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기행] 강북구
서울사랑 매거진에서....
글 윤재석 언론인
넉넉한 녹지가 부러운 북한산 아랫마을
추분을 보름 앞둔 지난달 7일 오후. 백로라는 절기가 무색하게 늦더위가 쏟아지는 거리를 달려 강북구로 향했다.
안암동 고려대 교우회관을 지나 종암로를 북상하자 이윽고 나타난 교통 표지판, ‘미아사거리’. 그런데 필자의 뇌리에
떠오른 이름은 ‘미아삼거리’. 그랬다.
40여 년 전 필자의 고교시절, 이곳 지명은 미아삼거리였다. 그 흔적이 인근의 4호선 서울메트로 ‘미아삼거리’ 역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동쪽으로 월계로가 뚫리기 전 삼거리 동편엔 대지극장이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건맨이 나오는 마카로니 웨스턴이나,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이 나오는 국산영화를 재상영하는 재개봉관(일명 2류 극장)이었다. 70년대엔 미아삼거리 고가도로도 있었다. 지금은 주위에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 피 터지는 경쟁을 하고 있다.
꿈같은 공원 북서울 꿈의 숲
강북구 탐방에서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은 이름도 멋진 북서울 꿈의 숲(이하 꿈의 숲). 미아사거리에서 우회전해 휘익 내달렸더니 왼쪽에 거대한 공원이 나타난다. 한때 드림랜드라는 이름으로 강북 최대의 놀이공원이었던 곳. 하지만 능동 어린이대공원, 과천 서울대공원과 서울랜드, 에버랜드, 롯데월드 등 대형놀이공원에 밀리면서 운영난에 봉착한 후, 쇠락한 모습으로 주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급기야 서울시가 드림랜드 부지 33만m²와 주변 공원용지 33만m²를 매입, 2008년 10월 66만m²의 녹지공원으로 환골탈태한다.
꿈의 숲은 여느 공원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이웃 오패산의 오동근린공원과 연계해 7.7㎞의 둘레길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시민들이 다양한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공연장, 전시장, 전망타워 등에서는 남녀노소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공원 중심부에 우뚝 솟은 49.7m 높이의 전망대는 북쪽으로는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의 절경을, 남쪽으로는 서울시내와 남산, 한강까지 조망할 수 있다. 서로 연결된 월영지와 칠폭지에는
청둥오리 등이 노닐고, 정자와 폭포도 곳곳에 마련돼 있다. 이 공원은 강북구민뿐 아니라, 성북·도봉·노원·동대문·중랑 등 인근 자치구 주민들에게도 소중한 야외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공원 안에 위치한 번듯하게 자리한 한옥도 알아두면 유익할 우리 문화재.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는 조선 23대 순조의 차녀 복온공주(福溫公主)와 부마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의 재사(가르치던 유생들을 위한 일종의 기숙사)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전통 한식건축양식의 단층 목조기와집으로 높은 장대석 기단으로 둘러싸인 이 건물엔 깊은 사연이 곁들여 있다. 바로 한일병탄 직후 김병주의 손자 김석진(金奭鎭)이 일본의 남작작위를 거절하고, 순국 자결한 곳이기 때문. 꿈의 숲을 탐방하면서 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을 발견했다. 동문 입구로 들어가 주차장을 지나니 공원 동산 밑에 벙커처럼 파놓은 시설이 있는데, 그곳은 강북구재활용품선별처리시설이었다. 가장 쾌적한 공원 공간 안에, 누구도 원치 않는, 그래서 님비(Not in my back yard!)의 대명사인 재활용처리시설이 공존하고 있다는 파격. 그게 멋져 보였다.
요충의 운명 숱하게 겪은 땅
그럼 본격 탐사에 앞서 강북구의 연원부터 살펴보자. 역사 속에 나타난 강북 지역의 입지는 상당히 복잡하다. 삼국시대 건국 초기 기원전 1세기 경,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등 백제 건국 집단은 이 지역을 도읍으로 삼으려 끝까지 고민했다. 그만큼 풍수가 완벽했다는 증좌. 건국 초기 백제 강역에 속했던 이곳은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에 따라 백제 도읍 위례성을 함락시키면서 고구려에 편입됐다. 이후 다시 백제에 귀속됐다가 552년 신라가 차지했다. 북한산의 진흥 왕순수비(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정복하고 강북 지역을 친히 방문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고려시대 태조 때 이곳은 견주(見州)라는 이름으로 양주(楊洲)와 동등한 행정 지위를
받았다. 그러다 1081년(현종 9년) 양주에 편입됐다. 그 같은 상황은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지속된다.
