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열매가 바로 그 사람
2024.10.27. 주일오전예배
가을이 깊어 가는 이때 성전에 들어오다 보면 바람결에 후두둑 소리가 납니다. 도토리가 떨어지는 소리, 알밤이 떨어지는 소리 일 년의 추수가 열매로 맺어지는 순간들인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소식」에 ‘추수 때’라는 귀한 목사님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오늘의 타작마당! 주님이 우리를 살펴보실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들로 몸 된 교회 식구들이 드러났으면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의 열매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오늘은 주님 모시고 ‘그의 열매가 바로 그 사람’ 이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 뉴스를 들여다보면 지구촌이라는 의미가 더욱 실감이 납니다. 중동 전쟁이 유가에 영향을 미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일이 이제 점차 전쟁이 확산되어서 그 영향권이 한반도에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이 추수 때의 타작마당이고 오늘이 땅끝임을 기억해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 바울 선생님 때문에 로마로 가는 배편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번 항해 길은 피하고 다음번에 갔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죄수를 호송하는 책임 있는 백부장은 죄수의 말을 크게 염두해두지 않았지요. 순풍이 부니 지금 출발해야 한다는 선장과 선원들의 말을 바울 사도 선생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듯이 항해 중에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해와 달이 열나흘째 보이지 않는, 나와 죽음이 한 발자국이라는 표현처럼 그들은 땅끝에서 서 있었습니다. 이제 점차 사도 바울 선생님의 역할이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나와 행선하는 자를 다 내게 주셨다 하셨다. 그러니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선장이나 선원들 말보다도 백부장의 군사적 권위보다도 주님을 모시고 있는 사도 바울 선생님이 그 책임과 권세 있는 충고로 배는 부서졌으나 사람들은 다 안전하게 되는 모습을 봅니다. ‘가뭄 때에 우물을 파야 진정한 우물을 만난다’는 말이 있지요. 땅끝에서 주님 사람의 면목이 드러나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이 땅의 삶에 휩쓸리는 자가 아니고 아무 일 없다고 마음을 풀어놓은 자도 아니고 주님 위해 사는 자라면 날마다 타작마당이 오늘이다! 또 오늘의 땅끝에서 주님을 알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시는 줄 압니다. 저는 우리 몸 된 교회에서 본으로 세운 네 분의 삶을 통해서 그들이 땅끝에서 어떻게 이기는 자로 섰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아비가일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아비가일의 남편이 나발인데 그 집에 다윗이 심부름을 보낸 소년들이 도착했습니다. 다윗의 소년들은 정중하게 먹을 것을 좀 나눠달라고 부탁했습니다만 나발은 그들을 멸시하고 다윗을 모욕하고 그 소년들을 보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사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발의 집에 쳐들어옵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자기 집의 소년 한 사람이 이런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고 알릴 때 신속하게 행동한 것이 ‘떡 이백 덩이, 포도주 두 가죽 부대, 잡아 준비한 양 다섯, 볶은 곡식 다섯 세아, 건포도 백 송이, 무화과 뭉치 이백’을 급히 준비해서 먼저 가지고 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유벽한 곳, 한적하고 외진 곳이 유벽이라는 뜻이랍니다. 한적하고 외진 비탈길을 달아서 나귀를 몰고 내려오는데 반대편에서도 다윗의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제가 당신의 소년들이 왔을 때 못 뵈었습니다.” 하면서 다윗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니 필요 없는 피를 흘리지 마시라”고 간언합니다. 그때 다윗의 마음이 감동되어서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네 지혜를 칭찬하며 네가 친히 보복하는 것을 막았느니라” 그리고 그가 가져온 것을 그녀의 손에서 받고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아비가일이 먹거리를 준비했을 때 저는 특히 ‘잡아 준비한 양 다섯’이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그 즉시 다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왠지 오늘은 양을 더 잡아서 누군지 몰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나귀를 몰고 산비탈을 쏜살같이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서 그냥 부잣집 마나님으로 꽃단장이나 하고있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자기 집 사람들과 비록 하인들이지만 같이 생활하며 평범한 그의 삶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아름다웠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다윗에게 부름을 받았을 때 다섯 명의 여종들이 따라오는 것으로 보아서 평소에도 존경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아비가일의 깨어있음과 그 담대함 그리고 지혜를 주님은 그것을 그녀의 열매로 보실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바르실래 할아버지
사무엘하 17장에 보면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을 도망치듯 나오게 됩니다. 물론 반란의 세력이 있기 때문에 피해주는 것도 있겠지만 이미 다윗은 지는 해요, 압살롬은 뜨는 태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참 우는 심정으로 그 아들과 싸우기를 피하고자 요단강 건너 길르앗 땅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 세 사람이 다가와서 열네 가지로 준비한 것들을 다윗에게 주면서 공궤를 합니다. 정치 군사적인 상황의 대세가 압살롬인데 다윗을 돕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위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바르실래 할아버지만 보더라도 거부인데 그가 다윗을 모른 체 할 수 있었어요. 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요. 그러나 주님의 감동이 바르실래에게 왔을 때 다윗의 어려움, 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불어닥친 유라굴로 광풍을 바르실래는 같이 겪으며 위로해주면서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강하게 일어선 것입니다. ‘예, 아니오’가 분명한 판단으로 일어선 것이지요. 