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노동절, 또는 "노동자 성 요셉 축일". 몇 년 전 오늘 적었던 글을 다시 읽는 마음이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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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교회인 로마 가톨릭교회는 오늘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 축일'로 지킨다. 이른바 '메이데이'에 맞춘 축일이다.
1955년 교종 비오 12세가 이 축일을 제정한 데는 '공산주의자들 주도로 진행되는 노동절'에 대응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인간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의 현실에 관한 교회의 관심이 이어지던 상황에서 적절한 행동이었다. 소위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나왔지만, 노동자의 현실과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런 일은 1891년 교종 레오 13세가 '노동헌장'이라고 잘 알려진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반포했을 때 시작됐다. 이 역시 산업자본주의 이후 노동 현실과 사회의주의적 해결책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왔는데, 이 문서는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 내 사회 교리의 중대한 전환을 이루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 특히 노동자와 약자에 관한 교회의 관심이 이 회칙 이후로 계속 나오며, 사회 교리의 전통을 강화하고, 교회의 실천에 깊은 근거를 마련했다.
이러한 역사 안에서 교회는 어느 곳에서는 진보 이념과 대결하기도 하고, 어느 맥락에서는 약자와 억압받는 이들을 향한 공동의 관심 속에서 서로 연대하기도 했다. 그 서로 배움과 연대에 대해서 외부의 억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부에서도 서로 의심의 눈초리가 서로 매섭게 오가는 역사를 반복했다. 교회 안에서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참여신학, 여성신학,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거나 불릴 여러 흐름이 역사를 지탱했다. 대결이든 연대이든 긴장 관계든, 서로 현실 인식과 논리, 그 행동을 꼼꼼히 살피려는 노력은 양측에 큰 성장의 힘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지금 사회 이념과 교회 신앙은 각자 혹은 서로 어떤 근거를 대고 어떻게 성찰하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그 서로 배움과 연대의 질과 결은 어떠한가? 종종 주장과 행동에만 빠져서 자기 현실 인식과 성찰이 부실한가 하면, 성찰에 몰두한다며 실천을 유보하는 일은 없지 않은가? 다시 접점을 찾을 곳은 어디인가? '현장'이라고만 말하면 그 처지가 너무 다양하고, 그 이익 관계의 맥락이 너무 복잡해졌다.
늙어가는 징표라며 나무라도 좋고, 이미 기득권에 들어선 변명이라고 핀잔해도 괜찮다. 소위 '수구'는 논의 자체에서 제외하기로 하더라도, 요즘 생각이 더 어지럽게 깊어지고는 한다. 허다한 리버럴의 주장이 면밀하거나 세심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않은 채 흐르고, 교회는 하나 마나 한 논리와 언어의 쳇바퀴만 돌리고 있다. 그저 몇 마디 산뜻한 수사나 정의로운 겉모습으로 그 식상함을 채색하는 일로는 길이 한참 멀다. 생각이 성근 리버럴은 사회나 교회 안에서 그리 성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자주 목격되고는 한다. 중세 권력자들은 얕고 성급한 개혁 주장을 '바보제'에 담아 오히려 통치에 이용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의 역사와 근거에 훨씬 더 깊어져야 한다. 그저 패거리나 끼리끼리 모임에서 안위와 찻잔 속 혁명에 골똘할 일이 아니다. 시기와 험담을 정의와 공평으로 치장할 일이 아니다. 지배하는 기득권은 겉으로는 움추린 척하지만, 뒤로는 웃는다. 훅하고 불면 금방 나뒹구는 현실이 냉혹하다.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목수 성 요셉'(1642)을 다시 들여다 본다.
늙은 노동자 요셉은 자기 일에 골몰하지만, 불빛을 들고 돕는 어린 예수의 관심은 불빛과 더불어 그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을 향한다. 일에서 잠시 눈을 돌린 아버지 요셉의 눈길은 어린 아들을 향해 철없다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빛에 환하게 빛나는 아들 예수의 얼굴에서 새로운 미래를 발견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