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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문명의 두 중심지- 아테네 : 스파르타 ...... 145호 회지에 이어서 계속 -
1. 아테나 : 아테네의 수호 여신 [출처-아테네인, 스파르타인 : 살림지식총서 173, 윤진, 2005. 4. 10., ㈜살림출판사]
아테나는 제우스(Zeus)와 메티스(Metis) 사이의 딸이다. 그러나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가 메티스의 자식이 신들을 위협할 것이라고 예언하자, 제우스는 메티스가 출산하기 전에 메티스를 삼켜버렸다. 여러 달 후에 제우스는 엄청난 두통에 시달렸고, 고통에 못이긴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를 시켜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쪼개게 했다.
이때 제우스의 머리에서 아테나는 다 자란 모습으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 튀어나왔으니, 신이라고는 해도 상당히 엽기적인(?) 출산인 셈이다. 아테나는 전쟁과 예술, 공예의 여신으로 특히 아테네에서 수호 여신으로 숭배되었다.(물론 스파르타에서도 아테나는 숭배되었다.)
사실 아테네의 이름도 아테나 여신에게서 따 온 것이다. 아테네의 수호신이 되기 위해 아테나 여신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과 함께 제각기 신의 능력을 펼쳐보였다. 이때, 삼지창을 던져 땅을 가르고 바닷물을 뿜어 올린 포세이돈과는 달리 아테나 여신은 석회질의 척박한 언덕에 올리브 나무를 자라나게 했다.
결국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아테나 여신을 선택했으니, 아테나 여신은 아버지 제우스의 동생이면서 자신에게는 작은 아버지인 포세이돈과 겨뤄 이겨낸 셈이다. 그리고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가호를 받는 도시답게 아테네는 훗날 그리스 문명의 대표자로 인류 문명사에 그 이름을 깊이 남기게 되었다.
로마 신화도 아테네의 이야기와 비교될 만하다. 로마 신화에 의하면 전쟁의 신 마르스(Mars)가 산들바람으로 변하여 접촉한 레아 실위아(Rhea Silvia)가 낳은 쌍둥이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 중에서 로물루스가 로마의 첫 번째 왕이 되어 로마를 건설하였다. 로마가 무력으로 지중해를 제패하여 훗날까지 로마 제국의 명성을 떨쳤던 것도 역시 전쟁 신의 후예라서 그런 것일까?
아테네에서 아테나 여신에 대한 숭배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팔라스 아테나(Pallas Athena)라고도 부르는 아테나 여신에 대해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희극 작가로 유명한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희곡 『기사들』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팔라스, 우리 폴리스의 수호자
경건한 나라,
세상 어떤 나라보다
전쟁과 시, 국력 면에서
뛰어난 나라의 통치자여,
오소서.
2. 아르테미스
일반적으로 달의 여신이자 사냥의 여신, 야생 동물의 수호 여신으로만 알려진 아르테미스는 여성의 삶과 밀접한 존재이기도 했다. 특히 그녀는 서아시아 세계에 식민시를 세우고 살고 있던 그리스계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는데, 그곳에서는 근동 문명의 영향을 받아 동방적인 풍요의 여신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에페소스(Ephesos, 에베소)에 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기도 했다. 또한 아르테미스는 스파르타에서 특별히 숭배되던 여신이었다. 델로스(Delos) 섬과 아티카(Attika) 반도의 브라우론(Brauron)에 있는 아르테미스 성소도 매우 유명하다.
제우스와 레토(Leto) 사이의 딸이자, 아폴론(Apollon)의 쌍둥이 누이인 아르테미스는 종종 활과 화살을 지니고 야생 동물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르테미스의 영역은 야생 동물이 많은 땅, 특히 개간되지 않은 지역과 숲, 언덕이었다. 그녀는 폭력적인 모습과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신으로 자주 나타난다.
그녀는 사냥꾼 악타이온(Aktaion)이 자신의 누드를 보았다는 이유로 사냥개들을 부려 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게 하였다. 또 두 자녀밖에 가지지 못한 여신 레토에게 자신은 6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가졌노라고 니오베(Niobe)가 자랑했을 때, 아폴론은 그 아들들을, 아르테미스는 그 딸들을 모두 죽이기도 했다. 또 트로이아(Troia) 전쟁 때에 아가멤논(Agamemnon)이 그녀를 모욕했던 것 때문에 그의 딸인 이피게네이아(Iphigeneia)를 제물로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한편 아르테미스가 갖는 특징 중 특기할 만한 것은 그녀가 출산의 여신이며, 사람과 짐승에 풍요함을 가져다주는 여신이라는 것이다. 또한 특히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나무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믿어졌다. 어찌 되었거나 그리스인은 아르테미스가 아이를 낳는 여성의 친구이며 보호자이기는 해도, 처녀인 여신으로 보았다.
