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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과거시험 문제, 그 당시 최고의 젊은 지성을 뽑는 자린데
어떤 문제를 냈을까? 요즘은 각 분야 전문가들이 너무 많아 탈이지만
그때는 文史哲은 기본이고 여러분야를 전문가 수준으로 공부했어야 하니
과거고 고시거나 시험은 어렵긴 마찬기지요 머리 터진다 소린 다를게 없구나 싶다.
그 시대 정조가 간절히 찾던 인물은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국방전문가를
찾는 간절한 기다림도 보인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정조대왕 과거 시험 책문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조선 정조대왕이 낸
과거시험 책문을 잠시 돌아볼까요?
희은 역대 임금 중에 학문에 조예가 깊은 왕을 들자면
세종과 정조대왕 같은 분들 아닐까요?
종구 당대의 석학들과 거침없이 토론할 수 있는 학구파
지도자라 하겠죠. 오늘 돌아볼 정조대왕 과거 책문은
과거 시험문제 일부분을 엿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지도자가 어떤 시대정신을 갖고 어떤 인재를 찾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거든요.
희은 우리가 사는 시대와 공감이 가는 부분이 뭐고
동 떨어진 생각이 뭔가를 엿볼수도 있겠군요.
종구 우선 정조대왕이 내린 ‘문과 무에 대한 책문’ 몇구절 돌아
볼까요. 우리 스스로가 과거장에 들어 선 선비라고 상상하면서
과거 문제를 본다면 더욱 긴장 될겁니다. 여기 보세요.
희은 (낭송) 문화와 국방을 병행하는 것이 국가를 강건하게 하는
방책이다. 그런데 진시황은 6국을 통일 시켰으면서도
선비들을 생매장했다 그래서 얼마나 갔던가? 겨우 2세로
마감한 왕조 아니었던가? 당태종을 보라 끝없이 주변국을
정벌하다가 고구려를 치면서 눈 한쪽을 잃지 않았던가?
국방만 숭상하던 자들은 왜 문화를 숭상하는 정치를 겸할 수
없었다고 보는가 이를 기술하라!
종구 이게 정조대왕 시절 과거 시험문제 중 하나거든요.
요즘으로 치면 국가고시 논술시험이나 같은 형식인데요.
그 주제가 요즘에 비해 무겁고 깊이 있는 점이 우선 다르죠.
희은 정조대왕은 문화와 국방을 함께 아우르는 시대정신을
가졌다는 걸 엿볼 수 있는 과거 시험문제 같은데요.
종구 바로 그 다음에 정조대왕이 과거를 보는 선비들에게
어떤 문제를 묻고 있는가 다시 볼까요?
희은 (낭송) 동진 서진시대를 보라. 고담준론 고상한 담론만 일삼다가
변방 수비를 허술히 해서 왕조의 신주가 깨졌잖은가?
남송과 북송을 보라 도학으로 문명을 창발 시키자 했다가
마침내는 몽고족에 정벌 당했다. 참으로 문무를 겸할 수
없더란 말인가? 두원개를 보라 강남을 토벌한 대장군이지만
춘추 주석을 낸 학자이기도 했지 않았던가? 답하라.
문과 무가 수레마차와 바퀴처럼 함께 달릴 방책이 무엇인지를
종구 요즘의 국가고시에 해당하는 과거시험 문제 일부인데요.
정조대왕이 간절하게 찾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죠.
입만 살아서 번지르 말만 잘하는 사람도 필요없다. 그렇다고
무술에만 능하고 병법에 통달한 전쟁의 달인도 필요없다.
문화와 국방을 아우를 인재는 어디 있는 것이냐 응답하라.
희은 그런 부분은 이 시대에도 필요한 부분 아닌가요?
지금은 각 분야가 전문화 돼서 예전보다 더나 깊이있게 연구한
인재들이 많은 편 아닌가요?
종구 정조시대를 때로는 문화의 시대로 말하기도 하죠. 그런데
정작 지도자인 정조는 문화로 풍요로우면서 국방으로 강한
나라를 동시에 추구했다는 걸 이 과거 시험 문제로 엿볼 수
있잖습니까? 정조의 책문 마지막 구절 한번 보세요.
희은(낭송)어떡하면 문화와 국방을 아우를수 있겠는가? 그 장구한 아름다움
누릴 길이 무엇인가 격식에 구애 받지 말고 기술해 답하라.
종구 정조대왕이 꿈꿨던 문화와 국방으로 장구히 아름다운 나라.
우린 지금 어디쯤 와 있는걸까요?
희은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정조대왕 책문’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태백 시구절로 유명해서 오죽하면 우리 남도 육자배기에 '삼산반락'이란
노래 곡목까지 생겼을까? '삼산반락 청천외요/ 이수중분 백로주라' 우리 가사문학
곳곳에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 담긴 이태백의 눈물을 얼만큼 알까?
너무 친근하면서 '그래서? 삼산반락이 어쨋다는건데?' 묻고 들어오면 우린 뭐라고
답해야 할까? 무수히 노래됐고 귀 아프게 들었던 그 구절, 이태백 눈물 뿐 아니라
무수히 살다 간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서러운 꿈까지 되돌아 보게 된다.
'저 우뚝 솟은 삼산아 내가 산이라면 구름이라도 내 허리 동강 자르덜 말던가?
내 오르고자 했던 꼭대기는 하늘 밖으로 뚝 떨어졌구나/ 저기 흘러가는 이수야
내가 강물이라면 큰바다로 거침없이 달려가게 두어두지/ 강가운데 우뚝 솟은
모래톱에 쩍 갈라진 강물 팔자라니/ 이게 다 태양을 가린 저 구름탓 아닌가?
꿈아 꿈아 애시당초 내 꿈이 아니걸랑 오지나 말지/ 깨고나니 모진 고생 가시밭길
사는게 다 내 꿈을 가린 저 구름탓일러라/ 햇살 밝은 날엔 쳐다보기 눈부셔
아득히 눈이 먼 내 꿈 같은 인생아/ 이태백이 우는 소리가 육자배기에서도 들린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삼산반락 청천외---산타령과 남도창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우리 민요나 잡가
시가에 등장한 ‘삼산반락 청천외요 이수중분 백로주라’
대목 음미해 볼까 합니다.
희은 ‘삼산반락 청천외’구절은 남도 육자배기 중에
‘삼산반락’ 이란 노래 제목이 생각나는데요.
종구 그렇죠. 오죽하면 육자배기 연곡 중에 제목으로
쓰기도 했겠어요. 경기 선소리 산타령 중에 ‘경발림’
가사에도 등장하죠. 잡가나 시가에도 인용되구요.
희은 이렇게 자주 빌려다 쓰는 유명한 구절이 됐는데
‘삼산반락 청천외’ 어떤 뜻인가요?
종구 원조를 따지고 가다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당나라 시선
이태백, 바로 이태백의 <등 금릉봉황대>란 작품에 처음
나온 구절이죠. ‘삼산은 반이나 하늘 밖으로 떨어졌구나’
희은 ‘삼산이 반이나 하늘 밖으로 떨어졌다’ 대개는 떨어졌다 그럼
밑으로 떨어진 모습을 연상하게 되는데 삼산이 어떻게
절반이나 하늘 밖으로 떨어졌다구 했을까요?
종구 그럼 이런 그림 한폭 상상해 보세요. 높이 솟은 삼산.
그 중허리에 백운이 빙 감돌고 있다.
희은 아, 삼산 중허리를 흰구름이 빙 둘러 있으니깐 남은
절반은 푸른 하늘 바깥으로 떨어져 보인다는 말이군요.
종구 이태백은 그 ‘삼산반락 청천외’란 한구절로
세상사가 뜬구름과 같더란 말을 하고 있는겁니다.
구름이 아니었다면 저 우뚝 솟은 삼산이 절반이나
절단나 하늘 바깥에 떨어진 모습도 아니었을테고
저 구름만 아니었다면 멀쩡하게 떠 있는 태양을
사라지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희은 구름 때문에 생긴 무슨 좌절 같은 거, 허망함 같은 게
느껴지는데요. 만약 태양을 이태백이 가장 소중하게 여긴
어떤 꿈이었다면 그 꿈을 구름이 가려 버렸다면?
종구 바로 그거죠. 사람 사는 일도 구름 때문에 생긴 좌절이나
절망. 몸부림 쳐도 안되는 일, 저 구름만 확 걷어 버렸더라도
산은 산 그대로 우뚝하니 하늘까지 솟았을테고
희은 태양은 온 천지에 화창하게 빛나서 꽃 피고 새우는
별천지를 그대로 드러냈을 거 아니냐?
종구 그래서 이태백은 <등 금릉 봉황대>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죠. (인용구) ‘ 봉황이 놀던 봉황대, 봉황은 어디루 가고
사람 없는 누각 앞으로 강물만 흐르느냐? 그 화려하던 오나라
궁전의 화초는 오솔길에 묻혀 있고 진나라 시대 귀인들
무덤을 이루었구나/ 이 모든게 뜬 구름이 태양을 가린 탓이라’
희은 그렇다면 뜬 구름이라는 게 어찌 보면 ‘무상한 세월’이란
말도 되지 않을까요?
종구 세월 뿐이겠어요. 사라진 모든 무상한 것들일 수도 있구요.
보일 듯 보이지 못하게 만든 허망함 일 수도 있죠.
구름은 그래서 우리 삶의 한숨이고 흘러간 다음 남은
울음일 수도 있구요.
희은 ‘삼산반락 청천외요’ 그래도 어느날인가는 쨍하니 화창하게 뜬
태양을 볼 수 있다는 눈길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종구 구름탓 하고 주저 앉지 말고 견디고 일하며 기다리는
가려진 소망이 ‘삼산반락 청천외’에 있다고 믿어 보는게 어떨지
희은 ‘고전의 샘터’ ‘삼산반락’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역관이면서 한양갑부였던 김근행. 당시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해서
어학덕을 톡톡히 본 인물. 청나라 복수하자니 화약이 필요했는데 그걸
일본에서 대마도 통해 4만근이나 들여 온 인물. 그래서 역관출신으로
장관급에 올랐던 입지전적인 김근행이 말한 꼭 망해먹을놈의 집안은
어떤 집안인가 둘러보고 싶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역관 김근행의 필패지가 (必敗之家)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조선 인조때 역관 김근행의
<필패지가> 고사를 돌아볼까 합니다.
희은 역관이라면 통역관이니 요즘으로 치면 외교관 아닌가요?
종구 그렇죠. 조선 인조 때 활약한 역관 김근행은 한양갑부로
소문난 집안이었고, 벼슬은 정2품 중추부사에 올랐으니
장관급 벼슬까지 지낸 인물이었죠.
희은 역관출신으로 장관급까지 올라가기가 쉽지 않은 일 아닌가요?
종구 맞습니다. 그런데 정2품 자헌대부까지 올랐으니 가히
입지전적 인물이었죠. 인조시대와 효종시대 특히
일본쪽과 무역이며 통상관계 큰 활약을 했던 인물이었죠.
희은 인조와 효종 때 활약한 외교관이라면 북으로 청나라의
강압적 지배도 헤쳐 나가야 했을테고, 남으로 일본과 통상도
원만히 풀어 나가야했을텐데요.
종구 인조와 효종 시대는 국방을 튼튼히 하자. 언제라도 청나라에
복수를 해야 한다. 그런 때 역관 김근행은 대마도를 통해서
화약의 재료인 유황을 4만근이나 비밀리에 들여 온
큰 공을 세웁니다. 그 공으로 고속승진하게 됐구요.
희은 그 당시에 유황4만근, 007작전을 수행했던 인물이기도 하군요.
오늘 돌아보기로 한 김근행의 ‘필패지가’란 어떤 내용인가요?
종구 한마디로 ‘반드시 패망하고야 말 집안’이란 뜻입니다.
국내외 활동을 두루 펼친 넓은 시야를 가진 김근행인지라
그가 말한 ‘필패지가’는 지금도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죠.
희은 김근행이 본 ‘반드시 망하고야 말 집안’ 이 내용 들으면서
속이 편치 못할 분들도 있을텐데요. 근데 궁금하거든요.
종구 만년에 김근행이 병들어 누웠을 때 젊은 역관이 찾아와
자신이 죽을 때 까지 좌우명으로 삼을 가르침을 달라고 하자.
이때 전했던 말이 ‘김근행의 필패지가를 조심해라’ 였던거죠.
여기 몇구절만 돌아볼까요?
희은 (낭송) 나라의 요직을 차지하고 남의 뒷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
그냥 자기집 문전으로 줄줄이 찾아오게 하는 사람. 꼭 망하더라
또 있지. 시정잡배 건달들 모아 이권을 취하는 사람.
높은 자리 있으면서 공사 분별 못하고 점쟁이나 풍수쟁이
가까이 하는 사람도 꼭 망하더라. 그저 백성들 입에 좋은 소리
들어 보려구 거짓으로 말과 행실 꾸미는 자도 망하더구만
종구 어떠세요. 요즘도 이런 사람들 볼 수 있지 않던가요?
역관출신으로 한양갑부이면서 장관급에 오른 김근행이 말한
반드시 망할 집안 이야기 몇구절만 더 보실까요?
희은 (낭송) 아침에 한 말 다르고 저녁에 한 말 다른 사람. 그저 세력있는
쪽에다 줄 대고 작당하는 사람, 언제나 윗자리에 앉아야 직성
풀리는 사람도 꼭 망하더라. 자네 윗 사람 모시는 거 조심하게
특히 자네를 두고 아무개편 사람이다. 아무개쪽 사람이다. 이런
소리 듣는것두 조심하고 또 삼가게나.
종구 이게 <송천필담>에 나오는 김근행의 필패지가 이야긴데요.
정작 김근행 자신은 장관급에 올랐는데, 갓 망건을 볼품없는
다 떨어지고 헤어진 걸로 하고 다녔답니다. 그 이유를 말하기를
희은 ‘좋은 갓망건에 비싼 관복, 달라면 줘야할테고, 수시로 도둑놈들이 노릴 것 아니냐.
근데 이 거지같은 걸 누가 욕심내고 갖고 싶겠느냐?’
종구 어떻습니까. 김근행이 말한 ‘필패지가’와 검소한 처신 말입니다
여 ‘고전기행 사설여행’ ‘김근행 필패지가’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광주국악방송 개국을 앞두고 간혹 빛고을 이야기를 하며서 이곳에서도
광주 출신 학자 고봉 기대승을 돌아봤다. 그놈의 당파며 사화 때문에 집안에
억울하게 죽은 작은 아버지도 있고 해서 벼슬길 사양했던 고봉이 그나마
퇴계와 주고 받은 8년간 학술담론이 아니었다면 무엇으로 한을 풀었을까 싶다.
이 글을 쓸 때가 한창 매화가 피던 때인지라. 퇴계가 매화와 연인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노래와 기대승이 여주 남한강 쪽에서 퇴계를 전송하고 매화시에
답한 면모를 돌아보고자 했다. 그들에게 매화는 한 겨울 눈 속에서도 피는
기상과 본래면목을 잃지 않은 천진함, 그리고 세상이 뭐래도 변치 않은 자기동일성으로
향기로움에 대한 찬탄 아닌가 싶다. 매화는 피어도 사람은 매화처럼 살기 어렵다는 것도
서로 고백할 수 밖에 없었을게다. 한양에 두고 가야했던 퇴계의 매화는 차라리
한양에서 이루 다 펼칠 수 없었던 퇴계의 시큰한 매실이었을테고... 올해도 매화는 핀다.
