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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주제 |
1. 10년 전인 1992년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열린 한 대화모임에서 조혜정 교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모색"이라는 주제의 발제를 하면서 기존 사회운동이 요동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진단하고,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또 하나의 문화>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소개하면서 새로운 사회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 모임은 애초부터 전형적인 새로운 사회운동의 방식을 가지고 움직여 왔다…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운동을 시작하자는 것이었고 그 운동을 통해 이론을 만들어가려는 모임이다. … '문화'와 '권력'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조직화에 집착하거나 제도권 정치권력에 과도한 비중을 두는 일이 없었다. 분명한 대항운동단체이지만 그 적이 '다중적'임을 알고 있어서 다중적 전략을 써야 함을 알고 있다. 운동의 주체로 나서는 이들이 단순히 억압적 조건에 처해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받는 억압성이나 '주변성'을 새롭게 해석하고 극복해 갈 여지를 조금이라도 가진 이들이며, 아직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주변성'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 따라서 운동의 과정은 각기 문제를 느끼는 소모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소모임은 사회적 비판을 하면서 동시에 '이상사회'를 살아보고 실험하며 그것을 확대해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 경제만이 아닌 기술주의 문화와 기술 관료사회에 대한 저항, 기존의 조직 위주의 도식(대규모 혁명)에서 소모임 중심·자율적인 생활방식의 실현을 추구하는 장기적 혁명방식, 그리고 포괄적인 실존적 요구·자율성·개인적 주체성의 강조, 탈엘리트적 조직·비공식적 조직망과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살림의 녹색전략을 새로운 사회운동의 특징으로 소개한다. 그는 <또 하나의 문화>나 한살림이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게 된 이유를 "단순 명료한 시대는 가고 불확실성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총론'에 대해 회의하고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한 각론을 벌여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각론의 운동'을 강조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꼭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낯선 이야기였고, '각론의 운동'이라는 것이 사회운동의 전열을 흩뜨리는 분열의 논리라는 숱한 비판이 있어 왔지만, 이제 '자신의 삶의 현장'을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이론과 현실 면에서 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사회적 상황도 변했고, 이 새로운 운동도 주변성을 인식하고 있는 소수 지식인들의 실험적인 양상에서 벗어나 지역주민들의 운동으로 보편화될 만큼 한국의 시민운동, 시민사회도 성숙해진 것 같다.
2.'삶의 현장'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보다 긴 세월 동안 근대화 과정을 거쳐 시민사회의 자율적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식민화"나 기든스의 "삶의 정치"가 등장하는 맥락은, 시장과 권력으로 대표되는 지배의 기제가 더욱 유연해지고 갈수록 견고해져 '일상적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파고 들어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또한 이반 일리히가 교육과 의료, 가사노동 등 전통사회에서 자율적이고 자립적이었던 영역들이 시장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우리의 경우는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30여 년에 걸친 군사독재 정권이 급속한 산업화·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자유·인권을 포함한 사람들의 생활세계는 무시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중앙 통제를 통한 생산력 중심주의, 경제성장 제일주의가 그 동안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중심적인, 거의 유일한 동력이었다.
급속한 근대화의 과정은 전통사회의 동질적 지역공동체를 급속히 해체시켰다. 문제는 사람들이 전통 공동체를 대신할 대안적 결속원리를 마련하기 위한 시간적·정신적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독재정권의 압제 아래 경제성장의 기본방향에 문제제기를 할 수도 없었고, 따라서 시민들의 자율적인 공공영역은 형성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운동도 필연적으로 물리적 억압과 정치적 배제에 대한 저항운동, 그리고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축으로 하는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삼고 있었다. 사람들은 산업화·근대화의 산업역군으로 국가와 시장에 의해 도구화된 존재로 자리잡게 되고, 한편에서는 돈에만 의존하는 개인의 사적 공간으로 침잠해 버리게 된다.