스파르타에서 아르테미스는 아르테미스 오르티아(Artemis Orthia)로 숭배되었는데, 고고학적으로 보아 오르티아는 도리아인이 숭배하던 여신이었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그리스로 이주해 온 도리아인은 자신들의 여신 오르티아와 아르테미스를 합쳐서 숭배했다고 추정된다. 아르테미스 오르티아 제전 때에는 스파르타의 소년들이 제단 위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참는 호된 시련을 겪었고, 이 제단에 바쳐지는 치즈를 훔치는 것이 아이들의 담력 시험이 되기도 했다.
3. 아테네 정치와 군사
아테네는 유명한 아테네 민주정으로 절정에 이르는 독특한 발전 과정을 겪었다. 아테네를 일명 '그리스의 학교'이자, 고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민주정이었다. 아테네는 기원전 900년경에 기하학적 문양의 도기를 발전시켜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성취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에 들어서면 코린토스(Korinthos, 고린도) 같은 다른 도시 국가들도 번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테네의 발전은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이미 아테네는 인구가 크게 증가했지만 따로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았고, 일부 소농들은 생활의 어려움에 빠져들게 되었다.
초기의 아테네는 귀족에 의해 통치되는 귀족정이었다. 아테네도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왕정으로 시작되었지만, 왕정은 기원전 1200~800년 사이의 암흑시대 어느 시기엔가 소리 없이 스러졌고, 귀족 출신의 최고 행정관인 아르콘(archon)이 군 사령관, 제사장, 최고 재판관 역할을 맡았다. 아르콘은 처음엔 세 명이었다가 나중엔 아홉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귀족정도 사회·경제적 변화(인구 증가와 가난한 농부들의 생활고, 부유한 일부 평민의 증가, 중무장 보병의 출현)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권을 주어 솔론(Solon)을 아르콘에 임명함으로써 한동안 그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아테네 시민을 재산에 따라 넷으로 나누었고, 상위 두 계급만이 아르콘이 될 수 있게 하였다.
위로부터 세 번째 계층까지는 새로이 만들어진 국정 평의회인 400인 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반 민회(general assembly)에는 네 계급 모두 다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1) 결국 솔론은 정치적 영향력의 기준을 출생에서 재산으로 바꾼 셈이다
아테네는 유명한 아테네 민주정으로 절정에 이르는 독특한 발전 과정을 겪었다. 아테네를 일명 '그리스의 학교'이자, 고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민주정이었다. 아테네는 기원전 900년경에 기하학적 문양의 도기를 발전시켜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성취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에 들어서면 코린토스(Korinthos, 고린도) 같은 다른 도시 국가들도 번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테네의 발전은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이미 아테네는 인구가 크게 증가했지만 따로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았고, 일부 소농들은 생활의 어려움에 빠져들게 되었다.
초기의 아테네는 귀족에 의해 통치되는 귀족정이었다. 아테네도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왕정으로 시작되었지만, 왕정은 기원전 1200~800년 사이의 암흑시대 어느 시기엔가 소리 없이 스러졌고, 귀족 출신의 최고 행정관인 아르콘(archon)이 군 사령관, 제사장, 최고 재판관 역할을 맡았다. 아르콘은 처음엔 세 명이었다가 나중엔 아홉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귀족정도 사회·경제적 변화(인구 증가와 가난한 농부들의 생활고, 부유한 일부 평민의 증가, 중무장 보병의 출현)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권을 주어 솔론(Solon)을 아르콘에 임명함으로써 한동안 그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아테네 시민을 재산에 따라 넷으로 나누었고, 상위 두 계급만이 아르콘이 될 수 있게 하였다.
위로부터 세 번째 계층까지는 새로이 만들어진 국정 평의회인 400인 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반 민회(general assembly)에는 네 계급 모두 다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1) 결국 솔론은 정치적 영향력의 기준을 출생에서 재산으로 바꾼 셈이다.