다만 사람이 매화 같지도 매화가 사람 같을 수도 없어 서로 그리워하는 노래일 뿐이지만
그래도 매화 앞에 서면 잠시 말을 잃는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퇴계와 기대승 매화노래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퇴계선생과 고봉 기대승의
매화노래 음미해 볼까 합니다.
희은 어제 고향이 빛고을 광주였던 고봉 기대승을 만나봤었죠.
장장 8년간 편지로 학술을 논했던 퇴계와 기대승
매화 노래를 만나 보겠군요.
종구 선조2년 퇴계는 고향 안동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선조는 가지 말라구 하고, 퇴계는 한사코 물러날 때라 하면서
한양을 떠나게 됐는데요. 그때 퇴계선생이 아끼던
매화를 두고 가야 했거든요. 그래서 남긴게 매화노래였구요.
희은 그 매화 노래에 고봉 기대승이 또 화답을 했다는건가요?
그래서 두 사람의 매화 노래가 남게 된거 아닌가요?
종구 한양을 떠나고자 했던 퇴계선생이 홀로 남겨둬야 했던
매화. 그 매화와 연인처럼 주고 받는 시를 남겼는데요.
우선 퇴계가 매화에게 전한 노래 볼까요?
희은 (낭송) 매화런가 신선인가? 나랑 같이 서늘 서늘/
창문바람 쓸어 향기롭던 꿈/ 난 고향 가는데 널 남겨두니
티끌많은 서울살이 고이 살펴 사시게나/
종구 서울에 두고 갈 매화랑 퇴계선생이랑 닮은 건
서늘서늘함과 한양 가운데 향기로움이죠.
범접을 못할 엄정한 품성, 그러면서도 향기로운 혼을
서로 마주 보며 느꼈던 사인데 티끌많은 한양에 남겨둬야했죠.
여기에 매화는 뭐라고 답했을까요? 매화 노래 들어볼까요?
희은 (낭송) 도산신선 날 푸대접하고 떠나도 내 향인들 변하릿까
서로 그립거든 내 생각나거든/ 맑고 참된 눈가운데 옥설매화
님께서 고이 간직해 주오
종구 고향가는 퇴계선생에게 답한 매화가 던진 말.
맑고도 참된 눈가운데 옥 같은 뜻 고이 간직해 달라는 한마디
퇴계선생은 한양에 있으나 고향에 있으나 변치 않을
매화 같은 한마음을 토로한 구절이죠.
희은 그렇다면 퇴계 이황이 한양을 떠나면서 남긴 이 매화시에
고봉 기대승은 어떻게 답했는지 궁금하네요.
종구 퇴계의 매화는 때로는 연인과 천진한 사랑을 나누듯 했다기
때로는 세태에 찌든 얼까지 씻어주는 청정함으로
마침내는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을 참된 본마음으로
다가 오기도 했는데요. 이에 고봉 기대승이 여주 남한강에서
배 타고 떠나는 퇴계를 보면서 매화노래를 보냈죠.
희은 (낭송) 찾으셨구료 고향 산천 매화까지/ 난 주저 앉았답니다
이 풍진 땅에 벼슬감투 욕심낸 육신으로....
향 피우고 닻줄 매는곳 어딜꼬? 비바람 어둑한데
홀로 사립문 닫고 돌아섰어라
종구 고봉 기대승이 보기엔 퇴계는 정말 고향에서
매화를 만나 천진한 그대로 맑고 향기로운 그대로 살건데
자신은 벼슬감투 욕심내 한양에 눌러 살아야 하니
매화처럼 봤던 사람 떠나자 홀로 사립문 닫고 돌아선 고독한
꼴이됐더란겁니다.
희은 우리시대에도 이처럼 서로를 향해 맑고 향기롭게 천진한
그대로 매화처럼 봐줄 사람들 있긴 있겠지요?
종구 우리가 기다리는 건 매화 앞에서 우아! 놀라며 반길만치
그런 맑고 청정한 사람들 아닐까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퇴계와 기대승’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병자호란 모진 고생도 해봤던 윤선도. 사실 그가 노래한 자연을 벗삼는 시들은
인간에 대한 미움을 삭히느라 변죽 울린 걸수도 있다. 오죽이나 친구 삼을 인간이
말랐으면 거문고도 내 친구, 돌댕이, 솔나무, 달이라고 했을까?
청나라 것들 남한산성 포위 했을 때 남한산성으로 가지도 어쩌지도 못하고
발동동 굴렀을 그 발등을 보고 내 발등을 봐도 같이 시리고 아프다.
제주로 갈려다 완도 어름께 보길도로 들어간 윤선도가 봄날 밥상 들고 오는
보길도 아줌마 이맛살에 굵게 패인 내천자를 봤던가 보다.
'아줌마 얼굴 상오 좀 펴제. 아 봄에 얼굴이 뭐요. 반찬없으면 샘물 말아 먹으면 되지'
그런 이야기가 들려온다. 윤선도의 잠깐 봄 편시춘 그림 한컷이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봄날 윤선도와 밥짓는 여인’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고산 윤선도와 밥짓는 여인
잠시 돌아볼까요?
희은 고산 윤선도 하면 보길도에 반해서 그 섬에 살았던
모습부터 떠오르거든요.
종구 사실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살았던 세월은 나라는
병자호란 뒤에 만신창이가 돼 있었고, 한양 정국은
청나라에 완전 굽혀 살 것인가, 앞으로도 싸울 것인가
그런 시국이었거든요. 그때 윤선도는 아주 제주로 내려가
살 생각이었는데 보길도에 반해서 눌러 앉아 살게된거죠.
희은 그럼 오늘 돌아 볼 ‘윤선도와 밥짓는 여인’ 이야기도
윤선도가 보길도에 살던 당시 사연인가요?
종구 그렇죠. 윤선도가 보길도에 살면서 인조 23년인 1645년
‘봄날 밥상을 마주하고’ <대안>이란 작품을 썼는데요.
여기 한번 보세요.
희은 (낭송) 앞산에 비온 뒤에 쑥쑥 돋아난 고사리 싹
밥짓는 아줌마 봄날이니 얼굴 펴게나
샘물 가득 떠서 보리밥 말아 먹고 보면
숨어사는 사람 살림살이 가난할게 뭐 있겠소?
종구 보길도에 봄이 왔는데 밥짓는 아줌마 얼굴은 펴질 기색이
없더라. 그 오만상 찌뿌리면서 밥상을 들고 온
보길도 아줌마에게 윤선도가 농담 삼아 전하는 노래죠.
희은 윤선도가 보기엔 그 보길도 아줌마 얼굴이
잔뜩 찌뿌린 이유가 밥상에 놀 반찬이 없었던 거
아닌가요? 그래서 ‘샘물에다 보리밥을 물 말아 먹어도
그만 아니오?’ 했던거 아닌가요?
종구 윤선도 마음은 이 좋은 봄날 밥짓는 아줌마 얼굴이
펴졌으면 더욱 좋겠는데, 오만상을 찌뿌린채 밥상을 들고
들어오면서 ‘어이구 반찬이 없어서 으짠다요’ 했겠지요.
그 소리에 윤선도는 ‘이 보리밥에 시원한 샌물만 말아
먹어도 그만인걸 무슨 걱정이 그리 많수‘ 했던거구요.
희은 그러면서 ‘ 숨어사는 사람 살림살이’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사는 걸 숨어사는
사람으로 생각했던건가요?
종구 ‘숨어사는 사람 살림살이 뻔한거 아니냐? 그러니
보길도 아줌마 봄인데 그 얼굴 좀 펴시오‘ 이런 소리거든요.
윤선도는 밥상 들고 들어 온 아줌마에게 아마도
이런 농담도 했을겁니다. ‘숨어사는 주제에 보리밥에
물 말아 먹은 것도 감사해야지. 아줌마 봄이요 얼굴 좀 펴소‘
희은 보길도에서 윤선도와 밥짓는 아줌마 사이에 생긴
그냥 웃고 넘어갈 수만도 없는 소소한 한 장면을
되새기게 되는군요. 윤선도가 참을 수 없었던 게 뭔지
감이 잡힐 듯 싶거든요.
종구 시절하고 같이 가자. 봄날이니 얼굴 좀 펴자.
가난하고 없이 살아도 봄이니 주름살 진거 좀 펴고 삽시다.
희은 보리밥에 샘물 부어 말아 먹어도 넉넉할 봄날
반찬 없다고 밥상들고 얼굴 찌뿌린 보길도 아줌마에게
고산 윤선도가 던진 우스개 소리가 들리는 성 싶네요.
‘아줌마 봄이여 얼굴 좀 펴잔게요?’
종구 오늘 우리 얼굴 표정은 어떤가요. 네 봄이잖어요. 얼굴펴자구요
희은 ‘고전의 샘터’ ‘윤선도와 보길도 아줌마’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귀를 막고 싶은 소리 중에 이부자리 속 이야기 처럼 민망할까?
사람 평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고 꺼낸 고사인데, 춘추좌전에 있는
'제강'이란 여인 이야길 늘어놓자면 글 읽다 말구 도망갈 분 많을것이니
이 글은 그냥 건너 뛰는 것도 속 편하지 싶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시경의 중구지언 中冓之言과 고려의종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시경의 중구지언과
고려의종 고사를 돌아볼까요?
희은 시경은 사서오경에 드는 경서이고, 의종은 고려 18대 왕
아닌가요? 서로 어떤 연관이 있나 보죠?
종구 앞으로 ‘사립탐정’이란 직업이 생긴다 소리 나왔죠.
또 ‘사이버 평판관리자’ 같은 직업도 나온다는 뉴스도 봤구요.
희은 앞으로 생길 일자리 ‘사이버 평판관리자’ 대체 어떤 일을
하는건지 궁금해 지기도 하더군요.
종구 예전엔 역사기술을 통해서 한 인물에 대한 평판을 남겨
천년토록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게도 했고, 2천 7백년이 흘러도
추한 평판을 전하기도 했거든요.
희은 그럼 시경의 ‘중구지언’이란 말은 좋은 평판인가요? 아니면
추한 평판인가요?
종구 시경 용풍 ‘장유자’란 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담장에 남가새 넝쿨 쓸어 버릴 수도 없고/
저 방안 이불속 이야기는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더라’
여기 방안에 이불 속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을 ‘중구지언’이라했죠
희은 시인이 노래로 남긴 그 중구지언 주인공도 확인 됐나요?
과연 누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그런 일을 했을까요?
종구 제나라에서 노나라 군주에게 시집 온 강씨가 가끔
친정집인 제나라로 돌아가 오빠인 제 양공과 차마 입으로
올릴 수 없는 근친상간을 벌이고 돌아왔거든요.
희은 옛 사람들은 그런 사건도 역사에 기록했단건가요?
제나라 양공과 노나라로 시집간 강씨가 형제 사이였다는거죠?
종구 근데 시집간 강씨가 때때로 친정집 제나라를 찾아가
오빠를 만나고 돌아왔던겁니다. 그 추악한 평판을 시인은
‘가는구나 강씨여 노나라로 시집가 놓고 친정집 또 가는구나
담장에 남가새 넝쿨 확 쓸어버릴 수도 없고
저 방안에 이불 속 이야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구나‘ 했던거죠
희은 그런 추악한 평판들이 역사로 기록되고 시인의 노래로
남아 2천 7백년이 흐른 지금도 다시 입에 올려지고 있군요.
그러고 보면 평판이란 게 두고두고 남는 뒷담화 아닌가요?
종구 그러니 앞으로 생길 그 ‘사이버 평판관리자’ 같은 일 하는
분들 과연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평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철저한 역사의식과 준엄한 도덕성도 갖춰야겠죠.
희은 그런데 이 중구지언이란 말고 고려 의종이 또 연관 있다는
거잖아요. 그럼 고려 18대왕 의종 역시 좋은 평판은 아니었군요
종구 고려사 명종 2년조에 보면 정중부등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마침내 무신정권에 살해당한 고려 의종이 형제간인 덕녕공주와
정을 통한 사실을 기록해 놨거든요. 여기 보세요.
희은 (인용구) ‘의종이 춘추시대 제나라 양공의 못된 행실을 본받아
악명을 후세에 남겼다. 시시 때때로 덕녕공주를 대궐로
불러 들여 밤새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추악한 짓을 하였으니
안방의 일, 중구지언은 차마 말할 수 없더란. 시경의 구절을
경계하지 못한 것 아니겠는가?
종구 옛 사람들은 이렇게 역사를 통해 평판을 남겼던겁니다.
이 시대에 우리도 매일 어지럽게 평판들 늘어 놓는데 과연
준엄한 도덕성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평판들 하는건지요?
희은 새 일자리 ‘사이버 평판 관리자’ 과연 믿을만한 평판인지 지켜봐야~~
‘고전기행 사설여행’ ‘중구지언과 의종’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판소리나 민요 잡가 시조등에 나오는 한자들이 때로는 와전 되기도 하고
그래서 발음이 변하기도 하는데, 사철가에 '한로삭풍'이 맞느냐 '한로상풍이' 맞느냐
그런 이야기가 있어 잠시 돌아봤다. 사계절 나눠 부른 사철가다 보니
가을바람이라면 '상풍'이 맞고 '삭풍'은 한 겨울 바람이 맞지 않나 싶어
갈바람 '상풍'을 노래한 옛 시인들 글을 몇군데 인용해 봤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사철가 한로상풍 寒露霜風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단가 사철가 한구절
돌아볼까요?
희은 단가 사철가 흥얼 흥얼 따라 부르시는 분들 참 많더군요.
그만큼 사철가가 널리 알려지고 사랑 받고 있다는 뜻이겠죠.
종구 사계절을 노래하면서 인생의 사계절을 비유하고 있어서
단순히 계절만 묘사한게 아니라 우리들 인생도
사계절을 거치면서 살아 간다는 뜻도 담겨 있거든요.
희은 봄에서 여름으로 그리고 가을과 겨울로 넘어가면서
계절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도 아울러 가면서 그 사계절을
어찌 살아가는 게 좋은가도 은연중 말해주고 있잖아요.
종구 한구절 마다 뜯어보면 의미있는 구절이 많죠.
그런데 이 사철가에도 한자를 많이 쓰고 있어서
크게 보면 무리가 없는데 촘촘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거든요.
희은 오늘은 사철가의 어떤 구절을 촘촘이 들여다 볼까요?
종구 사철가의 봄날 묘사는 어떤 풍경으로 시작하나요?
희은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날은 꽃피는거죠?
종구 그렇죠. 여름날은 녹음방초 승화시로 한껏 녹음이 우거지고
햇살이 눈부신 것으로 묘사했구요.
희은 가을은 한로삭풍 요란해도 제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이 어떠한고. 이 구절이죠.
종구 자 그 가을을 묘사한 구절 중에 ‘한로삭풍’이라고 하는데
한로상풍으로 부르기도 하거든요. 여기서 한로삭풍이 맞느냐
한로상풍이 맞느냐? 논란을 벌이기 보다 가을바람이냐? 겨울
바람이냐 가려보면 되거든요. 삭풍이 나오는 김종서장군시 있죠
희은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이 구절 말이죠.
종구 그렇죠 삭풍은 한겨울 살을 에이는 모진 겨울바람이죠.
그런데 옛 선비들은 가을 바람을 상풍이라고 했죠. 여기
조선 중기 문장가 장유가 남긴 추흥팔수, 가을 흥취 노래 보세요
희은 (낭송)한밤중 바위랑 나무숲을 뒤흔든 가을바람 상풍이여 /
천 산의 앙상하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인다 /
종구 상풍은 가을 바람이고 찬 이슬 한로 다음에 부는 서릿바람이죠.
