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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잘리고
증 언 자 : 박병준(남)
생년월일 : 196B 12. 13(당시 나이 17세)
직 업 : 재봉사(현재 노점상)
조사일시 : 19857
개요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로 27일 새벽 도청에서 총상을 입었다.
사장의 부상
1980년 5월 18일 양복을 만드는 마찌꼬바에서 재봉을 하고 있었다. 이 공장에 취직하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재봉기술을 배울 겸 집안살림에 보탬 이 되고자 해서였다. 아버지가 다리 관절염으로 직업이 없어 우리 집 형편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형제는 아들 넷이었는데 한참 고만고만하여 아버지,어머니께서는 자식들을 가르치기에 벅 찼다. 대흥양복점은 충장로 고려 아케이드 건물에 있었고 공장은 방림동에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일한 지 3년째 되었다. 공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일감이 많아 언제나 바빴고 양복점 사장의 안집이 함께 딸려 있어서 사장 식구들과도 한식구처럼 지냈다. 재봉을 한지 3년째 되어 월급도 제법 짭짤하게 받았다. 나는 특별히 쓸데도 없어 거의 어머니께 꼭꼭 갖다드렸다. 또한 집과 공장에만 왔다갔다하는 일 이외에 따로 하는 일이 없었다. 약 12시쯤 되었을까, 점심때 일거리가 많아 한참 바쁜데 사장이 헐떡거리며 들어왔다. 이마에서는 피가 붉게 흘렀다. 손으로 상처를 에워싸고 곧 쓰러질 것같이 힘없이 현관문 앞에 픽 기대었다. 이것을 본 나는 재봉을 들리다 말고 달려 들어가 뭔 일이냐고 다그쳤다. 상처를 닦을 경황조차 없었다.
우선 놀라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천조각으로이마에 흐르는 핏자국부터 닦았다. "시위군중이 충장로와 금남로에 많길래 구경삼아 금남로 쪽으로 시위대 틈에 끼여들었는데 계엄군이 최루탄을 쏘며 몽등이로 사정없이 시민들을 두들겨팼다. 도망갈 사이 없이 최루탄을 맞았다. 시민들이 밀리고 밀치는 사이 계엄군의 몽둥이에서 빠져나왔다. 공수단이 쫓아오길래 아무 건물이나 담을 넘어 도망쳤다. 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림동으로 왔다."이야기를 듣고 나니 계엄군이 왜 시민들을 몽등이로 때리고 시민들은 왜 데모를 하는지 궁금했으나 사장에게 물어보지 못하였다. 나는 낮도깨비한테 흘린 것처럼 어벙한 느낌과 놀라움이 엇갈렸다. 사모님과 나는 사장의 상처를 닦아주고 붕대와 반창고로 우선 지혈시켰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도 어안이 벙벙한 듯 "그런 죽일 놈들이 있냐"고 욕을 해댔다. 군인이 왜 시민들을 때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위를하면 다 그러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장이 내일부터 공장에 나오지 말라고 시름없이 말하였다. 공장일이 바빠 보통 날은 거의 쉰 적이 없을 정도였는데, 며칠 동안 연락할 때까지 쉬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일이 끝나고 공장에서 나와 방림동 하천을 따라 걸었다. 걸어가는 도중에 왜 시민들이 데모를 하는지 궁금하여 그날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시내로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불로동 다리에서 구시청 사거리로 갔더니 시위군중들이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전경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골목길에서 얼정거리며 싸우는 것을 구경했다. 전두환이 누구길래 물러가라는 것인지 의아스럽기만 하였다. 또 계엄군은 무엇이길래 저리도 한결같이 목청을 돋우는지? 다만 어린 마음에도 무엇인가를 격렬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구경하다가 최루탄에 흩어진 시위대를 보고 사동에 있는 성하맨션 쪽으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공장은 문을 닫고
