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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정지상 |
3. 전개
(1) 서경파의 두 부류
a. 중앙관료로 진출한 개경관리파: 정지상, 김안, 백수한 등의 서경파는 무력보다는 정치적타결로서 서경천도를 주장하였다.
b. 서경재지파: 묘청, 조광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서경천도를 실시하고자 하였으며, 묘청은 서경에 불교 도교 민간신앙이 결합된 팔성당과 명당이라는 곳에 대화궁을 짓고 칭제건원을 내세우며 금국정벌까지 주장하였다.
(2) 서경천도의 실패와 묘청의 난 (1135년 인종 13년): 서경천도론이 인종에게는 받아들여 졌지만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개경파 문벌귀족들이 반대함으로써 실행할 수 없게 되자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 국호를 대위국, 연호를 천개,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 칭하였다.
(3) 김부식: 정권안정과 송에 이용당할 우려를 강조하면서 서경천도와 금국정벌을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반란의 진압책임자로 먼저 개경에 있었던 김안. 정지상. 백수한 등의 서경세력을 제거하고 서경반란을 1년만에 진압하였다.
4. 결과
(1) 묘청의 실패는 고려의 국시나 다름없던 고구려주의 북진정책이 후퇴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보다 평화지향적인 유교정치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2) 분사제도와 삼경제도의 폐지
(3) 서경파의 몰락: 개경 유교파의 정치적 전횡 - 개경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은 더욱 드세어지고, 반명에 왕권은 크게 위축된 상황이었다.
[보충] 국사편찬위원회: 고려 국초부터 역대 왕들이 서경 경영에 주력하여 서경세력을 육성함으로써 개경세력과 서로 대립 견제시켜 그 힘의 균형 위에 어느정도 왕권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으나, 묘청의 난 진압에 따르는 서경세력의 몰락으로 그러한 힘의 균형은 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개경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은 더욱 드세어지고, 반면에 왕권은 크게 위축되었다.
(4) 문신의 극단적인 우대와 무신의 멸시풍조가 만연하여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을 격화시켰다.
5. 의의: 북진이념의 계승이며,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1천래의 1대사건이요, 낭가사상의 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