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여행5 - 아시안 게임 경기장을 뒤로하고 엣 남송거리를 찾아가다!
2023년 11월 1일 항저우 彭埠(팽부) 역에서 원데이 패스를 15위안에 구입해 1호선을 타고 무역
박람성을 찾아서 구경하고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항저우 올림픽 스포츠 엑스포시티
(杭州奥体博览城) 에 내려 항저우 스포츠 파크 경기장(奥体博览中心主体育场) 을 구경합니다.
‘큰 연꽃’ 으로 불리는 주경기장과 ‘작은 연꽃’ 으로 불리는 테니스 경기장은 지붕이 회전식으로
열고 닫을수 있도록 설계돼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나타냈으며 항저우와 베이징을 잇는
징항(京杭) 대운하, 량주(良渚) 고성 등 3개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항저우는
아시안게임 마스코트를 3개를 형상화해 ‘충충(琮琮)’과 ‘롄롄(蓮蓮)’,‘천천(宸宸)’ 을 만들었습니다.
동아일보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는 아시안게임 베드민턴의 영웅에 대해 “우리가 안세영
선수에게 열광한 이유” 라는 글을 올렸으니... ‘못했다’보다 ‘성의 없다’ 는 평가가 더 아파, 안세영
선수, 최선 다한 모습이 감동 준 것, 중요한 것에 얼마나 진정성 다해 임하고 있나 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바쁘게 왔다 가는 우리 사회는 지난 것들을 빨리 잊는다. 불과 한 달여 전에 열린 항저우
아시안 게임의 감동과 흥분도 벌써 저만치 뒤로 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수영 중계를
보며 훤칠한 청년들의 뛰어난 실력과 승리에 흥분했고 막바지엔 탁구와 배드민턴 등에 열광했었다.
그런데, 수영장 터치패드를 제일 먼저 찍고 포효하는 김우민 선수를 카메라가 비췄을 때 나는 승리에 기뻐
하는 그의 얼굴 보다 가슴팍 여기저기의 부항 자국에 먼저 눈이 갔다. 우승이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 나이여서일까. 우승의 영광에 닿기까지 그가 감당했을 시간과 상처가 먼저 들여다보였다.
어디 수영뿐이랴. 알다시피 안세영 선수는 결승전 경기 도중 심한 무릎 부상을 겪었다.
통증으로 주저앉은 그녀를 향해 관중석의 어머니는 “세영아, 그냥 기권해!” 라고
애타게 소리쳤지만, 그녀는 끝내 경기를 다 치렀고 결국 시상대 맨 윗자리에 올랐다.
그녀의 부상과 투혼을 안타까이 지켜보다 예전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는 일을 못했거나
경쟁에서 졌을 때 화가 나고 부끄러웠다. 그러다 나이가 들고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알아가자 부끄러움을 안기는 것들이 달라졌다. 선배나 클라이언트로부터 성의
없고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 같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 실패했을 때보다 훨씬 부끄러웠다.
차라리 못했다는 평이 낫겠다 싶을만큼 태도에 대한 지적은 많이 아팠다. 반복하고 싶지않은 경험
이었으므로 나는 마음 가운데에 ‘최선’ 이라는 두 글자를 들였고 시시때때로 들여다보곤 했다.
그렇게 일하다 은퇴 같은 퇴직을 한 날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 에 이런 소감을
적었다. ‘나는 더 이상 잘하지 못한 것에 미련이 없다.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족하나마 내 능력을 다 쏟아부었으므로 이제 미련 없이 떠난다’ 라고.
다시 항저우 아시안게임 얘기로 돌아가자. 안세영 선수의 단식 결승전 경기 영상엔
수백, 수천의 댓글이 달렸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 하나하나
읽어 보니 울면서 경기를 봤다는 얘기, 정말로 감동했다는 얘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스무 살 청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라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다들 한마음이
되어 응원하고 감동했던 거다. 이 당당하고 발랄한 선수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난 기자회견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에게 또 한 방을 먹였다.
“포기하지 않으니까 되던데요!” 이런 투지가 지금의 안세영을 만들었을 거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이런 생각도 있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무리하지 말고
경기를 중단하고 몸을 먼저 살폈어야 하는게 아닌가? 우승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나?
무엇이 옳은지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문득 ‘진정성’ 이란 말이
떠오른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진정성’ 이란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개인 사이뿐
아니라 기업이 고객에게 진정성을 말하고 사람들은 리더에게 진정성을 기대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 진정성의 잣대를 자신에게 향하게 하면 어떨까? 나는 자신
에게 얼마나 진정성이 있나?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들에 진심을,
최선을 다하고 있나? 나는 나에게 진정성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까?
언젠가 ‘일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를 주제로 강연한 후, 당신은 왜 그토록 열심히 일했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나 자신에게 진정성을 다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나의 자존을 지키는 방식
이었다고, 물론 늘 최선을 다하기는 어려워서 가끔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일이
크게 틀어지지 않고 웬만하면 안도의 숨을 내쉰다. 함께한 동료나 선후배도 다행이라 여기고 넘어간다.
하지만 한 사람, 자기 자신은 안다. 결과는 나쁘지 않지만 그건 다행을 넘어 요행이라는 것을.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순간을 모면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고 어깨도 당당하게 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적어도 인생에서 일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일을
붙들고 제대로 해보려 애쓰는 것과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 보려는 노력이 결코 다른 게 아니라고.