5월 19일 아침 어제 사장이 나오지 말라는 말이 사실인가 싶어 공장에 나갔다. 방림동 공장에 가기 위해서는 불로동, 양림동, 학동, 방림동 다리를 지나야 했기에 하천을 따라 걸어가는데, 계엄군들이 다리마다 양쪽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니 뭔지 모르게 적개심이 들끓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길래 사람들을 함부로 때리는 것인지 아직도 의아심이 풀리지 않았다. 버스 한 대가 학강다리를 지날 때 계엄군들이 차를 세우더니 버스에 올라 신분증을 검사하였다. 젊은 사람 세 명을 잡아 내리게 한 뒤 버스를 보냈다. 그 모습만 보고 방림동으로 갔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공장에 들어갔더니 사장이 어제 나오지 말라고 일렀는데 뭣 하러나왔냐며 성화였다. 시내에 돌아다니면 젊은 사람, 늙은 사람 할 것 없이 잡아다가 때리고 끌고 가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나는 설마 계엄군들이 나 같은 놈을 끌고 가 때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걸어서 집으로 갔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허전했다. 날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법이니까. 오후 7시경 친구 병섭이와 둘이서 시내에 가보자고 하여 가톨릭센터로 갔다.
유병섭은 바로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 냉장고 텔레비전, 전기, 전자제품을 수리하는 가게를 하였다. 그는 나 또래의 나이였는데 형님과 함께 일을 하였다. 시내가 어수선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제,오늘 본 것으로는 대중을 잡기 어려워 병섭이가 일을 끝내는 것을 보고 함께 나가자고 하였다. 금남로로 나가 시내구경이나 하고 오자는 심사이기도 하였다. 관광호텔과 한국은행 사이에 시민들과 전경, 계엄군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전경들과 군인들이 시민들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군인들은 지하상가와 광주은행 쪽에 있었고, 시민들은 금남로 2가쪽과 1가 쪽에 운집해서 투석하였다. 계엄군과 전경들은 시민들의 거센 물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과탄을 연방 터뜨리고 사람들을 때리고 달려들어 사정없이 군화발로 짓이겨댔다. 시민들 앞에 다가드는 그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사과탄을 던지던지 나도 그 인파들 틈에서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사과탄을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의식을 되찾은 것은 어느 중국집 식당에서였다. 가톨릭센터 뒤에 있는 식당으로 기억되는데 병섭이가 내 옆에 있었다. 병섭이가 아니었으면 나는 그자리에서 공수단원들에게 끌려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아득한 기분이었다. 의식을 되찾은 다음에도 한참 동안 토하고 컥컥거리고 호흡마저 어려웠다. 얼마 후 정신을 좀 차린 뒤 식당에서 나와 이슥한 길목을 따라 병섭이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틀아왔다.
시위대와 함께
다음날 점심때까지 누워 있었더니 몸이 좀 풀렸다. 노는일이 별로 없었던 평소와는 달리 모처럼 쉬는 한가함을 누리기가 어려웠다. 집에 있는 것이 오히려 답답하였다. 어제 사과탄을 맞았던 이야기는 가족들에게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했다간 밖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할것이 뻔하였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아우성 소리가 귀에 선하였고 그 험한 계엄군들의 흉포한 짓이 머리에 가득하였다. 시민들이 어제와 같이 계속 싸우는지 오늘은 좀 달라진 것이 없는지 밖에 나가야만 궁금증이 풀릴 것 같았다. 집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깥 소식을 듣고 있었다. 나에게 밖으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언질을 주었다. 저녁 일곱 시가 넘어서 춘삼이와 함께 도청 쪽으로 나갔다. 