비록 귀족의 힘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계층을 위해 그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고, 채무 노예를 해방하였으며, 해외에 노예로 팔렸던 아테네인을 되사왔다. 솔론의 개혁 중에는 배심원 법정을 설치한 것도 있다. 매년 6,000명의 시민 명단이 작성되고, 그중에서 일정한 수(보통 501명)의 배심원이 추첨으로 뽑혀 특별한 사건의 판결을 맡았다. 결국 그는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지만, '조정자'로서 국가의 분열과 최악의 결과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귀족 가문 출신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아테네의 가난한 사람들과 아티카 반도의 소농들이 가지고 있던 불만을 이용하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들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하고, 참주2)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자의적인 통치를 위해 귀족의 세력을 억제하고 평민의 권한을 늘려 놓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민주정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기원전 510년, 참주들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 왔던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아테네 귀족들은 힘을 합해 참주정을 무너뜨렸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는 페르시아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참주정이 폐지된 뒤에 귀족들 사이에 정권 다툼이 일어났다. 기원전 508년,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가 이 정권 쟁탈전에서 승리자가 되었다. 그는 평범한 시민 대중, 즉 데모스(demos)와 연계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그는 데모스에게 정치적 권력의 일부를 주어야 했고, 결국 귀족의 권력은 더욱 더 줄어들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클레이스테네스는 유명한 아테네 민주정의 창시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아테네 폴리스(아티카 반도)의 영역을 10개의 부족(phyle, 퓔레)으로 나누었다. 각각의 부족은 세 개의 트리튀스(해안 트리튀스 trittys, 내륙 트리튀스, 도시 트리튀스; 복수는 트리튀에스 trittyes)로 구성된다. 가장 작은 단위는 마을 혹은 구역이라고 해도 좋을 데메(deme)로서, 100여 개 이상이 있었다. 이 구획이 아테네 민주 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각 부족에서 50명을 뽑아 500인 협의회(Boule)를 만들었다. 이 과정은 추첨으로 이루어졌다. 선거를 치르게 되면 선동 정치가가 나설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에서는 추첨이 가장 민주적인 절차라고 판단하였다.
500인 협의회 구성원의 임기는 일 년이었다. 이 협의회에는 많아야 두 번까지 뽑힐 수 있었으며, 그것도 연속해서 뽑힐 수 없었다. 이는 많은 아테네 시민이 협의회 구성원이 되어 정치적 경험을 쌓는 기회를 가졌다는 의미이다. 이 협의회는 매일 매일의 행정 문제에 책임을 지고, 민회의 의제와 결의를 준비했다. 그러나 민회는 기준에서 벗어난 제안을 수정하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권한을 가졌다. 민회는 제기된 안건에 대해 투표하고, 최종 결정을 했다. 이 모든 것이 아테네의 체제를 '데모스크라티아'(demoskratia)로 만들었다. 즉, 민중인 데모스(demos)가 정책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르콘은 여전히 최고위 행정관이었고, 아직 폐지되지 않았던 솔론의 계급 체계에 따라 상위 두 계급에서만 선출되었다. 비록 신흥 부자들도 아르콘 피선 자격은 갖고 있었지만, 오래된 귀족 가문 사람들이 항상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원전 487년이 되어 아르콘도 추첨으로 뽑게 되자, 예전보다 존경받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장군에 해당하는 스트라테고스(strategos) 직책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군대와 함대를 지휘하는 장군들은 가장 적합한 후보자들 중에서 계속 선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 년의 임기가 끝난 뒤 몇 번이라도 재선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이후 아테네의 민주정은 식견과 경험이 있는 장군들이 주도하여 이끌게 되었다.
'도편추방제(ostracism)'는 클레이스테네스가 내 놓은 마지막 정책이었는데, 일 년에 한 번 민회에서 도편추방제를 실시할 필요가 있는지를 물었다. 실시할 필요가 있으면, 민회의 다음번 회합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질그릇 조각에다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야 했다. 가장 많은 조각에 이름이 쓰인 사람은 10년 동안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재산을 몰수하지는 않았다. 기원전 5세기에 들어서면 아테네 민주정은 더 확대되었다.
