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남아와 한국 진출의 교두보
1987년 이후 관징 스님은 중국과 미국을 넘어서 동남아와 한국에 진출하여 법을 펴게 되는데 반야수덕선당은 그 활동의 밑바탕을 만들었다. 1980년대 이후 중국 여권을 가지고 자본주의 국가를 마음대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발부한 재 입국비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동남아 국가와 한국을 드나들 수 있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영주권이나 동남아 가는데 필요한 비자 같은 일들을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드렸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LA 몬테레이 파크는 작은 타이완이라고 할 정도로 대만을 비롯한 동남아 화교들의 도시였기 때문에 동남아 각국에 진출할 때 현지와의 원활한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한국에 갈 때도 초기에는 늘 이곳 LA 한국 영사관을 통해서 비자를 받아 가지고 홍콩을 통해서 한국에 입국하였다.
(3) 중국의 불교 재건을 위한 불사금을 모집
1987년 반야수덕선당에 처음 온 뒤 본격적으로 고국의 불사를 시작하여 도솔천에서 쉬인 스승과 약속한 불교재건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관징 스님은 많은 불사금을 받아 대륙에서 절을 짓고 수리하는 것 이외에도 큰길을 내고 고향에 정자를 지었다. 그런 사업을 하려면 돈 가운데 한 몫은 그 지방의 관리들과 관련 인사에게 뇌물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불사를 하는 어려움은 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절을 세우거나 수리할 때는 반드시 보시한 신도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 감사를 표시했고, 관련 신도들은 개광식에 초대했다.
반야수덕선당이 관징 스님을 도와 조국의 불사에 참여한 것은 1987년부터 이다. 가장 먼저 셴여우현 띠쉐이옌사에서 우리 부부와 차이장 첸안 차이휘춘 같은 신도들이 일부 불사금을 부담하였다. 당시는 아직 관징 스님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때라 경제적으로 크게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좋은 시작이 되었다.
관징 스님의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가장 큰 결과를 낸 것은 바로 쥐셴산 링쥬옌사 건설이다. 관징 스님이 한 불사 가운데 가장 본격적이고 규모가 큰 불사를 한 곳은 자신이 극락세계를 갈 때 몸을 두고 다녀온 쥐셴산 미륵동굴이 있는 링쥬옌사다. 이 절은 당나라 때부터 있던 고찰로 16~18세기에도 복건성 불교활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88년 초, 전에 이 절의 주지였던 관징 스님의 제안으로 반야수덕선당 먀오파 이사장이 쥐셴산으로 가서 링주옌사 중건의 기초를 세웠다.
당시 구성한 준비위원회를 보면 관징 스님이 위원장을 맡아 전체 일을 주관하고 더화현 정치협상위원회 주석을 명예위원장으로 모셨다. 부위원장에는 미국에서 반야수덕선당을 대표해서 우리 부부인 완쩐 . 먀오파 부부와 실질적으로 가장 큰 자금을 댄 장나이런 . 쉬츄화를, 현지에서는 더화현 문화국 국장인 쉬용창과 상용향 향장을 넣었다.
2년 뒤인 1990년 쥐셴산 링주옌사 점안식에 초대를 받아 다녀왔다. 1990년 2월 17일, 췐저우시 인민정부는 이 절을 대내외에 개방하여 불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승인하고, 같은 해 11월 3일 점안식과 낙성식을 가졌다. 2년에 걸쳐 링쥬옌사는 대웅보전, 관음전, 조사전 선방, 종루와 고루, 승방, 객당, 바깥 산문 같은 9채의 건물을 잇달아 낙성하였다. 전국 정치협상 부주석이고 불교협회 회장인 자오푸추가 친필로 편액을 써 주었고, 홍런 홍화와 왕쩐 먀오파가 미얀마 옥불 3존, 태국 금동불 2존을 보시하여 천연 옛 절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점안식 날 기적 같은 이야기가 일어났다. ‘옥불 3존을 대웅보전에 모신 날 저녘 8시 호랑이 한 마리가 대웅보전에 와서 옥불을 향해 3번 절을 올렸고, 점안식 하는 날에는 짙은 안개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는데, 고승(관징 스님)께서 자리에 오르시자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문득 하늘가에 부처님의 광명이 나타나며, 그 불광 속에 추공 조사의 불상이 뚜렷이 나타나 이적’이 많은 현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일어나 그 지역에서는 관징 스님의 법력이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관징 스님은 이렇게 큰 불사를 할 수 있도록 보시한 반야수덕선당과 제자들에 대해 건물 상량문과 공로비에 자세하게 새겨서 그 공덕을 뚜렷하게 하여주셨다.
동운종 48대 전등자 석관징이 중건하였다.