도청에는 중무장한 계엄군들이 살벌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움직임은 이미 노도와 같이 거세어 졌다. 시민들은 도청 앞과 분수대를 향하여 계속해서 투석하였고 차량의 동원하여 차내에다 불을 붙여 군저지선을 향하여 밀어붙였다. 불붙은 차들은 분수대 못미처 가로수를 들이받기도 했으며 불길을 내뿜으며 펑펑 터지기도 하였다. 그러자 계엄군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다발탄과 최루탄을 던져댔고 시민들도 이에 맞서 돌멩이를 던졌다. 한참 동안 시위대를 구경하고 있는데 춘삼이가 집으로 돌아자고 하였다. 나는 이런 불구덩이에서 잘못 빠져 나갔다가는 오히려 안 가느니만 못하다며 조금만 더 있다 가자고 하였으나 춘삼이가 극구 말렸다. 하는수없이 가톨릭센터 뒤로 빠져나가 광주세무서 쪽에서 춘삼이와 헤어졌다. 그때 춘삼아는 도청 뒷골목으로 빠져나갔다고 했다. 광주세무서 앞의 시민들도 도청 쪽을 향하여 석유통에 불을 붙여 밀어보내기도 하였고,지프차와 트럭에 불을 붙여 시동을 걸어 보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부터 나도 적극적으로 구호를 외치며 시위군중과 함께 했다. MBC방송국은 이미 불길에 쉽싸인지 오래되었으나 시위대를 따라 MBC방송국을 지나 무등경기장까지 갔다. 집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등경기장을 지나 구호를 외치며 계속 돌아다녔다. 시위대에 가담하면서부터 어렴풋이나마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되어 갖은 만행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두환이 광주 시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한 술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시민들이 왜 나중에는 불을 지르고 차를 밀어붙이는지도 알았다. 계엄군이 걸어가는 시민을 몽둥이로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맨몸에 팬티만 입힌 채 인간 이하의 구타를 하는 것 등을 보고 더 이상 이제는 견딜 수 없다 하여 분기하여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남대 입구 사거리로 가며 시위를 하였고 다음에는 광주역으로 갔다. KBS방송국이 불타고 있었다. 시민들이 왜곡보도를 일삼는 방송국은 불태워야 한다며 너도나도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던졌다. 화염병과 돌멩이도 던졌으나 나는 아무것도 던지지 않고 그냥 바라보다가 새벽이 되자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역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나를 본 아버지께서 "죽으려고 환장하였냐"고 심하게 꾸중하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않고 아침밥을 먹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전매청 무기탈취
그날이 5월 21일이다. 오전 10시쯤 공원으로 가보았다. 시위차량에 탄 사람들이 각목으로 두드리며 '계엄군은 물러가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 나도 차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열댓 명 정도 타고 있는 시외버스가 지나갔다. 손을 흔들자 나를 차에 태워주었다. 젊은 청년이 광주시내는 지금 무기가 필요한데 전매청에 가서 무기를 가져오자고 말했다. 나를 포함해 세 명이 그 청년의 말에 찬성했다. 세 명만 전매청에서 내려 본관 대형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어디에 무기고가 있는 줄도 모르던 나는 두 사람만 따라갔다. 우리 셋은 전매청 지하실로 가서 창고 자물쇠를 부수고 Ml 두 정, 카빈 열너덧 자루를 탈취하여 공단 사거리로 갔다. 그때 나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광주 시민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는 판에 무기탈취가 무슨 죄냐 싶었다. 엊그제 적십자병원으로 실려온 고등학생차림의 남학생이 총에 머리를 맞아 흰자위만 보이며 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떠올라 우리도 당할 수만은 없다는 적개심으로 타올랐다.
