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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땅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창 13:1-18/ 2013. 6. 16 주일 설교
기독교인이라면 비전이라는 단어를 잘 알아야 합니다. 비전이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묵시’(하존)의 뜻은 환상, 이상, 비전(vision), 미래성을 가진 꿈을 말하고, ‘방자히 행한다’ 함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뜻합니다. 때로는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나 약속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경거망동한다’는 것입니다. 하존(묵시)은 정신이 한 곳에 통일되어 나를 잊고 있는 경지 곧 무아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이 기도할때에 그 이상을 보았습니다(단 1:17, 8:15, 8:2, 9:21,24). ‘비전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방자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목사든, 교인이든, 그 누구든 방자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전의 사람」/ 이재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코 앞의 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에,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비전이 있는 사람과 비전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 비전이 있어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에는 분명히 다릅니다.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늘 비전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의 매일의 삶을 대충대충 살아갑니다. 비전을 준비하며 이루어가는 삶과 그냥 하루하루 살기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 하면 생각이 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그는 75세의 나이에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 즉 비전을 품고 살았던 삶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비전을 갖고 살아가시는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비전대로 하나님은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인이든 가정이든 공동체이든 주신 비전은 반드시 성취됨을 우리는 확신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품고 날마다 전진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헤어지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길을 떠난 후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어려운 시련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은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견고하지 못한 신앙을 통해 그는 위험의 순간을 맞이했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과 구원의 약속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은 축복을 이룰 환경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환경적인 부함이 그들에게 찾아왔습니다.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축복의 여정가운데에는 그의 조카 롯도 함께 하였습니다. 롯은 아브람의 형제인 하란이 낳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란은 그의 아버지 즉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보다 먼저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습니다. 데라가 고향을 떠났을 때 그의 아들가운데 아브람가족과 그의 손자 룻을 데리고 떠납니다. 다른 아들인 나홀의 동행여부는 알려지지 않는데 그의 삶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들은 갈대아의 우르에서 가나안땅으로 가고자 하다가 결국 하란이란 곳에서 체류하였고 거기서 아버지인 데라는 죽습니다(창11:32). 그후에 아브라함은 이곳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여정을 평가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합니다.
1. 아브라함의 결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더라도 이런 저런 핑계로 불순종했다면 그는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선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결정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2. 과거와의 청산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 친척들과의 관계 등 삶의 여러 가지면에서의 단호한 청산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현재 익숙했던 모든 관계망과의 단절도 요구됩니다. 이것도 쉬운 결정이 아닐 것입니다. 다 내려놓고 떠난다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아버지가 가나안땅으로 가고자했던 일이 있었기에 쉬웠을 수도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약속없이, 목표없이 광야의 길, 새로운 삶을 찾아 길을 떠난다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축복의 여정은 복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장밋빛의 화려한 영광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난의 힘든 여정이 있었습니다. 고난의 여정은 그에게 축복을 성취하는 과정가운데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고난없이 영광은 찾아오지 않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3장에서 만나게 되는 아브람과 롯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커다란 위험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위험이라는 것은 ‘안주’‘매너리즘에 젖는 것’입니다. 위험요인의 제공은 이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주어진 부요함이었습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창 13:2).
풍부함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기대와 이상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힘든 여정을 끝내고픈 유혹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부를 이루었으니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리요. 가난하게 시작한 여정이 큰 부를 이루었으니 이들에게 당한 가장 큰 유혹은 바로 이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평생의 삶은 이러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며 예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통해 안주의 평안함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4)
그러나 롯과의 평화도 이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롯의 일행의 가축도 많아져서 그 땅에 두 사람이 함께 기거하기에는 좁습니다. 삼촌, 조카의 육친적인 관계도 이제는 자신 아래에 많은 식솔들이 생기다 보니 그 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 사람사이의 관계는 그럭 저럭 유지된다해도 아랫사람들끼리의 이해관계는 유지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 관계에 금이 생긴 것은 아랫사람들과의 갈등과 충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더 이상 문제를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두 사람은 결단합니다. 평화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강구책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지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싸움과 분쟁을 피하기 위함입니다(창 13:8). 문제가 불거지고 확대되기전에 내린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 지혜로운 결단과 선택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윗사람인 아브라함임 먼저 제안합니다. 이것도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아랫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하자면 윗사람이 불쾌할 수도 있는데, 윗사람이 먼저 좋은 제안을 내어 놓으니 참으로 평화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선권을 주어 땅을 선택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의 아량과 조카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젊고 계산에 빠른 롯은 자신을 위하여 좋은 곳을 선택합니다. 삼촌인 아브람에 대한 배려는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집니다(창 13:11).
