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1월 18일, 비는 죽창 내리는 데 마을사람들에 쫓겨서 하염없이 가는 길, 왜 그들은 한사코 밀어만 내는가. 그래도 가는 도중 은사(은거한 유학자) 왕을원이란 사람을 만나는데 자초지종을 말하자 술을 주고 차도 내주며 조선에 불법이 있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최부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유술만을 숭상하여 효제 충신을 업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연이어 나타나 몰아세워 다리는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었는데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치처럼 퉁퉁 부었다는 말이 생경하지만 실감이 난다. 그렇게 20리를 가자 각진 몽둥이를 들고 나와 휘둘러 대는 통에 최부의 말안장을 짊어지고 가던 오산은 얻어맞고 말안장을 빼앗기고 말았다. 배에서는 오산은 맥을 못추고 자살까지 하려했는데 뭍에서는 그래도 제 몫을 하는 것 같다. 나중 본문 끝부분에서 중국관리 수발을 잘 들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배 멀미가 극히 심했을 뿐이지 당초 추정한 반동은 아니었다. 그로 인사고과 C등급은 철회되어야 한다. 선암리라는 마을에서는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을 지어 보였는데 최부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겠다고 적고 있다. 왜 죽는다는 것일까.
포봉리라는 곳에서 군리를 거느린 관인이 나타나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도착했는지를 물었다. 최부는 또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죽을 주고 밥 지을 그릇을 주어 밥을 먹도록 해주었다. 물으니 그는 해문위 천호 허청이라고 하는데 왜적이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잡기 위해 온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 다시 그들은 최부일행을 내몰기 시작했다. 최부는 절룩거리며 걷다 이러다가 죽고 말겠구나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군리들은 독촉을 하여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정 효지 상리 현산이 번갈아 최부를 업었다. 종자들이 거들었는데 곁군인 현산이 끼어 있다. 역시 인사고과 A등급답다. 두 고개를 지나 30여리를 가니 인가도 많고 불사도 눈에 띄었는데 비는 그치지를 않아 허청이 불사에 머물게 하려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하고 또 걸어야 했다
밤 2시경 어느 한 냇가에 이르자 이정들도 모두 힘이 다하여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였다. 보다 봇한 허청이 최부의 손을 끌으려 했으나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었다. 고이복이 힘들면 고꾸라지면 될 것을 이제는 ‘미쳐 버린 거야, 미쳐 버린 거야.’ 하던 차에 더는 못 버티고 최부는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모두들 다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자 허청이 군리들을 시켜 독려도 하고 구타도 하였지만 몰아갈 수는 없었다. 여기서 느껴지는 게 있다. 최부가 가면 가고 서면 버티는 그들, 똘똘 뭉친 수하들이다. 그런데 한참 후 또 다른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들은 갑옷, 창검, 방패의 위세와 쇄납(태평소 일종), 징, 북, 총통의 소리와 함께 겹겹이 둘러 싸더니 칼을 빼고 창을 써서 치고 찌르는 동작을 해보였다. 최부 일행은 넋이 나갈 정도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관인은 허청과 함께 군사의 위요를 정돈하고 또 최부 일행을 몰았다.
그리고 4리쯤 더 가서 도지소라는 곳에 이르니 큰 옥사가 있었고 성안에 안성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 유숙을 하라고 했다. 그곳에 중은 또 다른 관인은 도저소 천호라고 했으며 이 역시 왜군들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달려온 것이라고 했다. 내일 도저소에 이르면 심문을 해서 최부가 말한 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가려낼 것이라고 했다.
그 다음날인 윤1월 19일, 이날도 큰비가 왔다. 천호 두 명이 함께 말을 타고 내몰아서 비를 무릅쓰고 갔다. 허청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만 그러나 국법에 구애되기 때문에 도울 수 없다고 하였다. 이정 · 이효기 · 허상리 등이 서로 최부를 교대로 업고 고개를 하나 지나서 약 20여리 즈음에 한 성(城)에 도착하였는데, 바로 해문위(海門衛)의 도저소(桃渚所)였다. 성으로 가는 7~8리 사이에 군졸이 갑옷을 입고 창을 갖췄으며, 총통(銃㷁)과 방패가 길 좌우에 가득 찼다. 그 성에 도착하니 성은 중문(重門)이었는데, 성문에는 철빗장이 있었으며, 성의 위에는 망루(望樓, 警戍樓)가 줄지어 있었고, 성중에 있는 물건을 사고 파는 가게들이 연이어 이어져 있으며, 사람이 많고 물산이 풍부하였다.
어떤 공관에 이르러 유숙하는 것을 허락받았을 때는 최부의 몰골은 야위고 생기가 없었고, 의관도 진흙투성이 이었기에 보는 사람들이 웃었다. 이름이 왕벽(王碧)이라는 사람은 글로 물었다.
<“어제 이미 상사(上司)에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사람들을 약탈하였다’고 보고하였는데, 너희가 정말 왜인이냐?”>
이에 최부는 우리는 왜적이 아니고 바로 조선국의 문사(文士)라고 하였다. 또 노부용(盧夫容)이라는 자가 있어 자칭 서생(書生)이라 하면서 말했다.
<수레는 바퀴가 같고 글은 문자가 같은데 (車同軌 書同文), 유독 너희 말소리는 중국과 다르니 어떤 이유인가?”>
이에 최부가 말했다.