한일병탄 4년 후인 1914년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으로 개편됐고, 곧바로 경성부에 편입돼 동부출장소 관할에 속하게 된다. 정부수립 이듬해 숭인면 일부 지역이 성북구에 편입돼 숭인출장소가 설치된다. 63년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지역이 성북구에 편입돼 노해출장소가 설치된다. 73년 성북구에서 숭인출장소와 노해출장소
관할 지역이 도봉구로 분구됐고, 이후 인구 증가로 95년 도봉구에서 강북구가 분리된다. 쉽게 말해 강북구는 도봉구의
아들이자, 성북구의 손자인 셈이다.
녹지 60%, 쾌적한 도시의 전형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태어난 강북구. 하지만 쾌적하기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60.7%가 공원녹지로 서울시 자치구중 가장 넓기 때문이다. 당연히 여름철 열대야가 가장 적다. 강북구의 쾌적성(amenity)은 70만㎡ 규모의 꿈의 숲을
비롯한 구내 각처에 산재한 녹지공간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에도 기인하지만, 그보다는 서울 북쪽에 우뚝 선채 강북구에 긴 자락을 드리우고 있는 북한산이라는 풍만한 허파 덕분이라고 하는 게 적절하다. 구의 상당부분이 북한산 남쪽자락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제 꿈의 숲을 떠나 다시 미아사거리로 나와 도봉로 쪽으로 우회전한다. 미아역 근처. 아련한 추억과 함께 연도의 고층빌딩 사이로 깔끔한 학교건물과 운동장이 보인다. 필자가 68~71년 다닌 고등학교다. 60년대 말 예전 미아리 공동묘지
자리 16만5천㎡에 지어진 최신식 교사(校舍)와 최고급 시설(당시 라디에이터로 난방하고 교내 스케이트장이 있는 유일한 학교였다), 내로라하는 교사진으로 진용이 짜인 이 학교는 1회 졸업생부터 고교평준화 전(8회 졸업생)까지 전교생 대부분을 SKY대학에 합격 시킨 괴력의 신예였다. 야구와 농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고 수학여행은 고사하고 소풍도 경복궁으로 갔다. 이제 예전 우리의 백운대 등반 단골 출발점이었던 도선사로 향한다. 국립4.19민주 묘지사거리에 도착하자
차량 흐름이 갑자기 늦어진다. 도로엔 철제패널이 즐비하게 깔려 있다.
‘아, 경전철 우이신설선 공사 때문이구나.’ 2년 후에 완공된다는데, 공기를 맞출 수 있을까. 상념 속에서 도선사에 도착.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 도시락 든 가방 들고 백운대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어느 여름방학(말로만) 끝자락 토요일 오후, 전날 “내일도 도시락 싸오자”고 작당한 친구 셋이서 수업(토요일이라 오전만)이 끝나자 우이동 가는 버스를 탔다. 종점에서 내려 도선사로 향할 때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숲이 시작되면서 고역은 시작됐다. 맨몸도 아니고 학생복에 구두, 게다가 육중한 책가방까지 들고 등산이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교복에 책가방 끼고 백운대 올라
그래도 우리는 엽엽(曄曄)했다. 우이산장 기점을 거쳐 하루채를 지나 깔닥고개까지 당도했다. 도중에 몇 번 쉬었음은
물론이고 깔딱고개에 당도해선 숨이 넘어가도록 깔딱거렸다. 깔딱고개에서 한참 숨을 돌리고 쪽도리바위를 지나니 백운산장이 나타났다. 호젓한 산중에 의연히 앉은 돌집. 그곳에 머물고 있는 이들은 모두 도인 같았다. 수염을 덥수룩이 기르고 여름인데도 털모자를 쓰고 있었고, 세상 돌아가는 것 제쳐놓고 살아가는 모습이 잠시나마 부러웠다. 머리 위론 최고봉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가 완고한 장수마냥 서 있었다. 그날의 목표는 해발 837m의 백운대. 엉성한 쇠밧줄에 의지해
낑낑 올라가면서 아래를 보니 다리가 후둘 후둘. 그래도 고도가 높아질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는 게 신기하고도 상쾌했다.