페리클레스(Perikles)는 기원전 460년 이후, 아테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였다. 역사가들은 그가 전염병으로 사망한 기원전 429년까지의 30여 년을 '페리클레스 시대'라고 부르는데, 역사상 한 세대에 이렇게 개인의 이름이 붙여진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가 이끌었던 시대의 아테네에서는 정책 결정과 행정 문제에 가난한 시민도 참여할 수 있게끔 공무에 대해서 급료를 국가가 지불하는 체계를 들여왔다. 즉, 기원전 5세기 후반, 500인 평의회에 참여하고, 법정의 배심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적은 참가 수당(대략 반나절 일당)을 받았고, 그 뒤에는 민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수당이 주어졌다. 종교적, 국가적 축제 때에도 수당이 지불되었다
아테네는 유명한 아테네 민주정으로 절정에 이르는 독특한 발전 과정을 겪었다. 아테네를 일명 '그리스의 학교'이자, 고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민주정이었다. 아테네는 기원전 900년경에 기하학적 문양의 도기를 발전시켜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성취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에 들어서면 코린토스(Korinthos, 고린도) 같은 다른 도시 국가들도 번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테네의 발전은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이미 아테네는 인구가 크게 증가했지만 따로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았고, 일부 소농들은 생활의 어려움에 빠져들게 되었다.
초기의 아테네는 귀족에 의해 통치되는 귀족정이었다. 아테네도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왕정으로 시작되었지만, 왕정은 기원전 1200~800년 사이의 암흑시대 어느 시기엔가 소리 없이 스러졌고, 귀족 출신의 최고 행정관인 아르콘(archon)이 군 사령관, 제사장, 최고 재판관 역할을 맡았다. 아르콘은 처음엔 세 명이었다가 나중엔 아홉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귀족정도 사회·경제적 변화(인구 증가와 가난한 농부들의 생활고, 부유한 일부 평민의 증가, 중무장 보병의 출현)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권을 주어 솔론(Solon)을 아르콘에 임명함으로써 한동안 그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아테네 시민을 재산에 따라 넷으로 나누었고, 상위 두 계급만이 아르콘이 될 수 있게 하였다.
위로부터 세 번째 계층까지는 새로이 만들어진 국정 평의회인 400인 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반 민회(general assembly)에는 네 계급 모두 다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1) 결국 솔론은 정치적 영향력의 기준을 출생에서 재산으로 바꾼 셈이다.
비록 귀족의 힘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계층을 위해 그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고, 채무 노예를 해방하였으며, 해외에 노예로 팔렸던 아테네인을 되사왔다. 솔론의 개혁 중에는 배심원 법정을 설치한 것도 있다. 매년 6,000명의 시민 명단이 작성되고, 그중에서 일정한 수(보통 501명)의 배심원이 추첨으로 뽑혀 특별한 사건의 판결을 맡았다. 결국 그는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지만, '조정자'로서 국가의 분열과 최악의 결과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귀족 가문 출신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아테네의 가난한 사람들과 아티카 반도의 소농들이 가지고 있던 불만을 이용하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들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하고, 참주2)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자의적인 통치를 위해 귀족의 세력을 억제하고 평민의 권한을 늘려 놓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민주정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기원전 510년, 참주들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 왔던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아테네 귀족들은 힘을 합해 참주정을 무너뜨렸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는 페르시아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참주정이 폐지된 뒤에 귀족들 사이에 정권 다툼이 일어났다. 기원전 508년,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가 이 정권 쟁탈전에서 승리자가 되었다. 그는 평범한 시민 대중, 즉 데모스(demos)와 연계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그는 데모스에게 정치적 권력의 일부를 주어야 했고, 결국 귀족의 권력은 더욱 더 줄어들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클레이스테네스는 유명한 아테네 민주정의 창시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아테네 폴리스(아티카 반도)의 영역을 10개의 부족(phyle, 퓔레)으로 나누었다. 각각의 부족은 세 개의 트리튀스(해안 트리튀스 trittys, 내륙 트리튀스, 도시 트리튀스; 복수는 트리튀에스 trittyes)로 구성된다. 가장 작은 단위는 마을 혹은 구역이라고 해도 좋을 데메(deme)로서, 100여 개 이상이 있었다. 이 구획이 아테네 민주 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각 부족에서 50명을 뽑아 500인 협의회(Boule)를 만들었다. 이 과정은 추첨으로 이루어졌다. 선거를 치르게 되면 선동 정치가가 나설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에서는 추첨이 가장 민주적인 절차라고 판단하였다.