1987년 이후 부분적이기는 했지만, 민주화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국가와 시장의 영역에 대한 견제력과 발언권을 강화하는 새로운 사회운동, 시민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중앙집중적 발전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는 "새로운 목소리들은 자율성과 정체성, 참여와 자치를 주장하면서 작은 조직과 네트워크식 조직 양식으로 참여의 과정 자체를 중시하면서 생활세계와 삶의 세계의 일상적인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부각시켰다." 경제성장 과정에서 발생된 환경오염, 식품공해, 주택문제, 교육 및 시민생활에 대한 시장과 국가 개입의 강화, 건강의 문제, 군사적 파괴의 잠재력, 핵발전소, 핵폐기물, 개인의 신상 자료의 중앙적 통제와 오용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국가의 논리, 시장의 논리에 억압되었던 '생활세계'가 사회운동의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3.'생활세계'를 사회운동의 중심 이슈로 삼는다는 점에서 생활공동체 운동은 1990년대 우리 사회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민운동의 맥락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정수복 박사의 지적대로 시민운동이 "민주화된 체제 안에서 기존의 사회시스템을 인정하면서 더 많은 참여와 올바른 공공정책", 사회 시스템을 공정하게 유지하는 규칙(rule)을 형성하는 데 주력한다면, 대안운동으로서의 생활공동체운동은 오히려 산업사회의 물질적 가치관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생활세계 깊숙이 잠입해 들어와 있는 관료제(전문가주의)에 대항하여 자율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시스템, 새로운 결속원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대안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혜정 교수의 말대로 기존의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이상사회'를 현실로 살아보고 확대해 나가는 것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생활공동체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생활협동운동은 정치와 시장이란 중앙화된 제도에 의해 조정되는 농산물(먹을거리)의 생산-유통-소비-폐기라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생활경제 과정을 생산자와 소비자의 협의 시스템을 통해 재창조해 나간다. 농약과 화학비료, 각종 첨가물 등의 식품오염에 대한 문제의식, 즉 자신의 생활이 국가와 시장에 의해 조정되고 주변화되고 있다고 자각한(성찰한) 생활인들이 이웃과 함께 구매력을 결집하여 유기농업 생산자와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대안경제 시스템을 만들어나간다. 다시 말해,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한 구체적인 생활의 문제를 생활공동체라는 대화의 광장을 통해 공공화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즉, 생활협동운동은 지역의 생활공동체운동을 기반으로 하면서 유기농업이라는 새로운 생산시스템의 확산, 국가나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협의적 경제, 바로 새로운 대안경제 시스템을 형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이 함께 토론하면서 스스로 마을의 미래상을 만들고 인간미 넘치고 자연과 함께 하는 마을, 독특한 지역문화를 만들어가려는 마을 만들기 운동도 삶의 장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공동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대안운동으로서의 생활공동체운동은 지역공동체의 구성요소로서 아파트 또는 동 단위의 마을 등 삶의 장을 터전삼아, 정치와 시장에 의해 틀이 갖춰지고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된 의식주, 상하수도, 전기와 에너지, 폐기물의 처리, 환경, 교통, 보건의료, 교육과 문화활동 등 생활의 다양한 영역의 과제 해결을 중심으로 이웃간의 공동체 형성, 주민들의 자치 능력 고양, 개인의 주체성·자율성 형성(각자 생활의 주인되기)을 목표로 한다.