적십자병원에 실려온 그 남학생이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았다는 소리를 듣고 같은 또래의 피끓는 청춘인지라 '나도 저 학생처럼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치가 떨리던 기억이 얼핏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느 누구도 욕되게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단 사거리에서 총을 한 정씩 받고 실탄은 공원으로 가서 받으라고 하여 봉고차로 갈아탔다. 처음에 함께 타고 온 사람들과 갈라져 봉고차가 공원으로 간다기에 그 차를 타고 공원에서 실탄 한 클립을 받았다. 공원에는 사람들도 많았고 무기도 어디서 탈취했는지 여기저기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군대에서 예편했다는 젊은 사람이 총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총기조작법은 가르쳐주지 않고 일단 총을 들수 있는 사람에게만 총알을 나누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디로 가서 싸워야 할 것인가도 지시하지 않았다. 막상총과 총알을 받았지만 어떻게 싸워야 할지 막막했다. 전매청에서 무기를 탈취한 세 명은 로두 흩어졌고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총과 총알을 다른사람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 사람이 달라고 하지 않았는 데도 나는 내가 총 다루는 법도 몰랐고, 그렇다고 지시받을 수 있는 사람도 찾지 못했기에 나에게는 총이 무거운 짐이 돼버린 것이다.
공원에서 내려와 혼자서 적십자병원과 구시청 사거리로 가보았다. 총에 맞아 픽투성이가 되어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속이 메슥메슥해서 차마 눈뜨고 보기가 어려웠다. 광주의 모습이 저렇게 되어가고 있다니 22일부터 25일까지 집에서 시내로 왔다갔다하며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모든 것을 보는 대로 나의 눈에 담았으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는 아직도 몰랐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지만 이미 무장한 시민들 앞에 나설 자격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총을 못 쓰는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26일 오후 6시경에 돌고개에 사는 친구 진경모의 집으로 놀러 갔다. 그도 나와 같이 양복재봉을 하는 친구였다. 그동안 보고 들은 일들을 이야기하며 친구집에 있다가 한참 후에 나왔다. 시위대가 도청으로 모여달라는 방송을 하고 다녔다. 친구가 집에까지 바래다주겠다며 자전거 뒤에 타라고 하였다. 그런데 월산동파출소 앞에서 자전거 쿠사리(체인)가 끊어져 거기서부터 걸어서 집으로 가며 친구와 헤어졌다.
죽음을 다해 광주를 지키자
집에 들어갔더니 아버지에서 나를 보더니 대뜸 야단을 치셨다.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도 밖으로 뛰척나가냐! 때가 어느때인 줄 알고 이제 들어포는 거야." 그때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집을 뛰쳐나왔다. 숨 좀 돌리고 들어가자는 심사에서였다. 집에서 바로 나오면 중앙로가 있는데 거기로 나와 한국은행 쪽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아까 경모 집에서 나오다가 본 시위대를 다시 만났다. 약 4백∼5백 명 정도였는데 플래카드를 들고 다니며 방송하는 것 같아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나도 함께 시위대에 섞여 걸어서 도청으로 갔다. 아마 7시 정분쯤 되었을 때다. 나는 분수대에 앉아서 35구경 권총을 메고 말하는 박남선씨의 말을 귀기울여 들었다. 박남선씨가 외쳤다.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서 두렵거나 무서운 사람, 처자식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시오" 나는 이 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조차 없었다. 두렵거나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죽음을 다해 광주시를 지키고 시민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것은, 5월 21일이후 직접적인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민들의 상처와 시신을 보며 나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따라서 그 자리에 모인 시민들과 함께 도청과 광주를 지키기 위하여 힘을 모은다는 것이 나에게는 두려움이 될 수 없었다.