<“천리에도 풍속은 다르고, 백리에도 습속은 같지 않은데, 족하(足下)는 우리말이 괴이하게 들린다고 하는데, 나 또한 족하의 말이 괴이하게 들리니, 습속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똑같은 하늘이 내려준 성품을 지녔음 즉 나의 성품 또한 요(堯)·순(舜)과 공자(孔子. BC552~BC479) · 안회(顔回. BC513~BC482)의 성품과 같은데 어찌 말소리가 다르다고 하여 꺼리겠습니까?”>
그 말을 듣더니 그 사람이 손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그대들도 상을 당하면 『주문공가례』를 따르는가?”>
최부가 또 대답했다.
<“우리나라 사람도 상을 당하면 모두 한 결 같이 가례를 준행한다. 나도 당연히 이를 따라야 하는데, 다만 풍파 때문에 거스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관 앞에서 곡을 할 수 없음을 통곡할 따름이다”>
호기심 많은 그 사람이 또 묻는다. <“그대는 시를 짓는가?”>
최부가 마저 대답했다.
<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자가 풍월을 조롱하는 밑천으로 도(道)를 배우는 독실한 군자가 행할 바는 아니다. 우리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으로서 학문을 삼고 있으며, 그 시사를 배우는 것에 뜻을 두지 않는다. 혹시 어떤 사람이 먼저 창(倡)한다면 화답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그런데 또 한사람이 최부의 손바닥에 글을 써서 말하는 데 바로 그가 건넨 말로부터 최부는 그토록 끌고 다니고 몰아낸 이유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 어디 그 이야기를 들어 보자.
<“너희를 보건대, 호인(互人,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 다만 언어가 달라서 실로 장님과 벙어리 같게 되니, 진실로 가련하다. 내가 그대에게 한마디 하겠는데, 너희는 그것을 기억하여 스스로 신중하게 행하여 가볍게 다른 사람과 말하지 말라. 예로부터 왜적이 여러 차례 우리 변경을 약탈하였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비왜파총관(備倭把總官)을 두어 방비하였다. 만약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죽인 후에 나중에 보고한다. 지금 너희가 처음 배를 정박한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로서, 수채관(守寨官)이 너희를 왜인이라 무고하여 머리를 베어 현상하여 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먼저 보고하기를,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백성을 약탈한다” 라고 하여, 바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너희를 붙잡아 너희를 참수하고자 할 때에 너희가 먼저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들어왔기에 그 계획을 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일 파총관이 와서 너희를 심문할 것인데, 너희는 상세하게 말하라, 조금의 거짓이 있으면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최부는 깜짝 놀라 그 작당한 사람 이름을 물으니 그가 말하였다.
<“내가 말한 것은 그대를 소중히 여기고 위태롭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최부는 그 말을 듣고 머리가 쭈뼛이 서서 바로 정보 등에 말하였다. 그러자 정보 등이 말한다.
<“길가의 사람이 우리들을 가리켜 참수의 형상을 했던 것은 모두 이러한 음모에 현혹되어서 그러하였던 거군요.”>
참 기가 막힌 노릇이다. 최부 일행이 두 번째로 표착하였던 우두 앞바다에서 만난 6척의 배에 나누어 탄 무리들은 사자채를 지키는 군인들이었던 것이다. 만약 상륙을 하여 마을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최부 일행은 모두 몰살을 당한 후 왜구로 조작되어 처리될 뻔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3일간의 표류도 힘들었는데 상륙하자마자 고초를 당한 것은 바로 왜구로 오인되었기 때문이다. 해금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명대에는 장려의 일환으로 표창제도를 실시했다. 명사에 의하면 "태조 29년 명하기를 왜선 및 적을 포획한 자는 일 계급 승진하고 상으로 은 50량, 지페 50정을 급여하라. 군사가 수륙에서 적을 포상할 경우 상으로 은을 급여하되 차등이 있게 하라." 하였는바 사자채 수비관들은 최부 일행을 왜구로 간주하고 그들의 왼쪽 귀를 잘라 바치어 공훈을 세우려 했던 것이 자명해 보인다. 절강에서는 명대에 온주, 태주, 소흥, 기흥, 항주등이 주로 왜구의 중요한 침략 목표였으며 홍무2년(1369)년부터 성화2년(1466)에 이르는 97년간 절강을 침략한 왜구는 34회로 평균 3년에 1회 정도였다고 한다.
도저성(현 도저진)은 1439년 왜구의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였고 1457년 4월 왜선 40척이 태주 등에 잠입하여 2천여세대를 약탈해 호위를 겁탈해 대량 학살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곳 사람들의 경계태세는 대단했다. 지금의 경계주의보 발령과도 같은 꽹과리와 징을 들고 다니며 알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몽둥이도 들고 다니고 군인들 또한 완전무장에 피리나 소리 나는 것들을 지참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아무튼 사자채 군인들의 불손으로부터 일찍이 올바르지 않음을 알아차린 최부는 비가 오는 틈을 이용하여 감시를 벗어나 마을로 뛰쳐나왔으나 이내 왜구로 오인 받아 끌려서는 드디어 심문을 받는 곳에 이른 것이다. 이윽고 날 저녁에 천호 등 관원 7·8인이 큰 탁자 하나를 놓고 탁자 주변에 둘러서서, 정보를 앞에 끌어 놓고 심문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