500인 협의회 구성원의 임기는 일 년이었다. 이 협의회에는 많아야 두 번까지 뽑힐 수 있었으며, 그것도 연속해서 뽑힐 수 없었다. 이는 많은 아테네 시민이 협의회 구성원이 되어 정치적 경험을 쌓는 기회를 가졌다는 의미이다. 이 협의회는 매일 매일의 행정 문제에 책임을 지고, 민회의 의제와 결의를 준비했다. 그러나 민회는 기준에서 벗어난 제안을 수정하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권한을 가졌다. 민회는 제기된 안건에 대해 투표하고, 최종 결정을 했다. 이 모든 것이 아테네의 체제를 '데모스크라티아'(demoskratia)로 만들었다. 즉, 민중인 데모스(demos)가 정책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르콘은 여전히 최고위 행정관이었고, 아직 폐지되지 않았던 솔론의 계급 체계에 따라 상위 두 계급에서만 선출되었다. 비록 신흥 부자들도 아르콘 피선 자격은 갖고 있었지만, 오래된 귀족 가문 사람들이 항상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원전 487년이 되어 아르콘도 추첨으로 뽑게 되자, 예전보다 존경받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장군에 해당하는 스트라테고스(strategos) 직책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군대와 함대를 지휘하는 장군들은 가장 적합한 후보자들 중에서 계속 선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 년의 임기가 끝난 뒤 몇 번이라도 재선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이후 아테네의 민주정은 식견과 경험이 있는 장군들이 주도하여 이끌게 되었다.
'도편추방제(ostracism)'는 클레이스테네스가 내 놓은 마지막 정책이었는데, 일 년에 한 번 민회에서 도편추방제를 실시할 필요가 있는지를 물었다. 실시할 필요가 있으면, 민회의 다음번 회합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질그릇 조각에다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야 했다. 가장 많은 조각에 이름이 쓰인 사람은 10년 동안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재산을 몰수하지는 않았다. 기원전 5세기에 들어서면 아테네 민주정은 더 확대되었다.
페리클레스(Perikles)는 기원전 460년 이후, 아테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였다. 역사가들은 그가 전염병으로 사망한 기원전 429년까지의 30여 년을 '페리클레스 시대'라고 부르는데, 역사상 한 세대에 이렇게 개인의 이름이 붙여진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가 이끌었던 시대의 아테네에서는 정책 결정과 행정 문제에 가난한 시민도 참여할 수 있게끔 공무에 대해서 급료를 국가가 지불하는 체계를 들여왔다. 즉, 기원전 5세기 후반, 500인 평의회에 참여하고, 법정의 배심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적은 참가 수당(대략 반나절 일당)을 받았고, 그 뒤에는 민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수당이 주어졌다. 종교적, 국가적 축제 때에도 수당이 지불되었다.
페리클레스 시대와 그 다음 세기에 아테네 민주정의 결정 기구인 민회는 일 년에 적어도 40회는 개최되었다. 민회가 개최되었던 장소인 아테네 중앙에 있는 프뉙스(Pnyx) 산에는 기껏해야 6,000명 정도가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교외에서 농사를 짓던 시민들은 아마 모임에 그렇게 자주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민회는 그 기간 동안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아테네 시의 주민들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따라서 기원전 5세기에 거의 35,000명에 달하던 성년 남자 시민들 중에서 일부만이 민회에 정기적으로 참가하였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 점은 직접 민주정을 채택한 아테네에서는 모든 시민이 참여하여 정책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페리클레스 시대까지의 아테네 지도자들은 여전히 모두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사실 귀족은 재산, 여유 시간, 교육과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보통 시민들에 비해 매우 유리했다. 더욱이 그들이 오래되고, 존경받는 가문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민주적 체제에서도 시민들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그들은 도움을 주었거나, 여러 형태의 보호 혹은 자선 행위로 인해 그들에게 충실한 모든 사회 계급에 속한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29년에 아테네를 휩쓸었던 전염병에 의해 죽은 후에는 훌륭한 장군과 제독이면서 동시에 재정 문제를 잘 처리하고, 또 민회를 매끄럽게 다룰 수 있는 지도자는 나타나지 못했다. 대체로 스스로가 귀족이거나, 귀족과 관계가 있던 당대의 저술가들은 이런 형태의 비귀족 정치가들을 묘사할 때 '선동 정치가들'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정치가들은 귀족들이 가진 전통적인 권력 획득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대중이 자신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해 수사학과 웅변술을 이용해야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4. 스파르타의 정치와 군사
스파르타에서 중장 보병은 귀족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7세기에 이미 특히 뛰어난 중장 보병 국가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 국가들과는 달리 두 명의 왕이 있는 세습적 이왕제(二王制)를 유지했으며, 참주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테네처럼 스파르타도 식민지를 거의 건설하지 않았다. 대신 스파르타는 기원전 7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있었던 두 번의 전쟁으로 인접한 메세니아(Messenia)를 정복해서 토지의 필요를 해결했다. 스파르타인은 같은 도리아인이었던 메세니아인도 헤일로타이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곧 그들보다 수가 많았던 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어려운 과업에 직면해야 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문제와, 이웃에 있는 상당히 강력한 도리아인의 국가인 아르고스의 지속적인 위협 때문에, 스파르타인은 펠로폰네소스의 패권을 놓고 자주 전쟁을 치러야 했고, 결국 모든 관심을 군사 훈련에 쏟아야 했다. 스파르타 소년은 일곱 살(만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로부터 떨어졌다. 그때부터는 국가에 의해 훈육되었다. 그들은 가혹한 훈련을 받으면서 엄격하게 키워졌고, 거칠고 강인한 전사가 되었다.
