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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기쁨
기다릴 수 있는 사람만이 어떤 것을 기다릴 수 있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기다림이 필요한
어떤 것을 가질 수 있다.
모든 것을 즉시 해결해야만 하는 사람과
모든 욕구를 즉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살아갈 능력을 갖기 어렵다.
그런 사람의 삶은 흥미가 없으며 욕구를 즉시 해결하려는 데만 혈안이 된다.
배고픈 짐승은 기다리면서 기다림을 통해 기쁨이 커지게 할 수 없다.
오직 사람만이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을 잊어버렸다.
기다리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사람은,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없고 충만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기다림은 마음을 넓힌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사람 안에 삶을 증진시키는 긴장을 형성한다.
이러한 긴장 속에 참된 삶과 충만한 삶이 우리를 기다린다.
- 글 : 안셀름 그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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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FB
권 토마 (순)
+ 찬미예수님
어려웠던 집안, 아버지는 그 가족들을 위해서 멀리 배를 타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전히 오지 않는 아버지의 밥그릇에 밥을 가득히 담아서 아랫목에 차려두셨습니다.
‘내일이면 내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겠지’하면서 말입니다.
아마도 그 할머니는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어느 골방에서 묵상에 잠겨 있는 수도자에게 침입자가 나타났습니다.
조용한 그 방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껴안고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그는 드디어 입을 열어 애통하게 부릅니다.
“ 주님~! ” 주님의 흔적이 비치자, 그는 어디론가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집니다.
그제서야 그는 애타게 흐느끼면서 “ 그따위가 감히 나를 희롱하다니.”하면서...
“ 나는 네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오지 않느냐? ”
달려오신 분은 빛이신 주님이시고,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이는 어두움인 사탄인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는 언제든지 사탄을 부르는 유혹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더욱이 이것을 잘 영위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안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줄 준비를 늘 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그리 어렵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보다 오히려 나약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토록 강한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누구를 생각하거나 누구를 도울 위치에 있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사는 곳으로 흐르는 강물은 때로는 많은 비로 넘쳐서 많은 피해를 가져다주곤 합니다.
그러나 이 강물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잘못 건드리게 되면 홍수로 인한 피해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태국의 대도시를 범람하게 만든 자, 바로 자연을 거스른 자들에 대한 심판일 것입니다.
구불구불한 강물은 때로는 조용한 백사장을 만들고, 때로는 주변의 절벽을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자연을 정화시키고,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생활이 순탄하지 아니 한 것은, 우리가 그런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원동력이 있음을 깨달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천시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의 이치와 반대로 가기에 어리석게만 보이는 이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또한 우리가 분명히 그분의 희망을 보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로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주님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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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일
2011. 12. 4
마르코 1, 1 ~ 8
♠ 복음 연구
* 1~3절 : ‘복음의 시작’인 요한의 활약상은 이미 구약성서에 예고되었다. 마르코는 이사야 예언자의 글이라고 하나, 사실은 2절은 탈출 23/20, 말라 3/1을 합친 인용문이고 3절은 이사야서 40, 3절을 인용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심부름꾼’과 ‘광야에서 외치는 이’가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인물인데 비하여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공적 활약을 준비하는 인물로 바뀌었다.
* 4절 :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요한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며 죄 사함을 …’이라 한다. 요한의 활동 가운데 세례를 베푼 행위가 돋보였기 때문에 그는 ‘세례자’로 통했다. 그가 세례를 준 시기는 27년경이고 장소는 광야인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요르단 강 동부에 위치한 베다니아였다. 요한 세례자의 특징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대로 각자에게 한 번씩 세례를 베푼 것이다. 요한은 본디 하느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상하여 백성을 회개시키려고 세례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마르코는 그 동기를 고쳐 요한은 예수님이 공적으로 활약하실 것을 예상하여 그렇게 했다고 한다. ‘죄 사함, 회개, 세례’의 관계는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 ‘죄’이고, 범죄 한 인간이 하느님께로 되돌아서는 방향전환이 ‘회개’다. 이처럼 회개한 인간은 ‘죄 사함’을 받아 그분과 정상화된다. 그리고 ‘세례’는 인간이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는 도리를 드러내는 상징적 행위라 하겠다. ‘선포하다’와 ‘선포’는 본디 심부름꾼이 심부름 보낸 이의 이름으로 중대한 내용을 공포하는 행위를 뜻한다.
