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금시대의 ‘마패’ 야간통행증과 침락공.
제목의 기사로 흥미를 끌었던
조선일보 기사와 침락공의 유물 3점을 소개 하고자 한다.
초대 민선 면장을 지낸 침락공의 유품에서
도민증, 공무원증, 야간 통금시대 야간 통행증을 발견하였다.
KBS 진품 명품시간에
침락공께서 발급받은 같은 시대에 같은 종류의 유사 유물이 출품 되었다.
근대 유물로 가치가 있는 유물로 평가 받는 것을 시청하였다.
얼마후 조선일보에서 `광복 70년 근대사 물건,`
추억 ‘통금시대 마패 야간 통행증’ 이라는 기사가 나와
근대 유물도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침락공 유사(遺事)와 유물 3점을 함께 보학 까페로 올리게 됐다.
39세 휘 김용득(양간, 퇴촌, 담암, 도봉공파)
1905년 출생~1993년 졸. 자는 청하, 호는 침락.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기산동.
유학자로 초대 민선 면장 재직 외에는 일생을 유학에만 점념했다.
6, 25 전쟁이 끝나고 산업화 이전은 먹고 살기 힘든 보리고개 시대였다
그당시 발행된 신문들은 한글과 한문의 혼용으로 문맹율이 높은 시대라,
신문만 읽을줄 알아도 지식인으로 존경받는 사회였다.
시각적인 정보의 전달에 신문이 찿이하는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농경시대 실업율이 높아, 침락공은 젊은 이들은 신문도 읽을 줄 알고,
배워야 가난을 면 할 수 있다 면서,
가난으로 진학을 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한학(漢學)을 가르쳤다.
후학들은 물론 배우려고 오는 청년들에게 재능 기부의 무료 봉사를 하였다.
당시 여관이 없는 농촌에서 나그네가 자고 갈 문간방을 연중 개방 했다.
춘궁기에는 식량을 구하려 오는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았다.
공께서는 유림儒林들의 선망의 대상인 서원의 원장으로도 추대되었다.
일어와 중국어를 소통하는 시골 출신의 카리스마가 강한 엘리트였다.
노브리스 오리비제의 정신을 실천하신 분으로 많은 사람들로 존경을 받았다
해방이 되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귀국 때 생명의 위험이 따르자,
재물을 교환으로 구원의 도움을 간절하게 요청하였다.
공께서 재물은 필료 없다고 사양하며서, 물욕을 초월해서
참된 선비의 도리로,
그들에게 생환의 도움을 주는 은인이 되어 주었다.
6, 25사변 때, 공산군은 지주나 부자들이나 엘리트는
인민을 등쳐먹는 반동 분자라며, 학살하거나 잡아갔다.
잡혀 갔다가 그간 베풀어 온 자선의 공덕으로 극적으로 살아 나왔다.
근대 인물이므로 개인 정보보호 차원으로 각 신분증에 모자이크 처리 하였습니다.
경상북도도민증: 신분증명서로
1950년에 시행해서
1962년 주민등록 법의 제정으로 역사속에 라졌다.
한장 접이식 양면이다.
아쉽게도 도민증은 사진 떨어져서 사라져 안타깝다.
전면: 일열 No번호 모자이크 처리..
태극기와 무궁화 꽃과, 당시 전국에 이름난
대구의 명물 사과와 함께,
우리나라 제일의 섬유도시로서 명성을 알리는 상징성의 실타래와,
중앙에는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사의 다보탐을 소재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 모서리를 보면 붉은 도장 위에 청색 고무인으로
‘국문 해독’이라고 찍혀있다.
이 시대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가 너무 많았다
.불이익을 예방하려 구분하여 놓것으로 사료됨.
국가는 문제 해결을 위해
방학 때면 학생들을 활용해 방학 과제로
동네마다 문맹퇴치 운동을 벌였다.
내면: 본적과 주소지 모자이크 처리.
호주 또는 세대주: 김용득 본인
생년 월일 :본적과 주소지 : 모자이크 처리.
발행일: 단기 4287년(1954년) 11월 30일. 경상북도지사.
공무원증: 소속: 풍천면. 직명: 면장. 생년 월 일: 내용은 도민증과 동일.
발행일, 단기4288년(1955년), 6월 30일. 상기 사실을 증명함
안동군수 김옥현
◆야간 통행증 (夜間 通行證)
야간통행 금지는 해방후 국내 치안을 이유로 미 군정이
1945년 9월 7일부터 더글러스 맥아더 포고령에 의해 경성, 인천,
두 지역에서 실시 되었다.
