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단양군 단성면 중방리 와 외중방리 경계의 소이산. (동경 128° 북위 36° 55′)
명칭 : 돈산, 수리산, 금이산, 봉산 해발 360m (인공석 및 흙)
축법 : 조석축(인공석 및 흙)
규모 : 둘레 85cm 높이 40 - 100cm .
시대 : 고려
문헌 :
- 신증 동국여지승람 14권 충청도 산천조
-여지도서, 상충청도, 단양 산천조
-여지도서, 상충청도, 봉수조 와 단양 군병조 한국 성곽과 봉수
주변 경관 : 단성면 외중방리 봉산에 있으며 봉산을 중심으로 많은 경작 농지가 있고 민가 18호가 살고 있다. 적성의 금수산과 12품달촌이 보이고 적성비와 적성산성 옛단양의 군청소재지가 한눈에 전개되며 단양천의 맑은 물과 하선암과 소선암 관광지가 바로 발아래 있고 앞으로는 한강물이 흘러 어름골 앞을 지나 제비봉을 통과하고 멀리 죽령과 소백산의 국망봉, 미로봉이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이 사방이 관측하기 용이한 곳이다.
봉군의 근무 : 제 2횃불에 직봉에 속하여 별장1인 감관20명 군인(봉군) 100명이 근무하는 아주 중요하고 큰 봉수 였으며 동쪽은 경상도 영풍군 순흥부 죽령산 봉수의 연락을 받아 서쪽으로 청풍군의 오현봉수소로 연락 했다고 여지도서 충청도 단양군 봉수조에 명시되어 있으며 외중방리 봉산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의하면 약 80년에 소이산 봉수소에 올라가 봉수대를 보았다는 증언이 있다.
봉수대에는 정상에 봉수지기 거처인 3칸집이 있어서 들창을 통하여 올라가는 봉화를 살폈으며 3교대로 번을 섰다고 한다. 산이 아주 가파르고 오르기가 힘이 든다. 부근에 물이 없어서 봉수군이 아래 마을 봉산에서 물을 길러 올려다가 먹었으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 된다.
외중방 소이산 봉수대의 폐쇄된 봉산 마을에서 봉수대를 향해 200m쯤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이것은 일제시대 봉수대를 폐쇄하고 나서 봉수지기 3칸을 허물어서 그 목재와 기와를 뜯어다가 외중방리 3개 자연부락 봉산, 유다리, 구미 3개소의 성황을 지어서 그나마 보존되어 오다가 72년 수해와 85년 충주댐 건설로 모두 다 없어지고 말았다. 용마루에 앉은 숫기와는 조선 중기 것으로 판명되나 현재도 봉산 꼭대기에 가면 많은 기와를 볼 수 있다.
봉수대의 크기 : 봉화대의 크기는 둘레가 상부 42m 하부 85m, 높이 40 ∼ 100cm 뚝에 두께가 상부 40 ∼ 50cm 하부는 80cm이며 하구의 폭은 상부가 1.3m 하부가 7m 입니다.
- 제 1횃불(제 1거) - 동북, 함경도, 경흥, 강원도, 경기도를 거쳐오는 가장 긴 봉수로로서 직봉 120, 간봉 60처가 있었다.
- 제 2로 - 경상도 동래 응봉 다대포진을 발하여 양산, 언양, 경주, 영천, 의흥, 의성, 안동, 예안, 영천, 봉화, 안동, 순흥, 영천, 풍기, 순흥(죽령산), 단양(소이산, 금이산), 청풍, 충주, 음성, 충주, 죽산, 용인, 광주, 한성(목멱산)으로 직봉 40 간봉이 123처 였다.
- 제 3로 - 3대에 연결 평안도의 압록강 중류에서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내륙을 거쳐 경기도 고양의 연포나루로 오는 봉수로 로서 직봉 78 간봉 22처 였다.
- 제 4로 - 제 4대에 연결 평안도 의주에서 서해안 황해도의 서해안을 거쳐 경기모악 사봉으로 오는 해로의 봉수로 로서 직봉 71, 간봉 35처 였다.
- 제 5로 - 제5대에서 받음 순천 서해안 홍양, 장흥, 강진등 전남 북서해안을 거쳐 충남의 대륙인 공주, 아산, 직산을 거쳐 수원, 안산, 인천, 부평, 김포, 통진, 강화도 해안을 돌아서 오는 봉수로서 직봉 60 봉 간봉 35처가 있었다.
목멱산은 도성의 남산으로서 일명 인경산 이라고도 불렀던 곳으로 5대의 화덕이 있다 - 세종대왕 실록 제148권 지리지 경도 신증 동국여지승람 권지3 한성부 산천조 및 봉수근 대동지지 권제 경도 한성부 산수 인경산
우리 나라는 고구려 영양왕 23년(612년) 삼국사기에 수양제의 군사가 나타나 변방을 침범해 봉후를 괴롭혔으므로 위급을 알리는 봉수도 몹시 시달렸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 했을 때 10리마다 1개의 봉수를 두고 태자와 약속한뒤 침입했다는 기록있고 당시에 널리 사용했다는 증거이다. 백제는 의자왕 20년(660) 라당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고 백제 부흥군이 664년 부터 성곽과 봉수를 쌓았다고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가락국기에 실려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전국의 직간봉은 623개소이며 단양의 소이산 봉수대는 1895년 윤5월 9일 각처 봉수군 폐지때 폐쇄되었고, 단성 외중방 소이산 봉수대 단양 가곡 두산의 봉우등 봉수대 영춘 용진 좌송의 봉우등 에도 봉수가 있었다. 이는 간봉으로 판명되며 연결 부분은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