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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남지 개비리길과 마분산 馬墳山] 강물과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스릴 넘치는 벼랑길
사람만 길을 열어가는 것은 아니다. 때론 동물도 길을 연다. 사람처럼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본능에 충실해서일까. 동물의 길이 사람의 길보다 더 편리하고 아름다운 경우도 있다. 이번 산행 구간에 포함된 경남 창녕군 남지읍 '개비리길'이 그런 곳이다. 남강이 낙동강을 만나 몸을 섞는 기강(岐江) 유역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이 길은 용산마을에서 영아지마을까지 길이 약 2.4㎞, 높이 수십 m의 수직 벼랑의 중간에 나 있다. 너비가 1m 안팎으로 매우 좁지만 푸른 강물과 그 위로 우뚝 솟은 거무스름한 빛깔의 단애(斷崖), 그리고 만추의 풍광이 어우러져 보기 드문 절경을 연출한다. '기강단애'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곳 경치는 '남지 8경'의 하나다.
남지 개비리길.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기강 유역의 벼랑 중간에 나 있는 이 길은 수려한 강의 풍광을 보며 걸 을 수 있어 매력적이다.
그런데 개라는 말에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라는 뜻도 있다. 이를 미루어 바다와 멀지 않은 이곳에 원래 벼랑길이 나 있었는데 좁고 위험해 잘 다니지 않다가 누렁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이용자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개비리길은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격전이 벌어졌던 수난의 현장이기도 하다. 1592년 임란이 발발하자마자 의병을 일으킨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 장군은 개비리길이 있는 마분산(馬墳山)에 토성을 쌓고 왜적과 싸워 승리를 거뒀다. 당시 망우당은 왜적의 총탄에 맞아 죽은 자신의 애마를 토성 안에 묻었는데, '마분(말무덤)'이란 산 이름은 거기서 유래됐다. 6·25 때는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창녕으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에 맞서 아군이 배수진을 치고 싸운 끝에 가까스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강이 피로 물들 정도로 큰 희생을 치렀다. |
첫댓글 "악양루岳陽樓" 현판은 청남 오재봉(菁南 吳齋峯) 선생이 썼다.
岳陽樓重修記에 악양루가 처음 세워진 때는 조선 철종 8년인 1857년이고,
원래 이름은 기두헌(倚斗軒)이었다.
이런 뛰어난 경관 외에도 이곳은 '처녀뱃사공'이란 애달픈 노래가 탄생한 곳입니다.
그래서 부근 길가에 노래비가 있습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9월 이곳을 지나던 유랑극단 단장인 윤부길(가수 윤향기의 아버지)이
이곳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젓고 있는 두 처녀의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 군에 갔다가
소식이 끊긴 오빠를 대신하여 당시 23세였던 박말순과 18세였던 박정숙 두 처녀가 교대로 노를
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사연을 듣고 노랫말을 짓게 되었고, 여기에 한복남이 곡을
붙여 '처녀뱃사공'이란 노래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