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가난한 사람 속에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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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란민들에게 제공된 학교 교실 |
독짓골부녀회와 여성동맹은 분명히 다른 단체이고 부녀회는 이미 해체되어 존재하지 않는 단체라고 몇 번을 설명해도 취조관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조사하고 작성해둔 보고서대로 자백할 때까지 정숙을 잡아둘 작정이었다.
취조관은 독짓골에 쌓아둔 약품들과 가득 담아놓은 막걸리가 이번 폭동의 주범인 남로당을 지원하는 증거라며 빨갱이로 몰아갔다.
독짓골은 오래전 박영효가 제주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 그동안 수고해준 은덕으로 정숙의 어머니에게 준 것이었다. 여덟 채의 집과 그에 딸린 전답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독짓골은 제주 성과 거리가 멀고 한적하여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었다. 정숙은 정화의원이 낡고 협소해 간혹 후원받는 약품이나 귀하게 얻은 약품이 있으면 독짓골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항아리 그득한 막걸리는 금시초문이었다. 취조관은 약품보다 막걸리에 초점을 맞추고 정숙을 다그쳤다. 그러나 알길 없는 내용을 정숙은 말할 수가 없었다.
정숙은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제자와 부녀회원들, 친구들이 끌려와 있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농업고등학교 운동장에 세워진 천막마다 잡혀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정숙이 감금된 천막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사람이 호명되어 불려가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호명되어 불려간 이들 중 일부는 풀려나고 일부는 총살을 당했다. 기준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다. 규칙도 없었다. 정숙은 이렇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취조관이라면 총살당할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아찔했다. 정숙은 다시 반복되는 취조관의 심문에 자신은 천주교 신자라 절대 빨갱이가 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연히 정숙의 천막에 들어온 소대장이 정숙의 진술을 들었다.
소대장은 취조관에게 천주교 신자는 공산당에 가담할 리가 없다며 재조사를 즉각 지시했다. 그 말 한마디에 정숙은 기적처럼 풀려났다.
정숙은 서둘러 독짓골로 달려갔다. 놀랍게도 독짓골의 집들과 전답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군인들에 의해 연행되어 가는 정숙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그동안 정숙이 빨갱이였다며 광분하여 독짓골로 몰려가 불을 지른 것이었다.
여덟 채의 집이며 헛간이 모두 불타는 바람에 박영효가 남겨준 오래된 가구와 글, 그림 등 문화재급의 귀한 것들이 재가 되었다.
그러나 정숙은 그보다 귀하게 모은 약품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불에 탄 것이 안타까웠다. 미군 부대를 수시로 드나들며 조금씩 얻어낸 페니실린이 한 병도 남지 않았다.그렇게 섬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트리고 피로 물들인 4ㆍ3사건을 뒤로 하고 6ㆍ25전쟁이 발발했다. |
▲ 1949년 제1회 신성여중 졸업 기념 사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최정숙. |
피란민제주도는 전쟁의 포화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러나 육지의 전쟁 피란민들이 날마다 섬으로 몰려왔다. 피란민들이 제주 거리를 구름처럼 몰려다녔다.
아무 곳이나 빈터가 보이면 천막을 치고 짐을 풀었다. 걸인과 상이군인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구걸을 했다.
정숙을 찾아오는 피란민도 많았다. 서울 유학 시절의 은사들과 친구들, 전주와 목포 시절의 지인들이 모두 제주의 정숙을 기억하며 내려왔다.
그들 중에는 정숙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도 있었지만, 정숙의 이름만 들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숙은 가리지 않고 마음을 다해 도와주었다. 고향을 등지고 낯선 제주에서 정숙을 믿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정숙은 그들에게 임시 휴교 중인 신성여중 교실을 내어주었다. 또 그들을 먹이기 위해 독짓골의 전답도 내놓았다.
난리 중이라 제값을 못 받을 게 뻔했지만 달리 변통할 것이 없었다. 땅 판 돈으로 쌀과 땔감을 구해 학교에 짐을 푼 사람들을 보살폈다.