생활공동체운동이 아파트나 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민의 대면적 접촉이 가능한 지역, 삶의 나눔이 가능한 생활의 현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앙집중화의 과정이 가져온 삶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거점으로 분권화 및 자립과 자치가 가능한 생활과 지역을 복권시킨다. 즉, 중앙집중화의 과정에서 해체된 전통적 공동체와는 또 다른 대안적 결속원리를 생활 현장, 지역 현장 속에 마련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기나긴 근대 100년의 식민지 경험과 군사독재의 중앙 집중화의 과정에서 보편화된 불편의 감내와 타성의 문화, 즉 일상생활의 불편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극단적 수동성을 극복하는 민주적이며 자율적 훈련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4. 멀리는 일제 침략기 원불교의 생활협동운동, 물산장려운동, 농민운동, 1970년대 신용협동조합운동, 농촌의 협업운동 등에서 생활공동체운동의 뿌리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보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초중반 남미의 기독교 기초공동체가 소개되면서였다. 천주교의 일각에서 생활공동체운동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고, 의정부 등지에서 몇 가족이 함께 모여 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생활공동체가 실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것이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전지구적인 환경·생태 위기가 떠오르면서 대안운동으로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사회적으로는, 한편에서 시민운동이 활성화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의 질서에서 철수하여 새로운 시스템을 스스로 만들어나간다는 귀농운동, 생태공동체, 생태마을, 지역화폐, 대안기술, 탈학교, 대안학교, 생태여성주의, 소수문화운동 등 대안문화운동이 등장한다. 하지만 생활공동체운동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을 운동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참여와 자치를 통해 삶의 질, 자율과 자립, 대안적 결속원리, 대안적 사회시스템을 실험하고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민운동과 대안운동의 접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생활공동체운동은 한살림이나 생활협동조합 등 생활협동운동, 도농직거래운동, 의료생협, 지역화폐운동, 마을 만들기 운동, 지역공동체 형성 운동, 주민자치운동, 대안교육운동 등 다양한 생활의 영역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 특징으로는 물질적 관심에서 벗어나 환경, 복지, 문화 등 삶의 질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 형성을 발판으로 한 문화운동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운동의 출발점이 되는 소재가 세계를 읽어내는 매개가 된다. 예를 들면, 식품오염, 농산물의 중앙 통제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활협동운동에서 먹을거리는 운동의 목표이면서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 식량 위기, 세계화의 억압구조를 읽어내는 소재로 새로운 차원의 운동을 배태시키는 매개가 된다. "밥이 하늘이다. 일용행사 막비도야(日用行事 莫非道也). 부엌에서 세계가 보인다.(생활협동운동)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여성운동) 동네 안에 국가가 있다. 세계의 공간과 역사의 시간이 지역 안에 있다.(지역공동체운동)"의 논리들에서 볼 수 있듯이 구체적 일상 속에 현대 세계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고 여긴다.
우리 사회에 198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생활공동체운동은 형식적 면에서는 밀실에서 광장, 소유 지향성에서 소통 지향성, 통치에서 자율과 자치, 권력의 정치에서 생활의 정치, 중심에서 주변을 지향한다. 그리고 내용 면에서는 엘리트주의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민의 협동, 극단적 수동성에서 자율·창조의 문화, 결과보다 동기·과정의 강조, 엔지니어링에서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섬세한 보살핌, 제도를 지향하기보다 문화의 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가운데 대안운동으로서의 생활공동체운동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전문가 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모순과 부조리를 전체로서 보는 시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기술관료 사회의 뿌리인 전문가 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한다는 점이다. 웬델 베리의 지적처럼 "우리가 당면한 현재의 대실패를 일천 개에 이르는 수많은 문제들로 세분화해, 이들 문제를 다시 학계와 관계(官界)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일천 명의 실무진들에게 맡겨 해결할 수 있다는 … 구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점은 생활공동체운동의 기반이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통합하는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삶의 현장으로서의 지역을 강조하고, 그것이 민의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삶의 회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테크노클라트 중심의 현대사회는 물론이고 전문성을 강조하는 현재 사회운동의 극복방향을 분명히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신행 교수의 지적대로, 지금은 국가 만들기에서 벗어나 풀뿌리의 탄탄한 사회적 저변을 일구는 사회 만들기가 사회운동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이것은 일부 전문가들에게 위탁된 운동이 아니라 일상의 민들이 주체가 되는 생활공동체운동의 문제의식을 보다 분명히 부각시키고, 의식적으로 추구해 나가야 하는 핵심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혜정, [새로운 사회운동의 모색: 운동가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크리스챤아카데미 주최 <90년대 한국사회와 민간운동의 방향Ⅱ> 발제문, 1992.3.27∼28
佐藤慶幸 엮음, 이효재 감수, 유보경 옮김, {부엌에서 세계가 보인다}, 도서출판 과 , 1989
김지하 외 지음, {한살림}, 도서출판 한살림, 1990
정수복 편역,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여민주주의}, 문학과 지성사, 1993
크리스챤아카데미 편, {주민자치, 삶의 정치}, 대화출판사, 1995
정문길 외 지음, {삶의 정치 - 통치에서 자치로}, 대화출판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