드디어 백운대 정상. 아, 아직 아니다. 침니로 갈라져 두 조각으로 벌어진 백운대 정상의 앞쪽으로 가야 확실한 정상 정복이 되는 것이다(그땐 두 바위 사이에 쇠다리가 없었다).
‘하나, 둘, 휘익’셋이 차례차례 책가방을 들고 날았다. 2시간여 만에 드디어 백운대 정상 안착. 정상에서 본 세상은 정말
장난감 같았다. 위용을 자랑하던 모교 교정도 성냥갑만도 못하게 왜소했고, 남산과 그 시절 가장 높았던 청계천2가 삼일빌딩도 초라했고. 도시락은 유난히 맛났다. 그날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다. 공부 많이 시키는 학교 미워하지
말고 대학 들어갈 때까지 한눈팔지 말고 정진하자고. 그렇게 다짐하고는 교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하산했다.
‘동트는 하늘 찬란한 빛이 백운대 위에 퍼져날 때…’
그 후로도 대학시절, 구두신고, 신혼시절 불판 갖고 백운대를 몇 번 갔다. 물론 연전에도 몇 번 갔다. 그러다가 북한산행을 딱 끊었다. 필자까지 백운대를 괴롭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다. 1년에 북한산에 오르는 인구가 8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아이들 빼면 서울사람 1명이 평균 한 번 이상 간다는 얘기다. 입산인원 제한제를 실시하고 있다지만 등산 마니아들은 갖가지 편법으로 북한산을 유린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북한산에 들지 않는다.
3・1운동의 발상지 봉황각
도선사에서 내려오다가 오른쪽 숲 사이로 고색창연한 벽돌집을 발견하게 된다. 정문에 천도교종학대학원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다. 문 오른쪽엔 ‘3・1운동의 발상지 봉황각’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경내로 들어가니 근대식 벽돌 건물 뒤로
날아갈 듯 지붕을 한 기와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2호인 봉황각(鳳凰閣)이다. 한일병탄 2년 뒤인 1912년 6월 19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이 세운 이 건물은,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킨 곳으로 의창수도원이라고도 부른다. 봉황각이란 이름은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시에 자주 나오는 ‘봉황’에서 딴 것이다. 지금 걸려있는 현판은 오세창 선생이 썼다고 한다.
천도교 3대 교조인 의암은 1910년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되자 백성에게 천도교를 포고하는 한편,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이 집을 지었다. 1919년 3·1운동의 구상도 이곳에서 했고 이곳을 거쳐 간 수다한 지도자들이 3·1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봉황각과 부속 건물에는 당시의 유물이 남아 있다. 앞쪽 약 50m 지점엔 의암 묘소가 있다.
묘소 담장엔 의암의 일대기를 간략히 기술한 안내판이 서 있다.
‘일찍이 갑오(1894) 동학혁명 시 북접 통령으로 혁명을 영도 하셨고 갑진(1904)개화운동을 통하여 조국 근대화의 문을 열었으며, 기미(1919) 3・1운동을 주도하신 위대한 지도자이시다. 기미독립운동으로 왜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근데 안내판이 너무 조악하다. 독립운동가이자 우리 민족의 선각자인 의암 선생에 대한 최소한의 의전을 갖춰드려야
할 것 아닌가. 의암 묘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북한산 강북 관내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묘역이 유독 많다.
헤이그 만국회의에 고종 밀사로 파견돼 객지에서 순국한 이준(李儁) 열사, 초대 부통령 이시영, 2대 국회의장 신익희,
김창숙, 인공 대표 몽양 여운형, 이명룡, 유석 조병옥 박사,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신숙, 김도연, 신하균, 서상일,
양일동, 이용문 장군, 공초 오상순 등 기라성 같은 위인들이 북한산 강북 자락에서 영면하고 계시다. 17위의 광복군
묘역도 빠트릴 수 없는 성지다.
