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31. 주일예배 설교(요한복음강해 8)
요한복음 2장 1-11절
베스트 오브 베스트
■ 유튜브가 가져온 혁명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1인 미디어 방송 시대를 가져 온 것입니다. 기존의 미디어 방송은 다자(多者)에 의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이런 공식을 여지없이 허문 것이 유튜브입니다. 혼자서 촬영, 편집, 방송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유튜브의 혁명’은 미디어의 혁명이 아닌 ‘유통의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좋아요’ 조회수와 ‘구독자’ 수, ‘댓글’ 수, 그리고 ‘시청자들의 광고시청시간’ 길이 등을 알고리즘에 의해 종합하여 수익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구독자가 100만 명이 넘으면 월수입이 수 천 만원을 상회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많은 조회 수와 구독자 수, 그리고 댓글 수를 가진 본문을 꼽으라면 지금 읽은 본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술꾼들에게 가장 높은 ‘좋아요’를 받는 본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사건은 술꾼들을 위해 마련하신 사건일까요? 위로는 되겠지만 과연?☺
■ 요한복음을 읽다보면, 사건과 사건, 이야기와 이야기가 이어지는 지점에 시간이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부했던 본문들부터 볼까요? 1장 29절에는 “이튿날”, 35절에도 “또 이튿날”, 43절에도 “이튿날”이라는 시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2장 1절도 그렇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1장에서 보는 “이튿날”은 ‘그 다음날’이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사흘 째 되던 날”의 시간에 대해서는 앞의 사건인 예수와 나다나엘이 만난 후 사흘 뒤라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의 공생애의 시각으로부터 사흘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난 후 사흘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신 뒤 사흘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가나 혼례잔치가 시작 된지 사흘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견에 동의가 되십니까?
사실 우리의 궁금증은 ‘왜 예수께서 가나 혼례에 가셨을까?’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흘째 되던 날”이 무엇이냐는 부착적인 관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차적인 관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의 일차적 궁금증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사흘은 앞의 사건들과 연관된 사흘이 아니라, 안식일과 연관된 사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으면서 겪는 어려움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요일을 말할 때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우상숭배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요일 대신 안식일로부터 시작해서 숫자로 카운트를 합니다. 안식일 지나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이런 식으로 카운트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사흘째 되던 날은 안식일 후 세 번째 맞는 날입니다.
이러한 셈법으로 볼 때, 본문의 가나 혼례가 열린 날이 안식일 후 삼일 째 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아, 그렇구나.’하고 지나가기에는 안식 후 세 번째 날이 갖는 의미가 깊습니다. 유대인들의 혼례풍습은 안식일 후 세 번째 날 하는 것이 전통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고요? 그들은 이 날을 축복받은 날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 전통은 하나님의 창조사건에 기인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사흘째 되는 날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다른 창조 날에는 한 번밖에 없는데 사흘째는 두 번이나 나옵니다. 바로 이것을 근거로 안식일 후 세 번째 날(화요일)이 축복받은 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런 풍습과 전통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나 혼례가 시작되고 난 삼일 뒤에 방문하셨다는 것 보다는 혼례 당일 날 가신 것으로 읽는 것이 상식적이 됩니다. 나사렛에서 머무시던 예수께서 막 챙기시기 시작한 제자들과 13km가 떨어진 가나에서 열리는 혼례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함께 하신 제자들은 아마 기본적으로 빌립과 요한이거나 이들이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 그런데 본문은 시간과 장소를 이처럼 제법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표적이 비유나 상징과 같은 문학적 요소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의 표적이 허위가 아닌 이처럼 시간과 장소를 갖고 있는 역사적 표적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적’(=기적=표적)이라는 헬라어 용어가 ‘뒤나미스’(dynamis)와 ‘세메이온’(semeion), 두 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세메이온’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헬라어 ‘뒤나미스’는 ‘능력있는 행동’이란 뜻입니다. 이 이적들은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사건들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세메이온’은 그 기적들을 행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이적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가나 혼례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표적 중 첫 번째 표적(=기적)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이 사건을 소개하면서 이를 표적이라고 하면서 사용한 헬라어가 ‘세메이온’입니다. 이것의 의도는 이 표적의 주인공은 순종한 하인도, 도움을 요청한 어머니 마리아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을 소개하는 목적이 단순히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표적(=기적)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피 흘려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야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었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의 의도가 예수의 그리스도(신성, 神性)를 밝히 드러내는데 있었다면, 우리가 본문을 읽는 태도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읽어야 당장 어머니에게 내던진 말투의 문제가 이해될 수 있습니다. 패륜아 혹은 싸가지 없는 녀석들이나 내던질 만한 말투였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봅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세상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투는 특히 유교권에 있는 우리로는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패륜아이거나 싸가지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당당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사건의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곧 반전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은 했지만, 어머니의 청을 들어드렸고, 연회장의 당혹을 해결해주었지 않습니까? 6절 이하에 보면,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붓게 하고는 이를 모두 포도주로 바꿔주시지 않았습니까? 연구자들에 의하면, 돌항아리는 80~120리터의 물이 들어갈 수 있는 항아리였답니다. 여섯 개의 항아리였으니 대략 150명 정도가 충분히 마실 수 있는 양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의 역사인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세메이온(표적)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예수는 어머니에게 “여자여”라는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의 예수와 마리아의 대화는 ‘신과 인간의 대화’였던 것입니다. 패륜아/싸가지의 태도가 아니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부탁은 시기적으로 어머니 마리아가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는 아직 자신의 신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5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는 이러한 어머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답은 7~8절에 있습니다. 참으로 자신의 입장 보다 어머니가 민망하지 않으시도록 입장 정리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패륜아도 싸가지도 아닌 것이 여기서도 증명이 됩니다. 신으로도 사람으로도 다 충실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완전하신 분이셨음이 증명됩니다.
■ 우리는 이 완전하신 분께서 내주신 포도주가 얼마나 대단한 포도주였던가를 알아야 합니다. 9~10절입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최고의 포도주를 주신 것입니다. 기왕에 베푸시는 은혜, 베스트로 제공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이 아닌 최고로 말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베스트, 아니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이십니다. 주님의 표적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 베스트 오브 베스트의 주님이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우리를 챙기신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날마다, 매순간 기적 속에 사는 행운아인 것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