삭풍은 한겨울 세찬바람이구요. 그래서 조선 전기 문장가
서거정은 ‘시월’이란 시에 상풍을 노래하기를
희은 (낭송) 시월이라 서릿바람 상풍에 기러기는 높이 날고 /
물가 가득 갈대 소리는 쓸쓸하기만 하구나 /
( 十月霜風雁正高 滿汀蘆葦響蕭蕭 )
종구 그래서 사철가에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은 황국 단풍이 어떠한고’ 구절로 엮어
불렀던거죠. 사철가에 가을바람은 서릿바람 상풍이고
가을꽃은 국화다. 한로상풍에 꺾이지 않은 절개를 봐라.
희은 그리고 이어서 겨울로 넘어가 ‘낙목한천 찬 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려 은세계가 되고보면’ 이렇게 백설로 가는군요.
종구 사철가의 가을 주인공을 국화로 삼은 뜻을 돌아봐야겠죠.
한로상풍에도 꺾이지 않는 그 절개를 옛 사람들은
오상고절이라했죠. ‘서릿발을 오만하게 견디는 고독하지만
고고한 선비의 절개’ 그래서 가을국화를 귀하게여겼구요.
희은 가을 서릿바람 상풍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황국을 돌아보게됩니다.
‘고전기행 사설여행’ ‘사철가 한로상풍’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동안 진주 운석이다. 고창운석이다. 우루루 몰려드는 걸 보면서
운석에 대한 우리 역사 속 이야기랑 중국 고사를 뒤적거리며 그 때는 운석이
우리에게 무슨 신호였던가 돌아보고자 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운석고사 춘추좌전과 조선 효종고사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춘추좌전과 조선 효종 때
운석 고사를 돌아볼까 합니다.
희은 요즘 경상남도 진주운석이 화제가 되고 있잖아요.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을 하늘의 로또라면서 운석 사냥꾼이
진주로 모여들고 있구요.
종구 진주의 운석들은 나라에서 관리할 천연기념물로 저정해서
해외로 반출되는 걸 막자는 논의까지 나오고 있는데요.
예전엔 운석이 떨어지면 재변을 예고 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거든요. 여기 중국 춘추좌전에 등장하는 운석고사
잠시 돌아볼까요?
희은 고대에 운석을 어찌 봤는가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기사인 듯
싶은데요. (인용구) <희공(僖公) 16년 조에 “하늘에서 돌멩이
운석들이 송나라 도성에 떨어졌는데, 이는 하늘에서 유성이
쏟아져 내린 것이다.”>
종구 이게 춘추좌전 희공 16년 조에 등장하는 운석 기사인데요.
희공 16년이면 기원전 715년이거든요. 이때 운석이
송나라 도성에 쏟아졌던겁니다.
희은 거의 2천7백 30여년 전 일인데요. 당시 사람들은 송나라 도성에
쏟아진 운석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종구 유성이 불타면서 송나라 도성에 쏟아져 내렸다.
당시 사람들은 이 일을 가지고 송나라에 재변이
일어날 것이다. 예언을 했었죠.
희은 우주에서 그냥 우연히 쏟아져 내린 유성을 가지고
그 해석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 들였단 말이군요.
종구 그런데 희한하게 송나라는 그 다음해인 기원전 714년
노나라와 정나라 연합군에게 대대적인 토벌을 당했거든요.
희은 그래서 운석이 송나라 도성에 떨어진 걸 송나라에
재변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예견했고, 우연히 또
송나라가 토벌 당하는 역사적 사건까지 연결된 셈이군요.
종구 옛 사람들은 일식이 일어나면 지도자의 잘못을 돌아보라했구
유성이 떨어지거나 운석이 떨어지면 불길한 재앙이
닥칠 것이라 생각했던거죠.
희은 우리 조상님들도 운석이 떨어지는 것을 썩 좋지 않게
여긴 거 아닌가요?
종구 그런 측면이 있었죠. 조선 인조대왕이 세상을 뜨고
효종이 즉위했을 때가 1649년이었는데요. 이 당시 효종은
선대왕 인조의 왕릉을 찾아가 참배를 하고자 했는데
송준길이 말리면서 이런 말을 했었죠.
희은 (인용구) 예전에 하늘에서 운석만 떨어져도 재앙을 걱정해서
공경히 몸을 돌이켜 수신하고 성찰하여 삼갔던겁니다.
이제 하늘의 변괴가 한두가지 아닌데 어찌 궁궐을 떠나
선대왕릉을 참배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삼십리 왕릉길
떠나시면 안될 때입니다. 공구수성 몸과 마음을 닦고
근신해야 할 때입니다.
종구 일식이나 유성 운석이 떨어지는 것을 하늘의 경고로
해석했던 구절인데요. 헌데 보세요. 지금 같은 과학시대에
운석 떨어지니깐 진주로 몰려 진주 운석지역을 해외에서도
달려와 들쑤시고 있으니 이게 사람에 의한 재앙 아니고뭐겠어요
희은 과연 우주에서 우연히 떨어진 진주 운석은 하늘의 로또일까요?
아니면 우리더러 조금은 더 삼가고 성찰하며 살라는 경고일까요
‘고전기행 사설여행’ ‘유성과 운석’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성호 이익의 원거행 바닷새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성호 이익의 ‘원거행’에
나오는 바다새 고사 돌아 보겠습니다.
희은 성호 이익하면 실학자로 알려졌죠. 그가 남긴 ‘원거행’
그리고 바다새. 어떤 이야긴지 궁금하네요.
종구 조선 영조 7년인 1731년 겨울에 서해로 날아든
원거라는 바다새가 경기도 안산으로 날아와서 나무꾼에게
잡혔다가 6개월 쯤 후에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 갔는데요.
성호 이익은 이 커다란 바다새 원거가 왔다 간 걸
원거행이란 작품으로 기록해 남겼거든요.
희은 도대체 얼마나 큰 새가 날아왔다가 6개월이나 머물다
갔던걸까요? 그걸 실학자 성호 이익은 어떤 시선으로
봤나요? 어찌보면 알바트로스나 콘도르 같은 새가
병들어서 잡혔다가 재활해서 날아간 정도 아닌가요?
종구 별스럽지 않게 보려면 아무런 사건도 아닌거죠.
그냥 큰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가 기운 차려서 훨훨
날아갔다더라. 헌데 실학자 성호 이익은 그 원거라는
새에 대해 나름 몇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자연 생태계의
변화에 대해 혹여 다른 재앙이 발생하지 않을까? 해서 남긴게
성호 이익의 ‘원거행’이란 작품이었죠. 여기 몇구절 보세요.
희은 (낭송) 2천년 전에 송나라에 나타난 새가 너였던가?
노나라에 내렸을 땐 사당에 모셔 놓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날마다 고기에 맛깔스런 먹이를 줬건만
너는 어리둥절 멀뚱멀뚱 사흘을 굶가 죽고 말았지.
이제 이땅에 다시 온건 무슨 연유이던고?
필경 너 살던 땅도 강산도 아닌지라. 차마 사람들
우리나 조롱속에 살지 않겠노라 해서 기운 차리자
훨훨 만리 창공으로 날아간 거 아닌가?
종구 이 부분에 춘추시대 노나라에 내렸던 원거라는 큰 바다새
고사가 흥미롭죠. 난데 없이 커다란 새가 내려 앉자.
노나라 제후가 잡아서 사당에 가둬놓고 날마다 고기를
주고 구소라는 음악까지 들려줬는데 사흘만에 죽고 말았다는
기록이 전해 왔거든요. 망아지 만큼 큰 바다새였다고 합니다.
희은 그렇게 큰 새가 사람에게 잡혔고, 나라의 사당에 가둬 놨고
고기를 주고 구소란 음악까지 들려줬지만 사흘만에 죽고
말았다는 것은 환경의 문제 아닐까요?
종구 생태환경의 문제가 우선이죠. 이걸 성호 이익은 서로
같이 살 수 없는 사이인 줄을 모르고 사람은 억지로
그 바다새를 잡아 기르려 했고, 바다새 원거는 돌변한
환경과 억압을 참지 못해 스스로 죽어간 것이다.
희은 그런데 우리 강산 안산땅에 그 원거란 바다새가
등장했다. 그런데 다행이 6개월 후에 다시 날개를 펴고
날아간 거잖아요.
종구 그걸 성호 이익은 이런 말로 끝을 맺습니다.
‘결코 새장이나 조롱속에 살 수 없었던 바다새 원거.
기운차려 훨훨 제 살던 곳으로 날아가는데
메추리 참새가 속도 모르고 깔깔대며 비웃고 있더라’
희은 아, 이제 알겠네요. 십리도 못 날아본 참새 메추리가
수만리 창공 날아 본 바다새 삶을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종구 자, 사람도 그와 비슷한 경우 있지 않을까요? 참새나 메추리
같이 작은 동네 살거나, 대양과 큰 산맥을 날아 살거나 말이죠.
희은 ‘고전의 샘터’ ‘성호이익과 원거행’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옛 사람들이 생명을 몸에 가질 때 삼가하고 조심했던 마음을 잠시 돌아보고자 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간이 최립의 송도록과 심청가 탄생대목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조선 중기 문신 최립의
송도록에 김수재에 주는 글과 심청탄생대목 돌아 보겠습니다.
희은 송도록이라면 송도에서 기록한 시와 문장들이란 뜻인가요?
그 대목에 심청가하고 연관된 구절이 나온단 말씀이군요.
종구 송도는 지금의 개성을 말하는데요. 고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선비들이 그 송도를 유람하고 감회를 기록한
작품들을 전하고 있는데요. 역사적으로 사라진 고려왕조를
회상하는 내용도 있고 당시 송도의 풍광도 담겼죠
희은 그럼 조선 중기 문신인 최립 역시 고려 수도였던
개성을 유람하면서 그 감회를 ‘송도록’에 남겼겠군요.
종구 ‘김수재에게 주는 글’에서는 꼭 개성만 노래한 게 아니라
선비가 스스로 경계하고 성찰하면서 살아가야 할
좌우명이 여러구절 담겨 있는데 지금 돌아봐도
몸을 닦고 마음을 추스르는데 도움이 될겁니다. 여기 보세요.
희은 간이 최립의 ‘송도록’에 ‘김수재에 주는 글’이군요.
(낭송) 정자는 사잠을 지어 자신을 단속하였나니 / 程子有四箴
보는 것 듣는 것과 언어 행동을 반듯이 하는것이요/ 視聽及言動
생각하길 사특하게 말라는 사무사가 주시에 전하니 / 周詩思無邪
시경의 시, 삼백편이 사특치 말란 한마디 아니겠소 / 三百一以總
종구 여기선 우선 자신을 경계하는 정자의 사잠이란 말이 나오죠.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논어 안연편 말씀을 정자도 따랐다는 뜻이죠. 이런 구절은
심청가에 곽씨부인이 심청이 잉태할 때 태교 구절에도
응용돼 나오는 구절이죠. 여기 심청가 석부정 부좌 보세요.
희은 (심청가 사설) 그날부터 태기있어 석부정부좌(席不正不坐) 할부정불식
(割不正不食) 이불청음성(耳不廳淫聲) 목불시악색(目不視惡色)
십삭일이 찬 연후에 하루난 해복기미(解腹幾微)가 있든가 보더라
아이고 배야 아이고 허리야~~~~ 심청 탄생 대목 사설이죠?
종구 그 구절이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경망하게 움직이도
말거란’ 구절이 나오는데요. 이게 심청가의 태교 대목으로
가면 ‘석부정 부좌’- 반듯한 자리가 아니면 앉지 말거라.
‘활부정 불식’- 반듯하게 자른 음식이 아니면 먹지도 말거라.
희은 예전 태교에서는 앉은 자리도 가리고 먹는것두 그렇게
가렸던거군요. ‘이불청음색, 목불시악색’ 역시 임산부가
보고 듣는 걸 잘 가리고 피하란 뜻이겠군요.
종구 귀로 들려오는 사악하고 음란한 소리는 차라리 귀를 막어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건 시선을 돌려라. 그래서 뱃속의
태아를 놀래키지도 말고, 나쁜 기운을 전하지도 말거라.
희은 그럼 논어에서 나온 그 구절이 심청가에서는 태교로 발전된
셈이군요. 간이 최립에게로 가서는 말과 행실을 돌아보는데
거울을 삼는 구절로 다시 쓰이구요.
종구 그래서 간이 최립은 이런 말로 거듭 개개인 행실을 잘
가다듬고 수신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요. (인용구) ‘도를 따른
마음은 샘물처럼 솟구치는데 욕심과 사악에 가리면 막힐 수밖에
이 소중한 한 생각 보존해서 푸른 하늘 봉황새를 볼건지
망녕된 생각에 바보가 될 건지 그 자신에 달렸다!’
희은 사람마다 간직한 샘물같은 한마음 길, 돌아보게 하는 구절이군요
‘고전기행 사설여행’ ‘송도록과 심청태교’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허균의 스승 이달. 스승팔자 옆에서 그리 봤으니 홍길동 같은 이야길 썼지 싶다.
정조 시대에 와서야 서얼출신 몇 사람이 조금 한을 풀기도 했지만 허균시절 때까진
억울하기만 했을까? 여기선 이달이 남도 영광에서 맘에 쏙 든 기녀랑 연애를 하는데
기분 좋게 비단 선물을 하고 싶었나 보다. 자기가 사준 비단으로 옷 지어 입은 모습을
보는 뿌듯함이란 그 시절 연애하는 사내의 소원 중에 하나였을테고, 근데 아침 햇살에
눈부신 그 비단 앞에서 자꾸만 빈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자신을 노래한다.
돈많은 풍류객 최가운이 들으라고 하는 소린데, 최가운이 멋진 것은 '이달의 시는
한글자가 천금이다 내가 자네 시를 사주겠네' 그때 돈으로 거금을 주고 이달의 시를 사줬고
이달은 자기손으로 사 입힌 영광기생 옷때깔을 보다 못해 그날 밤은 치마폭에
얼굴 파묻고 무슨 시를 노래했는지 짐작이 간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이달이 비단을 빌었던 노래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조선 중기 삼당시인으로
알려진 이달이 비단을 빌었던 노래 한수 음미해 볼까요?
희은 삼당시인으로 이름 난 이달이 무슨 일로 비단을 비는
시를 지었을까요?
종구 선조시대와 광해군 때에 살았던 이달은 원래
서얼 출신이라 벼슬에 나갈 길이 없어서 산천을
유람하며 시를 짓는 풍류로 살았는데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희은 홍길동의 스승이라고 하니깐 이달의 무게가 달라지는데요.
서자출신이라 신분차별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텐데
문학으로 승화 시켰던 모양이군요.
종구 한때는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응대하러 나간 접반사로
활약하기도 했었죠. 시와 문장에 뛰어난 사람을 접반사의
종사관으로 내 보냈거든요. 그런 이달이 최가운을 따라
전라남도 영광에서 지낼 때 영광 기녀랑 사랑에 빠졌죠.
희은 이달과 영광기녀 이야기 중에 나온 비단을 비는 노래
이제 윤곽이 잡히는데요. 이달이 누구를 위해 비단을
비는 노래를 지었다는건지 감이 잡히네요.
종구 돈이 없는 이달이 사랑하는 영광 기녀에게 비단을
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던거죠.
희은 (낭송) 강남 시장에 비단점/ 햇살에 자주빛 안개 자욱하다/
내 사랑이 저걸 사서 치마고 허리띠 만들려는데/
주머니 더듬고 또 더듬어도 잡히는게 없구료/
종구 비단전 앞에 햇살에 눈부신 자주빛 비단 앞에 이달은
자주 호주머니를 더듬는 모습이 보이죠.