독립・건국・민주화 주역 자취 즐비
수유리에는 국립 4・19민주묘지가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3・15부정선거에 항거하기 위해 초기 중・고・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지자 초등학생과 대학교수, 일반시민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동참하게 된다. 이성을 잃은 정권은 경찰에 발포명령을 내렸고 시위대를 향한 경찰 발포로 수다한 인명이 숨지거나 다치자 나라의 안위가 백척간두에 서게 된다. 4월 26일 드디어 이승만 박사는 하야를 선언하고 하와이로 망명한다.
4・19민주묘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듬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의해 조성된다. 그러나 4・19혁명의 진가를 인정하기 싫은 박정희 군부는 ‘의거’로 격하하고 5・16을 ‘혁명’이라고 견강부회한다. 자연 묘지의 격이나 관리 수준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1995년 4월 17일 YS정부는 4・19묘지를 국립으로 격상, 성역화하고 면적을 3만3천㎡에서 13만2천㎡으로 늘린다. 이에 따라 영령 안장능력도 466기에서 650기로 늘어났다. 당시 4・19 희생자 시신 및 유골 224기가 안장돼있었으나 희생자 유족이 개별적으로 모신 희생자 영령의 이장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4・19 기념식도 성대하게
거행된다.
4・19혁명과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매년 4월 18일 안암동 고려대 정문에선 이 대학 학생 건각들의 마라톤이 열린다. 수유리 4・19민주묘지까지 갔다 오는 이 마라톤의 명칭은 4・18희망나눔 마라톤. 하루 먼저 봉기에 나선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고려대가 보여주는 밉지 않은 해프닝이다.
그러고 보니 강북구는 독립, 건국, 민주 등 국가 존립의 거대 담론에 참여한 인물과 역사적 장소가 어느 곳보다 많은 자치구이기도 하다. 여기서 빠트릴 수 없는 곳이 몇 곳 더 있다. 수유리아카데미하우스와 한신대대학원.
한국 기독교의 거목 강원룡 목사가 설립한 수유리아카데미하우스는 수원아카데미하우스와 함께 유신독재 시절 민주인사와 열혈학생들이 수시로 모여 민주화를 향한 끈질긴 몸짓을 하며 울분을 토했던 곳. 한신대대학원(예전 한신대 학부)
또한 이른바 반골목회자들이 많이 배출된 신학대학이다.
요즘 뜨는 ‘재미난 마을’을 만난다
강북구의 쾌적함을 더해주는 존재가 더 있으니 북한산 둘레길과 자생 솔밭근린공원이다. 북한산국립공원 자락 저지대를 따라 서울시 6개 자치구와 경기도 3개시에 걸쳐 총 길이 63.2km, 11개 구간으로 기획된 둘레길은 외국인들도 부러워하는 도시 숲길. 강북구에는 소나무 숲길, 순례길, 흰구름길, 우이령길 등 총 4개 구간의 둘레길이 조성되어 천만 서울 시민의 쉼터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중 우이령길 구간은 1968년 1・21사태 김신조 등 북한 124부대원의 침투로로 이용된 후 40년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지역으로 자연 생태계 보전이 우수한 지역이다. 2009년부터 생태탐방로로 재탄생했다. 생태계 보전을 위해 하루 천 명에게만 탐방을 허용하고 있다. 우이동 수유동 사이 대로에 있는 솔밭공원은 서울 유일의 평지형 소나무 군락지로 100년생 소나무 천여 그루가 집단 자생하고 있다.
90년대 아파트가 들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서울시와 강북구가 부지를 매입해 2004년 솔밭근린공원으로 개장했다. 배병우의 사진에나 나올법한 소나무 군락 사이에서 아침저녁으로 에어로빅댄스를 추는 여인네들의 몸짓이 아름답다.
쾌적한 환경은 착한 심성의 마을공동체를 창출했다. 이른바 ‘재미난 마을’이 그것. 98년 공동육아협동조합 ‘꿈꾸는 어린이집’의 학부모들이 중심이 돼 2004년 대안학교인 ‘재미난 학교’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작년에 출범한 사단법인체다.
수유, 우이동 일대 주민을 중심으로 구성된 재미난 마을은 지리적 개념의 마을이 아니라 인적 네트워크로 형성된 소프트웨어적 마을이다. 우이동의 대안학교인 ‘삼각산 재미난 학교’, 수유동의 ‘카페 521’, 인수동의 ‘마을목수공작단’ 등이 함께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