①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도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외치는 것을 그렇게 불렀다.
② 그러나 마르코는 그리스도교의 선포 내용을 넓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까지 포함시켰다.
③ 한걸음 더 나아가 요한 세례자가 ‘자기보다 더 강한 분이 자기 뒤에 오실 것을’ 선포했고,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제자들도 예수님의 선포활동에 가담했고, 예수께 치유 받은 이와 목격자들이 치유사건을 선포했다고 한다. 복음과 선포는 그 내용이 같은 까닭에 둘을 합쳐서 복음 선포라 한다.
* 5절 : ‘유다 지방’은 이스라엘을 삼등분할 때 최남단 지방이고, 그 중심부에 예루살렘이 자리 잡고 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요르단 강 동부 베다니아는 유다 지방과 인접한 곳이다. 당시 유대교인들은 속죄의 날에, 그리고 유대교 계통의 꿈란 수도자들은 계약 경신의 날에 죄를 고백했다. 그런데 죄를 대충 고백했는지, 아니면 낱낱이 고백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
* 6절 : 요한은 사막의 유목민처럼 입고 먹었다. 아울러 요한의 의복은 엘리야 예언자 의복과 같다. 엘리야는 죽지 않은 채 승천해 있다가 세말에 다시 온다는 전설이 있는데, 바로 요한 세례자가 하늘에서 내려 온 엘리야라는 설이 나돌았다. 그리고 요한은 빵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아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 7절 : 1세기에 그리스도교와 요한교가 대립하여 서로 자기네 교조가 더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7절은 그리스도교계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주장하려고 만든 말인 것 같다. 예수님이 세례자보다 시기적으로 늦게 출현했으나, 품위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는 것이다.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세례자는 예수께 그런 일을 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한다. 비슷한 말이 어록을 베낀 마태 3, 11과 요한 1, 27에도 있다.
* 8절 : 어록에 의하면 요한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시리라 예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요한은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여러분에게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 뜻인즉 요한의 물세례를 거부하면 하느님의 불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받으리라는 경고다. 그럼 마르코가 불세례 대신 성령세례를, 어록 작자가 불세례와 더불어 성령세례를 내세운 이유가 무엇일까? 1세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요한교의 세례에는 성령이 작용하지 않고 오직 자기네 세례에만 성령이 내린다고 했다. 이런 배경에서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로 고쳤을 것이다.
♠ 복음 요약 : 마르코는 예수의 사생애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고, 오직 공생애만 서술했다. 마르코가 공적인 예수 사건을 기록하면서 왜 요한 세례자 활약부터 시작했을까? 세례자 전승을 전해 준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 전승을 전해 받아 이 대목을 꾸민 마르코 자신도 세례자를 예수의 선구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례자와 예수를 밀착시켰던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① 아마도 세례자 자신은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자처했을 것이다.
② 세례자의 제자들은 세례자가 처형된 다음에 그를 메시아로 추대했다. 그들은 요한 교회를 설립하여 예수 교회와 맞섰으니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고 요한 메시아의 제자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다.
③ 예수 교회는 한편으로 세례자를 존경하고 또 한편으로는 격하시켰다. 세례자는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예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평을 내렸다. 마르코는 이런 세례자관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에게 몇 가지 전승요소를 물려받아 이 대목을 꾸몄다. ‘하느님의 아들
이신’은 바티칸 사본과 베자 사본, 그리고 시나이 사본 교정문에는 있지만 시나이 사본에는 없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란 뜻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바오로가 이 낱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에 관한 전갈을 일컬어 복음이라 했다. 그러나 마르코는 복음의 내용을 넓혀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까지도 복음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친히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해 선포하신 복음이기도 하고 또한 예수의 말씀과 행적, 죽음과 부활과 재림에 관한 복음이기도 하다. 곧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도 되고 복음 내용으로 선포되는 객체도 되신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그리고 그분의 활약과 종국에 관한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한다. 마르코는 세례자를 예수 메시아의 선구자로 보았기 때문에 그를 복음의 효시로 삼았다.
