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상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서양 고대의 지독한 회의주인자인 고르기아스(BC 480-380년 경)는 회의주의의 강령과
도 같은 주장을 이렇게 하였다. '첫째, 존재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둘째,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은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셋째,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손 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동료 인간에게 전할 수 없거나 이해시킬 수 없다.'
이 명제는 서양철학의 흐름을 앞서 꿰뚫어본 주장으로 유명하다. 서양의 고중세 시대
는 고르기아스의 첫번째 회의론적 명제에 대항하여 철학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즉 존
재하는 것은 있다. 존재란 무엇이며, 참으로 존재하는 것[실체, 본질]은 무엇이며 존
재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지 등을 파고 들은 소위 '존재론적 패러다임'의 철학이다.
근대는 고르기아스의 두 번째 명제가 철학적 핵심문제로 전면에 등장한 '인식론적 패
러다임'의 시기라 할 수 있고, 언어가 철학의 중요 화두로 등장한 현대는 고르기아스
의 세 번째 명제와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언어론적 패러다임'의 시대라 볼 수 있
다.
철학함의 유형과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 새로운 시대[근대]를 연 사람, 새로운
진리관, 학문관, 세계관을 열어 근대 시민사회로의 길을 개척한 사람, 그 사람이 바
로 데카르트(1596-1650)이며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이의 없이 그를 '근대철학의 아버
지'라고 부른다. 그는 철학의 장을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에로 바꾸어 놓았으며, 놀
라움에서 비롯되었던 철학함의 시작을 의심[회의]함에로 옮겨 놓았고, 철학의 화두
를 '실체'에서 '주체'에로 변환시켰다.
철학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알]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며 당연해 보
인다.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려는 사람은 존재하는 것이 인식되게끔 자기를 내어 준다
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참된 인식이란 존재자를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그렇게 그
것의 무엇으로 있음을 받아들여 그 무엇임[본질 또는 실체]를 궁구하는 것이다. 그런
데 문제는 인식하는 자가 어떻게 존재자의 참된 실체를 인식하고 있는지를 아는가 이
다. 어떻게 그가, 그가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실지로 참된 것이라는 것
을 확신할 수 있는가 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이 존재하며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우리
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과연 내가 보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인지를 나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인식을 통
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
로 그 인식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이 문제를 창조주로서의 신과, 창조물로서의 세상, 그리고 그것을 질서짓
고 있는 신적 이성을 갖고 풀었으며,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가져서도 안 되었다. 더욱이 하느님의 직접 계시라는 『성서』는 '진리의 寶
庫'이기에, 철학자들은 흔들릴 수 없는 이 계시의 진리에 바탕하여 모든 것을 설명하
고 해석해 내기만 하면 되었다. 성서의 해석을 주관하는 교회는 진리를 독점하였고
사람들이 믿고 따라야 하는 진리의 목록을 확정지어 놓았다. 그런데 새로이 등장한
자연과학이 성서의 내용과는 다른 사실들을 발견하여 퍼뜨리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교회는 그러한 도전을 묵과할 수 없었다. 기존의 [성서적] 진리와는 다른 것을 주장
하는 사람에게 그가 주장하는 것이 진리임을 입증해야 할 의무를 부과한다. 교회가
제시하는 입증 방식은 간단했다. 장작더미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새로운 진리를 주장
하는 사람을 묶어놓고 불을 지르는 것이다. 만약 그가 주장하는 것이 진리라면 하느
님은 그를 구해줄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당연히 타 죽을 것이다.
데카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이렇게 소위 마녀사냥이 판을 치던 살벌한 시대였다. 그래
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주장하던 브루노라는 철학자는 그것을 증명하다가 불에 타죽
어야 했고, 갈릴레이는 이 증명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교회재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과학자적인 양심을 달래려고 갈릴레이는 교회 법정문을 나오며 '그래
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린다.
