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학수 스포츠부 차장
스포츠 기자로 겪었던 가장 인상 깊었던 월드컵의 한 순간을 꼽으라면 2006년 독일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베를린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외국 기자들과 뒷이야기를 주고받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는 프랑스를 승부차기 끝에 누르고 통산 4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프랑스 '아트 사커'의 지휘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네딘 지단이 경기 도중 자신의 누이를 매춘부라고 모욕하며 자극했다고 알려진 이탈리아 수비수에게 박치기한 뒤 퇴장당하는 해프닝이 터졌던 결승전이었다.
"원래 이번 월드컵은 우리 것이었어"라고 브라질 기자가 말했다. 2002년 우승팀이었던 삼바 축구 브라질은 당대 최고 스타로 꼽히던 호나우디뉴가 '외계인'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전성기였다. 또 베스트 11 모두 정상급 선수들이 즐비했다. 우승은 떼어 놓은 당상 같았지만 프랑스에 져서 8강에서 탈락했다. 그는 "우리에게 선수들과 함께 울고 웃고 화내는 감독이 있었다면…"이라고 자조했다. 당시 선정적인 일부 유럽 신문들의 가십난엔 연일 브라질 선수들과 밤을 함께 보냈다고 주장하는 여인들의 후일담 기사가 올라오곤 했다. 그만큼 대표팀 관리와 정신자세가 엉망이었다.
이탈리아 기자는 "대규모 승부 조작 사건이 터져 국민의 지탄을 받고 세계 축구의 웃음거리가 돼있던 우리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뛰었다"고 우승 비결을 들려줬다. 마르첼로 리피 당시 이탈리아 감독은 선수들의 이런 절박감을 승부근성으로 연결하는 절묘한 리더십을 보였다.
독일 기자는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야 겨우 1990년 월드컵 우승의 거품에서 벗어났다"며 웃었다. 사실상 독일 통일이 이뤄진 1990년 월드컵에서 독일은 3번째 월드컵을 들어올렸다. 당시 독일은 "이제 동독의 우수 선수까지 가세했기 때문에 독일이 오랫동안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자만했다. 하지만 독일은 세대교체에 실패하며 '녹슨 전차 군단'이란 오명을 벗지 못했다. 월드컵 무대가 스타 놀음이 아니라 선수들의 기량과 절박함을 엮어 경기장에서 폭발시킬 줄 아는 리더십의 경연장이라는 걸 절감했던 순간이다.
이번 브라질월드컵에서는 지난 10년간 세계 축구를 호령하던 '무적함대' 스페인이 고작 두 경기 만에 조별리그에서 탈락이 확정됐다. 스페인 '티키타카 사커'(짧은 패스를 끊임없이 주고받는 축구)의 초라한 퇴장이다. 스페인의 이른 몰락은 결국 리더십 부재에서 온 '인재(人災)'라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한동안 '명장(名將)' 소리를 들었던 스페인 감독이 전성기를 함께한 노장들을 의리 때문에 중용하면서 뛰어난 젊은 재능들을 벤치에 썩혀 놓았다는 지적이다. 이미 2년 전부터 스페인 전술에 대항하는 역습 전술이 쏟아졌지만 옛날 방식을 고집하다 무너졌다는 비판도 설득력을 얻는다.
러시아와의 첫 경기에서 선전한 한국은 다음 주 16강 진출을 놓고 알제리·벨기에와 격돌한다. 모두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이 우리보다 앞서는 팀들이다. '하나의 팀(one team)'을 강조하는 홍명보 감독의 리더십과 젊은 선수들의 패기는 한국의 열세를 예상하는 세계 축구 도박사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다.
첫댓글 이 칼럼이 쓰여진 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알제리에 2:4, 벨기에에 0:1로 패배하였습니다. 홍명보 감독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여러 매체에서 '홍명보의 몰락'이란 제목까지 보입니다. 단순히 16강에 들어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근호/김신욱/김승규 등 성과를 보인 좋은 선수를 두고도 박주영/이청용/정성룡 등에 집착한 리더십을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팀에 박주영을 제하고는 스트라이커가 없어서 감독의 고민이 컸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입니다.
벨기에전에서도 후반 21분에 잘 뛰고 있던 김신욱을 뺀 후 10분 뒤에 1골을 먹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용병술의 리더십이 잘못됐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두 사람의 스피치가 기억될 만합니다.
- 골 키퍼 김승규 : "월드컵은 경험을 쌓으러 나오는 자리가 아니라 실력을 겨루는 자리다. 이번 경기를
경험이 아닌 실패라고 생각한다."
- 전 국가대표 이영표 :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다. 월드컵은 증명하는 자리다. 경험했다는 게 좋은
의미가 있지만 월드컵은 경험보다는 보여주는 자리다. 월드컵에 경험을 쌓으러 오는 팀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