♠ 대화 방향 : ① 대림시기에 교회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따라 모든 신자들이 판공성사를 보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내가 구체적으로 회개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②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저마다의 ‘소리’들입니다. 내가 가진 작은 소리로 전해야 할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오늘 독서, 복음을 잘 읽고 묵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성서주해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보득솔 (가톨릭청년성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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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
2011. 12. 11
요한 1, 6-8, 19-28
♠ 복음 연구
* 6~8절 :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온 것이다. 빛에 대한 증언을 듣는 사람들이 증언하는 요한이 아니라 빛이신 주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 19~23절 : 요한은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냐는 질문에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니다’ 이것은 쉬운 것 같지만 사실 쉽지 않다. 요한의 겸손함을 드러낸다. 심지어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외치는 이의 목소리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드러낸다.
* 24~28절 :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주님은 성령의 빛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이에 바리사이들은 ‘그럼 당신을 보낸 그 사람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소?’라고 물었을 것이다. 이에 요한은 엄청난 말을 한다. ‘바로 너희 가운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못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은 신발끈을 풀어주는 종에 위치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한다.
♠ 복음 요약 : 세례에 해당하는 고대 낱말은 포티스모스( photismos)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생물시간에 배웠던 광합성(photosynthesis)과 어원이 같다. 빛이신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빛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빛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빛을 느낄 수 있으며 알 수 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당 안에서만 주님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도 우리 가운데 서계시는 그분을 모르고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성인들은 바로 빛으로 오라는 말씀을 마음속에 새긴 사람들이며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느낀 사람들이다.
♠ 대화 방향 : ① 자신을 표현할 때 요한처럼 겸손함을 드러내고 있는지 성찰해보자.
② 생활 속에서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느낀 체험을 서로 나누어 보자.
♠ 참고 문헌 : ▪ 캐롤린 노리스 “수도원 산책” (생활성서)
▪ 스테폰버니, 놀라운 변화, 마음으로 만나는 요한복음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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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2011. 12. 18
루카 1, 26 - 38
♠ 복음 연구
* 26~27절 : 하느님은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여섯째 달에 다윗 왕가의 요셉과 약혼한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셨다. 마리아는 순결한 처녀이다. 두 약혼자는 증인들 앞에서 결혼에 동의하고 각기 부모의 집에서 약 일 년 동안 따로 살다가 약혼남이 약혼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결혼식을 올리면 그 때부터 정상 부부생활이 시작되었다.
* 28~30절 :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이 그를 선택하여 총애하고 그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말은 마리아가 천사의 축하인사를 받을 때 처음으로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천사의 축하 인사를 들은 마리아는 이러한 은혜로운 인사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해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마음속으로 그 뜻을 물었다. 천사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마리아를 위로했다. 하느님은 마리아의 공로나 자질을 봐서가 아니라 무상으로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다. 이 은혜는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 당신 아들을 마리아의 몸에 잉태하게 하여 그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31~33절 : 천사는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가 동정의 몸으로 아기 예수님을 낳게 하시는 것이라고 알렸다. 또 아기 예수님이 일찍이 나탄 예언자가 다윗 왕에게 후손 하나와 영원히 지속하는 왕권을 약속한 예언을 실현하시는 분이라고 밝혔다. 예수님의 이러한 신비스러운 신분은 다음과 같이 초대 그리스도교회가 믿고 따른 예수님의 신비이다. 첫째,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나 그 밖의 어떠한 사람보다 더 하느님의 인정을 받으신다는 뜻으로 위대하시다. 둘째, 예수님은 최상의 권능을 행사하시는 하느님과 친밀하고 특별한 부자관계를 맺고 계신다. 셋째, 예수님은 다윗 왕가의 메시아로서 왕권을 행사하실 것이다. 넷째, 예수님은 다윗의 왕좌에 앉아 야곱의 12지파를, 즉 온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고, 그 분의 왕권은 영원하다.
* 34~35절 : 마리아는 동정의 몸으로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한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천사는 그의 동정잉태가 생명을 주는 성령, 즉 하느님의 권능에서 비롯된 것이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에 힘입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마리아에게 임한 성령은 삼위일체의 성령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창조력을 뜻한다. 마리아는 이 권능의 그늘 밑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영의 힘으로 동정녀의 모태에 메시아를 탄생하게 하셨다. 이처럼 하느님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성령의 힘으로 가능하게 하셨다.
