성을 조선인에게 이식하겠다는, 말하자면 영혼의 점령이었다.
논리는 단순했다. 일본의 조상신을 조선인의 조상이라 설득할 수 있다면, '내선일체(内鮮一体)'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강요가 아니라 귀환이 된다. 황민화(皇民化) 역시 그 끝에 있었다.
식민주의 역사관도, 이후 굳어진 황국사관(皇國史觀)도 결국 이 신도 국교화의 논리를 떠받치기 위한 이념적 토대였다.
이 구조에 정면으로 맞선 집단이 대종교였다.
홍암 나철은 1909년 서울 재동에서 단군을 교조로 하는 민족종교를 다시 일으켰다. 그는 새 종교를 창시한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 땅에 있었던 신교(神敎)를 다시 밝혔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중광(重光)'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신교의 뿌리야말로 일본 신도(神道)가 흘러 나온 원천이라는 주장을 정면에 내걸었다.
나철은 이렇게 물었다.
"대화(大和, やまと, 일본)의 옛 사기(史記)를 살펴보건대, 일본 민족의 근본과 신교의 본원이 다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신사(神社)의 삼한기(三韓几)와 궁내성(宮内省)의 오십한신이 다 어디에서 왔으며, 의관문물과 전장법도, 그리고 공훈을 세운 위인들이 다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일본 신도(神道)의 뿌리가 한국의 신교(神敎)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 선언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이었는지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대종교를 집요하게 탄압한 사실이 증명한다.
일제는 기독교·불교는 인정하면서도 대종교만은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단군을 신봉하는 것 자체가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행위라 여겼고, 종교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했다.
1915년 총독부는 종교통제안(宗教統制案)을 공포해 대종교를 불법화했고, 나철이 포교 허가를 신청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신도(神道, しんとう)를 국교로 내세우는 제국이, '신도의 뿌리는 조선의 신교'라고 주장하는 종교를 눈앞에 두고 공존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어느 한쪽이 거짓이 되지 않고는 둘이 동시에 설 수 없는 구조였다.
여기에는 또 다른 층위가 있다. 자격지심이다. 일본 신도(神道, しんとう)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문화적 영향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제국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단군으로 상징되는 조선의 정체성이 살아있는 한, 황민화(皇民化)의 논리는 끝내 완성될 수 없었다.
신교(神敎)와 신도(神道) 사이의 싸움.
그것은 총칼이 아니라 일제와 대종교가 정체성을 걸고 벌인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