성인이 되면, 그들은 같이 먹고, 같이 훈련받으며, 같이 자고, 같이 싸우는 동료들의 모임에 들어갔다. 각 스파르타인은 이 모임에 분담액을 치러야만 했다. 따라서 스파르타인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강력한 시민군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메세니아, 아르고스와의 전쟁에서 귀족이 별로 효율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에서는 중장 보병이 매우 초기부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스파르타의 개혁은 입법자(law-giver) 뤼쿠르고스(Lycurgos)의 업적이라고 하는데, 그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근래에는 통상 뤼쿠르고스가 기원전 700년 이후에 정치적 개혁을 도입했다고 본다. 뤼쿠르고스 이후에 스파르타인은 '동등자'라는 의미의 '호모이오이'(homoioi)라고 불렸다. 이 평등함은 그들이 중장 보병 밀집 대형에서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스파르타인만이 참여할 수 있었던 민회인 아펠라(apella)에서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메세니아 헤일로타이 그룹이 딸린 일정한 토지를 배당받았다고 보아도 좋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완전히 평등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메세니아의 토지 이외에 개인적인 토지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크기는 제각각 달랐다. 일부 스파르타인이 그들에게 배속된 헤일로타이를 엄격하게 관리하지 못해 농장 운영에 실패했던 것도 불평등함을 가져온 다른 이유가 된다. 반면에 다른 일부는 뇌물이나, 해외에서 획득한 공물, 전리품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부자가 되는 다른 방법으로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들이 없는 부유한 스파르타인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이들 부유한 스파르타인은 모임에 내야 하는 분담액을 늘렸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분담액을 치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분담액을 낼 수 없어 이급 시민(second-class citizens)의 지위로 떨어졌다.
스파르타의 민회는 결코 진정 민주적인 집합체로 발전하지 못했다. 진정한 권력은 민회에서 종신직으로 뽑은 60세 이상의 시민 30명으로 구성된 장로회(gerousia)에 있었다. 민회가 장로회의 우월성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도 비판적 정신보다는 군사 훈련이 더 높이 평가되는 국가에서는 이해될만한 일이다. 스파르타의 두 왕도 장로회의 구성원이었지만, 이들에게는 당연히 나이 제한이 적용되지 않았다.
스파르타에서 왕정이 유지되었던 이유로 관심을 다시 되돌려 보자. 서로 다른 왕가에 속해있는 두 명의 왕은 서로 견제했기 때문에, 왕권이 지나치게 강해질 위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의 유일한 과업은 전시에 군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후일, 왕정과 함께 행정관직이 추가되었다. 이 행정관직은 다섯 명의 감독관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매년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그들은 스파르타시의 매일 매일의 행정을 책임졌다. 시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했을 에포로이가 왕의 권력에 제동을 걸었던 것도 스파르타에서 더 이상의 민주적 개혁에 대한 요구가 나오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스파르타의 체제는 왕정(이왕제), 과두정(장로회), 민주정(민회와 에포로이)으로 구성된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스파르타의 성공 요인으로 보였던 엄격한 생활 방식도 역시 크게 존중받았다. 기원전 6세기와 5세기 초에, 스파르타가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였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에서의 헤게모니를 확실히 하고 싶어 했지만, 더 많은 도시를 정복하고, 더 많은 헤일로타이를 지배하면서 헤게모니를 쥐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기원전 6세기, 스파르타는 코린토스를 포함하는 펠로폰네소스의 도시 국가들을 한데 모아, 스스로 맹주가 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아르고스는 이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바깥에서도 페르시아와 갈등 관계에 있던 뤼디아, 이집트와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럼으로써 스파르타는 참주정에 적대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페르시아는 친 페르시아 성향의 참주를 각 지역에 배치함으로써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소아시아(이오니아)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은 그런 참주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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