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4월 합평회 '젊은 날의 추억' (윤춘화) 수정 작품 올립니다.
젊은 날의 추억
윤 춘 화
답답한 시내를 빠져나온 버스는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시원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목적지는 20대에 직장생활을 한 충청북도 청주다.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각자 사는 지역이 다르고 바쁜 삶으로 모이는 일이 쉽지는 않아 겨우 날을 잡았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설렘으로 내 마음이 버스보다 앞서 달리고 있는 듯하다.
1988년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조치원행 기차에 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빠가 있는 회사에 취업이 되었다. 경상도에서만 살아오다가 처음으로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이다.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가득 찬 마음이 기차 소리처럼 ‘덜커덩덜커덩’ 방망이질을 한다.
첫 출근 날, 인사를 하고 회사 여기저기를 소개받았다. 회사는 무전기와 무선전화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작은 부품에서 시작하여 하나하나 더하여져서 완성품이 되어 나왔다. 이렇게 만들어서 수출까지 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하였다. 같은 옷을 입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앞에 앉아 각자의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다.
회사생활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 발목을 잡은 건 사투리였다. 경상도에서만 살았던 내게 충청도 사투리는 낯설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해 되묻는 일이 많았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어들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자기 집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토요일 퇴근하고 우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덜컹거리는 시골길을 달려 친구 집에 도착하자 부모님들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짐을 내려놓고 친구가 다니던 학교, 어릴 때 놀던 곳, 동네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 후로 우리는 더 친해지게 되었고 젊은 날의 추억을 만들어갔다.
밤새 달리는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간 부산 여행, 산을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 다니던 등산, 복잡한 거리를 재잘거리며 다니던 시내 거리, 교양을 쌓는다며 찾던 연극공연장, 맛집이라며 줄 서서 기다려 먹던 식당,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젊은 날의 추억에 젖어있는 사이 버스는 청주에 도착하고 있었다. 낯익은 거리를 찾아보고자 애썼지만, 도시는 하루게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청주에 사는 친구들이 마중을 나와 있다. 오랜만에 듣는 충정도 사투리에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일찍 나오느라 힘들었던 피곤함이 사라지고 생기가 돋는다. 대전에 사는 친구가 도착하고 우리는 함께 친구 차에 올랐다.
예전에 자주 다니던 식당으로 갔다. 이른 시간이라 우리가 첫 손님이다. 자리를 잡고 나니 줄 서서 기다려 먹던 때가 생각났다. 기다림이 힘들다고 투덜대던 그때가 아련하다. 고기를 다 먹을 때쯤 종업원이 와서 능숙한 솜씨로 밥을 볶고는 호일 종이로 감싸고 밥공기를 엎어 놓는다. 지글지글 소리가 군침을 돌게 한다. 잘 익은 볶음밥과 추억도 함께 먹는다.
식당을 나와 친구 집으로 가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다른 친구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른 봄이라 아직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차와 함께 그간의 소식을 전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백일이 지난 손녀를 보는 즐거움, 객지로 아이들을 떠나보낸 허전한 마음, 취업을 앞둔 아이들 걱정, 엄마가 돌아가신 후 힘든 시간 등 보따리 안에는 친구들의 애환이 가득 들어 있었다. 술술 풀어져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고개가 절로 숙어진다.
대청호로 자리를 옮겨 봄 마중을 하고, 유명하다는 커피숍에 가서 늦게 합류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다. 딸의 결혼 소식을 전한다. 예비 사위를 처음 소개받고 상견례를 하면서 어느새 짝을 찾아가는 딸이 대견하기도 하고, 보낼 생각에 서운하기도 하다며 오묘한 감정을 이야기한다.
스물다섯 살이 지나면서 어머니는 딸의 결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중신을 부탁했고 맞선을 보게 했다. 고향에 가서 맞선을 보고 왔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더는 만나지 말라며 말린다. 엄마는 마음에 든다고 하고, 친구들은 멀리 떠나지 말라며 반대했다.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 자주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지만, 진심으로 축하하며 결혼식에도 참석해주었다. 연애 상담을 하고 결혼 소식을 전하며 함께 고민하고 축하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자식의 결혼 소식을 전하며 좋기도 하고 허전한 마음을 쏟아내고 있다. 어느새 우리 나이가 이렇게 되었구나!
시간이 쏜살같다. 첫차를 타고 출발했는데 어느새 막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짧다며 다음에는 1박 2일로 만나자고 한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해외여행을 가자고도 한다. 바쁘게 살다 보면 이 약속이 언제 지켜질지 잘 모르지만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어둠이 내려앉은 고속도로를 다시 달린다. 출발할 때 설렘은 뿌듯함으로 변했다. 친구들을 만나 바쁘게 살아가던 일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젊은 날의 추억과 함께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하며 나도 열심히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익숙한 도로가 나타나자 긴 꿈에서 깨어난 듯하다. 잘 도착했다고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친구들아 고맙다. 다음에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