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바울은 14년 후에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정식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요즘 같으면 총회를 외면하는 이런 선교사는 후원을 받을 가능이 제로일 겁니다.
진리를 가진 사람의 특징은 군대로 치면 각개전투에 능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역사일수록 교단이나 단체나 교회의 배경을 앞세우는 경향이 짙습니다.
교회의 간판을 보면 이 교회가 복음 일변도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14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 간 것도 계시를 따라 올라 갔다고 말합니다.
그 목적은 자신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달음질을 하고 있는 것이나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도록 그 복음을 예루살렘의 유명한 자들에게 제출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교회로부터 인정된 자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사사로이 했다는
말은 자 봐라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고 떠벌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무시를 당하거나 이단 판정을 받을까봐 그가 전하는 복음을
예루살렘 곧 중앙무대에 자신의 복음에 대한 공인을 받고자 올라 간 것뿐입니다.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디도는 헬라인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행16장에는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했다고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상은 육신으로 유대인이면 유대인처럼, 헬라인은 헬라인처럼 행하도록
한 겁니다. 그 이유는 육신의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갈6:15절)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엿보고 밀수꾼처럼 가만히 들어 온 거짓 형제들
까닭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간첩들처럼 정탐하는 것을 말하고 흡사 유괴범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그런 부류의 신흥종교가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교회가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뻥 뚫려 있는 허점을 노려 자신이 중보자가
되는 것처럼 별 것도 아닌 것을 큰 체험인양 내 세워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반복 학습하여 세뇌시키고 과거 학생들을 동원해서 마스게임을
하듯 집단 확신을 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광경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사람들을 그 집단의 종으로 삼으려 합니다. 무슨 명목이라도
붙여 묶어 두려고 합니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의 법으로 정합니다.
어쩜 교회의 주일 성수나 십일조, 새벽기도를 위한 그래프 같은 것에서 습관이
된 어린 신자들이 관성에 의해서 그들의 규칙에 빠져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 구역별 경쟁이나 숫자 경쟁을 시켜 열심을 내게 하는 일 등도 같은 방법입니다.
코로나 이후의 교구나 구역을 관리하는 사역자들은 신자들 관리에 더 골몰할 겁니다.
5절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전하려면 묶지도 말고 묶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잠시라도 묶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조직과 제도와 법은 아무 가치도
없는 제약들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교회를 부흥시켰다가 지금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5절의 입장에서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4절과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패거리를
만들려고 하고 조직과 공동목표를 제시하여 묶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봅니다.
그 다음에 6절과 같이 권위와 전통을 내세워 사람을 묶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양쪽이 숫자적으로는 세상적인 유명세로 매력이 있습니다. 큰 세력이 되니까요.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을 리드십이라고 여기는 세대입니다.
6절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바울은 어떤 사람이든지 무론대소하고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저울에 달아도 눈금하나 까딱할 만한 무게도 나가지 않습니다(시62:9절)
그래서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시지 않으십니다. 사실 유명한 자들은 자신의 심복이나
울타리로 삼으려 할 뿐 복음의 진리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한국의 교단 정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총회의 인물들이 일선 목회자들의 영성에 도움을 주고 있을까요?
이것이 이 시대에 진리를 가진 자들의 고독한 고백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교단의 대표나 기독교단체장들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대표성이 있을까 묻습니다.
7절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바울은 무할례들자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졌습니다, 베드로는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인에게 복음의 그물을
던지고는 바로 장막장수 바울에게 복음의 바통이 넘어 간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8절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베드로는 외적인 역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내적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무할례자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 헬라인은 지혜를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 증거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라면 주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이
절실해 질 겁니다. 아담 안에서 잘 못 태어난 인간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고 거룩함과 영광을 얻는 참 회개는 오직 십자가의 도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속에서 역사하시는 내적인 능력이며 지혜입니다(고전1:24)
9절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이와 같은 사실을 안 사람들은 야고보, 베르로, 요한 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다고 진술합니다.
그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총회의 공인을 받은 사역자들이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복음사역의 결과는 검증을 받아야 하는데 과연 이 시대에 야고보와
베드로 요한 등과 같이 성령의 통찰력에 의한 성경의 잣대를 가진 이가 있을까요?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인정을 받은 결과 이방인에게로 가고,
다른 이들은 할례자를 위한 사역으로 각각 분담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도 사역을 분담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 안에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방법은 사람들을 흩어 섞어 버리는 것인데 지금 온 세계가 섞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을 수용하고 복음을 전하는 지도자의 자질에 달려 있습니다.
10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가난한 자들을 부탁하는 것은 바울의 원래의 생각이었답니다. 복음을 전파하다
보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 사르밧 과부의
가루 조금과 기름이 매우 귀한 것은 그들의 마지막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죽음입니다. 나눠준 쌀 3kg 봉지를 들고 눈물을 글썽거리고 한국 돈으로
5만원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해 다리가 썩어가는 환자를 치료해 줬던 지난날의
기억이 아련해 집니다. 한국 같은데서 절대 가난은 개인의 이유가 크겠지만
국가가 가난하여 애먼 국민이 절대적인 가난에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볼 때에
그들을 돕지 않고 나는 복음만 전하겠다고 고집할 수 없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극한 가난을 구제하는 것은 그들의 육신의 목숨을 돌보는 일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에 암암리에 식량과 약품 등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있는 일부 한국교회의 사역은 마땅히 인정받고 칭찬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