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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36) 솔로몬의 기도로부터 배운다, 역대하 1:7-17
한국교회처럼 기도를 강조하는 교회도 없고, 한국교회 성도들처럼 뜨겁게 기도하는 성도들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도의 양이나 열정만큼, 올바른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하는 데에는 항상 의문점이 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때요? 기도의 양도, 열정도 줄어들고 있으니, 올바른 기도는 더더욱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솔로몬의 기도로부터 두 가지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올바른 기도는, 마음을 드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적지않은 성도들이 ‘일천번제’라고 하는 헌금을 드리면서 작정기도를 하곤 합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린 후에 지혜를 구했더니 하나님께서 지혜 뿐 아니라 부와 재물과 영광까지 부어주신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입니다. 물론 정성과 마음이 부어집니다. 수고롭습니다. 매일 매일 1000날동안, 혹은 1000번의 예배를 지켜가면서,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일이 아닙니다. 아프지도 말아야하고 드릴 예물이 늘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여기의 ‘번’ 자는 횟수, 숫자 ‘번’이 아니라, 태워드릴 ‘번’ 자이기 때문이지요. 일천 마리의 희생을 태워드린 제사입니다. 천 일동안 혹은 천 번의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백성들과 소를 가지고 올 때는 열 마리, 양을 가지고 올 때는 스무 마리, 염소를 가지고 올 때는 30마리 이렇게 가지고 오지 않았겠습니까? 100-200만원을 천원 이천원씩 나누어서 똑같이 매일 드리는 헌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천’이라는 숫자는 정확하게 ‘천’일 수도 있지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매우 많은 수’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제물로 번제를 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셀 수 없는 숫자였으니 천을 넘어 2천에 가까웠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수를 헤아릴 수 없이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대었던 사람, 오늘 그가 솔로몬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웅녀처럼 100일이 아닌 21일만에 사람되기를 바라며 일천번제를 드리기도 하고, 딱 그렇게 내가 삼년, 1000번까지만 해보고, 그렇게 나의 헌신와 수고의 마지노선을 정해두고 그때까지 응답없으면 때려치우겠다는 심정으로 드리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 솔로몬이 드린 ‘일천’이라는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제사를 드리고 있는 배경과 마음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만날 것이라고 말이지요. 또한 성전을 지어야하니 성막이 있는 곳에 와서 먼저 확인을 해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솔로몬은 그저 하나님을 안 찾으면 버리신다니까 어쩔 수 없이, 혹은 성전을 짓기 위한 공부와 연구만을 위해 기브온 산당에 왔던 것이 아니지요?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한, 다른 왕자들보다 부족한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을 다짐하며 이 ‘일천’의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서 드린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정성을 보임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도구, 혹은 주변에 나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 앞에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믿음과 정성의 소유자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이해하고 동참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솔로몬이 ‘일천’의 번제를 드리고 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복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솔로몬의 모습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어주신 은혜와 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여 솔로몬처럼 일천 번제를 작정하여야 뭔가를 받을 수 있다는 마음에서 나온, 하나님께 뭐라도 받을 것을 목적으로 하고 드리지 말고, 그저 이미 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더욱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지켜 보호해 주시길 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께 온전한 마음과 기뻐하시는 뜻으로 오늘 우리의 예배와 예물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드리는 예물, 일천 번이든, 일만 번이든, 아니 단 한 번의 예물이라도 아벨과 아벨의 제물처럼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예물이 되면 좋겠고, 불의한 이익에서 나온 예물말고, 정직하게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 앞에서, 그 마음과 동기는 늘 한결같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해서 드리는 예물,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도를 위해서, 요새 배운대로 하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진리에 속한 지식을 위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물을 드릴 때마다, 우리와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는 복된 제사가 우리의 제사가 되시길, 혼잡한 탐심과 허영, 경쟁심, 인간적인 목적들을 버리고 순전하게 드리는 예배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나아가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어려운 환경을 잘 헤쳐나가기 위해, 학업 중인 자녀들을 위해 누구보다 뛰어난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는 대로 오늘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 ‘실력’이거나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순간에 붙들고 적용해야 할 하나님의 마음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God-listening Heart 하나님을 듣는 마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는 마음 자세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에게 재판을 받으려고 나오는 백성들의 말 역시 잘 ‘들으려고’ 하는 마음 자세를 말하기도 합니다. 전자는 전적인 수용이요, 내 뜻과 마음, 내 생각과 경향을 버리는 들음이라면, 후자는, 둘 중에 하나에게 점수를 더 매겨, 너가 더 죄인임을 가려내기 위함이 아니라, 서로의 인간적인 변호와 비방들이 난무하는 곳에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함인 것이지요. 그저 잘잘못을 가려주고 한쪽에 손을 들어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저 서로를 향한 미움의 자리에 하나님을 심기 위함인 것이지요. 그래서 어느 쪽이 과실이 많고 어느 쪽이 조금 더 합당하냐를 판별해내는 지혜가 아닙니다. 둘다 살려내는 하나님의 마음을 솔로몬은 듣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래요. 솔로몬은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임을 인식한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하나님과 백성을 잘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제사장, 중보자, 통로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오늘 우리가 구하듯, 우리의 입신양명이나 자랑이나 스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원수를 갚고 내 문제를 해결해서 손해보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앞에서 하나님 종답게 쓰임받기 위해 구한 것이 오늘 본문이 기록하는 ‘지혜’요 ‘지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듣는 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전자전입니다. 아버지도 마음을 위해 기도했는데, 솔로몬도 역시 마음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다른 것보다 마음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마음을 잘 다스려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도, 곁에 있는 이들을 통해 바른 교훈이 주어져도, 우리의 마음은 부끄럽게도 길가와 돌짝밭과 가시덤불이 가득한 것입니다. 미리미리 자주자주 마음밭을 돌보질 못하니 어느 새 단단해져 있고, 돌들도 가득하고, 가시덤불이 무성하게 덮여있는 것이지요?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새가 물어가고, 싹도 못틔우고 죽어버리고, 조금도 내 안에서 자라나질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밭을 기경하질 못해, 두루파고 거름을 주질 못해, 허락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마음들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나무, 오랜 기간 땅만 버리고 있는 나무, 맛을 잃어버린 소금들만 가득한 것이지요. 오늘도 어김없이 부어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다른 이에게 갔으면 열매가 맺혔을 것이, 오늘 하필 나 같은 이에게 주어져, 그저 소멸되고 있고, 낭비되고 있는 것이지요.
