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권 대인이요,
가해자는 놀랍게도 열네살 소년이었다.
권 대인은 선대로부터 문전옥답을 물려받은
천석꾼 갑부였다.
게다가 여기저기 선행을 베풀어
고을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사건이 일어난 밤
, 권 대인은 읽던 책을 덮고 촛불을 끈 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때 복면을 쓴 괴한이 사랑방 문을 열고 들어와
시퍼런 단검을 천장까지 추켜올렸다가
권 대인의 가슴팍으로 내리꽂았다.
그러나 권 대인이 몸을 돌려
칼끝이 어깻죽지에 찔린 탓에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인들이 포박한 괴한의 복면을 벗기자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앳된 소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모두 놀랐다.
“나으리, 우선 의원을 부르고 동헌에 고발을 해….”
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 대인은 성한 한쪽 팔을 흔들며 다그쳤다.
“의원을 부를 필요 없고,
관가에 이 일을 알릴 것도 없다.
대신 하인들 입단속이나 잘 시켜라.
오늘 밤 일을 발설하지 않도록.”
안방으로 들어간 권 대인은
약쑥으로 상처를 덮은 뒤 광목으로 싸맸다.
다행히 자상이 깊지 않았다
. 권 대인은 다시 사랑방으로 돌아가
집사에게 광 속에 가둬둔 소년을 데려오라 명했다
. 그리고 하인들에게 마당의 횃불을 끄고
모두 제 방으로 들어가 자라고 일렀다.
마침 새벽닭이 울었다.
감나무 가지에는 눈썹 같은 그믐달이 걸렸다.
권 대인은 소년을 앞세워 사랑방에 들어선 집사에게도
“들어가 자라”고 말하고는 손수 소년의 포박을 풀었다.
경칩이 지났지만 아직 밤공기가 싸늘해
광 속에 묶여 있던 소년의 몸은 빳빳했다.
권 대인과 소년은 한참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때 소년이 방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대성통곡했다
. 울음을 참느라 이를 꽉 물고 있던 권 대인도
뒤돌아 면벽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삼십년 전,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던
죽마고우 김 서방과 장 서방이 있었다.
어느날 둘은 술잔을 기울이다가
자식들의 혼약을 약속했다
. 김 서방네 두살배기 딸 은지와
장 서방네 세살배기 아들 필우를
십오년 뒤 진사년 춘삼월에 혼인시키자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것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일년 뒤 봄이 되면
은지와 필우는 혼례식을 올리고
정말 가시버시가 될 참이었다.
필우는 심마니 노인을 따라다니며
산삼을 찾아 산을 헤매는 일을 했다.
은지는 외양을 곱게 가꾸고 혼수 준비를 했다.
은지와 필우는 밤이면 남의 눈을 피해
뒷산 바위에 걸터앉아 손을 잡고 정을 나눴다.
어느 화창한 봄날,
은지는 대바구니를 옆에 끼고
냉이와 달래를 캐러 뒷산 골짜기로 향했다.
정신없이 나물을 캐는데
‘푸드덕’ 매에게 쫓기던 장끼 한마리가
은지 치마 밑으로 처박혀 들어왔다.
마침 산을 오르던 한량이
은지 치마를 벌렁 쳐들고
장끼를 낚아채 목을 비틀었다.
그런데 은지의 희멀건 허벅지를 본 한량의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고함소리는 골짜기에서만 맴돌았다.
발버둥도 소용없었다.
은지는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지도 않은 채
실성한 사람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은지가 죽으려고 디딜방앗간에 목을 맸다가
아비가 낫으로 목줄을 끊어 겨우 살아났다.
그런 뒤에는 필우도 심마니 노인 따라다니는 일을 그만두고
밤낮으로 은지 곁을 지켰다.
“은지야, 겁탈당한 것은 너의 죄가 아니야
.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하지만 운명은 야속했다.
뱃속에 악의 씨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은지는 바위에서 떨어져보기도 했고
, 낙태에 효험이 있다는 온갖 조약(造藥)도 먹어봤지만
허사였다.
열달 후 아들을 낳은 뒤
은지는 산후우울증까지 겹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홀로 남은 필우는 이 동네 저 동네 젖동냥을 다니며
은지가 낳은 아들을 키웠다.
그 아이가 자라 열네살이 됐다.
아이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으려
생부(生父) 권 대인의 가슴팍에 칼을 꽂은 것이었다.
권 대인은 학식이 높은 막역지간 서당 훈장에게
자신을 죽이려 든 아이를 맡기고
훈장과 함께 먹고 잘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다.
아이는 스물하나에 장원급제를 했다.
백마를 타고 어사화를 꽂은 아이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자신을 길러준 필우였다
. 아이는 필우에게 절하고
어머니 무덤에 가서 술을 따랐다.
그리고 다음 해
아직도 총각으로 남아 있는 양부 필우를 장가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