마치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는 다윗의 아들이 강도지요. 바르실래 할아버지와 로데발 사람 마길, 암몬 사람 소비, 이 세 사람이 예루살렘을 급하게 빠져 나오느라 먹을 것도 없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에게 공궤를 합니다. 사무엘하 17장 29절에는 그 바르실래 할아버지의 생각이 표현되어 있어요.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생각했답니다. 그냥 다윗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집에 있는 것을 생각 없이 가져온 것이 아니고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지요. 주님을 알아준 것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자신의 군대가 압살롬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바르실래는 왕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마중 나왔습니다. 다윗은 궁까지 같이 가서 당신을 공궤하고 싶다고 했는데 바르실래는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내 나이 팔십인데 내가 음식의 좋고 나쁨을 알 수 있겠으며 음악 소리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겸손히 거절하고 그 아들을 대신 가게 합니다. 팔십 되신 할아버지이지만 이 아름다운 판단을 주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지난 수요일 날 저녁에 마치 예전에 집회하던 생각이 나더라구요. 귀한 분들이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우리 목사님을 주님의 사람으로 귀중히 여기시는 그 중심이 너무 고맙고 또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김OO 목사님이 퀴즈를 하나 내었지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강한 부대가 무슨 부대냐고요. ‘할머니 부대’ 정확하게는 ‘할머니 기도 부대’이지요. 우리 몸된 교회에도율전동의 할머니 기도 부대가 있지요. 할렐루야! 예전에 목사님은 젊은이들은 못 믿겠다 하시고 할머니들은 믿을 만한 분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바르실래 할아버지도 귀한 주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르밧 여인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이 땅에 우로가 삼년 반 동안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는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가게 하셨지요. 시냇가가 마를 때 주님은 엘리야를 일으키시고 이방 시돈 땅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한 과부에게 너를 공궤하도록 명했다고 하면서 그 길로 보내십니다. 사르밧 여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받았는지는 성서에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너에게 내 사람을 보내니 잘 섬겼으면 좋겠다고 하셨겠지요. 통에 가루가 점점 사라지고 이 한 줌 남은 가루와 병에 기름이 다 떨어지고 그 통에 가루를 부쳐 먹을 수 있는 몇 방울의 기름만 남아있는 그 마지막 순간에 엘리야 선지자가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는 “물 한 모금 주라” 해서 물 가지러 가는 그 길에 “작은 떡도 하나 주라” 그렇게 말씀하지요. 그 여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 마지막 음식마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접합니다. 끝까지 기다리는 믿음을 보는 것이지요. 기다리다 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기다려야 참된 기다림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그 당시 오백 명이 일시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이지요. 주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백 이십 명이었습니다. 나머지 삼백 팔십 명은 기다리다 지쳐서 제 갈 길로 갔던 것이지요. 사르밧 여인이 주님의 명령을 끝까지 기다렸던 그 믿음을 열매로써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수넴 여인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수넴 여인은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는 평범한 여인이지만 하루는 그 아이가 갑자기 죽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자기 집 담장에 있는 엘리사의 쉬는 방 그 침상에 누이고 남편에게 외출을 허락받습니다. 그 남편은 말합니다.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합니까?” 수넴 여인은 “평안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남편은 아무 말 않고 그 부인을 믿음으로 보내줍니다. 역시 수넴 여인도 나귀를 타고 그 하인 한 사람과 같이 가는데 내가 천천히 가자 할 때까지 이 나귀가 빨리 달리도록 도와주라고 말을 합니다. 갈멜산까지 나귀를 타고 달려간 것이지요. 요즘 차로 말하자면 아마 시속 200km로 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엘리사가 다가오는 수넴 여인을 맞이합니다.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이렇게 물어보았는데 여인은 평안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뒤에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그 여인의 심중에 괴로움이 있는데 나에게 알려주지 않으셨다.” 수넴 여인인 괴로운 마음은 있어도 평강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기 사환 게하시를 보내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지고 그 여인에게 가라고 했을 때 그 여인은 게하시와 그 지팡이를 따라가지 않고 엘리사의 발을 붙잡고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결국은 지팡이와 게하시의 기도는 효력이 없었고 엘리사가 가서 기도하므로 그 수넴 여인의 아들이 살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땅끝과 오늘의 타작마당에서 저와 여러분도 이와 같이 주님께 속함으로 강하고 아름답고 지혜로운 열매들이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의 어르신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지혜로 판단할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필요 없는 고난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유라굴로 광풍이 불 때라도 주님 모시고 견고하면서 깨어 섬기셨던 사도 바울 선생님처럼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권세 있는 왕도 아니고 위대한 선지자도 아니지만 오늘의 땅끝에서 주님의 마음을 따라 깨어 있으며,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판단하며, 끝까지 기다리고 주의 평강을 따르는 그의 사람들 되시기를 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