보십시오. 오늘 본문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잘 다스리며, 오늘도 하나님을 듣는 마음을 구했으니, 솔로몬은 예배를 제대로 드렸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복을 주실 만한 예배는, 하나님을 찾아대는, 일천의 번제를 드리기까지의 수많은 시간과 오랜 반복이 필요했던 것을 오늘 본문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입니까? 더욱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주시면, 그 마음대로 살 수 있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시선과 당신의 원하심을 보이시면, 오늘 그 시선으로 그 원하심을 나의 사명과 목표로 살 수 있는 오늘 우리의 마음이 한 구석탱이라도, 한번 한번의 예배를 통해, 드디어 그래도 조금, 말씀을,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심고 길러낼 수 있는 좋은 밭이 일구어지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솔로몬의 기도가 흡족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못되었는지, 당연히 해야 할 일들, 누군가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주고, 오래 전에 훔치고 빌린 돈을 갚았다는 이야기가, 폐지줍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주었네, 길을 잃은 노인을 잘 보호해 가족들에게 데려다 주었네 하는 이야기들이 뉴스에 나옵니다. 그러곤 답글이 달리지요.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다라고요.
이걸 보며 우리는 옷을 찢고 마음을 찢고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오늘 그것을 구했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서 찾아오셔서 복을 주시는 것이지요. 당연한 일인데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당연한 일에 기뻐하시며 복을 주십니다. 뭐라고 하면서? 12절, 네 전의 왕들에게도 이런 일이 없었고, 네 후에도 이런 이이 없을거다 하면서 말이지요.
반대로 생각해볼까요? 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찾아와 복을 주시지 않을까요? 잘하고 있는데 조금 더 잘하지 못해서입니까? 아뇨, 애시당초 우리는 당연한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 속에는 온통 하나님의 마음이 온데 간데 없다는 말씀이겠지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 그 말씀과 삶의 본보기들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연한 일인데, 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수 일, 수 주, 혹은 수십 년을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지 할똥 말똥 하는 것일까요? 왜 자기를 그렇게나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해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 하나가 돌아오면, 여태껏 뭐하다가 이제서야 당연한 일을 시작하는 이인데, 왜 그렇게 저 천국이 온 천사들과 의인들이 함께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셔야만 했을까요?
솔로몬의 기도는 오늘 우리가 드려야할 기도,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드려야할 당연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한 대로 살아야지요.
하나님께서 오늘도 마음을 폭포수같이 부으실텐데, 그 마음을 뿌리내리고 굳게 서서 감사로 살아가지 못하는, 오늘도 그 마음을, 인간의 생각이 선별하여, 그나마 내 마음에 드는 것만 행하는 우리로 끝내 남아 있다면, 글쎄요. 죽을 때까지 한 번이라도 하나님이 찾아오시겠습니까?
성경은 참 속상하고 안타까운 책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네 인간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 싶은 정도이지요. 당연한 것을 구하면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당연한 일을 행하면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당연한 섬김을 보이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고 구제하고 섬기고 공경하면, 진실하고 화평하고 정직하면,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더욱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행하며 사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당연한 것을 힘들어하고, 당연한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당연한 것 때문에 시험에 들고 원망하는 우리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일천의 희생을 드린 솔로몬의 제사를 보면서, 우리는 저 거대해 보이는 겉모습에, 압도적인 스케일과 그 결과에만 시선을 빼앗기면 안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저런 정도의 제사나 받으시는 분이라고, 너네들의 예배로는 복 받기를 꿈도 꾸지 말라고 딱 선을 그으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합니다.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행하고자 하는 솔로몬의 저 하늘에 닿고 있는 간절한 마음을 말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일천 번제의 형식과 겉모습만 답습하면, 그야말로 우리는 저 불교의 샤머니즘의 유교의 기복적인 기도와 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신 생애, 우리에게 주신 사명, 우리에게 걸고 계시는 기대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다라쉬 찾아대야 합니다. 멈추지 말고 예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과 허영을 이루기 위해 드리는 일천 번제라면, 우리의 소원을 위해 찾고 행하는 신앙생활이라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
언제라도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하기 전’, 아니 어떤 일이든, 냅다 덤벼들기 전에 먼저 목적을, 목표를, 방향을, 잘 점검해보시길 축복합니다.
일전에 살펴보신 신앙생활의 목표대로, 육체의 자랑거리, 신뢰할만한 육체를 만들어가기보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그간 내게 유익해 보이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길 수 있는 우리,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붙잡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이르기 위하여, 그분을 본받고 만나기 위하여, 마침내 그분의 천국에 영생의 소망에 들어가기 위하여 더욱 정결하고 깨끗한 우리가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게 당연한 일, 복 받을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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