이 부분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해 보려 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평화로운 헤어짐은 정말 보기에 좋았습니다. 롯의 이기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아브람의 덕스러움이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런 덕스러움의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것을 먼저 주장하기 전에 다른형제들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미덕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평화와 화평의 길을 택하는 지혜로운 선택을 우리도 본받아야 합니다. 서로 갈등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합의하에 서로의 갈 길을 택하여 가는 것은 참으로 현명하고 좋은 결정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무리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양보하는 자가 있으니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정말 잘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을 신앙적으로 해석해볼 때, 하나님이 이 두 사람의 삶과 그들의 선택에 간섭하셨음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의 조상으로 삼고자 하시기 위하여 그의 조카 롯을 그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축복은 아브라함의 것이었습니다. 그를 축복하기 위해 롯을 분리시킨 것입니다. 앞으로 나오는 장면을 보면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카 롯의 이야기는 소돔과 고모라성 사건과 그의 딸들에 의해 부정적인 방법으로 후손이 이어지는 것들로 보아 하나님의 구속사에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들은 좋은 예로 소개되지 않고 있으며 계속적인 이스라엘의 역사에 도리어 그 후손들은 방해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롯으로 인한 여러 가지 시련을 아브라함 자신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의 축복의 여정에 결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축복의 여정에서 룻을 제거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 방법은 아주 선하고 평화로운 방법이었고 결국 롯 자신이 자신의 길을 결정하고 선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과 롯의 자연스러운 결별은 도리어 아브람자신에게 더할 수 없는 축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분리와 이별은 도리어 축복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될 수 있음을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홀로서기’는 참으로 중요한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 케고르는 하나님앞에서 홀로서기를 하는 개별적인 인간을 ‘단독자’(單獨者)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단독자는 하나님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는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앞에서 부끄럽고 죄많은 인생임을 고백하는 자가 서게 되는 것이며, 결국 그는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앞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철저히 순종의 자세로 서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앞에 혼자 서 있습니다. 그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자신앞에 혼자 서 있게 만드신 것은 그의 순종과 아울러 축복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앞에 날마다 혼자서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아울러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축복을 약속받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14절이후의 사건이 설교의 주된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의 과정가운데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것을 보게 하십니다. 특히 성경은 이점을 기록하였는데,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라는 시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롯과 함께 있을 때 보지 못했던 것, 롯이 이제 그의 곁을 떠난 후 홀로 남게 된 아브라함에게, 이미 그에게서 아버지와 조카도 떨쳐 버린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또 다른 약속의 계시를 하고 계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
사실 현재 아브라함이 서 있는 곳은 벧엘입니다. 가나안땅의 정중앙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축복된 땅의 중심에서 주님은 구체적으로 땅의 비전을 품게 하십니다. 처음 약속을 받을 때의 막연한 약속과는 구별되는 이제 구체적으로, 눈으로 확인하도록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벧엘이라는 곳은 이스라엘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중에 이곳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곳이 하나님의 성소가 되며 나중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모든 이스라엘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지, 영적인 성소가 바로 벧엘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약속의 비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서 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에게도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영적인 성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약속을 부여받은 곳, 사명의 장소, 뼈를 묻을 장소입니다. 어쩌면 오늘 이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교회가 여러분의 벧엘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벧엘이라는 곳에서 우뚝서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구체적인 비전을 품게 하셨습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것’은 축복의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곳은 민족의 번성, 신앙여정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목민에게 땅은 새로운 비전과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후손의 번성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명령합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7) 이제 구체적인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로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눈앞에 그것을 보고 피부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된 것입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밟아보고 소유하게 하시겠다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직접 소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아브라함의 장면을 보면서 오늘 우리 교회, 믿음의 공동체가 가져야할 소망과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오늘 우리교회에게도 임할 수 있음을 확신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아브라함이 보았던 비전을 현실로 받을 수 있습니까?