계엄군이 다시 들어와도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였다. 다만 '나는 여기서 죽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언뜻 스쳐갔다. 박남선씨의 말이 끝나고 보니 1백여 명이 분수대에 남았다. 분수대에 남은 1백여 명 모두 YMCA건물로 들어갔다. 지금은 헬스 클립 회관으로 쓰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장교 출신이 총 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실제로 총을 나누어주면서 하는 교육이 아니었으므로 눈짐작만으로 이해해야 했다. 군대라도 다녀왔다면 다를 수 있었을 텐데리는 아쉬움을 가지면서도 지금 당장 총알 하나라도 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였기에 긴장을 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시민들의 무장력이 얼마나 허술했던가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얼었다. 한방이라도 제대로 쏜 사람은 몇 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우리들의 총기조작법은 허술했다. 총 사격교육이 끝나고 라면을 끓여 먹고 은하수 담배일곱 개비를 배급받았다. 자정 가까이 되었을 때 50여 명은 눈을 붙이기로 하고 남은 50여 땅은 도청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나도 잠을 좀 자기 위해 헬스 클럽 안에서 누웠다. 얼마나 잤을까. 누가 와서 "계엄군이 왔다!"고 소리쳐 벌떡 일어났다. 이 소리를 듣고 잠을 깬 사람들이 일시에 도청으로 헐레벌떡 들어갔다. 도청 정문 앞 경비대 초소에서 카빈총과 총알을 받았다. 그때는 누가 총을 나누어주든 개의치 않았고,계엄군이 온다면 총을 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같이 총을 쏘아 도청과 나를 지켜야겠다는 긴장이 생겼기 때문에 총을 받았다.
장갑차와 탱크까지 앞세운 계엄군들
도청 앞에 약 20미터 간격으로 화단이 있었다. 화단에 몸을 숨기고 총을 겨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엄군의 장갑차와 탱크,트럭 등이 온 시가지에 굉음을 울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놈들은 도청을 향하여 총을 쏘면서 다가들었다. 계엄군의 총알이 날아오는 중에 도청 안에서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숙여 도청으로 들어갔더니 들어간 순서대로 12명섹 조를 편성해 주었다. 도청 뒷골목에 있는 경찰국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열두명이서 그쪽으로 갔다. 도청 뒷골목에 있는 경찰국은 공사중이었고 우리가 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초소가 하나 있어서 나를 비롯해 몇 명이 들어갔고, 나머지는 경찰국 건물로 들어갔다. 계엄군이 약 3미터 앞으로 다가왔으나 우리를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머리에 횐 띠를 두르고 탄창을 열십자로 메었으며 헬멧을 쓰고 있었다. 그때 초소에 있던 우리들은 누구 하나 총을 쏘지 못하였다. 우선 총을 한 번도 쏘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막상 사람을 향해 총을 쏜다는 것이 어려웠다. 똑같은 인간이면서 훈련되고 훈련되지 않은 차이를 아주 절실하게 느꼈다. 계엄군이 초소 쪽을 비껴지나가자 우리는 초소에서 죽은 듯이기어서 경찰국 지하실로 갔다. 이때부터 두려움이 생겼다. 나도 모르게 무심코 피해 들어간 곳이 지하실이었다. 나는 하얀색 바지와 미색 티셔츠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으므로 컴컴한 곳에서 유독 환히 비칠까봐 마음을 조였다. 힘을 뭉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경들의 전투복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곳에 올라가 잠들어버렸다. 왜 잠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너무나 긴장을 했던 탓에 지하실에 숨으면 안전하다는 생각에 잠이 들어버린 것같다. 계엄군이 지하실로 들어오면서 총을 얼마나 난사했던지 잠을 쟀다. 직접 계엄군이 다가와 총을 쏘았던 것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한명도 없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내가 자고 있던 자리의 옆에 문이 있길래 그 문을 열어보았다. 사무실처럼 꾸며진 그곳에 나와 한 조가 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역시 한마디도 않고 서로 긴장된 눈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몇 명은 책상과 캐비넷에 숨어 있었고, 왼쪽에 있는 침대에도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빠져나가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린 것 같았다. 나도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 많은 병력이 도시를 장악하고 쳐들어꼬는데 싸움의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 옆으로 가서 나도 두 손을 쥐고 웅크리고 있었다. 