* 36~38절 : 천사는 어떻게 동정잉태가 가능한지 묻는 마리아를 이해시키기 위해 친척 엘리사벳이 기적적으로 임신하게 된 경우를 제시했다. 임신할 수 없는 그가 늙은 나이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배려로 임신한 지 여섯째 달이 되었다는 것은 천사의 말이 옳음을 입증한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를, 먼지에서 인간을 지어내신 하느님은 엘리사벳의 경우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동정잉태 기적을 이루실 수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이러한 권능을 믿고서 그분의 말씀에 조건 없이 순종하고 그 분이 주신 사명을 이행할 결심을 표명했다. 마리아가 내린 신앙의 결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하느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데는 하느님의 은총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도 중요한 몫을 했던 것이다.
♠ 복음 요약 : 처녀인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여인인 엘리사벳이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을 잉태한다. 인간 구원은 하느님의 개입과 그 분의 능력과 은총으로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라는 마리아의 순명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셨고, 마리아를 통해 세상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리아는 신앙인의 귀감이다.
♠ 대화 방향 : ① 우리가 하찮게 보는 곳에 위대함이 숨어 있다. 나는 특별한 곳에서만 은총을 찾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봅시다.
②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 (가톨릭신문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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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탄 대축일
2011. 12. 25
요한 1, 1 - 18
♠ 복음 연구
* 1~2절 : ‘한 처음’이란 창조 이전의 영원하고 무한한 시간을 뜻하며, ‘말씀’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라는 말에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말씀이신 아들이 구별되지만 일치되어 있음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예수님이 한 처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면서 함께 존재했고, 함께 영광을 누렸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느님이셨다는 뜻이다.
* 3절 : 말씀이 하느님의 창조에 적극 참여했다는 뜻으로 ‘통하여’라는 말은 말씀이 창조의 통로나 수단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과 말씀이 함께 창조했다는 뜻이다.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말에서 창조는 그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말씀은 동격이고, 하느님과 말씀은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강조한다.
* 4절 : 만물은 그분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빛’이란 예수님이 사람들을 구원, 생명, 진리, 지혜로 인도하는 등불을 말한다. 이 말은 결국 말씀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빛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 5절 : ‘어둠’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등진 인간세계, 악의 세계로 타락한 인간세계를 뜻한다. 그런데 어둠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빛을 거부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어둠 속에 있는 인간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나타낸다.
* 6절 : 여기서 갑자기 세례자 요한을 언급한 것은 그가 빛(예수님)을 증언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 7절 : 예수님을 증언해서 사람들이 그분을 믿도록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셨다.
* 8절 : 세례자 요한을 빛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가 아니라 구세주를 증언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분명하게 금을 긋고 있다.
* 9절 : ‘참된 빛’이란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하고 진실하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신 예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구세주라는 것이다.
* 10~11절 :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고 만물을 만드셨지만, 인간들은 자기들을 만드신 분이고 구원하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배척하고 죽였다. 예수님이 당신의 땅에 오셨으니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주인이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 12절 : 12절에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이며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뜻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물과 성령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권한’은 뭔가를 할 수 있는 권리와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권리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은 하느님의 은총이고 선물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진 일이기도 하다.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는 인간이 선택할 일이고, 거부했을 때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들이 져야 한다.
* 13절 :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자연적인 출산 과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과정, 즉 세례성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 14절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란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 즉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으로 부른다.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말의 원문은 ‘우리 가운데에 천막을 치셨다.’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 광야를 떠돌 때의 만남의 장막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즉 그때 하느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도 사람들 가운데에 거처를 마련하시고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실제로 보았다는 고백이고 증언이다.
* 15절 :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우월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로 예수님은 인간 세계에 오실 때 세례자 요한의 뒤에 오셨지만 사실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분이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보다 위대하신 분이다.
* 16절 : ‘우리 모두’는 14절에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한 즉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은총의 은총을 받았다.’라는 말은 끊임없이 주어지는 은총을 받았다는 것이다.
* 17절 : 예수님이 주시는 은총과 진리로 얻는 구원의 방법이 구약시대 율법으로 얻는 구원의 방법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한다.