그러고 보니 투지, 의지, 성실함, 부지런함, 노력, 우리는 이런 말들과 꽤 멀어진 것 같다. 일은 물론이고
‘부캐’ 든 사랑이든 운동이든 최선을 다하지 않고, 애쓰지 않고 이루는 법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안세영 선수에게 열광한건 이미 오래전 잃어버린 투지를 그녀
에게서 발견했기 때문 아닐까? 투지 같은 건 이미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희소한거라 반가웠던 게 아닐까?
아시안게이장에서 이런저런 회상을 하고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2정거장을 가서
장링루역에 내려 1호선으로 환승을 하여 4정거장을 가서는 딩안루역에 내립니다.
그런데 내가 지하철에 타자 자리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일어서기에 다음 정류장 에서
내릴려나 보다 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았는데.... 이런?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지않고 그냥 서서 가는 것이 그럼 내가 머리가 희다고 자리를 양보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다음 정류장에서 자리가 나자 나이많아 보이는 흰머리의 노인과 검은 머리이기는
하지만 고생을 한 탓인지 무척 늙어 보이는 사람이 서로 앉으려다가.....
이번에는 또 서로 자리를 양보해 상대방에게 앉으라고 말하는 흐믓한 광경을 봅니다.
딩안루(정안로)역에 지하철이 서기에 내려서는 D 출구로 나와 위로 올라가서 지상
으로 나와서는 주변을 훑어 보니 분위기상 오른 쪽으로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른쪽으로 100여미터를 걸어서 오른쪽 거리로 우회전을 하니 여긴 보통 거리와 다른게
건물이 참으로 오래되어 고풍스러우니 이른바 남송거리인 난쑹위제 (南宋御街) 입니다.
남송은 카이펑의 북송이 금나라에 점령당하면서 오아자 하나가 남쪽으로 도망쳣으니
수도는 임안(臨安, 항저우시) 으로 1127년 ~ 1279년까지 152년간 존속하였습니다.
나라에 일어난 변화가 너무 커서 역사학에서는 북송과 남송으로 시대를 구분하여 고찰하는 것이 일반적
이나 당시 사람들의 의식으로는 황실의 교체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에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
조송(趙宋) 단일 왕조가 화북 지역을 상실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어지러운 시대에 마지막 한족(漢族)의 보루였던 국가였으며 난세에 악비 등 한족 명장들이 나타
났고 몽골인이 건국한 몽골 제국과 남송은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전쟁이 있었다. 결국 몽골
제국에 의해 남송은 멸망하였고 남송 전체를 원나라가 차지하게 되고 곳곳은 행성들이 설치되었다.
1127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나라는 송나라로 진격해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고는 천자인 흠종과 상황
휘종을 포함한 황족과 신하들을 포로로 잡아간다. 이로써 북송은 멸망 하였으며 금나라는
송나라의 신하 장방창(張邦昌)을 초제(楚帝)로 내세운 괴뢰 국가 대초(大楚)를 세우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금군이 물러나자 곧 송의 군신들은 장방창에게 맹반발하며 제위를 포기하도록 권했고 장방창은 이를
받아들여 휘종의 아들 중 유일하게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흠종의 동생 강왕(康王) 조구(趙構)
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내고 황제에 등극한 지 32일 만에 스스로 퇴위한다.
새로운 천자로 옹립된 조구는 1127년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 에서
송 고종으로 즉위하며 연호를 건염(建炎)으 로 고치고 송나라를 재건하였다.
황제로 즉위한 송 고종은 주전파 관료를 기용하여 군사를 소집하는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이런 행위는 금을 크게 자극하였고 한창 기세가 오른 금이 이런 고종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마침내 금은 '송나라가 초나라를 무너뜨리고 초 황제 장방창을 죽였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다시 대규모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금의 공격이 맹렬하여지자 고종은 응천부를 버리고 양저우(楊州), 항저우(杭州),
원저우(溫州) 등으로 고종은 계속해서 달아나고 급기야 1129년에는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가기까지 한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129년 남송 정부는 수세에 몰리자 수도를 난징에서 바다와
가까운 임안(항저우) 으로 옮겨 끝까지 저항할 뜻을 밝힌다. 그런데 난징을 함락
시킨 딱 3달 후 금나라 군대는 임안까지 함락시킨다. 바로 이 때 고종이 바다로 달아난 것.
양쯔강 이북을 점령한 금나라는 1130년 대제(大齊)라는 제2의 괴뢰 국가를 세워 항장인 유예(劉豫)
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토록 강남이 이민족에게 유린당한 적은 남북조시대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은 1130년부터 갑자기 바뀌게 되는데, 남송의 명장 한세충이 1130년
4월 강중에서 최초로 금군을 대파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이후 5월에는 악비가 금군
을 대파하고, 1131년에는 오린과 오개 형제, 수군장수 강민 등이 화상원에서 금군을 대파한다.
1133년에는 악비가 강광의 군도를 평정했고 1134년이 되면 한세충이 다시 금군을 대파하였다.
계속되는 패배로 실의에 빠진 금 태종이 1135년에 죽자 금군은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1142년 진회의 협상으로 양국은 휴전하기로 합의를 봤고, 그가 죽은 후인 1162년에
금나라 해릉양왕이 재침을 계획했으나 남송의 명신 우윤문에게 채석기에서 가로막힌다.
그 이후 금 진영에서 반란이 일어나 해릉양왕이 살해되고 금세종이 즉위하였다. 송 효종 시기 장준을 중심
으로 북벌을 시도하나, 이현충과 추굉연과의 반목으로 인해 북벌에 실패하였고 금과 다시 화평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 남송은 회하까지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기반이
쌓인 1206년에 한탁주가 자신의 권세 확장을 북벌을 시도하였지만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강행하였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