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 거문도 영국해군 나무
다도해의 뭍섬들을 떠받들 듯 지키고 있는 거문도는 섬이 3개여서 삼도, 삼산도라 불렀다. 거문도라는 이름은 청나라 정여창이 섬에 와서 섬 주민들과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아 거문(巨文), 또 섬이 검게 보여 ‘검은’이 거문이 되었다고 한다.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에 사람이 살고, 고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이 세 섬이 웅성거리듯 모여 남북으로 문을 열되 바깥 바다의 거친 파도를 막아주니 천혜의 항구였다.
하지만 남해의 숱한 섬 중 하나이고, 성가신 왜구의 징검다리 섬이라는 조선의 무관심을 틈타 영국해군이 남하하는 러시아에 맞선다며 1885년 4월 15일 덜컥 점령했다. 그리고 고도에 진지를 구축, 1887년 2월 27일까지 제독 윌리엄 베일리 해밀턴 이름을 따 ‘포트 해밀턴’이라 했다. 당시 영국해군 규모는 2~3백, 많을 때는 7~8백 명, 군함도 5~10척까지 들락거렸다.
이때 일본 상인이 여성 5명을 데려와 거문도 서도에서 유곽을 운영했다. 1886년 6월 18일 저녁, 영국해군 12명이 2척의 보트를 타고 이곳에 놀러 가다 전복 사고로 해병대원 ‘피터 와드’ 일병이 익사했다. 영국해군은 시신을 찾아준 조선인에게 사례하고, 다음날로 유곽을 폐쇄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 여자 무당을 짝사랑하다 죽은 영국 수병 때문에 젊은 여자가 빠져 죽으면 영국인 귀신이 잡아갔다는 괴담도 남았다.
불법점거였지만 영국해군은 주민들에게 일감과 급여를 주고 섬의 여성들에게 되도록이면 농담을 하지 말라는 군령을 내렸다. 식민지 주민에 대한 탄압과 갈라치기 분열 정책으로 악명을 떨친 영국이 거문도에서는 예의 바른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정부로부터 1원 한 푼 받은 일이 없던 주민들은 영국해군이 철군할 때 매우 서운해했다. 또 영어를 배워 영국해군과 의사소통을 하고 함께 노래도 부르고 사진도 찍었다. 일요일이 없었던 조선에서 일요일 (Sunday)이라서 논다는 영국해군의 말에 노래하고 노는 문화를 ‘산다이’라 하게 되었다.
아무튼 아쉽지만 영국해군이 떠난 뒤, 조선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처럼 거문도의 지리적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1888년에 거문진을 설치했다가 1895년 갑오개혁 후 폐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본인이 들어와 고도를 차지하고 어업기지로 만들어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등대를 설치했다. 이들로 인해 일감이 크게 늘자 동도와 서도의 주민들이 고도로 모여 큰 마을을 이루어 1930년대 들어서는 하루 수백 척이 출항하는 항구가 됐다.
거문도와 백도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섬이다. 특산물로 해풍쑥과 삼치, 은갈치,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가 있다. 30여 종의 바닷새, 풍란, 석곡, 눈향나무, 동백, 후박나무 등 아열대 식물과 큰 붉은 산호, 꽃산호, 해면 등 170여 종 생물이 서식하는 해양생태계의 보고이다.
오래전 옥황상제 아들이 이 섬에 와서 용왕의 딸과 서로 사랑하였다. 수년 후 옥황상제가 아들을 데리러 신하를 보냈으나, 아들도 신하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화가 난 옥황상제는 아들과 신하들을 돌로 변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크고 작은 섬 백도가 되었고, 봉우리가 ‘일백(百)’에서 한 개 모자라 ‘한일(一)’을 뺀 ‘흰백(白)’자 백도가 되었다.
여기 영국 해군 기지가 있었던 곳은 고도의 거문리 뒷산 옛 거문초등학교 터이다.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테니스장이 있었다. 또 조금 산비탈을 걸으면 영국 해군묘지가 있다.
우연인지, 누가 심었는지, 묘 옆 낮은 돌담 가에 한 아름 향나무가 있고, 그 옆에 두 아름 해송이 우뚝 서 있다. 나무지만 이역만리 타향에 묻힌 영혼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듯싶어 눈을 들어 푸른 바다를 보는 마음이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