1. 과거와의 청산과 분리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롯의 평화로운 분리는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와의 동행이 아브라함의 축복의 여정에는 방해거리만 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의 번성을 통하여 도출되는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의 문제를 지혜롭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자연스러운 분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원한다해도 더 이상 함께 공존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롯을 분리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사람 아브라함에게는 약속된 축복을 현실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주어진 현실은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계획하심가운데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과거로 돌이키거나 후회할 필요도 없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교회를 구별하시기 위하여 이런 과정을 겪게 하셨다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철저한 죄악과 과거의 실수와의 단절과 분리없이는 새로운 일의 시작, 하나님의 궁극적인 복의 역사는 시작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허전하고 외롭기도 합니다. 혼자 행하기에 두렵기도 합니다만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우리와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출애굽하는 백성들의 심정과도 같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를 인도해가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이제 새 일을 시작하실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2. 신앙의 매너리즘 ,‘안주’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브람에게 지금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롯이 떠나가도 그의 재산은 부유합니다. 풍부합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평안합니다. 그러다보면 아쉬울 것이 없으니 이제 꿈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화된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여기에 안주하려는 마음,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 상태에서 맛보기를 보고 안주하려는 것입니다. 더 큰 믿음의 성숙과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보아야 하는데 안주하려고 합니다. 이정도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기에서 안주하지 말고 일어나 서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종과 횡으로 다녀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욕심을 더 내어라는 말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이제 눈과 피부로 발견하고 쟁취하라는 선언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2005년 6월 12일 미국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행했던 그의 말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생각의 덫에 빠지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갇혀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시간을 사용하라는 권면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1152호(2011.11.15-22)에는 ‘원숭이들을 상대로 한 실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연설내용을 좀 더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원숭이 다섯 마리를 한 우리에 집어 넣는다. 우리의 천장에는 바나나가 달려 있다. 그 아래에는 사다리가 놓여 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바나나를 따먹기 위해 사다리를 올라가면, 천장에서 찬물이 쏟아져서 모두가 찬물을 뒤집어쓰게 된다. 이렇게 몇 차례에 걸쳐 원숭이들의 시도를 무산시키지만 원숭이들은 더는 사다리에 오르려하지 않는다. 사다리에 오르려고 하는 원숭이를 다른 원숭이들이 끌어 내린다. 이제 원숭이 세계에 하나의 규범이 생긴 것이다. 다섯 마리 모두는 우리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합의에 이른 것이다. 흥미로운 일은 다섯 마리중에서 한 마리를 새로운 원숭이와 교체할 때 발생한다. 새로운 원숭이는 당연히 바나나를 따기 위해서 사다리로 향하지만, 나머지 네 마리의 원숭이가 모두 이 신참 원숭이를 사다리에서 끌어 내린다.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기까지 한다. 이 신입 원숭이는 사다리를 올라가면 찬물이 쏟아지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음에도, 사다리를 올라가면 안된다는 규범에 순응하게 된다. 그 다음에 다시 처음 들어왔던 네 마리 중 한 마리를 새로운 원숭이와 교체한다. 물론 이 신참도 바나나를 따기 위해서 사다리에 올라간다. 그 때 나머지 네 마리가 동일하게 말린다. 이런 식으로 처음에 우리에 들어왔던 원숭이들이 모두 새로운 원숭이로 교체되어도 사다리에 올라가면 안된다는 규범은 그대로 남는다. 이 때 찬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잠궈 보자. 찬물 세례는 더 이상 없다. 원숭이들은 사다리로 올라갈까? 아니다. 올라갈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우리네 인생들이 가진 어리석은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 왜 생겼는지도 모르는 규범들 속에 갇혀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바로 매너리즘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앙생활에도 이런 모습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비전과 꿈을 포기하게하고 꿈꾸지도 못하게 하는 율법들. 비진리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짓누리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 바리새적인 신앙관입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하고 깨달은 바가 아닙니다. 오랜 시간 교회안에 성경에도 없는 비진리이지만 마치 불문율처럼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비성경적인 진리들이 있습니다. 물론 전통이며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정말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것도 있지만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체면치레 형식에 얽매이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선배 권사님들이, 장로님들이, 집사님들이 초신자들에게 말하는 비성경적인 진리들입니다. 그것을 깨뜨리지 않기에 교회의 개혁과 부흥에 방해가 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지켜야할 것은 그런 비상식적이고 불문율화 되버린 굳어버린 비율법적인 진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정작 개혁되어져야할 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봅니다. 그것이 사실 우리의 신앙성숙과 변화와 믿음의 도전들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진리안에서 나날이 새로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변화되어져야 합니다. 낡고 침체되어가는 병든 진리를 날마다 깨고 부숴뜨려야 합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독수리처럼 날아 올라야 합니다. 어쩌면 스티브잡스가 세상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이 바로 그것인지도 모릅니다. 자기 멋대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남의 생각, 남의 경험, 남의 말에 갇혀 버려서 새로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했던 천동설에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지동설로의 전환 바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런 전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내 힘으로 열심을 내고 노력했던 삶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를 다스리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러한 대전환은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in) 나를 통해(through) 일하시는 삶입니다.)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가졌을 안주, 매너리즘의 위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것을 깨뜨리시고 계십니다. 