총을 내려놓고 아마 일자로 드러누웠을 때였을 것이다. 이때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하는 울림이 확대되어 귀에 울려왔다. 군인 한 명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 다리를 향하여 총을 여지없이 갈겼다. 지금도 가끔 그때 계엄군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총을 쏜 것인지 의무감에 쏜 것인지 생각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다리에 총을 맞는 순간 집과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두 명의 군인이 들어오더니 나와 옆에 있는 사람을 총맞은 그대로 질질 끌고 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총알에 준은 후 다른 사람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부상
통합병원에서 사흘 만에 의식을 찾아 깨어보니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방위병이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내가 언제 여기에 왔는지 물어보았다. 5월 27일사흘 전이었다며 자기가 항상 아침 일곱 시에 출근하는데 그날 출근할 무렵 통합병원 연병장에 헬기가 내려앉을 때 내가 들어왔다고 일러주었다. 내 기억으로는 총에 맞은 시각히 새벽 3시쯤이었는데 그렇다면 4시간을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했다. 이상한 불길함이 머리에 스쳐갔다. 혹여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는 의식을 잃을 정도로 아팠다. 나는 총에 맞았다는 정도만 알았지 내 다리에 이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못 했다. 병원에서 연락을 했는지 아버지,어머니께서 찾아오셨다. 통합병원에서는 면회도 시켜주지 않았다. 저한 감시하에 한치의 기밀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었다. 해서였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나를 보더니 너무나 기가 막힌지 기점을 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면회도 잘 안 시켜주았는데, 나는 보호자의 허락하에 다리를 수술해야 했기 때문에 부모님께 연락했던 것이다.
두 다리를 절단
관통당한 두 다리의 신경이 잘 움직이지 않아 제패로설 수조차 없었다. 대령 계급을 단 원장이 나를 보며 나이도 적게 먹은 것 같아 일단 다른 살을 대어 수술을 하였다고 일러주었다. 다리를 보니 사방에 파편이 박혀 랠 수가 없었고, 칼자국이 여러 군데 나 있었다.'설마 다리를 아예 쓰지 못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문병국정형외과 과장이 와서 의식을 찾은 지 며칠도 되지 않아 다리를 전달해야겠다고 말했다. 문병국 소령은 그 이후 화순에 개인병원을 차려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통곡을 하며 의사에게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데까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다리는 1차 수술을 했음에도 발목 있는 데까지 썩어 있었다. 동맥신경이 끊어져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2차 수술 때는 발목까지 절단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또 며칠 후 다리를 절단해야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차라리 수술대에서 죽었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살고 싶은 의욕이 조금도 없었다. 오른쪽 다리는 발목, 왼쪽 다리는 무릎을 절단하는 수술을 하였다. 고통스런 날들을 6개월이나 통합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병원에서 조사를 받던 초기에는 도청에서 잡힌 경위에 대해서 주로 물었다. 조사 관들도 귀찮게 군다거나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내가 나이도 어린 데다가 다리까지 절단되었으므로 남들보다 잘해준 것 같았다. 그런데 며찰 후였다. 내가 누워 있는 병실로 수산관 두 명이 문을 뻥 차고 들어오더니 "박병준이가 누구야?" 한고 소리쳤다. 그리고 두 명이 곁으로 달라붙더니 게드를 밀고 나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당시 앉아 있을 수도 없었으므로 다리를 쭉 뻗치고 누워 있었다. 수사관 두 명이 사정없이 나의 뺨을 쳤다. "왜 전매청에서 총을 탈취했다는 딸을 안 했어! 너와 함께 총을 가지고 온 놈이 다 불었으니까, 어서 불어 !" 그러고는 또 연거푸 상체를 사정없이 때렸다. 전매청에서 있었던 일을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은 그로 인하여 어떤 후환이라도 있을까봐 나름대로 궁리하여 말하지 않았던 것인데, 함께 갔던 사람이 나의 이름을 대고 전매청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딴 것이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떼었다. 나중에는 그 사람을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묶은 채 내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와 대질까지 시켰다. 