서울의 신학교와 성 바오로 수녀원이 제주로 내려왔다. 신학교와 수녀원이 제주로 옮겨오자 성당은 크게 활기를 띠었다. 전쟁은 아이러니하게 제주의 낙후된 교육 수준과 생활 수준을 향상했다.
아울러 천주교의 정착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전쟁 소식을 들은 미국과 유럽의 신자들이 옷가지와 학용품과 곡식을 구호물자로 보내주었다. 해외에서 보내온 구호물자로 성당은 구민사업을 펼쳐 제주 주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성당 앞 골목에서 옥수수와 약간의 우유를 섞은 죽을 나누어주는 보급소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보급소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난한 신자들의 주린 배를 달래주었다.
정숙은 정화의원을 극빈자 무료 진료소로 만들었다. 무료 진료소의 소문이 피란민들 사이에 빛처럼 퍼져나갔다. 병원을 찾는 환자들 모두 극도로 비참했다.
낡은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안고 온 엄마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야위어 있었다. 아기 엄마들은 자신보다 아기를 살려달라고 정숙에게 매달렸다.
아기들이나 아기엄마 모두 영양실조였다. 젖먹이를 데리고 피난을 나왔으니 누구 하나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나같이 모두 굶어 죽기 직전이 되어 정숙을 찾아왔다.
정숙은 아기 엄마들에게 바닷가에 나가 해초도 먹고 조개도 먹으라고 알려주었다. 바닷가에 나가면 먹을 것이 많고 해녀들도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바다를 처음 보거나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이 쇠약한 이들에게는 주머니를 털어 국밥이라도 사 먹으라고 손에 쥐여주었다. 맥이 풀린 눈동자의 아이들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굶주린 아이들은 대부분 길가 풀이나 흙을 파먹어 독이 올라 배가 땡땡하게 부풀어 있었다. 정숙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성당 보호소로 데려갔다.
삶의 조각들
제주에는 예로부터 도둑이 없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전쟁 피란민들로 인해 아름다운 제주의 미풍양속이 많이 파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한공렬 신부(나중에 광주대교구장 대주교가 됨)는 신성여중에서 보낸 3개월의 피난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제주도민들은 생활 태도가 건실하고 다른 이들에게 생활 형편을 의존하지 않는 건전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도박, 절도의 범죄가 거의 없었는데 피란민이 제주에 들어가고 난 후 소매치기, 다방, 요정이 생겨났다.’
비록 짧은 경험에서 나온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제주는 6ㆍ25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피란민이 모여들면서 기존의 질서가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1953년, 정전 협상이 성사되어 전쟁의 혼란은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살육의 시간은 끝났지만, 전쟁은 삶의 터전을 빼앗고 부모·형제를 흩어지게 했다.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산 사람도 살아있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주도로 피란 왔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터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신학교와 소신학교, 성 바오로 수녀원도 서울로 돌아갔다. 그들은 피란 생활을 알뜰하게 살펴준 정숙에게 크게 감동하고 고마움을 표했다.
정숙은 할 일을 한 것이고 모든 것은 하느님이 예비하신 일에 마음을 다해 순종한 것이라고 겸손해 했다.
제주도 어수선함이 가라앉고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정숙은 전쟁으로 인한 여러 혼란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만 할 것이 아니었다. 모든 고난에는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은혜가 베풀어졌다.
피란 온 대신학교와 소신학교의 학생들이 제주에서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몸소 보여줌으로 제주의 신자들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해주었다. 또 구제 활동은 신자 수를 증가시켰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해리를 신앙에 의지해 해소하고자,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자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편 거의 모든 사람이 고향에 돌아갔지만, 제주에 남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중 학력이 우수한 교사들이 있었다. 정숙은 그들을 놓치지 않고 신성여학교의 가족이 되게 했다.
폐쇄적인 지리적 특성으로 고급 인력을 구하기 어려운 제주로 볼 때 선물 같은 귀한 존재였다. 마른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였다. (계속)