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는 '동내'에서 나온 말
'동'보다 큰 구역은 '방'
.동네방네 원래는 한자의 '동내방내'에서 나온 말
바보 두 사람이 길을 가는데, 어느 동네에 이르니
동쪽에 둥근 해가 떴다. 두 바보가 그것을 보고 외쳤다.
"와, 저기 해가 떴다."
다른 바보가 외쳤다.
"이 바보야, 그게 해냐, 달이지."
"이 바보야, 해야. 내가 전에 이 동네에 왔을 때도 그 때 해가 떴었어."
"아냐, 이 바보야, 달야. 내가 전에 이 동네를 지났을 때도 그 때 달이 떴었어."
"해야."
"달야."
서로 결론을 못 짓고 싸우면서 가는데, 저쪽에서 다른 바보가 다가왔다.
"야, 저거 해지?"
"아니지. 달이지?"
싸우던 두 바보가 서로 자기가 옳다는 듯 물었다. 그 바보 대답.
"이 바보들아, 내가 이 동네에 안 사는데, 그걸 어떻게 아니?"
* '동네'는 원래 '마을 안'의 뜻
'동네'는 원래 '동(洞)의 안'이란 뜻의 '동내'가 원래 말이다.
우리말에는 이처럼 한자말이 변하여 순 우리말처럼 된 것이 무척 많다.
'동네'라고 하는 말은 원래 '동리'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동리'는 '동(洞)'과 '리(里)'를 말하는데, 이 두 한자말도 모두 '마을'을 뜻하고 있다. 지금 서울 같은 도시에는 '청파동', '신당동'처럼 대개의 동네 이름이 '동'자를 달고 있고, 시골에는 '신촌리', '송정리'처럼 '리'자를 달고 있는데, 여기서의 '동'과 '리'가 모두 '동네'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예부터 집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곳을 '마을'이라고 불렀다. '동네'란 말보다는 이 말이 더 오래 전에 썼던 말이다.
그러나, '마을'은 원래 '마슬' 또는 '마실'이라고 불렀던 말이었다. 지금도 시골에서는 '마을'을 '마실'이라고 하는 곳이 더러 있다. 그리고, 마을의 이웃집에 놀러 가는 일도 '마슬' 또는 '마실'이라고 했다.
'동(동네) 안'이라는 뜻의 말이 한자로 된 것이 '동내(洞內)'이다. 이 말이 지금의 '동네'라는 말까지 오게 됐다. 따라서, 옛날에는 '동내(동네)'라는 말은 단순히 '마을'이라는 뜻이 아니고, '마을의 안'이라는 뜻이었다. 마을 안에 어떤 소문이 퍼지면, 마을 사람들은 '동에 소문이 퍼졌다'고 하지 않고 '동네에 소문이 퍼졌다'고 했다.
서울에는 옛날에 서로 가까이 있는 여러 동네들을 모아 '방(坊)'이라는 행정구역을 만들었었다. 그래서, 지금의 중구 명동 일대는 '명례방'이었고,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지금의 종로구 옥인동 일대는 '준수방'이었다.
'방'은 '동'보다 훨씬 넓은 구역이었다. 지금의 대도시에서의 '구'보다는 좁고 '동'보다는 넓은, 그런 정도의 지역이었다. 지금의 말에 '방방곡곡'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여러 방(坊) 지역의 곳곳마다'라는 뜻을 지닌다.
옛날에는 동네 사람끼리는 너무도 잘 알아서 어떤 소문이 퍼지면 금방 그 동네 전체에 금방 퍼져 나갔다.그러나, 소문이 더 멀리 퍼져 나가면 '방'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따라서, 동네 소문은 작은 소문이고, 방까지 퍼져 나간 소문은 제법 큰 소문이다. 이 때문에 소문의 큰 정도를 말할 때는 '동내(동네) 소문'이냐 '방내(坊內) 소문'이냐로 말하기도 했다. '방내 소문'은 '방까지 퍼져 나간 소문'이란 뜻이다.그래서, 예부터 소문이 크게 났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쓰게 된 것이다.
"동내 방내 소문 났네."
이처럼 '동네에 소문났다'고 하지 않고, '동내방내 소문났다'고 했다. 이것은 마을 안에서만 난 소문이 아니라 그 일대의 다른 동네들 즉 방까지 소문이 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에서는 옛날에 방보다 더 넓은지역은 '부(部)'라고 했다. 이것이 지금의 '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서울 안에 그 지역이 있는 방향에 따라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등 5개의 부를 두었다.
그 부의 중심 마을을 '붓골'이라고 했다. '부의 골(마을)'이란 뜻으로 붙은 이 이름은 서울에 5군데가 있었을 것이나, 그 중 좀 잘 알려진 곳이 남산 밑, 지금의 필동에 있었던 '붓골'이다. '필동'이란 이름은 '붓골'이란 이름에서 '붓'을 한자의 '필(筆)'로 옮겨 나온 이름이다.
동 안을 '동'내, 방 안을 '방내'라고 했듯이 부 안을 '부내'라고 해야 했지만, 그런 말은 많이 쓰지 않은 듯하다. 만약, 그런 말이 있어서 '부내 소문'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얽힌 이야기 하나 더]
조선시대에 서울의 행정구역은 크게 다섯으로 나누었다.
우리 서울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머릿도시'로 정해지게 되는데, 이 때 '한양'이란 이름이 '한성'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서울의 영역을 성 안의 지역과 성 밖의 지역(성으로부터 대체로 10리에 이르는 바깥 지역)으로 정한 후, 행정구역을 5부로 나눈다.
5부는 '북부', '남부', '동부', '서부', '중부' 가 되는데, 지금으로 치면 서울의 용산구니 종로구니 하는 그 '구'와 비슷한 것이다. 각 부는 10개 안팎의 방(坊)을 관할하였는데, 초기에는 모두 52방이었다.
그 방 밑에는 다시 '계'를 두었고, 또 그 밑에는 또 '동'을 두었다.
속담 중에 '동네방네 소문났네'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의 '동네방네'는 그 당시의 행정구역 단위인 '동과 방의 안'이란 뜻의 '동내방내'라는 한자말에서 나온 것이다. 즉 '동네방네 소문'은, '동'에서만의 소문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큰 지역인 '방'에까지 소문이 난다는 뜻이다.
태조 때에 정해진 행정구역은 세종 때에 52방이 49방으로 변경되었을 뿐, 조선 말까지 350여 년을 거의 변경 없이 내려왔다. 26대 고종 초에 이르러 47방 339계로 조금 조정되었으나, 그 영역이나 이름들은 거의 그대로였다.
따라서, 조선 5백년 동안 우리 서울의 행정 지명들은 각각 부-방-계-동의 꼬리를 달고 불려져 왔다. 이 땅이름들은 모두 한자로 붙여지긴 했지만,원래의 토박이 땅이름을 토대로 해서 옮겨진 것이 많았다. '너븐다리'가 있는 곳을 '광통방'(지금의 광교 부근)으로, '황토마루'를 '황토현계'(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부근)'로,'웃잣골'로 불리던 곳을 '상백동'(지금의 혜화동 부근)'으로 정한 것 등이 바로 그 예가 된다.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의 5부는 갑오경장(1894) 때에 이르러 5서(署)로 바뀌어 동서(東署), 서서(西署), 남서(南署), 북서(北署), 중서(中署)가 된다. 갑오경장 무렵 서울의 행정구역은 5서 47방 288계 775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