하는수없이 전매청에 가서 충을 가져왔다고 진술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수사관이 나를 침대에 앉히고 번호를 매긴 뒤 사진을 다. 그 후로는 수사관도 오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편히 있는 병원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생각하면 씁쓸하고 어줍잖은 일도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두어 가지 있다. 나를 간호하던 후송병이 바람을 쐬어주려고 휄체어를밀고 밖에 나간 사이에 그 후송병이 맡았던 또 다른 환자가 그 틈을 이용하여 탈출하였던 것이다. 책임자가 후송병에게 얼마나 심하게 욕을 보였던지 후송병이 나를 미워했던 일이 생각난다. 탈출했던 사람은 다시 붙들려 왔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병원이 한때 발칵 뒤집혔다. 또 한 번은 교수들에게 들어온 사식을 바로 나누어 먹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며칠이 지나서야 교수들이 제대로 해치우지 못하니깐 우리들과 나누어 먹다가 모두 설사를 한 일이 있었다. 그때처럼 교수들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모든 교수님들이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집단생활에서 보이는 배운 사람들의 태도도 나에게 적잖은 실망을 주었다. 지성을 자랑하던 사람들의 실제 모습은 기대치에 훨씬 못 미쳤다. 통합병원에서 나온 뒤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광주시내에 있는 양동시장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나와서인지 정신이 없어서 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시내가 무척 거리감 있게 느껴졌다.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되어 무릎 관절을 빼내는 수술을 하였고, 그 후로도 우측 다리의 발목을 고정시키느라 수술을 수십 차례 해야 했다. 수술한 자리의 부작용 때문에 내의식과는 무관하게 수술 자리를 붙잡아야 했을 때의 고통이란 정말 말로 다 하기 힘들 정도였다. 때로는 나의 등살을 떼다가 다리에 붙이는 수술을 하였는데 현미경 수술이라고 했던 것 같다.
더구나 환절기가 되는 1월,7월은 통증이 심했고 움직이기가 거북하였다. 병원에 두서너 달 입원해 있다가 또 기독병원으로 옮겼다. 완쾌될 수 있다는 말은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 병명을 알 수 없다는 진단하에 수술을 너덧 번 더 했다. 나중에는 다리 신경이 없으니까 튜브를 끼워 다리를 눕혀놓기도 하였고 발꿈치에 돌덩이 같은 것이 자라나 재수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의족을 달아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언제 또 약을 먹고 수술을 해야 할지 모르니, 8년여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 몸뚱이 하나로 벌어먹으며 단련되었는데 ‥‥지금은 핫도그가게를 하며 벌어먹고 있기는 하지만 내 다리는 다시 찾을 수 없다.
부상자회 창단멤버로 활동
나는 부상자회가 처음에 창단되었을 때부터 가입한 열네명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1982년 무진 교회에서 창단되었을 때 우리 모두는 보상금이 문제가 아니라 전두환정권이 광주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임을 밝히는 것으로써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밝히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회원들의 투쟁을 가열차게 추진시키는 데 그 의의를 두었다. 현재로서는 보상금을 타는 것보다 광주 시민들이 어떻게 희생되어 갔는지 그 종적을 찾는 것에 부상자 모임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정권이 전두환 씨의 죄과를 낱낱이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가득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요즘 사람들 중에 세끼 굶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먹을 것에만 눈이 어둡다면 역사는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리라 여겨진다.부상자회와 5월 청년동지회에서는 이러한 취지 아래'전두환,이순자 구속하라'는 구호를 끊이지 않고 국회의사당 앞에 나가 외치고 있으며 때론 단식투쟁을 통해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끊임없이 전개하며 싸우고 있다. 다친사람이 다친 사람의 심정을 안다고 몸으로 싸워본 사람만이 그 뜻을 알 것이다. 대중들이 맘껏 살 수 있는 날이 될때까지 우리의 싸움은 계속될 건이며 나는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계속 싸워나갈 것이다. (조사·정리 양홍진)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건강하고 멋진 새해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