희은 그 당시 비단 선물이 대단한 것이었군요. 그걸 사서
사랑하는 영광기녀에게 주고 싶은데 호주머니는 비었고
눈앞에 햇살 눈부신 자주 비단은 아른 거리고
그 심정 오죽했을까요?
종구 그 마음 그대로 시를 지어 최가운에게 보여 줬죠.
그러자 최가운은 이달의 시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최가운 웃으며) 손곡 이달의 시는 글자 한자가 천금인데
돈을 아낄수 있나.
희은 이달이 지은 시 한수 글자 한자를 천금값으로 여겼군요.
그래서 이달을 위해 그 자리에서 비단을 사줬던건가요?
종구 이달이 당시 지었던 한시는 칠언절구 였거든요.
그러니 사칠 28. 스물여덟자였는데 한자에 비단 세필씩 쳐서
돈을 건넸다고 합니다. 이달의 재주를 사랑하는 마음 알겠죠.
희은 그 재주를 알고 선뜻 글자 한자에 비단 세필씩 쳐주는
사람도 대단하군요. 한쪽은 경제적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었네요
종구 그도 또한 시풍류의 한가지였죠. 이달은 그렇게 바람따라
물결 따라 유람하며 세월을 보내다 훗날 평양의 한 여관집에
얹혀 살다 외롭게 세상을 떠나는데요. 그 제자인 홍길동전의
허균이 스승의 글을 모야 ‘손곡집’이란 문집을 남겼죠.
희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비단 선물을 주고 싶어서 시를 지어
비단을 빌었던 손곡 이달의 시풍류. 요즘 멋진 시 한수를
최가운처럼 천금값에 사줄 사람 몇이나 있을까요?
종구 시인의 노래 보다 마이크 잡구 한곡조 하는게 더 쉽고 편하겠죠
희은 ‘고전의 샘터’ ‘이달과 비단’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행화촌 이야기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행화촌 이야기를
돌아볼까 합니다.
희은 어제 잠깐 목은 이색의 봄비와 비둘기 이야기 때
행화촌이 나왔었죠.
종구 옛 사람들이 ‘행화촌’이라는 구절을 쓸 때는 고유한
지명으로 행화촌을 쓴거 보다. 봄날 살구꽃 만발한
시골 동네를 보통 행화촌이라고 했구요. 술집을 또
행화촌으로 말하기도 했거든요.
희은 그럼 행화촌이다 했을 때는 어느 곳 특정 지명으로
보는거 보다. 봄날 농촌 마을 풍경이거나. 술집을
말하는 거구나. 그런 뜻이군요. 행화촌을 술집으로 보게된
사연도 있을거 같은데요.
종구 당나라 시인 두목의 <청명>이란 시에서 유래가 됐는데요.
우선 여기 두목의 ‘청명’ 노래 한구절 보실까요?
희은 (낭송) ‘한번 물어보세 술집이 어디쯤 있는지/ 목동이 멀리 가리킨
곳은 살구꽃 핀 마을이구나/
아, 여기 살구꽃 핀 마을, 행화촌이 실은 술집을 가르킨
말이었군요.
종구 그냥 살구꽃 만발한 농가의 동네를 뜻하기두 했지만요.
보통은 봄날 살구꽃핀 그 동네 그 술집을 말했던겁니다.
여기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유호인이 노래한
행화촌 잠시 음미해 볼까요?
희은 (낭송) 성 남쪽으로 북쪽으로 닭과 돼지 우는 요란한 소리들/
밭에서 풍년기도 끝나자 비내리는 들녘 어둑어둑 한데/
태수나리 행차가 놀자는 행차일까? 농사철 권농하기 위함이라/
때때로 가마타고 행화촌 찾아 쉬어도 간다네/
종구 유호인이 남긴 이 한수의 노래를 보면
사또나 원님들이 봄날 살구꽃 핀 마을을 찾아와
농사철 넘기지 말라며 권농을 하는데
때때로 행화촌을 찾아 쉬어도 가더라.
희은 사또 나리가 농사를 독려하고 나서 잠시
행화촌 술집에 쉬어 간 모습을 담은 노래군요.
이 사또행차와 행화촌에도 또 다른 사연이 있겠죠?
종구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당송 팔대가에 한 사람이고
북송 때 시인이 소동파가 남긴 행화촌 시를 보면
원님하고 행화촌 술집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죠.
희은 소동파하면 적벽부를 남긴 시인 아닌가요?
그 소동파가 원님과 행화촌을 노래한 작품이 전해 오는군요.
종구 전 적벽부와 후 적벽부란 불후의 명작을 남긴 소동파는
이름이 소식인데요. <주진촌가 취도시>에 사또와 행화촌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구절 보세요.
희은 (낭송) 내 지난날 주진촌 원님이 되어 / 我是朱陳舊使君
농사를 권하러 행화촌을 찾았더니 / 勸農曾入杏花村
요즈음의 그곳 풍물 어찌 차마 그 모양일꼬 / 而今風物那堪畫
고을 아전들이 돈 내라고
한밤중에도 문을 두드리다니 / 縣吏催錢夜打門
종구 여기서 행화촌은 두가지 뜻을 동시에 담고있죠.
농사를 권하려 찾은 시골 동네이면서 살구꽃 핀 술집인데
물색없는 관리들이 이집 저집 문 두들기며 사또가 왔으니
대접해야 한다며 문 두들기며 돈 달라는 소리 요란터라.
희은 원님덕에 나발 분다는 게 그런 모습이군요. 사또 덕에
떡고물이라도 먹어보자는 심산이구요.
종구 우리 시대 행화촌은 어디일까요? 혹시 고급 룸싸롱으로
오해하는 분 안계신지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행화촌’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행화촌 봄비내리는 날은 암비둘기가 소박 맞은 날이다.
왜 하필 봄비 내리는 날이면 암비둘기는 쫓겨나야 했을까?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봄비를 노래한 고사와 비둘기’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봄비를 노래한 고사와
비둘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희은 봄비를 노래한 구절은 많겠죠. 그런데 봄비하고
비둘기하고 어떤 연관이 있는건지 궁금하네요.
종구 고려말 목은 이색이 봄날 오이를 심고 노래한
시구절에 봄비와 비둘기가 등장하는데요. 이 구절 보세요.
희은 (낭송) 오느냐 봄비야 행화촌 너머 쟁기질하기 좋겠구나.
구구구 급한 비둘기 외치는 소리에 하늘이 다시 흐려지누나.
여기에 봄비랑 비둘기 우는 소리가 나오는군요.
종구 (그냥 읽으면서) 행화촌외 일려우하니/ 구부급호 천정음이라
(杏花村外一犁雨 鳩婦急呼天正陰)
이런 구절 그냥 평범하다 싶어 지나칠 수 있거든요.
희은 고려말 행화촌 풍경을 상상해 보는데요. 봄비가
오락가락했군요. 근데 비둘기가 울자 하늘이 또
흐려지더란 구절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다는 소리죠?
종구 우리 선인들 작품을 감상할 때 이런 구절에 별스런
묘미가 있는데 그냥 지나치기 쉽죠. 목은 이색은
행화촌에 봄비와 농부들 쟁기질 하는 모습 보면서
그 자신은 오이를 심고 있었죠. 여기에 비둘기 우는 소리에
하늘이 한번 더 흐려졌더란겁니다.
희은 목은 선생도 봄비가 오락가락 할 때 오이를 심으면서
나름 농가의 봄날에 동참하고 있었군요. 농부들은 봄비에
쟁기질을 서두르구요. 이 행화촌 그림에 등장하는 비둘기 울음
그리고 하늘은 왜 다시 흐려 졌을까? 이제 정말 궁금하거든요.
종구 이 구절엔 비둘기 부부, 특히 암비둘기의 서글픈 사연이
깃들어 있는데요. 비오는 날이면 암비둘기가 소박을
맞았다고 합니다.
희은 비오는 날 소박 맞아야 했던 암비둘기. 이 대목에선
납득할만한 이유를 꼭 알아야겠습니다.
종구 소박 이야기에 곱지 않은 시선 네, 느껴집니다. 들어보세요.
옛 사람들이 비둘기를 관찰했는데. 하늘이 흐려지고
비가 올거 같다 싶으면 숫 비둘기가 암컷을 둥지 밖으로
내 쫓더 랍니다.
희은 에? 한 둥지에서 다정하게 지낼 땐 언제고, 비올거 같으니깐
암 비둘기를 내쫓아요. 애초에 둥지를 크게 짓던가 하지.
종구 자, 그렇게 암비둘기를 쫓아낸 수컷이 날이 갠다 싶으면
또 둥지로 들어오라구 부른답니다.
희은 비올 거 같으면 방 빼라. 햇빛 나면 들어와라. 암비둘기는
그걸 또 순순하게 받아 준다는건가요?
종구 자 다시 목은 이색의 행화촌 봄비 풍경으로 가볼까요.
그러니 비 오기전 숲에서 구구구 구슬피 울어대는 비둘기
소리는 둥지를 나가야 하는 암컷의 원망서린 울음 아니겠어요?
희은 그 울음 소리에 하늘도 흐려졌다는거죠? 사실 하늘이
흐려지고 비가 내리려구 하니깐 암비둘기가 울었던거잖아요.
종구 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소박맞구 쫓겨나야 하는 신세를
원망하며 우는 암비둘기 울음에 하늘이 더나 흐려지더라.
희은 오늘 숲에서 들리는 비둘기 울음 소리는 봄비 때문에
소박 맞은 암비둘기 울음 소리가 아니었으면 싶습니다.
‘고전기행 사설여행’ ‘봄비와 비둘기’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이유원의 물맛 감별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이유원의 물맛 감별에 얽힌
고사를 돌아보겠습니다.
희은 옛 사람은 물맛을 감별하는 각별한 감각이 있었나 보군요.
종구 어제 연평도와 영종도 쪽 어떻게 지킬 것인가? 여기에
인용된 글을 소개 드렸죠.
희은 어제 연평도 배치기 소리와 함께 임유원의 글도 소개했었죠.
종구 그 이름을 잘못 소개했다는 겁니다. 어제 말한 임유원은
‘이유원’을 잘못 말한 것이란 점 고쳐 드리겠습니다.
희은 어제 임유원의 글로 소개한 연평도 글을 ‘이유원’의 글로
수정해서 다시 바로 잡는다는 말씀이군요.
종구 잘못 된 부분은 이렇게 바로잡고 애청자 여러분께 이런
소소한 실수도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드려야죠.
어제 말한 임유원은 이유원으로 고쳐서 바로 잡겠습니다.
희은 그래서 오늘 다시 이유원의 물맛 이야기를 꺼내게 됐군요.
애청자 여러분도 이런 점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소개 드린 이름은 물맛이 간 셈이네요.
종구 그래서 이유원이 물맛을 감별했던 고사를 돌아볼까 합니다.
옛 사람들은 물맛을 가지고 그 고장 나름의 물이 가진
특성을 잘 감별했는데요. 조선 후기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말한 물맛 감별하는 임하필기의 기사를 잠시 볼까요?
희은 (낭송) 예전에 동정 장산인이란 사람이 말하기를
“산꼭대기에 있는 샘은 가벼우면서 맑고, 산 아래에 있는 샘은
맑으면서 무겁고, 돌 가운데 있는 샘은 맑으면서 달고,
모래 가운데 있는 샘은 맑으면서 차고, 흙 가운데 있는 샘은
맑으면서 후중하다. 그리고 흐르는 물이 고인 물 보다는 낫고
그늘진 곳의 물은 볕을 향한 물보다 낫다. 산이 가파른 데는
샘이 적고, 산이 수려한 데는 신령함이 있다.
참 좋은 물은 원래 향이 없는 법이다.
종구 이게 예로부터 전해왔던 지형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른
물맛에 대한 일반적인 담론이었는데요.
이유원이 우리 강토 이름난 곳을 찾아가서 그곳의
물맛을 본 소감도 기록해 놓고 있거든요.
희은 물이 어떤 맛인가에 따라서 그 물의 특성을 이해하고자 한거
아닌가요? 물맛을 감별한다는 것도 대단한 감각 아닌가요?
종구 여기 이유원이 ‘임하필기’에 남긴 물맛 이야기 조금 들어볼까요?
희은 (낭송) 천마산 꼭대기에서 물을 마셔 보니 가벼웠고, 퇴사담에서
물을 마셔 보니 무거웠고, 승가사에서 물을 마셔 보니 달았고,
수곡의 묘정에서 물을 마셔 보니 차가웠고, 청해의 동정에서
물을 마셔 보니 후중하였다. 안정한 물, 볕을 향한 물,
샘이 적은 것, 신령함이 있는 것, 맛이 있는 것, 향이 있는 것도
한번 마셔보면 모두 족히 말할 수가 있다.
종구 그 샘물이 가진 고유한 성질까지 가려내 보고자 했으니
우리 선인들은 그 물을 가지고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용도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구요.
희은 그래서 일상 속에 그 샘물을 가지고 밥짓는 물로 쓸건지
차를 다리는 물로 쓸 것인지. 약을 다리는 물로 쓸건지 알아봤군요
종구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서 ‘인재를 감식하는 혜안’ 으로 발전
시키고 있거든요. 고려 인종 때 문신 임춘의 글을 보세요.
희은 (낭송) 예전에 역아란 사람은 마셔보면 치수의 물인지 승수의 물인지
물맛을 가려냈다고 한다. 악사 사광은 앞을 보지 못했지만
정위 같은 사람도 성음을 속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인재도 이처럼
척척 가려낼 수 있는게 바로 대현이요 어진 지도자 아니겠는가?
종구 옛 사람들은 물맛을 척척 가려내듯이 사람을 보면
인재인가 아닌가? 어떤 일을 잘 해낼 것인가? 척척 감식해
내는 인물감별 혜안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희은 단순희 물맛을 잘 본다고 자랑치는 게 아니라. 진짜는
사람 알아보기. 인물감식에 뜻을 두고 있었군요.
종구 이 시대에는 우리 서민대중들이 인물을 잘 알아봐야
도지사깜이다. 시장 군수깜이다. 시의원깜이다 할거 아닙니까?
희은 이 시대엔 시민들이 인재를 감식해 내는 눈 코 귀 입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군요.
‘고전기행 사설여행’ ‘이유원의 물맛’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연평도 배치기와 이유원 고사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연평도 배치기 소리와
조선후기 임유원을 만나볼까요?
희은 연평도 배치기와 이유원의 연평도 이야기군요.
연평도 하니깐 어제 지냈던 천안함 4주기 추모행사가
생각납니다.
종구 바로 그 바다가 가장 평화로웠던 때는 언제일까요?
인천 몽금포 해주 어부들이 ‘연평도로 고기잡이 가자’
그 ‘연평도 배치기’ 소리 울려 퍼질 때거든요.
희은 연평도에 어부들 고기잡이 소리 울려 퍼질 때가
연평도의 봄날이란거죠. 반대로 천안함 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 생기면 그게 연평도의 한겨울인셈이구요.
종구 우리 전통속에는 ‘연평도 배치기’가 서해에서 남해까지
전해지고 있는데요. 그만큼 연평도는 어부들 황금어장이었죠.
그래서 ‘연평도 배치기’ 소리 이 구절 한번 보세요.
희은 (낭송) 에~~ 연평바다로 돈 실러 가잔다 아 에헤
연평바다 널린 조기 양주만 남기고 다 잡아 디려라 아 에헤요
‘연평도 배치기’ 여기선 돈 실러 가자는 신바람 소리였군요.