데카르트의 위대함은 서슬퍼런 교회의 권위에 굴하지 않고 현명하게 바로 이러한 마
녀사냥적인 진리입증 방식을 바꾸어 놓게끔 한 데 있다. 데카르트는 계시와 믿음에
의해 작성된 그때까지의 진리의 목록을 재검토하여 새롭게 작성해보자고 제의한다.
요즘의 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교회에서 일방적으로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
에게 증명의 부담을 떠넘기는 '반증방식'을 버리고 진리의 '검증방식'을 시행해 볼
것을 제안한 셈이다. 그리하여 교묘하게 교회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도
록 하고, 이제는 오히려 교회가 진리의 기준과 척도를 찾고 검증방법을 고민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는 새로운 진리가 빛을 발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놓
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의 이러한 철학적 행위를 엿새에 걸친 신의 창조 활동
과 비교하기도 한다.
'6일간의 새로운 창조'는 그의 대표작인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간략하게 『성
찰』이라 불린다)이 6개의 성찰로 이루어진 것을 빗대어 한 말이다. 데카르트는 수학
의 정밀한 방법을 끌어들여서 흔들릴 수 없는 확실한 진리의 토대를 발견하여 철학
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리하려고 한다. 수학적 공리와도 같이 직접적으로 확
실하고 명백하며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그런 가장 확실한 아르키메데
스 점을 발견해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버리고 첫
걸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는 단호하게 결심하여 모든 위험
을 무릎 쓰고 모든 것을 '회의하는 사유의 자유' 속으로 뛰어든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절대적 회의 속에서 외부 세계의 존재도, 나의 육체적인 현존
도, 수학적 진리의 자명성도 전부 회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만
다. 그러나 그러한 혹독한 회의의 와중에서 데카르트는 번뜩이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의심하는 자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과 의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의심하는 그
가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기꾼 신이 있어 나를 속인다 할지라
도, 그래도 나는 속고 있는 자로서 실재한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
다.' '나는 사기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
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새로운 확실성을 향해 돌파해 나가는 데 성공한다. 데카르트는 중
세 철학이 거의 그랬던 것처럼 가장 근원적인 확실성의 장소를 더 이상 신에게서 발
견하지 않고 그 장소를 인간에게로 옮겨 놓으며 그럼으로써 서양 철학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놓는다. 그는 모든 신학적 배경을 헐어버리고 '사유'를 완전히 그
자체 위에 아무런 도움 없이 세우기를 주장한다. 이 배후에는 근세 주체의 자율성에
대한, 이성적인 자립성에 대한, 자신이 획득한 앎의 확실성에 대한 욕망, 즉 시민사
회적 계몽철학의 원칙이 숨겨겨 있다. 그 모든 것은 이제 비로소 신학적으로 합법화
된 전통의 권위에 항거하여 싸워서 획득하고 확보해야 할 것들이다.
이렇게 해서 근대의 '자아의 발견'은 막을 올리게 된다. 그런데 그 '나'가 우선
은 '사유하는 나'로서 규정되고 오직 '사유'만이 확실한 것이 된다. 물론 이때 사유
는 폭넓은 의미로서 감정이나 의지 등 의식의 전 영역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로써 의
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다시 말해 '사유하는 사물'로서의 인간과 의식하지도 사유
하지도 못하는 여타의 다른 존재 사이에는 건너기 매우 힘든 틈이 벌어지고 만
다. '나'는 구체적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고찰되지 않는다. 순전
히 의식 안에서만 살고 있는 '자아'는 사물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데카
르트로부터 한편에는 세계 없는 주체, 다른 한편에는 단순한 객체를 세워 현실세계
를 양분하는 근대적 분열이 시작된다. *
첫댓글 7 편에 걸쳐서 근대 서양 사상을 올릴 예정입니다. 간단하나마 올려진 [동양사상]은 영적보화 게시판에 재 정리 했으니 언제라도 편안한 시간에 조용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위의 글은 [진리의 벗되어]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늘 감사하는 맘으로 또 보고 또 보고,,자꾸 보면 이해안가는 부분도 이해되구..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공부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되겠는데요^^항상 주님안에서 영육간의 건강과 평화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