자신에게 이미 이루어진 주변의 축복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일어서서 먼 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아직 축복이 시작되지 않았고 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아브라함에 그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경계하십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사들과의 마찰과 논쟁은 결국 그들이 율법이라는 틀 속에 스스로 가두어버린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바르게 회복하시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벗어난 온갖 해석과 율례와 전통, 관습을 통해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원래의 하나님의 말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강하게 지적하시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원래의 말씀의 의미에서 떠난 따른 진리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이러한 장면을 예수님의 무언의 대답에서 찾아봅니다. 예수님이 높은 산에서 변화되신 후, 함께 한 제자 베드로는 그런 고백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마 17:1-8, 막 9:2-8, 눅 9:28-36)
이런 베드로의 제안에 주님은 대구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추측건데, 여기 이 자리에 안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이룰 때까지 머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후에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때 누리게 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신앙의 매너리즘인 ‘안주 의식’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나가는 자들에게는 커다란 유혹이자 방해거리일 수 있습니다. 매일 매주일 반복되는 예배나 기도생활이 식상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 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날마다 떨쳐버리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나의 마음에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잘못된 진리들을 부셔내고 포기하고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말씀과 기대와 소망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이루실 약속에 대한 매일의 기대와 소망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본 것 만큼 전진해 갑니다. 본 것 만큼 자라게 됩니다. 보지 않으면 마냥 그 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과 소망을 주십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주십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요엘 2:28)
리차드 버크의 갈매기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인 ‘갈매기의 꿈’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줍니다.
갈매기의 꿈인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지극히 평범한 갈매기입니다. 작품 속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동료 갈매기들과 함께 바닷가의 쓰레기더미와 선창가의 고깃배 주위를 맴돌면서 먹다버린 빵조각을 먹으려고 서로 다투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조나단은 먹기 위해 사는데 싫증이 났습니다. 그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부모와 형제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갈매기 조나단은 피나는 노력과 눈물겨운 인내로 하늘 높이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나단은 다른 갈매기들처럼 무의미한 삶을 살기는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쉬운 그런 훈련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고된 훈련을 이겨내며 갈매기의 역사상 최고 빠른 갈매기가 되었습니다. 조나단은 여러 가지 고도의 비행기술을 하나하나 터득해 나가면서 앞으로의 미래는 눈부시게 빛이 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갈매기들은 조나단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조나단을 몰라 본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갈매기들은 조나단을 추방했고, 그 뒤, 조나단은 다른 곳에 가서 비행술을 연마하며 날마다 많은 것을 터득해 나갔습니다. 조나단은, 갈매기의 인생이 그렇게 짧은 이유는 바로 권태감과 공포심 그리고 분노심을 마음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알아냈고, 그런 모든 것을 떨쳐버린 조나단은 정말로 근사한 삶을 오래도록 영위할 수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조나단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갈매기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 모두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들 각자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을 추구하며 완벽에 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목적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나단은 그곳에서 새로운 비행기술을 연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파 클립스 위에서 천천히 비행하는 어린 갈매기 플레처를 만났습니다. 그는 플레처를 제자로 삼았고 플레처를 가르쳤습니다.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조나단은 여섯 마리의 제자가 더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제자들은 갈매기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갈매기들은 그를 신 혹은 악마의 아들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몰래 찾아와 비행을 가르쳐 달라 갈매기들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조나단의 노력은 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고 저 하늘로 멀리 날아가게 했습니다. 1.보다 높이 멀리 나는 꿈 2. 꿈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 3. 높이 날으는 기술 4.자신들과 다른 이상을 가진 자여서
“너의 눈이 가르쳐 주는 것을 믿어서는 안돼.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허위야. 너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거야.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찾아야 해. 그러면 어떻게 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거야.”“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탈출하여 좀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인생의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똑같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질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알면서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그 꿈을 접고 맙니다. 그리고 후회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도, 상식, 수준, 그리고 사람들의 평가를 과감히 뛰어넘지 못하고 하나님앞에 당당히 서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의 신앙의 목표가 옆사람이진 않습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그러나 이기적인 신앙으로 외롭게 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톡톡 뛰는 멋진 꿈,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신앙인답게 세상을 거슬러 사는 삶을 택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장애와 편견, 고난과 멸시를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한번에 되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한단계 한단계 올라서는 연습을 통해 완성해 갈 수 있습니다. 상식과 편견을 뛰어넘는 신앙의 모험을 과감히 해야만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견고해 지고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높은 하늘에서 비상하는 나의 신앙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정도/ 인간의 상식과 수준/ 사람들의 평가를 과감히 뛰어넘는 행위입니다. 