종구 그 전통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우리에게 연평도는
돈 실러 가는 바다였거든요. 그 평화롭고 복스런 바다가
조선 후기로 오면서 서양 함대가 밀고 들어오는 통에
몸살을 앓게 됐죠. 그래서 이유원이 ‘연평도와 강화쪽 관문을
이렇게 정리해 남겼는데요.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 구절 보세요
희은 (낭송) 해주 건너 연평도는 말도와 서로 건너다 보인다.
만약 서양군함이 연평도로 들어 온다면 강화에서 먼저
보게 된다. 장봉도 주문도 두 섬은 서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서양군함이 서쪽에서 밀고 들어 올 경우 교동과 말도
사이를 빠져 나와야 한다. 남으로 오는 군함은 영종도와
신도 사이를 빠져 나와야 할 것이다.
이러니 요충지인 연평도나 영종도 이쪽에 말 목장만 둘게
아니라 별장을 보내 바다로 오는 적을 지켜야 한다.
종구 어부들의 황금어장이었던 연평도. 돈을 실러가자 외쳤던
그 어부들 바다가 조선말부터 서양군함이 등장하게 됐죠.
연평도 배치기 소리가 점점 군함과 서양열강의 쟁탈전
속에 힘을 잃어갔던거구요.
희은 조선 후기 이유원이 연평도와 영종도 근해를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인천과 강화도 주변 섬들을 열거하면서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고민했던거군요.
종구 이유원은 대원군 이후 고종시대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었죠.
서양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경계해서 청나라 이홍장에게
병기제조며 무기조달 지원을 받고자 했구요.
희은 이유원이 연평도와 영종도 근해를 지켜야 한다면서 남긴
글을 보니, 지금 우리의 연평도는 안녕한지 돌아보게 됩니다.
연평도 배치기는 아직도 부르고 있지만 말이죠.
종구 우리 선조들은 연평도를 향해 ‘돈 실러 가자’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에 천안함의 눈물과 연평포격 포성소리를
기억해야 하는 오늘입니다.
희은 우리의 연평도 ‘돈 실러 가자!’ 풍장치며 신바람 낸
연평도 배치기 소리 가사에 ‘대포 실러 가자’ 소리 있던가요?
‘고전기행 사설여행’ ‘연평도와 이유원’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윤선도의 갑신소와 명의고사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윤선도의 갑신소와
명의고사를 돌아볼까요?
희은 윤선도 하면 방송을 통해 가끔 들어 본 ‘어부사시가’가
생각나는데요. 갑신소는 어떤 내용일까요?
종구 청나라에 항복했던 인조대왕이 울분에 싸여 깊은 병이
들었거든요. 소현세자는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죠.
삼학사는 충절을 굽히지 않고 항거하다 처형당했죠.
청나라에 짓밟힌 강토에 백성들 울음소리 높죠.
희은 그 정도 사정이면 병이 들어도 골수에 까지 모진 병이
들었겠지요. 그때 윤선도가 갑신소를 올렸던거군요.
종구 무너진 산하, 항복으로 깨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했던 인조대왕이 그만 깊은 병에 시달리자. 멀리
해남에 있던 68세의 윤선도가 ‘갑신소’를 올려서 나름
시국 처방을 전하게 됩니다.
희은 68세의 윤선도가 과연 그 격변과 울분의 시대에 올렸던
시국 처방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궁금하네요.
종구 우선 윤선도의 갑신소 몇구절 돌아볼까요. 여기 보세요.
희은 (낭송)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이 고요하면 만병이 없어지고,
마음이 격동해 요동치면 만병이 생겨난다.” 했습니다.
〔心靜萬病息 心動萬病生〕”
지금 나랏일이 어렵고 힘든 게 천고에 없던 일인지라
전하의 마음속이 어떠할지 짐작하고 남은 일 아니겠습니까.
바로 나라와 백성의 고통이 성상의 고통인지라 그 고통 때문에
생긴 병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종구 이 구절을 보면 윤선도는 우선 인조대왕의 병이 어디서
생긴 것인가. 그 원인에 대해 명쾌하게 진맥한 대목이죠.
나라와 백성의 고통 땜에 임금이 그 고통으로 병이 생긴 것이다.
희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적국에 항복을 해야 했으니
그 고통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윤선도는
이에 대한 처방을 어떻게 내렸을까요?
종구 윤선도는 약 처방을 인재와 비유해서 하고 있습니다.
인삼과 같은 인재를 찾아라. 장량 소하와 같은 인재가
원기를 돋구는 인삼같은 약재다. 장군초와 같은 약재가 시급하다.
바로 한신과 범려와 같은 인물이 새기운을 대줄 장군초 대황이다.
희은 약재와 인재를 비유해서 내린 처방전이었군요. 그럼
당시 윤선도가 가장 효과를 볼 것이라고 처방한 것은
어떤 약재와 인재였을까요?
종구 좋은 약은 입에 쓰다. 달콤한 허울보다 쓰지만 약이 되는
인재를 가려 봐야 한다. 제갈공명과 주유처럼 서로 쓰디 쓴
사이지만 적벽싸움에서 불로 공격하자는 화공에 뜻을 모아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끌 듯이 그런 인재를 찾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희은 68세의 윤선도가 내린 처방은 결국 시대를 구해 낼 인재를
불러 들이는 것이었군요. 거침없이 쓴소리 하면서 시대를 구할
제갈공명과 같은 인재를 가려 쓰라는 갑신소 처방전이었군요.
종구 지금 이 시대에 윤선도처럼 입에 쓰지만 약이되는 ‘갑신소’를
올릴 사람들 있기는 있나 모르겠어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윤선도의 갑신소’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사기를 충천하게 했던 사람들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고전에 등장하는
사기를 충천하게 했던 사람들 돌아볼까요?
희은 간단히 우리소리 속에 사기가 오른 대목 몇 장면 돌아볼까요?
종구 흥이 나면 사기도 오른다. 춘향가의 ‘농부가’ 대목 보세요?
희은 흥이 나면 사기도 오른다. 아 춘향가 ‘농부가’ 대목 보면
노래하면서 풍장 치면서 모심기 하는 농부들이 흥도 나구
사기도 오르는 모습인데, 저는 심청가 한 대목 생각나네요.
종구 판소리에 신바람 난 대목들 듣구나면 사기가 오르죠.
심청가 어떤 대목이 가장 흥겹고 신바람 나던가요?
희은 그럼요. 눈 뜨는 대목, 여기서 눈 뜨고 세상을 보게 된
장님들 신바람과 사기 충천한 모습만한게 또 있을까요?
종구 근데 이 사기가 충천했다는 말은 많은 군중들이 기운을 받고
떨쳐 일어서는 기세를 말하기도 하죠. 자 예전에 지도자나
장군들은 군중들 사기를 어떻게 후끈 달아 오르게했을까요?
먼저 기원전 460여년 월왕 구천의 사례를 볼까요?
희은 월왕 구천 하니깐 ‘와신상담’이라는 고사가 생각나는데요.
복수를 준비하면서 장작더미에서 잠을 자고 쓰디 쓴
쓸개를 맛 보며 원수를 갚겠노라. 그 고사의 주인공 맞나요?
종구 그럼요. 복수를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던 월왕구천이 남긴
‘와신상담’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루도 잊지 않고 치열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는 모습이기도 한데요. 여기 한비자에 등장한
월왕 구천이 군사들 사기를 올리는 모습 잠시 볼까요?
희은 (낭송) 춘추 시대 월왕 구천이 성내면서 기세를 올리는 개구리를 보고
수레 위에서 개구리에게 경의를 표하자, 군사들이 말하기를
“개구리가 불끈 일어서 성을 내도 임금이 저렇게 장하다며
인사를 하는데, 하물며 우리 군사들이 용맹스럽게 싸우면
큰 상을 내리지 않겠느냐? ” 하면서 모두 사기가 충천했더라.
종구 월왕 구천이 군중심리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보여주고있죠
발끈 성을 내서 울며 기세를 올리는 개구리에게 ‘거 장할시고’
경의를 표하자 군사들이 ‘개구리 한테 저 정도면 기세 좋게
싸우는 군사들한테 얼마나 잘 해 주겠느냐? ’ 여기 또 다른
기록을 볼까요. 임진왜란 때 이억기와 충무공기사입니다.
희은 (낭송)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는 임진년 6월에 수군 25척을
이끌고 당포에서 이순신과 만났다. 이때 이순신은 이미 누차
적과 만나 싸웠는데, 이제 막 싸움을 끝내고 군사들을 쉬게
하고 있는데 이억기 함대가 돛대를 나란히 하고서 군악을
연주하여 해안으로 들어오니 온 군중이 사기가 충천했다.
이 기사는 임진왜란 때 남해에서 왜적과 싸울 당시 기록이군요.
종구 당포해전, 안골포해전을 앞둔 시점에 이억기가 병선 25척을
이끌고 그냥 들어온게 아니라 군악을 연주하며 기세 좋게
들어오는 모습 상상해 보세요. 그래서 사기충천해 가지고
이순신 함대와 연합해 남해에서 연전연승하게 돼죠.
희은 함대에서도 군악을 연주하기도 했군요. 싸움터에서도 때때로
음악이 사기를 올리는데 한몫을 했던 기록 아닌가요?
종구 사기는 군대에서만 있는게 아니죠. 생활 속에 사기를 올리는 거
우리소리, 우리가락으로도 기운을 낼 수 있다는 겁니다.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사기충천’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최우와 얼음캐기 고사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고려 고종 때 최우와
얼음캐기 고사를 돌아볼까합니다.
희은 봄인가 싶은데 꽃샘추위가 심했잖아요. 얼음캐기 하니깐
겨울 한가운데로 가는 느낌이 드는데요.
종구 오늘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 고려 무신 정권을 주도했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에 얽힌 얼음캐기 고사인데요.
희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훗날 최이란 이름으로 개명했다는
기록도 봤거든요.
종구 그 아버지를 이어서 고려의 정권을 마음대로 농단했던
인물이기도 했는데요. 고려 고종 30년 궁궐 벽에
붙었던 대자보 한구절부터 보실까요?
희은 (강경) ‘답하라. 얼음이 더 소중한가 백성이 더 소중한가?
대답하라. 잣나무가 더 소중한가 백성이 더 소중한가?’
그 당시 궁궐 벽에 이런 대자보가 붙었다구요?
종구 사연을 알구보면 참 기막힌 일이죠. ‘답하라. 얼음이 더
소중하냐. 백성이 더 소중하냐. 잣나무냐 백성이냐?’
희은 최우가 얼음과 잣나무로 백성을 엄청 힘들게 했나봐요.
종구 어느정도였는고 하면요. 고려 고종 30년 12월에
백성들을 내 몰아서 봄 여름에 쓸 얼음을 캐게 했는데
그때 동원된 일꾼들이 얼어 죽는 일도 생겼거든요.
희은 그러니 ‘얼음이 더 소중하냐. 백성이 더 소중하냐 답하라’
했던거군요. 그 시절 한 겨울 얼음캐기는 정말 목숨을 걸고
일해야 했나봐요.
종구 그럴수 밖에요. 꽁꽁 얼어붙은 얼음덩이를 잘라내고
그걸 꺼내고 그걸 서산 빙고에 밀어가고. 이 과정에
사람 목숨을 잃은 사고도 발생했구요.
희은 여름날 얼음조각으로 만든 시원한 음식을 먹자고
그 모진 고생을 시켰던건가요?
종구 단순히 여름날 음식 치레 하려고 그런게 아니었죠.
여름날 얼음덩이를 나눠 주는 게 대단한 권력과시였죠.
원래 임금이 했던 일을 최우가 대신했던 셈이구요.
희은 그렇다면 한 겨울 얼음덩이 많이 쌓아 둘수록
권세 부릴 밑천이 두둑해 진다는 거잖아요.
종구 그러니 얼음덩이 많이 쌓아 두려구 얼마나 모질게
득달을 했으면 그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그랬겠습니까.
헌데 최우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고 겨울에 또
잣나무를 파서 자기네 후원에 옮겨 심어라. 했거든요.
희은 얼음캐서 옮기는 일도 모진 일인데. 잣나무를 캐서
후원에 옮겨 심어라. 그걸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다 했단
말인가요?
종구 그 모진 노역을 피하려구 주변 고을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산에 올라가 토굴에서 지냈을 정도였거든요. 그 시절이 또
강화로 도읍을 옮겨 몽고에 대항할 때였죠.
희은 몽고 침략도 제대로 막지 못한 주제에 얼음댕이 캐와라.
잣나무 캐다 후원에 심기 바빴던 최우. 정말 백성 보기를
노예처럼 봤다는거군요.
종구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남았던지 팔만대장경 완성하는데 재물을
보태기도 했죠. 그가 죽은 후 2년만에 대장경이 완성됐었죠.
(인용) 얼음이 소중하냐 백성이 소중하냐? 잣나무가 소중하냐
백성이 소중하냐? 지하에 최우는 지금 뭐라고 답했을까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최우와 얼음캐기’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면암 최익현의 꽃샘추위 서찰’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면암 최익현 선생이
꽃샘 추위 속에서 보낸 서찰을 돌아보겠습니다.
희은 면암 최익현 하면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면서 단식으로
숨을 거둔 애국지사 였잖아요. 그 면암선생이 꽃샘 추위
속에 어떤 분에게 무슨 일로 서찰을 보냈는지 궁금하네요.
종구 일본과 통상조약이 체결 되자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려
일본과의 그 어떤 통상이나 협력도 거부하고 조선의 정신과
전통으로 살아나가야 한다. 주장하다 흑산도로 유배 가기도
했었죠. 팔도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했구요.
희은 그 면암 최익현 선생이 지금처럼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 때 보낸 편지가 오늘 머무를 곳이군요.
종구 당시 선비사회에 존경 받던 송병선, 송병순 형제가 있었는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형인 송병선이 일본침략에 항거하며
자결을 하게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면암 최익현이
지금처럼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송병선의 동생
송병순에게 편지 한 장을 보내죠. 여기 몇구절 돌아볼까요?
희은 (낭송) 이 무슨 변고입니까. 송병선 선생님이 떠나시다니요.
선생께서 살아 계실 때 우리 민국의 백성들이 우러러 의지하며
하늘의 북극성 같이 바랐는데 이젠 그만입니다.
왜놈 천지 이 나라 누구를 의지하며 선비들은 누구를 공경해
받들겠습니까. 꽃샘 추위 매서운데, 선생의 뒤를 바로 따르지
못해 서찰로 조의를 전합니다
종구 우암 송시열 선생 후손인 송병선, 송병순 형제는
당시 선비들에게 존경 받던 인물인데. 을사늑약 발표 후
송병선이 일본침략에 항거해 자결하죠.
희은 일본에선 을사조약이라 하지만 강제 협박로 맺은 거니깐
을사늑약이라고 하잖아요. 그 울분을 참지 못해 당시
목숨을 끊어 항거한 애국지사들 많았잖아요.
종구 그렇죠. 애국지사 송병선 장례를 치른 이후 면암 최익현은
자신도 바로 목숨을 끊어 뒤를 따르고 싶었다는 심경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팔도에 의병을 불러모아 일본 세력을
몰아내는데 앞장 섰다가 잡혀 쓰시마 섬에 유배된 때거든요.
자신도 단식을 결행할 준비를 하고 있던 때였죠. 다음 구절~~
송병선 동생인 송병순을 위로했던겁니다. 그 다음구절 볼까요?
희은 (낭송) 꽃샘추위 매서운데 장례 치른 후 옥체는 어떠신가요.
이 최익현이 죽고 사는 것과 영화와 치욕에 대한 의리는
다를게 없는데, 왜놈에다 해수 천식까지 달려드는구료.