* 18절 :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거나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반박하는 말이다. 하느님을 아무도 본 적이 없다. 모세도 이사야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을 알 수가 없었는데,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그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이 말은 예수님만이 하느님을 보았음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음을 나타낸다. 즉 예수님만이 하느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 복음 요약 : 요한복음 1장 1절~18절은 보통 ‘로고스 찬미가’ 라고 부른다. (로고스는 ‘말씀’ 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이고, 예수님을 가리킨다.) 초대교회 당시에 여러 종류의 그리스도 찬미가가 있었고
로고스 찬미가는 그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로고스로 인한 새로운 구원질서와 계시행위 및 그에 대한 믿음의 내용이다. 이 찬미가는 요한복음의 머리글로서 앞으로 전개될 요한복음의 내용을 미리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 대화 방향 : 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백성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인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②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가는지 생각해보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 참고 문헌 : ▪ 성경 해설 (송영진 모세 신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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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아나스다시아(치영) 자매님께서 얼마 전(2011.11.10) 선종하신 故 김 스테파노(치삼) 신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유고 글을 함께 나누고자 소개합니다.
스테파노 신부님께는 아들 신부가 두 분이 있었는데, 이 아우구스띠노(혁구, 금상동성당 주임) 신부님, 송 그레고리오(형석, 현역 군종사제) 신부님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신부님의 책상 위에 놓인 글이기에...
故 김 스테파노(치삼) 신부님
+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이렇게 예술성을 지닌 아름다운 성당에서 첫 사제를 탄생시킨 삼천동 교우 여러분들은 축복받은 신자들입니다.
제가 주제넘게 여러분 앞에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이유는 송 그레고리오 사제를
신학교에 보낸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입학하는 과정과 신부되기까지의 걸어온 길은 그이 어머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해성중학교 1학년때 친구들과 꽃동네를 다녀오더니, 난데없이 “어머니! 저 신부님이 되고 싶어요.”하며 신중하게 말하더랍니다. 얼마나 놀랐겠어요. 아직 신아에 대해서 모르는 집안이라고 가족 중에는 누구하나 믿는 분이 없는
데, 그래도 항상 신중하고 성실하고 남에 대한 배려도 많을 뿐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잘 도와주는 착한 아들이라 놀래기는 했지만 그동안 무심코 지냈습니다. 그래도 유일하게 집안을 지키고 가계를 이어갈 유일한 외아들인지라 신부가 도대체 무엇하는 사람인가를 알아보니, 장가도 안가고 혼자 살면서 교회를 위해서 평생 일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아주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이 한 학기가 끝날 무렵, 세례를 받고 아주 기쁨에 넘쳐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비록 반대는 했지만 어머님도 아들의 믿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어머님의 마음을 믿는 것처럼, 어머님도 아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당신도 93년도에 효자동성당에서 ‘수산나’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습니다. 신부가 되겠다는 신념하나로, 그러니까 외교인 집안에서 어머님의 입교까지 그레고리오 학생에게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과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품받기 전 3년 전에 아버님께서 입교하시고, 많은 친족들이 입교하게 되었지요...
아들이 어머니를 믿고 신뢰하는 것처럼 어머님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이병호 주교님께서 <좋은 우리 집>이라는 책에 쓴 글을 보면,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어머님이 용돈을 주셨을 때 함부로 그 돈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몇 마리 안되는 닭에서 얻은 계란을 파신 돈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용돈을 어디에 썼느냐고 물으시지 않기에, “어머님은 내가 돈을 어디에 썼는지를 왜 묻지 않으세요?” 하고 물으면“나는 너를 믿으니까... ”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키가 한 뼘씩이나 크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은 나의 성장을 자극하고 자긍심을 갖게 하고, 신비로운 힘을 주셨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나도 어릴 때 생각이 납니다...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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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들의 이모저모 한 컷 >
<10월 월례회 FB 미사 직후 지도신부님과 한 컷> <10월 월례회 회합 모습>
<원곡동성당 FB, 사강수녀님들과 한 컷> <사강수녀원에서의 모임 모습>
<안산 원곡동 F.B 2011년 정기총회> <당산동 F.B 기금 마련 칡캐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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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1년 10월 1일 ~ 30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