6.25 전쟁 직후부터 전국적으로 확대 되었다.
1954년에 위반시
경범죄 처벌로 구류 또는 과태료 처분으로 법제화 했다.
1961년부터 해제 될 1982년까지 통상적 통금시간은
0시부터 4시까지였다.
전면: 본적, 주소, 상기와 동일. 직업: 면장.
성명, 생년 월 일: 상기와 동일. 목적: 업무수행.
기간: 단기4290년(1957년) 2월 1일~6월 30일, 5개월간.
상기자는 업무 수행상 야간 통행 금지 시간중 통함을 인정함.
발행일:단기4290년 2월1일. 경상북도 경찰국 안동 경찰서장.
후면:
1. 본증은 기명 본인 이외는 사용 할수 없음.
2, 통행증 표면 기재사항 개경(다시고침)은 무효로함.
3 야간통행 금지 시간에 통행 할 시는, 취재관에게 먼저 본증을 제시 할사.
4. 통행증 기재사항의 이동이 유 할 시는 지체없이 발행관에게 반납 할사.
5. 본증은 정당한 업무 수행상 필료 할 경우 이 외는 사용을 할 수 없음.
6.상기 각항에 위반될시 차(이)를 몰 수 함.
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19) (조선일보)
통금시대의 ‘마패’ 야간통행증, 도독들도 갖고 다니면서 애용
1972년 6월 ‘청와대 민원반’을 사칭하며 건축업자 등에게서 돈을 뜬어낸
사기꾼 2명이 신분을
과시 할 때 마다 꺼낸건 공무원증도 아니고 명함도 아니었다.
야간통행증이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통행 금지 시간에도 집 밖을 다니도록 허가 한다는 증명서다.
광복 직후 어수선하던 시절 사람을 등치던
자칭 ‘수사기관 정보원’들이 갖고 다닌던 것도 야간통행증이다.
밤에 다니도록 허가한 증명서 한 장이 뭐 그리 대단했을까.
통금 단속에 불응하고 달아나는 차량에
군인이 소총을 발포 할 만큼 무시무시했던 시절,
심야의 거리를 유유히 활보 할수 있다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었다.
조선시대 ‘마패(馬牌)는 관리(官吏)가 말(馬)을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표시한 징표였지만,
암행어사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허가증처럼 되었듯
야간통행증도 마찬가지다,
통금이 해제된 1982년 1월 5일 0시까지 37년간
야간통행증이란 통행 허가증명서 이상의 무게를 가졌다.
1970년대 야간통행증을 소지하고 취재했던 어느 언론인은
“이놈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
경찰관들도 이증서를 가진 사람의 눈치를 봤다”고 회고했다.
광복 직후 경찰은 야간통행증 발급 대상자를
’공무원, 의사, 신문기자, 그리고 신분이 확실한자로서
야간통행을 부득이 필요로하는자‘로 정했다.
전국에 2만3119명이었다
(조선일보 1949년 12월 11일자)
박정희 정권 시절
장 차관과 주요 공공기관 간부들에게 우선 발급됐지만,
나중에 김장용 배추 트럭 운전기사나 영세 상인도 갖게됐다.
가수 이장희 윤형주 등 심야 생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DJ들도 받았다.
통금시간에 도착한 기차 승객들에게는 임시 통행증을 나눠줬다.
승객 팔뚝에다 고무도장을 쾅 찍기도했다.
이 임시 통행증이 가끔 말성을 빚었다.
1971년에 자정을 넘긴 취객들과 술집 접대부들이
열차 승객용 야간 통행증을 받아 집에 가려다 적발됐다.
파출소 자문위원이던 이 술집 주인이 경찰에 힘을 써서
자기 가게손님들과 종업원들의 편의를 봐주러던 것이었다.
(경향신문 1971년 9월 14일자)
어느 10대들은 일부러 통금시간에 도착하는 열차를 이용한 뒤
통행증을 발급받아 돌아다니면서 도적질을 일삼다가 구속됐다.
(동아일보 1977년8월26일)
과학 기술에 관심이 크던 박대통령의 뜻이 반영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간부들에게도 특별통행증이 나왔다.
과학자들의 사기도 올라갔지만,
통행증을 믿고 밤세 술을 마시던
여러 주당과과 학자들의 일화도 빚어졌다.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2015년 5월 13일자.
출처: 침락공 종가 유품, 조선일보, 참조.
2023년 4월
편집자 전 대구경북종친회 부회장 善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