동쪽을 바라보고 눈물 뿌리며 삼가 조의를 표해 올립니다.
종구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6년 꽃샘추위 때 송병선을 추도하는
글을 올리고 그해 11월 순국하게 됩니다. 송병선은 1910년
한일병합을 보며 순국했구요. 면암선생이 생전에
추모했던 조선의 선비요 애국지사 송병선 송병순 형제는
지금 대전 동구 문충사에 모셔졌고 두형제 모습은 조형물로
세워져 독립운동 정신을 선양하고 있죠.
희은 을사늑약 다음해 꽃샘 추위때 면암 최익현 선생이 애국지사
송병선 순국을 추모하면서 자신도 항일의 마지막 결심을했던
역사를 되돌아 보게 됩니다.
‘고전기행 사설여행’ ‘송병순에 준 면암’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경칩 노래, 경칩 이야기’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경칩이죠. 그래서
경칩을 노래한 작품과 경칩 이야기 마련해 봤습니다.
희은 영동에 폭설 소식도 들려오는데, ‘경칩이다!’ 하고 개구리가
나왔다가 놀래서 쑥 들어가게 생겼잖아요.
종구 이 꽃샘추위 속에서도 봄농사 준비에 바쁜 손길들 멈추지
않을겁니다. 여기 조선 중기 문신인 허목이 경칩 때
모습을 노래한 작품 잠시 보실까요?
희은 (낭송) 나무에 새싹 풀에도 새싹들/ 오늘이 경칩날이구나/
바빠진 농가 마을마다 분주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들녘에 있더라/ 그땐 경칩부터 어른 아이 다 들에 있었군요
종구 그 당시 풍경 보이죠. 조선 현종 때 우의정 벼슬까지 지낸 허목이
경칩날 바빠진 농가의 모습을 노래한 작품이죠.
(성독 느리잖게) ♬농가 수 가사이니/ 소장 재 전묘로다
(農家修稼事 少壯在田畝)
희은 그때나 지금이나 경칩 무렵 우리 농가 봄농사 시작한
모습들은 비슷한 거 아닌가요. 기계소리가 요란한게 다를테구요
종구 옛 사람들은 경칩엔 땅을 깨우는 우레 소리가 일어난다고
했거든요. 경칩 우레에 놀래 개구리들이 잠을 깨고
밖으로 나온다고 했구요.
희은 경칩에 우레가 먼저 울린다. 그거군요. 개구리가 알아서
잠을 깨고 나오는 줄 알았더니. 땅을 흔드는 우레가 일어난다.
종구 일테면 봄을 깨우는 에너지 파동이 땅을 흔들면서
만물이 소생하는 기운을 얻는다. 이 경칩 우레를 어진 사람이
등장하는 신호음으로 받아 들이기도 했었죠. 여기 최치원이
계원필경에 남긴 글을 보세요.
희은 통일 신라 때 중국 당나라에서 벼슬하던 최치원이
‘절서 주보 사공에게 보내는 글’에 있는 한구절이군요.
(낭송) 위 공자가 등장하는 봄 우렛소리 진동하자 개구리가 놀래
깨어나는 것과 같고, 진 대부의 겨울 해가 따사로이 비추자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해설이 필요하네요.
종구 최치원이 말한 ‘위공자의 봄 우렛소리’ 뜻은
중국 전국시대에 위나라 공자 무기란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등장하면서 내는 우레소리가 겨울내내 잠들었던
동물들을 깨우고 생동하게 해주는 것과 같더라.
희은 경칩 때 개구리만 잠에서 깨는게 아니군요. 겨울에 짓눌리고
훔츠러든 우리를 확 깨울 우레소리내며 오는 인물덕에
많은 사람들이 생동하는 봄기운으로 깨어 나더란 거잖아요.
종구 경칩에 자꾸 개구리만 이야기 하는데, 옛 선인들은 우레소리
내면서 겨울사람들 깨우며 봄날로 가자는 외침. 그 인물 따라
사람도 봄사람으로 깨어 나가자. 추사 김정희도 경칩 때
우레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이 한구절 보세요.
희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좋아했던 한구절이군요.
(낭송) 조금 일찍 울린 우레소리가 잠든 개구리들을 흔들어 깨움이여
종구 (성독조) 조뢰 경칩 호 일러라. (早雷驚蟄戶) 추사 완당집 8권에
나오는 한구절인데요. 보세요. 경칩에 개구리 이야기만 말고
개구리를 흔들어 깨우는 새로운 기운, 우레소리를 느껴보자.
희은 겨우내 움츠러든 우리를 생동하는 기운으로 흔들어 깨우는 인물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경칩 고사’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삼탄 이승소와 경칩 선농단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조선 세조 성종 때
문신인 삼탄 이승소의 경칩과 선농단 고사 돌아볼까요?
희은 그러고 보니 내일이 경칩이군요. 마침내 개구리가
잠을 깨서 나올 때가 됐군요. 아직 꽃샘추위가 남아 있지만요.
종구 영동지방에 눈 내린 곳도 있거든요. 하지만 절기상으로는
내일이 경칩이라. 이제 봄농사철로 접어들 때이죠.
조선 세종 때 과거에 올라서 사가독서를 거쳐 훗날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가 됐던 삼탄 이 승소 ‘매화노래’ 보세요
희은 (낭송) 백설 같은 매화에 서리 같은 달빛 내린다
이따금 살랑 스치는 실바람에 향긋한 매화여라
오늘 달밤이 맑은 기운 뼛속에 사무치나니
다시 무슨 시상 떠올릴까. 잡념을 모두 씻어 버렸는데......
종구 달빛 아래 매화를 마주하며 맑고 청정한 경개를
노래한 이승소의 시인데요. 지금 같은 절기라 하겠죠.
여기 이승소가 경칩을 지나면서 그 때에 해야 할 일이 뭔지
임금에게 고한 글이 있거든요. 보세요.
희은 이승소의 ‘농잠서 서문’이란 글이군요.
(낭송) 전하께서는 백성들을 보호하기를 어린아이를 보살피듯 하시어
붙들어 주고 안전하게 해 주어 태평성대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고서도 오히려 삐뚤어진 백성들이 안일하게 지내고
속된 말을 하면서 농사짓는 데 힘을 다하지 않을까
염려하셨습니다. 이에 몸소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경칩 이후
선농단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고 적전에 나아가 논을 갈아
사방 백성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종구 세종 시대 벼슬길에 나가 세조와 성종조 때 까지
국정에 동참했던 삼탄 이승소는 경칩 이후, 첫 돼지날에
임금이 직접 한양 동쪽 논에 나가서 농사일을 하며
경칩 이후 봄농사를 시작한 농부들을 격려 했던 걸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희은 그러니깐 예전엔 경칩이 지난 이후 임금이 직접
논에 나가 시범경작을 하셨군요. 그런 전통 때문에
우리 시대에도 지도자들이 농사철에 모내기 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그랬잖아요.
종구 그도 오래된 전통 중에 한가지죠. 경칩 이후 임금이
논밭에 나가 선농단에 제사를 올리고 농부를 격려한 행사를
선농제라 했었죠. 임금이 시범경작을 한 그 선농제 날에
황소를 잡고 백성과 함께 풍년을 기원하며 나눠 먹었던 음식이
설농탕이란 말도 전해 오잖아요.
희은 아, 선농제 때 황소를 잡아 국 끓여 먹었던게 설농탕이
됐다는거군요. 설농탕은 임금이랑 백성이 나눠 먹으며
풍년기원했던 전통이 담겨 있군요.
종구 한양 동쪽 그곳이 바로 지금의 동대문구 전농동이었죠.
설농탕의 원조는 임금이 나가 농사일 시작하고 소를 잡아
설농탕 나눠 먹던 전농동 지역이었구요.
희은 내일 경칩이 지나고 첫 번째 돼지날. 우린 그냥
설농탕만 먹구 지나가야 할까요?
종구 조선전기 문신 이승소의 글에서도 등장하는 동대문 밖 선농제.
지금은 모두 주택가로 변했습니다만. 이런 전통들 살릴 길은?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경칩과 선농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다 ‘봉명조양(鳳鳴朝陽)’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다>
‘봉명조양(鳳鳴朝陽)’ 고사 새겨볼까요?
희은 봉황은 실제 있는 새가 아니라 상상 속에 전해오는
상서로운 새 아닌가요?
종구 그렇죠. 하지만 봉황에 대해 꽤많은 고사가 전해오고
옛 생활 속에 봉황을 새긴 생활도구며 의류, 시서화 작품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죠.
희은 그 많은 이야기 중에 ‘조양의 봉황’에 대한 일화를 돌아보잔
말씀이군요. 봉황 생김새도 기이하면서 신비롭잖아요.
종구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고 몸과 날개 빛은 오색이 찬란하면서
오음의 소리를 낸다고 알려져 있죠.
희은 그래서 봉장취다. 봉황곡이다. 그런 악곡도 전해 오는거군요.
‘조양의 봉황’은 어떤 인물이 등장하나요?
종구 중국 당나라 때 한원과 저수량이란 올곧은 인물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됐는데, 그 억울함을 알면서도
말을 못했거든요. 헌데 당나라 고종황제에게 직언을 올린
사람이 있었죠. 바로 이선감이었습니다.
이선감 (간곡히) 한원과 저수량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 전후 사실을
다시 조사해서 한원과 저수량의 원통함을 풀어줘야 할것입니다
종구 아무도 나서서 말하지 못하는 일을 목숨을 걸고 나서서
직언을 올린 ‘이선감’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다’ 하면서 칭송했던겁니다.
이선감 그럼 조양에서 봉황이 울었다는 말은 출중한 인물이 나타나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제 울음을 울어서 진실을 알렸단건가요?
종구 중국 사람들은 ‘조양’이란 곳은 봉황이 우는 땅으로 알고
있죠. 사서오경 중에 시경 권아편에 이런 말이 나오죠.
‘봉황이 우는구나. 저 조양땅 오동나무에서 봉황이 운다’
희은 그 시대 사람들은 봉황이 운다는 걸 아주 상서롭고 좋은
조짐으로 받아 들였다는거 아닌가요?
종구 한마디로 태평성대를 알려주는 평화의 시대 신호음이고
문화의 시대 서곡이 봉황새 우는 소리란 뜻인데요.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봉황새가 날아와 노래해 주길바랬던거죠
희은 ‘조양땅에 봉황이 운다’ 이 한구절만 나와도 살기 좋은
태평성대란 말이 되겠군요. 우리 선대 선비들은 이 조양땅
봉황을 가지고 어떤 노래를 남겼을까요?
종구 조양땅에 우는 봉황을 인용한 작품이 많이 전해오는데요.
조선전기 학자요 문신이었던 권근이 자기보다 젊은 후배였던
유두명이 밀양땅으로 좌천당해 내려갈 때 전해 준 글 보세요.
희은 권근선생이 밀양으로 좌천당한 유두명을 전송하며 쓴 글이군요.
(낭송) 유군 내가 친애했던 재주있는 유군이 밀양땅 좌천이라니/
한창 사헌부 벼슬할 때/ 조양에서 봉황새울음 들었었지/ 그리
울고서 귀양길이라니/ 모두 안타까운 전송의 마음 보내는걸세
종구 권근 선생이 유두명에게 전해 준 이 글을 보면
지금의 검찰과 감사원 쪽이라할 ‘사헌부’에 일할 때도
곧은 소리 직언을 서슴치 않아서 ‘조양에 봉황새 우는소리’
말을 들었던거죠.
희은 헌데 그 곧은 소리 한 다음에 밀양으로 좌천돼 내려가게
됐으니 많은 대신들이 안타까워 했더란 말이군요.
종구 봉황새만 찾지 말고. 봉황새가 춤추고 반길 그런 인물들
기다린다는 겁니다. 어디 ‘조양의 봉황새’ 같은분 안계신감요?
그런 조양의 봉황새 같은 인물들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조양의 봉황새’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비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삼일절 95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를 돌아볼까 합니다.
희은 하얼빈 역에서 침략자 이토오 히로부미를 단죄했던
안중근 의사의 대한독립 만세 삼창 소리가 들려오는
삼일절이기도 합니다.
종구 그래서 오늘 같은 날, 안중근의사와 독립투사들
단지동맹을 돌아보자 그겁니다. 지금 북한 함경북도
나진 지역 건너편 중국 국경과 인접해 있는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안중근의사 단지동맹비’가 세워져 있거든요.
희은 북한의 나진지구와 인접한 곳이 바로 러시아 땅
크라스키노군요. 중국땅과 마주 하고 있는 지역이라면
북한. 러시아. 중국 3국의 땅 국경선이기도 하겠네요.
종구 그렇죠. 연추하리라고 부르기도 했던 연해주 러시아 땅
크라스키노에서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하기 위해
동지들과 모여 무명지를 잘라 동양평화를 위해 맹세했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거든요.
희은 그곳에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비석이 세워져 있다는거죠.
러시아 땅에 안중근의사 단지 동맹비가 오래전부터
있었던 건가요?
종구 러시아와 국교 정상화 이후 세우진 건데요. 2001년에
훼손된 단지동맹비를 다시 고쳐 세우게 됩니다. 그때
우리쪽에선 광복회와 독립유공자 후예, 국회의원등이
동참했구요. 잠시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세워졌던
‘안중근의사 단지동맹비’ 돌아볼까요?
희은 (낭송)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
이라 쓰고 대한국만세를 삼창하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
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종구 안중근 의사는 1909년 2월 7일 독립지사 동지들과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맹세했던 ‘단지동맹’ 이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단죄 했던겁니다.
희은 동양평화를 위해. 대한민국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의 제단에
손가락을 잘라 맹세한 그대로 침략의 원흉을 단죄했던
안중근 의사를 돌아보는 삼일절이기도 합니다.
종구 올해가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만
그 거룩한 동양평화정신과 대한민국 독립을 향한 구국의 얼을
기리고자 하얼빈 역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세우기로했는데요.
정작 우리가 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죠.
희은 이 시대에 아직도 우리가 해결 못한 안중근 의사 일이라면?
종구 남북이 힘을 모아 중국도 협조해서 안중근의사 유해를
찾아 이땅에 고이 모시는 일입니다.
희은 ‘고전의 샘터’ ‘안중근 단지동맹’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배수진을 파는 사람들 (背水陣)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한신의 ‘배수진’ 잠시
돌아볼까요?
희은 요즘 누가 배수진을 쳤다더라. ‘배수진을 치고 출사표
던졌다더라’ 그런 소리를 자주 듣거든요.
종구 그래서 ‘배수진’ 이야기 잠깐 해보자는 겁니다.
아무개가 의원자리 내놓고 배수진을 치고 지방선거
출사표 던졌다. 누구는 현직을 버리고 배수진을 쳤다.
그렇다면 그 ‘배수진’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생각해봐야겠죠.
희은 원래 ‘배수진’이란 말이 한신에게서 나왔다는 말은
들었거든요.
종구 한나라 고조 유방의 대장군이었던 한신이 조나라 20만대군을
상대로 싸워서 승리한 진법이 ‘배수진’이었죠. 거의 1대 20
싸움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치열했겠습니까?
희은 불가능한 승리를 배수진으로 쟁취했던 ‘한신’ 그래서
‘전쟁의 신’이란 말을 들었던 거 아닌가요?
종구 여기서 역사의 교훈을 돌아 볼 필요가 있는데요.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충주 탄금대 전투 당시
이 ‘배수진’을 쳤는데 그만 대패하고 말았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희은 한신은 배수진으로 승리를 거뒀는데, 우리의 신립 장군은
배수진을 치고 대패했다. 그 이유가 궁금하네요.