미국 로스엔젤리스 반야수덕선당
이번 불사에서 가장 큰 보시를 한 장나이런 . 쉬츄화 부부도 사실은 관징 스님의 큰 법력에 크게 감동해서 참여하게 되었다. 장나이런의 부인인 쉬츄화가 늘 꿈에 기이한 스님을 보았는데, 관징 스님을 보자마자 엎드려 절을 올리고, 그 뒤 부부가 가졌던 고민과 어려움이 모두 풀렸다는 이야기였다. 장나이런은 타이완에서 큰 재력을 가진 사업가였고 미국 몬테레이에서도 부동산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징 스님 덕분에 엄청나게 큰 문제를 해결하고 난 그는 아끼지 않고 링쥬옌사를 재건하는 모든 비용을 댔던 것이다. 대웅보전 입구 오른쪽에 박혀있는 작은 공덕비에는 장나이런 . 쉬츄화 부부는 몰론 두 아들과 딸 같은 그 가족까지 함께 기록되어 있다. 관징 스님은 불사금을 낸 제자들에 대해 이처럼 철저하게 기록해 놓고, 또 점안식에 초대하여 확인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당시 이 절의 주지였던 자신의 이름은 물론 반야수덕선당의 주지였던 제자 홍파도 공동 주지로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홍파는 반야수덕선당의 주지인 먀오파를 뜻하는 것으로 구족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스님은 아니고 그냥 사 또는 사제라고 한다. 그런데 관징 스님은 관례를 깨고 과감하게 자기와 같은 서열로 주지라고 올려준 것이다. 이런 것은 계를 지키고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 파격적이고 과감한 방편을 사용하는 관징 스님의 행보를 볼 수 있는 본보기다.
4)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을 해주는 ‘살아있는 붇다’
1999년 3월, 제법 큰 액수의 달러를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관징 스님은 늘 공공교통인 버스만 타고 택시를 타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테러를 당해 머리를 다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을 도울 때는 망설이지 않는다. 어느 날 지나가다 구세군에게 큰 보시를 해서 함께 가던 신도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 이것은 극락에 갔을 때 아미따불의 개시를 실천한 것이다.
“유교 . 도교 .(사꺄무니 불교의 10가지 종단을 아우른) 불교 . 기독교 . 이슬람교 같은 여러 종교계가 서로 돕고 서로 북돋아 주어야지 서로 비웃고 헐뜯어서는 안 된다. 보기를 들어 말하면, ‘나는 바르고 너는 삿되다’, ‘나는 옳은 길이고 너는 마귀다’,‘나는 높고 너는 낮다’,‘나는 훌륭하고 너는 상스럽다’며 한쪽의 모자라는 면만 잡아내 비웃고 헐뜯는 것을 그치지 않으면 죄다 함께 없어지게 되니 참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관징 스님은 짧은 기간이지만 덕행과 법력을 드러내시고 기적 같은 일을 여러 가지 보여주셨다. 참선은 물론 수인의 대가이다. 이것은 스님이 큰 법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관징 스님은 이처럼 도력이 높으심에도 불구하고 늘 겸손하고 온화하여 무슨 일이나 따지지 않고 그대로 받아주었으며, 입으로는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관징 스님의 구두삼매와 생활철학은 모든 것을 인연에 따랐기 때문이라고 본다.
현지 신도들의 어려움을 어루만져 주고, 고통과 번뇌를 덜어주는 법을 펼쳤다. 난해한 불법을 전하거나 힘든 수행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힘들어 하는 중생들이 원하는 대로 축원을 해주고, 정신적 고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그 고통을 없애주고, 돈을 벌고 싶은 신도에게는 돈을 벌게 해주고, 집을 짓는 사람에게는 풍수지리설로 자리를 잡아주고,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비는 자손에게는 재를 지내 주었다.
관징 스님의 도력과 법력은 고승의 위엄 있는 자세와 품위에서 나오지 않고 낮은 자세로 중생의 어려움과 함께하는 자신의 모습을 감춘 관세음보살과 같은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평가가 있다.
1981년 미국에 있는 동안 수많은 신도들이 그의 높고 깊은 도력을 인정하였고, 또 남 캘리포니아 신도들이 끊임없이 그가 주지로 있는 절에 와서 복을 내려 달라고 기원해, <중빠오> 에서는 그가 “복건성에서 온 살아있는 붇다”라고 기리는 글을 싣기도 했다.
미국에 다다라 대단한 환영을 받고 미국, 홍콩, 동남아 등지에서 두루 돌아다니며 법을 폈다. 그는 미국 불교협회의 종신회장과 미국에서 가장 큰 절의 주지가 되어 아주 많은 보시금을 받았다. 그는 이 보시금을 푸졘성에서 수많은 절을 다시 세우고 고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활불이 되살아 났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에서 모두 살아있는 붇다이라는 추앙을 받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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