신앙은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 점핑하는 것입니다. 상식과 환경과 방법을 뛰어넘고 초월하여 높이 비상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도 당당히 이기적인 신앙으로 과감히 살아가십시오. 노아처럼 시대를 거슬러 침몰하지 않고 하나님앞에서 당당하게 의로움으로 구원이라는 값진 선물을 받아 누리는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매일의 구원과 소망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구원의 날이 오늘 시작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의 삶을 계속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날을 새로운 비전으로 바라보고 사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어나서 보라고 하시는 것은 현실에 대한 안주에서 벗어나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고 소망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어제의 구원과 오늘의 구원은 다릅니다. 어제의 믿음과 오늘의 믿음이 달라야 합니다. 이것은 변화와 성숙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와 성숙의 기대는 하나님의 역사가 매일 매일 다르다는 확신과 기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제의 일상과 오늘의 일상이 똑같다면, 지난 주간의 일상과 이번 주간의 일상이 변함없이 그대로라면 삶의 의미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조금씩 자라고 이번주간에 일어날 일이 다르기에 우리는 매일 매일 기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밤에 보았던 하늘의 별이 오늘 밤에 보았을 때는 분명히 위치도 다르고 형상도 다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그런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내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기도했던 것이 내일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기대하면서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역사, 믿음의 변화도 매일 매일 다른 것입니다. 내일 더 새로워지고 더 굳건한 모습으로 하나님앞에 서게 될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소망이며 기대입니다.
우리 교회와 개개인을 향한 기대와 소망도 있습니다. 그것은 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굳건히 서게 될 것을 바라본다면 오늘의 고난과 역경은 쉽게 이겨질 수 있습니다. 보는 자는 이제 그것을 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제 구체적으로 그것을 쟁취하기를 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보는 단계가 끝이 나고 이제는 직접 밟으면서 쟁취하는 단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서야할 것을 기대하고 꿈꾸십니까?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과거의 그런 교회의 모습을 꿈꾼다면 여러분이 불쌍하고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꿈꾸십시오.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교회, 온전하고 거룩한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을 꿈꾸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약속하셨고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그것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한 새로운 교회의 모습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것을 꿈꾸고 소망하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일어서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면서 꿈을 꾸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제 구체적으로, 눈으로 보고 만지고 발로 걸으면서 쟁취해가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과 비전이 먼 훗날에 이루어진 것처럼, 오늘 우리의 꿈과 보는 비전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땅을 바라보면서 죽었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가나안땅으로 그 백성을 인도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한 번의 불순종(선택)이 결국은 그 땅만을 바라는 보았지만 그 땅에는 들어갈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바라만 보는 것은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가 본 땅을 밟고 취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모세는 안타깝지만 그 땅을 밟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우리교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두루 다니며 밟아보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허락하신 것을 받아 누리는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준 것을 취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코 헛된 욕심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래서 소망이 필요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이것으로 만족하오니’가 아니라 ‘아직 부족합니다. 나(우리)는 하나님이 주시고 약속하시고 보게 하신 축복을 완벽하게 누리고 쟁취하고 싶습니다’라는 담대한 소망의 간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어서서 그것을 보고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나는 아직 골맛이 더 봐야 합니다.’고 유명한 축구선수가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일어나서 보고 두루 다니며 그 땅을 밟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대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간절히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님의 교회에게 주신 거룩한 소망을 온 교회 공동체가 함께 보고 꿈꾸며 결단하며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 지난 주에 몇몇 여집사님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성도 여러분이 현재 교회를 향해 흘리는 눈물,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통해 더 아름답게 더 멋지고 더 위대하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기대와 소망을 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자리, 현재의 축복에만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큰 소망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더 큰 갈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욕심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과 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쟁취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기에 그것을 당연히 누릴 것입니다. 이것은 오만이나 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대한 우리의 열심이며 갖은 태도입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축복의 자손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을 쟁취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할 수 없으며 멈출 수 없습니다. 더 간절히 간구하고 더 과감하게 전진해 갈 것입니다. 마치 갈렙에게 주신 꿈을 위해 그가 각오하고 쟁취한 것(수 14:6-15)처럼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비전과 꿈도 그렇게 쟁취할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땅으로, 인도하시는 곳으로 담대히 나아가십시다. 어떠한 많은 역경과 장애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선명한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약속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나아갈 수도 있고 그것을 우리 품에 품을 수 있으며 소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일어나서 그것을 바라보고 결단하고 전진해 나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기대하고 기대하십시다. 함께 꿈을 꾸고 함께 기도하면서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날마다 전진하십시다. 그리고 그 땅을 밟고 소유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