종구 당시 신립장군의 작전참모격인 종사관 김여물은
문경새재에서 적을 막자고 주장했는데요. 잠시 김여물이
신립에게 했던 말을 들어볼까요?
희은 (강경히) ‘왜적의 숫자가 우리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왜적은
우리보다 강한 무기를 갖고 있고, 진격하는 기세가
마치 노도와 같이 밀려들고 있는데, 배수진을 쳐서 이겨낼
전투가 아닙니다. 마땅이 문경새재 조령관문에서 적을 막고
이곳에서 적을 막지 못하면 군사를 빼서 한양을 지킬
방도를 세워야 합니다. 배수진으로 이길 싸움이 아닙니다’
종구 당시 신립은 작전참모격인 종사관 김여물의 건의를 묵살하고
문경새재를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던겁니다.
더구나 믿었던 기병은 진흙탕 속에 발 빠르게 기동할 수도
없었던 지리적 조건도 무시하면서 말이죠.
희은 그래서 우리 역사에 통한의 패전으로 남게 된 게 바로
탄금대 전투였군요. 아무나 배수진 치는 게 아니란 말이잖아요.
종구 그럼요. 임진왜란 당시 남원 의병장이었던 조경남은
그의 ‘난중잡록’이란 임진왜란 기록물에 이런 글을 남겼죠.
(조경남) ‘한신이 아니면서 배수진을 쳤던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서
아까운 이 나라 장사들을 다 죽이고 말았다.’
희은 한신도 아니면서 한신인 거처럼 함부로 배수진 쳤다가
당대의 장군 장사들을 다 죽인 통한을 말했군요.
종구 개인의 자존심과 개인의 오기, 개인의 명예를 위한 ‘배수진’
이 시대에도 신립과 같은 배수진을 친다면? 그건 나라를 위한
배수진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과 오기를 위한 배수진이되겠죠.
희은 참 아까 신립의 배수진을 반대했던 종사관 김여물은 어찌됐나요
종구 왜적을 향해 돌격해서 무수히 많은 왜구를 죽이고 탄금대에
몸을 던져 순국했는데요. 배수진에 희생된 인물들 또 나와서야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배수진’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금준미주 천인혈(金樽美酒 千人血)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춘향가에 나오는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구절 돌아보겠습니다.
희은 춘향가에서 어사또 이몽룡이 거지 행색으로 변학도
생일잔치에 나타나 풍자했던 시구절 아닌가요?
종구 그래서 더욱 유명해진 구절인데요.
금준미주 천인혈이요(金樽美酒 千人血) 황금술잔에 넘치는
귀한 술은 천사람 백성의 피로구나.
이 한구절로 변학도 생일잔치 자리가 깜짝 놀라게되죠.
희은 변학도가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놀란 구절이기도 하잖아요.
댓구를 이룬 그 다음 구절도 있잖아요.
종구 옥반가효 만성고(玉搬佳酵 萬成膏) 옥 그릇에 날라대는 맛있는
안주들은 만백성 쥐어 짠 기름이 아니더냐?
희은 어사또가 노래한 그 두 구절로 변학도 생신 잔치가
백성들 피와 눈물을 쥐어 짠 잔치 자리란 걸 폭로한
거잖아요.
종구 대대로 우리 선인들은 성대하게 차린 잔칫상을 말할 때
금준이란 말을 했습니다. 황금술잔에 넘치는 술.
이걸 춘향가에서는 백성의 피눈물을 쥐어 짠 것으로
웅변했던 것이구요.
희은 그걸 통쾌하게 단죄한 장면이 바로 어사출도로 이어져서
그 대목 듣는 사람들에게 속 시원한 원풀이를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잖아요.
종구 그런데 우리 선인들은 이 금준이란 말을 똑 같이 쓰면서
멋들어진 풍류 자리로 바꿔주는 반전을 하기도 했거든요.
희은 ‘금준’하면 바로 백성의 피눈물 쥐어 짠 잔치 자리다.
그렇게 돼 있는데, 똑 같은 말을 하면서 어떻게
풍류자리가 될 수 있을까요?
종구 ‘금준’은 ‘금준’인데 황금이란 금자를 거문고 금자로
바꿔서 쓰기도 했거든요.
희은 아, 황금술잔 대신에 거문고와 술이란 ‘금준’을 썼던거군요.
황금술잔은 가거라. 거문고와 술이면 더욱 좋지 않으냐?
종구 여기 조선 중기 문신이고 문장가였던 상촌 신흠이
추포에게 부치다. ‘기 추포’ 가운데 몇구절 보세요.
희은 (낭송) 그대와 작별한 뒤에 거문고랑 술이랑 금준을 같이 즐길
사람 없어서 / 까마득한 저 차현 고개를 수없이 바라본다네 /
종구 차현 고개는 충청남도 공주 인근에 있는 고갯마루인데요.
추포란 사람을 기다리면서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하며
그 고갯마루에 사람 오는 인기척을 기다리는
상촌 신흠의 눈길을 보세요.
희은 그 사람이 아니면 이뤄질 수 없는 자리. 바로 추포가 있어야
거문고 소리도 나고 술 한잔도 오가는 멋스런 자리가 된다.
그런 뜻이군요.
종구 우리 옛 선인들은 이렇게 같은 발음으로 ‘금준’이라고
하면서 글자 한글자만 바꾸면 바로 세상이 달라지는
풍류자리를 만들었던거죠. 황금술잔 금준을
‘거문고와 술’ 금준으로 바꿔서 말입니다.
희은 근데 ‘거문고와 술’은 아무 하고나 이뤄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어서 그렇게 또 사람을 기다렸던 모양이군요.
종구 그 사람이어야 그 거문고에 그 술잔이 오가는 것이다.
자 그럼 우리시대는 어떤 금준이어야 백성이 울지 않을까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금준’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춘향가 이별가와 이별의 노래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춘향가의 이별가와
이별의 노래를 음미해 볼까 합니다.
희은 오늘 금강산에서는 또 다시 혈육간 이별을 해야 하는
생이별의 아픔을 보았잖아요. 오늘부터 다시금 긴긴
이별의 슬픔으로 살아야 하는 세월을 보내야 할 이산가족들.
종구 상봉의 기쁨은 잠시였고, 생이별의 아린 속은 길고 긴
탄식으로 이어지겠죠. 이별하면 판소리 춘향가의 이별가가
먼저 떠오릅니다. 이 구절 생각나실겁니다.
희은 (가사) 일절통곡 애원성은 단장곡을 섞어 운다. “아이고, 여보 도련님!
참으로 가실라요. 나를 어쩌고 가실라요. 도련님은 올라가면,
명문귀족 재상가의 요조숙녀 정실 얻고, 소년 급제 입신양명
청운에 높히 앉어 주야 호강 지내실 제, 천리 남원 천첩이야
요만큼이나 생각허리. 이제 가면 언제 와요?
종구 언제 들어도 이별 앞에 선 춘향이 절절한 흐느낌에
함께 눈물짓게 하는 장면이죠. ‘일절통곡’ 그야말로
통곡으로 시작하는 춘향가의 이별가. 그 다음 구절이
‘애원성’이고 곧바로 ‘단장곡’으로 이어지고 있죠.
희은 이별의 삼중주라 할 ‘통곡’과 ‘애원’ 그리고 ‘단장’이
연거푸 등장하는군요. 이건 가슴 아픈 이별에 꼭 들어가는 거
아닌가요? ‘통곡의 울음’ 그리고 이별없는 세상을 향한
애원. 하지만 온 몸으로 오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
종구 그렇죠. ‘애원성’은 함경도 민요 ‘신고산타령’ 다음에
‘애원성’이란 제목으로 나오기도 한데요.
이별을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통곡’과 ‘애원’
그리고 ‘단장’ 이 세가지 아픔을 한꺼번에 느끼고 있을
헤어진 이산가족들. 그 단장의 아픔을 돌아보게 됩니다.
희은 춘향가의 ‘이별가’ 에도 등장하는 이 ‘단장’에 대해
우리 선인들이 남긴 노래가 꽤 많겠지요.
종구 단장의 아픔을 노래한 옛 사람 노래 가운데
조선 중기 문신 권필은 ‘강남의 단장곡’을 인용해서
이런 노래를 남겼죠. 여기 권필의 ‘추랑에 주다’ 한편 보세요.
희은 (낭송) 벌써 아득하구나 양주의 하룻밤 꿈이/ 거문고니 술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 제발 강남의 단장곡 부르지도 말거라
이땅에 없는 사람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종구 여기서 권필이 말한 ‘강남의 단장곡’은 지금 서울 강남땅
단장곡이 아리라 중국 북송 때 시인 황정견이 전한
‘강남 단장곡’ 사연을 빌어 온 것이죠. 절친한 친구를
잃고 다시 볼수 없는 사별의 고통을 말하는 구절이구요.
희은 중국 쪽에서 빌어 온 단장 노래 말구 우리네 단장곡은
어떤 노래가 전해 오나요?
종구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술 한잔 올리며 노래했던
백호 임제가 남긴 ‘단장의 슬픔’은 한층 승화된
‘단장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죠. 여기 임제의 노래 보세요.
희은 (낭송) 대동강변 봄볕 밟고가는 소녀들/ 봄햇살도 애간장 끊어지리라
끝없이 내리는 저 봄 햇살로 우리님 춤옷 한 벌 만들고 싶다/
내린다 그냥 봄햇살만 애간장 끊어지게 쏟아지누나.
종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봄햇살로 춤옷을 만들어 주고 싶었노란
백호 임제의 속 깊은 사랑도 느껴지는 구절이죠.
‘저 봄햇살로 춤옷을 지어 입고 같이 춤추지 못해 단장의 슬픔이라오’
희은 오늘 다시 이별해야 했던 금강산 이산가족들 단장곡이 들리군요.
‘고전기행 사설여행’ ‘이별의 노래’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비조진, 양궁장(飛鳥盡, 洋弓藏)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중국 초한시대
전쟁의 신이라 일컬었던 한신이 남긴 한구절
돌아볼까요?
희진 한신이 살았던 시대는 진시황 다음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가 중국 통일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때 아닌가요?
종구 그렇죠. 당시 전쟁의 신이라 일컬었던 한신은 한고조를
도와서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됐죠.
헌데 한고조 유방이 의심하는 걸 눈치챘죠.
통일이 된 다음 세력이 막강한 한신을 제거할 기회를
넘보고 있다는 걸 알아 챈 것이죠.
희진 하나의 제국이 세워지면 전쟁을 수행하며 큰 공을 세운
명장이나 일등공신들을 꼭 제거하는 게 무슨 공식처럼
돼 있나봐요. 한신이 그걸 눈치 챈 다음 처세가 힘들었겠군요.
종구 거기다 한신을 힘들게 한 일들이 생겼죠.
바로 전에 항우 밑에서 싸웠던 명장 종리매가 한신에게
투항을 해온겁니다. 한고조는 종리매를 당장 잡아
올리라 했는데 한신은 친구 같은 종리매를 그냥 살려뒀죠.
희진 예전 항우 밑에 있던 명장이니 한고조는 당장 잡아
올려라 했겠죠. 한신 입장은 전에 또 친구였으니 바로
죽일 수 없었을테구요.
종구 그 사정을 안 종리매가 결국 한고조는 나를 죽일테고
한신 너까지 죽일 것이다. 그러니 내 목이라도 가져가서
신임을 얻어 보라며 자결을 하죠. 한신은 그 종리매
목을 가지고 한고조 유방을 찾아갔구요.
희진 한신의 친구였던 종리매. 단지 항우 밑에 있었던
장군이었기 때문에 한고조는 제거해야 했고,
살아보고자 한신에게 몸을 의탁했던건데 종리매 때문에
한신이 난감한 처지가됐군요. 한고조는 용서해 줬나요.
어쨋던 한신이 종리매 목을 가져 왔잖아요.
종구 냉혹한 한고조는 그걸 빌미로 한신을 제거하게 돼죠.
그때 한신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 그 유명한
‘교토사 주구팽이요. 비조진 양궁장’이란 말이었죠.
희진 전쟁의 신. 한나라 개국공신이라 할 한신이 결국
주군의 손에 의해 제거 당하게 됐군요.
그때 남긴 한신의 말이 지금도 자주 입에 오르는
‘팽’ 당했다는 소리의 출처였군요.
종구 그렇죠. ‘교활한 토끼가 잡혀 죽자. 토끼를 잡던 사냥개가
잡혀 삶아지고. 창공을 나는 새들을 다 잡으니
활이 쓸모 없다며 버려지더라’
희진 한마디로 단물을 쏘옥하니 다 빼 먹구서 버림받은
껌과 같은 처지가 됐더란 말이군요.
종구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한신의 죽음을 두고 두고 애석해
했죠. 그가 남긴 말은 지금도 정치계에 가끔 쓰는 ‘팽당했다’
원전이 됐구요.
희진 ‘교토사 주구팽이요. 비조진 양궁장’이라. 요즘도 이렇게
급할 때 사람 이용해 먹다가 속셈을 채웠다 싶으면 버리는
비정한 사람들 있잖아요.
종구 어제의 친구와 어제의 혈맹도 오늘 변할 수 있다는 겁니다.
희은 ‘고전의 샘터’ ‘한신’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김창협과 황현의 대보름 노래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정월대보름달을 노래한
농암 김창협과 매천 황현의 시를 돌아보겠습니다.
희은 농암 김창협은 이 자리에서 몇차례 소개됐었죠.
조선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한 문장가 아닌가요?
종구 훗날 대사성까지 올랐으니 당대의 지성을 대표한
인물이기도 했죠. 김창협의 형 김창집은 영의정 벼슬을
지냈고, 그 당시 ‘육창 형제’라 해서 여섯명의 형제가 다
이름을 떨친 명문가의 후손이기도 했는데요. 여기
김창협이 남긴 ‘석실서원에서 대보름달을 노래한’ 시를 보세요
희은 (낭송) 구름 한 점 없는 구만리라 장천에 / 不著纖雲萬里天
대보름 둥근달이 두둥실 걸려 있구나 / 放開蟾兎十分圓
산 위에는 단장 짚은 마을 노인 달맞이요/ 山頭扶杖聚村老
성안에는 다리 밟는 소년들 많기도 하구나 / 城裏踏橋多少年
종구 3백여년 전 우리네 정월 대보름날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시인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질 게 없는
대보름달 모습. 그런데 달맞이 하는 풍경과
다리밟기 하는 사람들 모습은 많이 변했죠.
희은 요즘도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 하는 모습들
볼수 있는데, 이 역시 일년내내 건강했으면 하는
염원이 담긴 대보름 습속이겠죠.
종구 달맞이도 마찬가지죠. 휘영청 밝게 뜬 정월 대보름 달에다
올해의 소원을 말하고, 비바람 순조롭고 대풍년 들기
바라는 마음을 올렸으니깐요.
희은 성안에 다리밟기 하는 소년들이 많기도 하다.
그때 꼭 소년들만 다리밟기 한게 아닐텐데. 김창협은
유독 소년들 다리밟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은 뭘까요?
종구 정월 대보름 다리밟기 풍속은 남녀노소가 모두
나서서 했던건데. 김창협이 유독 소년들에 초점을 맞춘
까닭은 어른들만의 다리밟기 민속놀이가 아니라서
보기 좋다는 뜻이구요.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에
다리밟기 하구서 더욱 건강하게 잘 자랐으면 싶은 맘이죠.
희은 매천 황현이 노래한 정월 대보름달은 어떤 달이었나요?
종구 매천 황현은 구한말 일본 침략에 항거해서 순국한 항일선비
우국지사로 알려져 있죠. 그 매천이 봤던 대보름날 보세요.
희은 (낭송) 들불에도 살아 남아 봄날이 오리라
이내 정한은 들에서 저 먼곳 땅으로 이어진다
이제부터 안개로 빗줄기로 꽃다이 피리라
동풍아 불어라 봄이 오시게
종구 이 매천의 노래는 정월 대보름날 쥐불놀이 하는 아이들
보면서 지은건데요. 아무리 불태워도 그 들판에 봄날이 온다.
태워버린 자리에 봄꽃이 피리니 동풍아 불어라 봄이 오시게
매천이 그토록 간절히 바랬던 우리땅의 봄날은 온갖 침략에
불탈지라도 봄꽃은 다시 핀다. 그 문화의 시대는 다시온다.
희은 대보름달 아래 타고 또 탈지라도 다시 오는 봄날을 노래한
매천 황현의 그해 정월대보름 간절한 열망이 느껴지네요.
종구 타고 또 타서 잿더미가 될지라도 봄꽃은 다시 핀다.
지금 우리가 다시 피우려는 문화의 봄꽃들은 과연 어떤꽃들일까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농암과 매천’의 정월대보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정두경의 용천검 고사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어제에 이어 ‘용천검’
고사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희은 제주민요에 ‘용천검’이란 노래도 전해오고 있으니
더욱 흥미로운데요. 어제는 조선 후기 인조, 현종 때
문인이고 학자인 정두경의 ‘용천검’ 잠시 돌아봤었죠.
종구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청나라 세력이 침략을
감행할 것이니 국방에 주력해야 한다는 ‘완급론’을 지어
알리기도 했던 정두경은 용천검 뿐 아니라 칼에 대한
글과 시를 여러편 남긴 인물이기도 하죠.
희은 침략에 대비하자는 주장을 했는데도 정세를 오판했던
그 시절, 정두경이 자주 칼을 노래했던 뜻은
용천검 휘두르면서 나라를 구할 명장을 기다렸던 거 아닌가요?
종구 그래서 정두경이 남긴 ‘영고검’이란 시에
(성독조) 추색만천 용야후이니/ 백두비장 억 관산이라.
( 秋色滿天龍夜吼/ 白頭飛將憶關山)
가을빛 가득찬 하늘에 침략자 경고하는 용이 우느니
백발 휘날리며 날아가는 장수가 용천검 들고
변방을 생각하며 달려 가리라. 이렇게 노래하기도했죠.
희은 정두경이 자주 칼을 노래 했다는 것은
그 자신도 용천검을 들고 일어서 침략자를 단죄하고픈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종구 원래 ‘용천검’이 등장한 것은 중국 춘추시대였는데요.
중국 진나라 장화를 통해 발굴돼서 후대에 그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용천검은 나라를 구할 구국의 명장이 휘두르는 칼
이거나. 국난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할 인재를 찾을 때
상징적으로 쓰기도 했던 칼이기도 한데요. 여기
정두경 작품에 등장하는 칼 이름 한번 보세요.
희은 ‘의천검. 용천검. 막야검. 창룡검. 연평검. 칠보검. 충성검.
갑중검‘ 중국 무협 영화에서 봤던 칼 이름도 나오는군요.
종구 갑중검이나 용천검은 같은 뜻으로 쓰기도 했습니다만,
정두경은 병자호란 전부터 새로 일어선 북방족 청나라 침략을
예상 하고 대비하자 주장했는데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게 되자
그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했던 뜻을 엿볼 수 있죠.
희은 한마디로 구국의 명장이여 용천검을 들고 나오라.
나라의 원수와 치욕을 갚자. 그런 울분도 있었겠군요.
종구 여기 오랜 장맛비를 보며 남긴 ‘고우’란 정두경 작품 보세요.
희은 (낭송) 백만겹 구름 구름 장맛비라니/ 푸른 강물 흙탕물 넘쳐흐른다/
누굴까 땅속에 용천검 충성검 빼들고/ 저 푸른 하늘 가로비껴
검은 흑룡을 죽일 명장이.
종구 정두경은 용천검을 충성검으로 부르기도 했는데요.
땅속에 묻혀 있다는 그 용천검 찾아 뽑아들고 저 침략자
우두머리 흑룡의 목을 자를 명장이여 오라 지금 이때에 오라.
외치고 있는 정두경의 모습이 떠오르잖습니까?
희은 용천검에 담겨진 구국의 일념, 침략자를 응징하고자 한 의지.
혼란한 시대에 용천검 들고 영웅이여 어서오라.
종구 그 간절한 구국의 열망이 담겨진 용천검이기도 하거든요.
여 ‘고전기행 사설여행’ ‘정두경과 용천검’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용천검 이야기 龍泉劍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제주민요에 나오는
‘용천검’ 이야깁니다.
희은 제주 토속민요로 ‘용천검’이 전해 오지만 김용우님이
노래한 ‘용천검’도 좋아들 하시잖아요.
종구 제주 민요 뿐 아니라 우리소리 사설에도 등장하는
용천검 이야기는 한두번으로 그칠 일이 아니거든요.
희은 그만치 용천검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는거죠. 참
지난 주 정도전 태고금 고사 때도 ‘용천검’이 잠깐 나왔었죠.
종구 그렇죠. ‘나에게 태고금이란 거문고가 있는데 알아 듣는 이
없어 세상이 텅 빈 듯 하다‘ 노래했던 정도전 작품에도
‘양신검’이라 해서 용천검이 등장했죠. 여기서 한가지
아쉬운게 있거든요.
희은 거문고와 명검을 이야기 한 정도전에게 아쉽다는건가요?
종구 그쪽이 아니라. 용천검 이야기는 대를 이어 노래 돼서
제주 민요 ‘용천검’까지도 나왔는데, 정도전이 노래했던
‘태고금’이란 거문고쪽은 슬쩍 가려졌거든요.
희은 그 이야기도 나중에 다시 풀어 주셔야겠군요. 오늘 용천검
이야기도 몇차례에 걸쳐 이야기 해주신다구 하셨죠?
종구 여기 ‘제주민요 용천검’과 김용우님 노래에 나오는 이 구절보세요
희은 (낭송) ‘찾던 칼을 쑥 빼고 보니 난데없는 용천의 검이라
에헤야라 데야 에헤야라 데헤야라 방애 방애로다.’
첫구절에 나오는 용천검, 어떤 칼인가요?
종구 찾던 칼을 쑥 빼고 보니깐 난데없는 용천검이라.
우리 민요에 이렇게 숨어 있는 대박이 꽤 있거든요.
희은 제주민요 용천검은 대박이었다. 어떻게요?
종구 지난번 정도전 태고금 때 나왔던 겁니다만, 1700여년 전
진나라 풍성땅에서 나왔다는 용천검은 견우성과 북두성에
칼빛을 쏘아 올릴 정도 강력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죠.
그 용천검은 일 개인이 휘두를 칼이 아니라.
나라를 세울 지도자 건국의 검이거나. 망할 나라를 구할
구국의 검이거나.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애민검으로
기다렸던 검 이기도 했거든요.
희은 그럼 정도전이 노래한 용천검은 건국의 꿈을 실은
용천검이었군요. 나라를 구하고자 간절히 용천검을 원했던
사람은 국난시대를 살아야 했던 인물이었겠네요.
종구 그럴수 밖에요. 조선 선조 때 태어나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겪어야 했던 인물 중에 ‘용천검’을 노래한
정두경은 현종대왕이 홍문관 제학으로 불렀을 정도 인물이죠.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북방족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완급론’을 짓기도 했죠. 여기 용천검 노래한 ‘영 고검’ 보세요.
희은 (낭송) 가을빛 하늘 가득 찼는데 밤에 우는 용울음 /
흰머리 장군 용천검 잡고 관산 땅을 생각하네 /
종구 가을밤에 우는 용울음을 들었던 사람, 백발을 휘날리며
나는 듯이 말을 달려 용천검 휘둘러 침략자를 막을 사람을
기다리고 바라는 정두경의 눈길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희은 오늘 정두경의 용천검 고사였는데요. 내일 용천검 이야기
기다려 집니다.
종구 구국의 용천검을 지닌 분 보세요 백발 휘날리며 말을달린다잖아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용천검’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정약용의 춤 이야기 원무(原舞)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다산 정약용의 춤 이야기
‘원무’를 잠시 돌아볼까요?
희은 다산 선생은 과연 우리 춤을 어찌 생각했는지 그
일부분을 돌아보겠군요.
종구 다산이 남긴 ‘원무’라는 글을 보면 춤이 왜 있는가?
춤이란 그저 기분 좋아서 떼를 지어 추는 것이 다인가?
이걸 돌아보게 해주거든요.
희은 춤이란 무엇인가? 그저 기분 좋아 흔들고 뛰고
돌고 그런게 다 춤이더냐? 그렇다면 다산이 생각한
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종구 춤을 다양하게 나눠 볼수 있지만, 다산이 ‘원무’라는 글에서
말하고자 했던 춤은 ‘선조의 공덕을 기리는 춤’이거든요.
희은 그럼 다산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춤은
선대의 공덕을 기리는 행사나 의례용 춤이었던가요?
종구 다산은 ‘원무’라는 글에서 춤을 이렇게 말합니다.
‘춤은 이루어진 일을 상징하여 짜여진 것이다’
희은 ‘이루어진 일을 상징적으로 만든 춤’이라면 아까 말한
그 큰 공적을 이룬 선조를 선양하는 의례용 춤 아닌가요?
종구 우리 전통무용 가운데 종묘제례악으로 추는 춤이나
공자님 공덕을 찬탄하는 석전대제에서 추는 춤이나
다산이 말한 ‘이루어진 일을 상징하여 짜여진’ 면모를
엿볼 수 있죠. 말하자면 <팔일무>라는 춤을 출 때는
위대한 지도자와 군신들 역할을 맡아서 ‘팔팔이 육십사인’이
그 공적을 찬양해서 추게 되는 경우가 그런거지요.
희은 팔일무가 있고 6일무다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거든요.
팔일무는 여덟명씩 여덟줄로 64인이 춘다는 뜻인가요?
종구 그렇죠. 황제가 팔일무를 춘다 했고, 제후국이 6일무이니
여덟명씩 여섯줄 48인이 추는 모습이죠.
다산은 중국 팔일무를 선망하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도 조상님들이 이룬 일을 상징하여 음악도 만들고 춤도
만들어야 한다. 이런 놀라운 말이 여기 ‘원무’란 글 보세요
희은 (낭송) 우리 조선의 태조만 하더라도 남으로 왜구를 무찔러 내친
황산대첩이 있었고 서쪽으로 위화도 맹세가 있어서
화란을 물리쳐 없애고 백성들을 편히 살게 만들었으니
그 성공을 상징할 음악이 없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천자가 아니고는 음악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부당한 말이다.
종구 다산은 우리의 음악과 춤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태조’
공덕을 찬탄하는 악가무가 있지만, 특별히 왜적을 무찌른
‘황산대첩’을 찬탄한 악가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겁니다.
희은 물론 종묘제례악에 조선건국을 찬탄하는 음악과 춤이
전해 오지만 특별히 황산대첩 공을 기려야 한다 그 뜻은?
종구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구한 공덕’을
잊어선 안된다. 그 거룩한 뜻과 영웅적인 역사를
악가무로 재창조 시켜야 한다. 우리 문화의 힘으로 해내자.
희은 역사에 있어 빛나는 승리와 그 영웅들을 찬탄하는 음악과
무용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군요.
종구 중국은 그 전통을 깡그리 깨부수고 단절 시켰다. 이제
우리 전통문화를 통해 다시 배워가고 있는거 보세요.
그러니 찬란한 승리와 그 영웅들 기리는 악가무 계속 나와줘야겠죠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다산의 원무’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원안의 눈과 왕휘지의 눈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원안의 백설과
왕휘지의 눈풍류 고사 잠시 돌아볼까요?
희은 어제 오늘 영동지역 폭설로 고생하시는 분들 많을텐데요.
눈과 관련된 고사, 왕휘지라면 명필로 유명한 인물이잖아요.
종구 1700여년 전 중국 동진시대 명필은 왕희지이구요.
그 아들이 왕서지 왕조지 왕휘지가 있었는데,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를 말하는 겁니다.
희은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리는군요. 근데 원안은 어떤 사람인가요?
종구 중국 후한시대 인물이었으니 2천년 전 사람이었죠.
당시 중국 낙양에 폭설이 내려 수많은 사람들이
눈 속에 고립돼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동네 사람들이 구조해 달라 밥을 달라며 아우성 칠 때
원안은 그냥 눈 쌓인 집에서 조용히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희은 그럼 폭설 속에 조용히 누워 얼어 죽겠다는 건가요?
왜 적극적으로 나가서 사람 살려달라 외치고
눈을 치워 보는데까지 치우고 그래야 하잖아요.
종구 자신이 나서면 이웃사람들 구조가 늦어질 거 아니냐?
자기보다 이웃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조돼야 한다.
그럭하고 눈 쌓인 채로 누워 있었던거죠. 나중에 구조대가
뛰어 들어서 원안을 구출했는데요. 그걸 일러서 ‘원안와설’
이란 고사로 전해오고 있죠.
희은 난 죽더라도 상관없다. 이웃사람들이 단 한사람이라도 더
구조돼야 한다. 그런 뜻으로 폭설 속에 고립돼 있었군요.
원안이란 사람이 거기서 살아서 훗날 무슨 일을 했나요?
종구 효성이 지극했던 원안은 그때 낙양에서 구출돼
추천을 받고 벼슬길에 나가 마침내 재상 반열에 오르게
됐는데요. 재난이 닥칠 때면 이 지경에 백성들이 어찌 살겠는가
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애민정신의 선구자이기도 했죠.
희은 그런 인물이니 2천년을 지난 지금도 폭설 때는
‘원안와설’ 고사를 돌아보게 되는군요. 그렇다면 아까 말한
명필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는 눈과 관련된 어떤 고사를 남겼나요
종구 황희지의 아들 왕휘지 역시 일대를 풍미한 문장가
명필로 알려졌는데요. 산음땅에 폭설이 내리는 밤, 홀로 술을
마시던 왕휘지가 문득 섬계땅 친구 대규를 보고 싶은겁니다.
그래 그 눈속을 헤치며 배를 타고 가서 친구 집 앞에까지
갔다가 홀연히 그냥 발길을 돌리는겁니다.
희은 친구가 보고 싶다고 폭설을 무릅쓰고 찾아 갔는데
그 친구 문 앞에서 돌아오다니 왜요?
종구 오해 받을 장면이죠. 그때 왕휘지가 말하기를
‘흥이 나서 눈을 헤치고 나왔는데 이제 흥이 다해서
그냥 돌아간다!’ 이해가 되시나요?
희은 색안경 쓰고 보자면 예술가의 변덕 아닌가요?
흥이 날 때 기분 다르고 흥이 사라질 때 마음 다르고
종구 그래도 우리의 윤선도는 그 왕휘지 풍류가
천년토록 전해 오는 걸 돌아보면서 이렇게 노래했었죠.
(낭송) 눈속에 뭔 일로 먼길 갔다 돌아왔던가?
그 걸음 걸음 친구만을 위한게 아니었다오.
눈 속에 불끈 일어났던 흥과 눈풍류를 말하자니
영동 쪽 폭설에 고생하는 분들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희은 다른 사람 먼저 구조해 달라 폭설 속에 누었던 원안과
눈 속에서 불끈 일었던 흥을 따라 친구 찾아 나섰던 왕휘지.
종구 오늘은 원안의 마음으로 이웃구조부터 생각해야겠지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원안과 왕휘지’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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